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18세기 프랑스 사회의 모든 계층에 대해 논하고 있으며, 특히 ‘밑으로부터의 역사’ 즉 사료로서 가치가 불투명하다고 의심을 품어왔던 글 속에서 숨어 있던 의미를 찾아낸다. 농민들의 민담, 파리의 한 인쇄소에서 벌어졌던 고양이 죽이기 소동, 몽펠리에 주민의 도시 설명서, 경찰 수사관의 조서, 『백과전서』의 서문, 한 시민의 서적 주문서 등을 소재로 한 글들이 담겨 있다.
[머리말]
이 책은 단턴Robert Darnton의 The Great Cat Massacre: And Other Episodes in French Cultural History를 완역한 것이다. 책이 나오기까지 애써주신 사람들에게 하는 감사의 말은 서문의 끄트머리에 붙이는 것이 예사이지만 이 책의 경우에는 굳이 그것을 앞에 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 먼저, 군산대학교의 천형균 교수는 옮긴이와 거의 동시에 이 책의 번역 작업에 착수하였었다. 양측 모두 번역이 거의 반 가량 진행된 상황에서 난처한 상황을 알게 된 뒤, 천형균 교수는 후배를 독려한다는 의미에서 그 번역 작업을 내게 양보해주셨다. 흔쾌히 양보하셨지만 그것이 쉽지 않은 결정이었음을 알기에 이 자리를 빌려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의 감사를 드린다. 다음으로 이 책의 저자인 프린스턴 대학교의 단턴 교수는 한국 출판계의 어려운 상황을 배려하여 이 책에 대한 자기 몫의 한국 저작권을 포기하며 옮긴이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두 분의 배려는 곧 이 책의 번역에 정성을 다하라는 질책이겠기에 책임감을 갖고 최선의 노력을 다하려 하였지만, 혹 그분들의 뜻에 미치지 못할까 두려운 마음이 든다.
로버트 단턴은 프린스턴 대학교 사학과의 교수로서 이 책이 나오기 전에 이미 The Literary Underground of the Old Regime으로 1983년 미국 최우수 도서상의 후보에 올랐었고, 인문 계열의 학자로서는 유일하게 맥아더 재단에서 수여하는 학술상을 받았던 인물이다. 『고양이 대학살』 이후에 나온 그의 저서는 『라무레트의 키스The Kiss of Lamourette』(1990), 『출판과 선동: 18세기 비밀 문학의 세계』(1991), 『혁명 이전 프랑스의 금서 베스트 셀러The Forbidden Bestsellers of Pre-Revolutionary France』(1995), 『프랑스의 비밀 문학 대계, 1769∼1789The Corpus of Clandestine Literature in France, 1769∼1789』(1995) 등이 있다. 이러한 여러 저서들을 관통하여 일관적으로 흐르고 있는 주제가 있는데 그것은 ‘관념의 사회사’라고 말할 수 있는 것으로서, 단턴은 특히 대량 인쇄의 문화와 서적 유통의 역사가 대중의 여론을 형성함에 끼친 영향을 논증하고 있다. 즉 주도적인 지식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계몽 사상의 ‘고급’ 문화가 밑으로 전달한 영향력이라기보다는 밑으로부터 만들어진 영향력이 프랑스 혁명 이전의 사회에서 작용하던 방식을 연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주제는 『고양이 대학살』에 실린 여섯 편의 논문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 책은 1984년 발간된 이래 극찬을 받았던 것은 물론 역사 서술에 있어서 방법론적인 논쟁까지 야기시켰다. 