이 책은 작가 특유의 시적인 문체가 아름답게 형상화되어 있는, 신세대 작가의 처녀 소설집이다. 언어를 투명하고 맑게 다루려는 진지한 예술 정신에 바탕을 둔 작가의 소설들은 종교적인 세계관의 풍모조차 띠고 있다.
[머리말]
사랑이니 진보니 하는 매력적인 말들에 혐의를 두기 시작하면서야 비로소 난 어른이 됐다. 그렇게 줄곧 자신과 주변을 파괴하고만 지낸 탓으로, 몸과 마음의 이곳저곳이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욱신거리는 요즘이다. 그 통증이 심한 날일수록, 난 지난 내 방향 모르겠던 악다구니들이 한없이 부끄러워진다. 자신만을 위해 산 청춘에게 상처는 결코 보람이 될 수 없다는 평범하지만 무서운 진리를, 이미 오래 전 아름다운 한 사람으로서의 꿈을 잃어버리고 만 내 모습을 통해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 일곱 편의 소설들은, 개인적으론 가장 고달팠던 시기에 발효된 것들이다. 그래서인가, 황홀하지만 결국엔 신기루마냥 비루한 환상 속에 서 있는 자아가 푸른 멍자국처럼 자꾸 눈에 거슬린다. 언젠가는 철저하게 읽는 이들만을 위해 씌어졌기에, 내가 절대로 위로받을 수 없는 진짜 소설을 선보이리라 다짐한다. 그러려면 지금보단 훨씬 강해져야 하겠지.
내 글을 읽기 위해 필요한 사전 지식이나 교양 따위는 애초부터 없다. 그냥 당신이 스스로를 외롭다고 느끼면 그것으로 족하다. 사는 게 무지무지 행복하다고 여기는 당신이 있다면, 제발 그냥 덮어두고 돌아가 그 삶을 더 즐기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사는 게 정녕 슬프고 지루하다 여기는 당신이 어떤 구원 내지는 해답을 바라고 이 소설들을 읽고자 한다면, 난 그에게도 어쨌거나 비슷한 말을 해줄 수밖에 없다. 나는 당신들에게 한 줄 잠언조차 들려줄 수 없을뿐더러, 그런 ‘꿈의 책’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유에서이다. 다만 내가 바라는 것은, 다 읽고 난 내 독자들이 누군가에게 다가가, 지금 외로워 몹시 피곤하지 않느냐고 물어봐줄 수 있었으면 하는 것이다.
이제껏 내가 소설이란 망원경을 통해 관찰했던 삶이란 밤하늘은, 뭐 특별한 이유도 없이 마냥 쓸쓸한 그 무엇이었다. 앞으로 얼마나 더 철이 들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난 그때의 그 쓸쓸함이 무엇이었노라 자신있게 규정하는 어리석은 어른으로 늙어가고 싶지는 않다.
고마운 사람들이 여럿 눈에 어린다. 하지만 일일이 호명하진 않는다. 그립기는 해도 멀리 오래 헤어져 있음으로 행복한 이들이 때론 있는 법이고, 또 그들이 내게 진정으로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는 까닭이다.
암과 싸우고 계시는 어머니께 이 책을 바친다.
– 1996년 여름, 신촌의 작은 방에서, 이응준
이제 나무묘지로 간다
그는 추억의 속도로 걸어갔다
아이는 어떻게 숲을 빠져나왔는가
그 시절을 위한 잠언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 나라의 분명한 기록
어둡고 쓸쓸한 날들의 평화
달의 뒤편으로 가는 자전거 여행
[해설] 작가의 탄생, 비관주의 감수성의 설화·한기
[작가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