그 여섯 편의 논문들은 18세기의 프랑스라는 역사적·지리적 공통점 이외에는 각기 동떨어진 주제를 다루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농민들의 민담, 한 파리의 인쇄소에서 벌어졌던 고양이 죽이기 소동, 몽펠리에 주민의 도시 설명서, 경찰 수사관의 조서, 『백과전서』의 서문, 한 시민의 서적 주문서 등을 소재로 하여 쓴 여섯 편의 논문들은 일견 서로간에 어떤 연관성도 지니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조금만 더 깊이 뜻을 음미하려고 한다면 그 논문들이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서로를 보충하거나 혹은 한 사물에 대해 다른 관점에서 바라본 전망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그것들이 하나의 책을 이루어 일관적인 상을 보여주고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예컨대, 제1장의 농민들의 민담과 제2장의 직공들의 이야기는 도시와 농촌 모두에서 밑바닥 층의 삶이 얼마나 고달팠던가를 말해주며, 민담이나 ‘복사’가 어떻게 혁명까지 이르지는 않으면서도 ‘작은 사람들’이 ‘큰 사람들’에 대해 저항할 수 있는 방편을 제공하였는가를 논하고 있다. 한편 제3장의 부르주아는 노동자들의 저항을 다른 관점에서 바라보고 있다. 귀족층으로의 편입에 대하여는 관대하면서 노동자들이 부르주아의 경계를 침투하던 것에 대해서는 위협을 느끼고 경계하였던 평범한 부르주아의 모습에서 우리는 제2장의 노동자들이 부르주아에 대해 느꼈던 반감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만족스럽게 자신의 도시에 애착을 느끼며 몽펠리에의 안내서를 서술하였던 한 부르주아의 여망은 현상 유지에 있었을 것이다. 제4장의 주인공으로서 서적과 저자들을 감시하던 경찰 수사관의 목표는 종교와 왕정에 해가 되는 요소들을 제거함으로써 왕국을 지탱시킨다는 현상 유지에 있었다. 그러나 그가 보던 바의 세계는 제3장의 부르주아가 보던 것과는 달리 모호한 정신의 영토에 있었고 명확한 정체도 파악할 수 없는 지식인의 세계였다. 그 경찰 수사관은 ‘지식인’이라는 단어에 대한 개념도 정의도 지니지 않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감시를 해야 할 필요가 있는 한 계층으로 그들이 서서히 등장하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이것이 지식인들에 대한 외부의 관점이었다면, 제5장에서는 지식인들 내부에서 그들 스스로가 인식하고 있었던 자신들의 사명감과 역할에 관해 『백과전서』의 서문과 지식의 나무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설명하고 있다. 경찰 수사관에게 지식인들의 정체가 아무리 모호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달랑베르와 디드로와 같은 계몽 사상가들에게 있어서 지식인들의 역할이란 기존의 종교와 군주제의 악폐를 일소하는 진보적인 추진력으로 작용해야 한다는 것은 명백한 당위였고 그들은 그 목적을 위하여 때로는 모순적으로 보이는 모든 논리를 동원하였다. 제6장에서는 한 시민이 남겼던 서적 주문서의 분석을 통하여 독자들이 루소에 대해 반응하던 방식을 설명한다. 전반적으로 그것은 책을 통하여 저자와 지식인들의 영향력이 사회 전체에 점차 크게 자리잡던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한 점에서 제5장과 제6장은 맥락을 같이하고 있지만 그 접근 방식에서는 상반된 모습을 보여준다. 즉 제5장이 이른바 텍스트 분석을 통하여 텍스트의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의미의 통일성을 찾으려고 시도하였다면 제6장은 그 텍스트를 독자들이 어떻게 읽었는가를 추적하여 그 의미가 어떤 방식으로 다양하게 전달되었는가를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여섯 편의 논문들은 독립적이면서도 서로 유기적인 관련을 맺으며 18세기의 프랑스에 대해 구체적인 상을 제시하고 있다.
이렇듯 새로운 서술 방식에 힘입어 농민에서 계몽 사상가에 이르기까지 18세기 프랑스 사회의 거의 모든 계층에 대해 단턴이 논할 수 있었던 것은 확실하지만, 그것만으로 이 책이 역사학도들의 필독서로 꼽히며 일반 독서 대중들에게까지 베스트 셀러로 자리잡게 된 사실을 설명할 수는 없다. 이 책이 지니는 중요한 의미를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자. 먼저 이 책은 ‘밑으로부터의 역사’를 실행하였다. 그 말은 근래에 역사학의 구호로 바뀔 만큼 호응을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확실한 사실은 그것의 실행이 어렵다는 것이다. 즉 무명 인사들이 남겼거나 그들에 대해 서술한 사료가 거의 없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서술을 체념적으로 포기한 채 그들을 그늘 속에 남겨두는 경우가 흔히 있었다. 단턴은 새로운 사료를 발굴함으로써 구체제의 농민들의 삶을 재현시켰던 것이 아니라, 「신데렐라」나 「장화신은 고양이」처럼 사람들이 흔히 보아왔지만 지나쳤던 농민들의 이야기에 역사적 차원을 부여함으로써 그들의 삶을 복원시켰다. 오늘날 우리가 그러한 민담을 읽으면서 문학적 비유나 과장이라고 생각하는 부분들이 사실은 농민들의 실제 삶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단턴은 민담에 숨어 있던 역사적 차원을 되살려놓은 것이다.
그 과업을 어떻게 이루었는가라는 문제는 이 책이 지니는 두번째의 중요성과 연결된다. 단턴이 택했던 방법은 민속학과 인류학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통하여 그는 농민들의 민담, 인쇄공들에게 전승되던 이야기, 도시의 안내서, 경찰의 보고서, 『백과전서』의 서문, 서적 주문서 등 많은 사람들이 읽기는 하였지만 사료로서 지니는 가치에 대해서는 의심을 품던 글 속에 숨어 있던 의미를 캐내었다. 현재의 우리가 보기에 “가장 불투명한 곳에서 문서에 손을 대어봄으로써 우리는 낯선 의미 체계의 실타래를 풀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한 것은 아무리 개별적이고 특이한 글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상징의 체계 속에서 표출된 것이기 때문이다. 개별적인 표현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사회가 함께 받아들이는 관용적 표현의 틀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단턴이 실행하였던 것은 우리에게 가장 낯설게 보이는 텍스트를 우리와는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창구로 삼아, 그것이 지니는 상징적인-따라서 사회적인-의미를 사회사가들이 복원시켰던 컨텍스트에 견주어 끄집어낸다는 것이었다. 현재 가장 활동적인 역사가 중의 한 명으로 단턴이 꼽히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그의 방법이 성공을 거두었다는 확실한 지표이겠지만 그의 방법의 성공 여부는 이곳에서는 논외의 일이고, 단지 그 중요성을 한 가지만 지적한다면 그 방법을 통하여 역사가들이 이용할 수 있는, 그리고 이용해야 하는, 사료의 범위가 방대하게 확대되었다는 사실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이 책이 지니는 중요성은 문화의 해석에 있어서 새로운 방향을 제시함에 기여하였다는 것이다. 종래의 문화사가 지니던 편견 중의 하나는 문화란 궁정이나 사상가의 서재와 같이 ‘높은’ 곳에서 만들어져 ‘낮은’ 곳으로 하달되거나 기껏해야 파급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단턴은 “밑바닥의 수준에서 일을 하는 사람들도 나름대로 철학자들만큼이나 지성적일 수 있다”는 견지에서 문화가 반드시 ‘높은’ 곳에서만 생산되는 것이 아님을 논증하였다. 물론 단턴 혼자만이 그러한 작업의 중요성을 느꼈던 것은 아니었고 아날 학파 및 다양한 종류의 사회사가들이 그러한 관점의 형성에 기여하였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그 중에서도 단턴이 지니는 의미란 여러 가지 방식으로 그러한 관점을 때로는 실증적으로, 때로는 논리적으로, 때로는 상징적으로 추구하였다는 데 있다. 즉 단턴은 귀족 어린이들의 유모였던 농촌 아낙네들을 매개로 하여 농부들의 민담이 살롱의 귀부인들에게 애호되던 장르로 변모하였던 과정을 추적함으로써 문화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뿐만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는 것을 논증함과 동시에 농민들의 이야기나 직공들의 이야기를 『백과전서』에 대한 논의와 같은 책 속에서 다룸으로써 ‘고급’ 문화와 ‘하급’ 문화라는 범주적 구분의 의미를 희석시켰다. 동시에 루소에 대한 장에서는 독자들의 반응이 초래하였던 결과를 예증하여, 사상가들의 생각이 단순히 그들이 원하던 대로 독자들에게 주입되었던 것이 아니라 창조적인 독서를 통하여 저자들의 저술 활동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보임으로써 문화의 흐름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적임을 예시하였다.
그 모든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읽기가 난해하다면 그것에 어떤 의미가 있겠는가? 이 책이 지니는 또 다른 가치의 하나는 흥미진진하게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거의 모든 학문 분야가 그러하지만 역사학의 경우도 예외 없이 전공 논문은 물론 학술서는 점차 학자들에게만 통용되는 전문 용어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 결과 이제 역사학자들에 의한 학술 서적은 일반 대중들과 유리되어, 오히려 역사를 전문으로 수업하지 않은 사람들이 쓴 역사책들이 학문적 검증도 받지 않은 채 독서 대중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상황이 도래하였다. 『고양이 대학살』은 새로운 이론을 도입하고 엄정한 사료 고증의 과정을 거쳐 학문적으로 중요한 쟁점을 제기하면서도 동시에 재미있는 역사책이 씌어질 수 있다는 고무적인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흥미로운 세계 속으로 감히 독자 여러분들을 초대한다.
– 1996년 9월, 조한욱
옮긴이 서문
감사의 말
서론
제1장 농부들은 이야기한다: 마더 구스 이야기의 의미2
제2장 노동자들은 폭동한다: 생-세브랭 가의 고양이 학살
제3장 한 부르주아는 그의 세계에 질서를 부여한다: 텍스트로서의 도시
제4장 한 경찰 수사관은 그의 명부를 분류한다: 문필 공화국의 해부
제5장 철학자들은 지식의 나무를 다듬는다: 『백과전서』의 인식론적 전략
제6장 독자들은 루소에 반응한다: 낭만적 감수성 만들기
결론
야아옹, 나는 아테네. 검고 우아한 몸매와 지적이고 섹시한 눈매를 가진–그래
맞았어, 고양이야. 마네가 그린 올랭피아 뒤에 있는 게 나라구. 나의 멋진 남자
친구였고, 사랑했던 그리스가 그 생-세브랭가의 막되먹은 인쇄소 견습공들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하던 날을 떠올리면 오열할 수밖에 없어. 어째서 나의 그리스와
사랑하는 친구들이 모조리 잔인하게 학살당해야 하는 거지?
아~~ 너무나도 끔찍한 그 광경을 생각하면 털이 곤두선다. 그때 올랭피아의 모델을
서지 않았더라면 나도 같은 꼴에 처했을꺼야. 왜 선량하고 아름다운 우리가
이다지도 기구한 운명을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인간들은 왜 우리를 마녀가
변신했다고 제멋대로 오해를 하고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 거지? 나의 귀여운 남동생
스파르타는 그 아이가 첫 번째로 쥐를 잡을 수 있게 된 날, 한 남자의 정원에
생매장당했어. 스파르타가 애절한 목소리로 살려달라고 애원하고 울부짖었으나 그
남자는 고양이를 묻으면 정원에 잡초가 없어진다는 미신을 믿고 그 작은 아이를
생매장시켜 버린 거야. 나도 처음에는 그의 복수를 위해 그를 염탐했으나, 그러던
중 약재로 잡혀갈 뻔한 일도 있었어. 내 다른 친구들 역시 나와 거의 다를 바 없이
아주 오래 전부터 인간들에게 수난을 당해왔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새 집을
수호하기 위해서, 혹은 빵이 부풀지 않는다거나 어부가 갈 길을 우리가 미리
가로질러 가면 고기가 상한다거나 하는 아주 사소한, 말도 안 되는 미신
때문이야. 멍청하고 한심스런 인간들은 그런 것들 때문에 우리를 학살하는 잔인한
족속들인 거지. 그러나 내 사랑 그리스는 달랐어. 그는 외양부터가 품위 있었고
그의 눈동자는 달빛보다도 영롱했어. 어떤 고양이도 그만큼 멋지거나 늠름하진
못했지.
그에 걸맞게 그에겐 그를 아주 사랑해주는 여주인이 있었고 그는 그녀의 가장
소중한 존재였기에 우리보다 한층 우월했는지도 몰라. 그가 살던 생-세브랭가의
인쇄소 견습공들은 그의 늠름함과 멋진 외모를 시기했어. 그들은 인정하지 않았고,
그 뿐만 아니라 근처의 모든 고양이를 죽음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었어. 춥고,
더러운 방에서 자신의 주인에게조차 모욕 받고 학대당하던 고작 그런 인간들이,
우리가 먹는 생선 가시가 섞인 비린내나는 꼭 같은 밥을 먹는 그 교양 없는 인쇄소
견습공들이 음모를 꾸민 거야. 그들이 주인 침실 앞에서 밤새도록 우리의 아름다운
목소리를 거짓으로 꾸며내어 울어댄 것이지. 물론 그 인쇄공들이 냈던 소리는
우리가 내는 소프라노처럼 곱지도 않았는데, 아니 전혀 우리의 목소리와는 비교는
고사하고 거리가 멀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의 여주인은 그 소리의 진상이
우리라고 확신했어. 급기야 그 소음으로 인해 잠을 자지 못한 그녀는 그 못된
견습공들에게 고양이를 죽여버리라고 한 거야. 의당 나의 그리스는 나의 안위를
걱정하면서도 자신의 여주인의 호위를 자신하고 있었기에 이런 처사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는데 잔인하고 미천한 견습공들은 처음부터 나의 고귀한 그리스를
노렸음에 틀림없었던 거야. 그들은 주인이 그리스를 보호하라고 명령했음에도 그를
처음으로 잔인하게 처형했어. 그 뒤 무슈와 마담이 숨진 그리스와 못된 노동자들을
보았으나 그들은 처단하지 않고 그냥 가버렸지.
오~ 오~~ 그리스, 나의 사랑하는 그이를 위해, 왜 여주인은 그들을 벌하지 않는
거지? 왜! 야아옹~~
-농민의 민담과 루소의 「신엘로이즈」를 통하여-
서론
고양이 대학살 제 6장에서 루소에 대해 열렬한 반응을 보였던 독자들의 반열에
농민들이 낄 수는 없었을까?
루소를 찬양하는 독자들이 인습을 버리고 감성에 따르는 삶을 열망하고 있었을 때
농민들은 그들과는 아무런 유사점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을까?
역으로, 여러 가지 지식체계를 접할 수 있었던 많은 독자들의 생활방식은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던 농민들의 것과 전혀 별개의 것이었을까?
6장을 읽으면서 나는 이러한 몇가지 의문점들을 떠올렸고, 6장의 독자들과 1장의
농민들이 서로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 동시에 어떻게 각자의 삶의 방식을 취하고
있는지를 내 머릿속에 대략 정리해 나갈 수 있었다.
루소의 「신엘로이즈」에 열렬히 반응하는 독자들의 모습과 더불어, 나는 민담이
유행하고 널리 반응되고 있었던 농민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농민과 독자들은 같은
부류는 아니지만 동시에 어떤 이야기에 반응하며 열렬히 기뻐한다. 농민들은
민담과 동요같은 구전되는 이야기에 반응하고, 독자들은 「신엘로이즈」와 같이
인쇄된 이야기를 읽고 반응한다. 그리고, 그들은 나름대로의 이야기에 자신들이
추구하고 열망하는 것들을 개입시킨다. 여기에 그들의 유사점과 차이점이
나타난다.
본론
1장의 농민들과 6장의 독자들은 서로 전혀 별개의 사람들인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그들은 방식은 서로 다르지만 18세기말 혁명의 기틀을 마련하는 비슷한
생각들을 나름대로 형성해가기 시작했다.
삶자체가 고통의 연속이었던 농민들은 민담을 만들어 유행시켰다. 그들은 민담에
자신들의 실재의 모습을 반영시켰고 그것은 우리들에게 구체제하에서 농민들이
세계를 보았던 방식을 가르쳐 준다. 그들이 난롯가에 모여서 신나게 지껄였던
이야기들은 ‘과거에 친숙하다는 그릇된 느낌으로부터 빠져나와야 할,
문화충격이라는 처방’을 해 주는, 내 생각에 꽂혀진 첫 번째 주사바늘이었다.
그들의 민담은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도저히 기뻐하며 재밌게 받아들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잔인하고 끔찍한 이야기들을 재밌고
통쾌하게 말하고 있다. 또 그 이야기들을 유행시킬 수 있는 시대에 살았다.
그들의 고달픈 삶의 원인은 주로 지배층에 있었다.
농민들은 지배층이 요구하는 세금 때문에 뼈빠지게 일해야 했고, 자주 기근과
질병으로 고생했다. 지배층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들은 그들 민담의 소재가 되었다.
농민들은 민담을 통해 지배층의 착취와 폭력을 묘사했고, 때로는 그들의
이야기에서 간사한 꾀와 술수로, 아니면 어떤 초인적인 힘을 의지하여 지배층을
죽이거나 그들에게 복수하는 것으로 대리만족을 느꼈다. 또한 농민들은 가난과
배고픔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을 민담으로 만들었다. 그들은 지배층들처럼
배부르게 먹고 편안하게 살기를 희망했다. 그들에게 6장의 독자들이 추구하고
있었던 ‘자신의 삶에 적응시켜 더욱 고결스럽게 될 수 있는 일반적인 방식의
사고와 감정’은 불필요한 요소였다. 농민들에게 있어서 지배층의 물질적인 삶의
면들은 비록 가능성이 없다 하더라도 끊임없는 소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이
지배층의 대열에는 6장의 일부 독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여기서, 나는 6장의
독자들을 동시에 살펴 보겠다.
6장에 등장하는 독자들에는 다양한 계층이 있다. 젊은 출판업자, 원장신부, 퇴역
육군장교, 신교의 목사뿐만 아니라, 루소의 소설이 상류사회의 거부를 표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루소에게 압도당했던 여러 귀족들도 여기에 포함되어 있었다.
시계공이었던 루소의 아버지처럼 교양높은 환경출신이 아니었던 사람이라도
도시민이라면 어렵지않게 인쇄된 지식체계를 접할 수 있었고 그들은 당시 거의
모든 독자들이 루소에 열광하고 있었을 때 그 반열에 쉽게 들어갈 수가 있었을
것이다. 2장에 나오는 인쇄소의 견습공들도 쉽게 이 독자의 대열에 끼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농민들만은 ‘인쇄된 상징을 통하여 의미를 전달하는 일에 참여할
수 있었던 사람들의 부류’에 끼지 못했다.
어쨌든 많은 부르주아, 귀족, 지식인들이 루소의 소설에 열광했다. 이들은 루소를
만나기 전까지 구제도의 모순과 문화적 인습속에서 희망이라는 단어를 잊어가고
있었다. 나는 이들이 무엇인가 정신적인 변화를 줄 수 있는 것을 간절히 열망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루소가 그의 소설을 들고 나타났을 때 이들은
루소의 글이 자신들의 그토록 바라던 정신적 가치를 정확히 짚어주는 것임을
발견하고 그에게 열광을 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석유를 뿌려놓은 장작더미에
루소가 불을 붙인 것이다.
「신엘로이즈」는 새로운 종류의 독서법을 요구하였는데, 그것은 단턴의 말대로
독자와 파리 상류사회의 정신적인 거리가 멀면 멀수록, 즉 사업과 대도시 그리고
번잡한 사교모임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성공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여기에서
어떤 연관성이 발견된다. 나는 삶의 기본적인 문제를 염려하고 있던 농민들의
순수한 정신세계가 일부 독자들, 즉 상류사회의 독자들이 갈망하던 순수하고
진실한 정신가치를 어느정도 닮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도시의 빈곤한 노동자들을
제외한다면, 정신적으로 굶주려하던 귀족, 부르주아, 지식인등의 독자들과
육체적으로 굶주려하던 농민들은 자신들의 굶주림을 서로의 세계를 갈망하며
달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그 과정에서 농민들은 민담을 만들어 대리만족을
했고, 독자들은 새로운 정신세계를 열어준 루소의 「신엘로이즈」에 열광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 두 부류를 굶주리게 만들었던 것은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지배적
가치였다. 농민들은 민담을 통해서 지배층, 즉 큰 사람들에 대한 거부감을
표현했다. 그리고, 독자들은 루소가 문학과 사회의 지배적인 가치를 거부하고
감정에 따라 살 것을 요구할 때 크게 열광했다. 농민과 독자들은 인습적인 요소와
구제도의 모순점들을 비난했고 육체적 정신적으로 거기에서 벗어난 삶을 살기를
원했다.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당사자들인 지배층, 특히 귀족들이나 성직자들도
어느새 루소의 소설속에서 한 역할을 맡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그런데, 18세기 농민들의 민담과 루소의 「신엘로이즈」에 열광했던 독자들의
감정은 지금의 우리가 익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문화충격’이다.
우리가 어렸을 때 동화책으로 읽은 아름다운 이야기들의 기원이 비참한 농민들의
삶을 반영했던 것이라는 사실과 단턴의 말대로 지금의 우리에게 열광할만한 감동을
줄 수 있는 가치를 발견하기 힘든 루소의 「신엘로이즈」가 18세기 독자들에게
마치 신같은 존재로 추앙받았다는 사실은 너무나 낯설게 느껴진다. 하지만, 그것은
가상이 아닌 사실이었다. 구체제의 농민과 독자들은 오늘날 우리가 생각조차 거의
할 수 없는 정신의 세계속에서 살았다.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지금 우리들의
생각을 쉽게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들은 최불암시리즈나 만득이 시리즈에
익숙해 있는 우리들이 선입관을 버리고 바라보아야만 하는 사람들이다.
문화적 충격은 시대와 시대사이에서 뿐만 아니라, 동시대 안에서의 전혀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도 일어났다. 18세기라는 동시대안에서 농민들은 비정하고 잔인한
감정의 세계에서 살았고, 그들을 지배하는 ‘큰 사람들’은 향락과 안일한
세계속에서 살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감정의 장벽이 높이 쌓여 있었고, 그것은
백성들이 빵이 없어서 굶어 죽어가고 있다는 말을 듣고 난 ‘마리 앙투와네트’의
입에서 “빵이 없으면 고기를 먹으면 되지 않느냐”는 말을 나오게 했으며, 나아가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렇다면, 막혀버린 감정의 문처럼 그들
사이를 연결하는 것은 전혀 없었을까?
여기서, 나는 1장과 6장에 동시에 언급되는 ‘샤를 페로’라는 사람에게로 눈길을
돌린다.
페로는 농민들의 민담을 변형시켜서 살롱의 부인들에게 전해 주었다.
그는 농민들 사이에 구전되던 이야기들을 채록하여 그것을 세련된 청중의 취향에
맞도록 어조를 바꾸어 살롱에 적용시켰다. 단턴은 페로가 프랑스 문학사에 있어서
특징적인 점을 제시하고 있다고 말한다. 즉 고급문화와 대중문화라고 하는 외견상
분리된 것으로 보이는 두 세계의 접촉점을 제시하는 것이다. 귀족들의 살롱에서
마더구스 이야기가 유행했다는 사실은 농민과 귀족, 두 문화 사이에 공통점이 없어
보이면서도 이 두문화가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밑으로부터 위로 흘러 들어간 문화의 물줄기였다.
1장의 농민들의 민담은 6장의 독자들에게도 퍼져 있었다. 그러나, 6장의
독자들에게 그렇게 감동을 주며 유행하고 있었던 루소의 「신엘로이즈」는
농민들에게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지식 수준의 차이때문이기도
하지만 농촌 문화와 도시 문화의 차이에 기인한다. 농민들의 민담은 독자들
중에서도 제일 꼭대기층까지 올라가서 영향을 주었지만, 「신엘로이즈」는 가장
밑바닥까지 흘러 내려오지 못했다. 그것은 농민들 앞에 있는 큰 장벽에서 그
흐름을 멈춰야만 했다.
결론
농민들은 그들 나름대로 민담을 통해 반감을 표출함으로써, 그리고 지식을 갖춘
계층들은 나름대로 감정의 세계와 새로운 사상을 추구함으로써 18세기말 혁명의
정신적 기틀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나름대로의 감정을 나타낸 것들
중에서 민담은 현대에까지 이르러 살아 있다. 그러나 「신엘로이즈」는 도중에
추락해 버렸다.
농민들의 민담은 현대를 살고 있는 어린이들이라면 반드시 읽게 되는 동화책에
여전히 살아 남아 영향을 주고 있다. 그러나 「신엘로이즈」는 현대인에게는 더
이상 베스트 셀러가 아니다. 밑바닥층의 평범한 사람들로부터 시작해 위로 흘러간
문화는 또다시 현대를 살고 있는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는 여전히 영향을 끼치고
있다.
나는 민담과 「신엘로이즈」를 비교하면서 밑으로부터 위로 흘러간 문화가 얼마나
강하게 지속될 수 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흔히 물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듯 문화도 위에서부터 아래로 흐른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고정관념을 버리고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오히려 우리에게
익숙한 일상의 문화는 평범한 농민이 옛날이야기와 아이들의 동요로부터 출발한
것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고양이 대학살”에서의 부르주아와 지식인들
고양이 대학살은 다른 역사서와 비교해 볼 때 우선 추리 소설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냥 지나치기 쉬운 일련의 사건들로부터 당시의 상황을 유추해
내기까지의 과정을 상세히 묘사해 냈는데, 꼭 명탐정 단턴에 의해 한 사건 하
사건이 풀어져 나가는 것을 설명한 것 같았다. 그리고 독자들은 그의 뛰어난
추리력에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오는 박수를 치게 만드는 ‘마력’같은 매력을 가진
책이었다. 또한 그 매력 중의 하나가 ‘미시사’를 통해 각계각층의 다양한 입장을
입체적으로 고찰해 보았다는 것이다. 기존의 역사서들은 상위계층에 이르는 이른
바 ‘밑으로부터의 역사 복원’이라는 새로운 방법을 택한다. 여기에서 각 계층간의
연관성과 다른 계층을 바라보는 눈, 그리고 자신이 속한 계층에 대한 태도가
모이고 응집되어 18세기 프랑스 문화를 복원시키는데 큰 기여를 한다.
이 책은 1장에서부터 6장에 이르기까지 한 사회를 구성하는 각 계층들의 사고
방식이 나타나 있는데, 이 레포트에서 나는 3장(한 부르주아는 그 세계에 질서를
부여한다.-텍스트로서의 도시)과 5장(철학자들은 지식의 나무를 다듬는다.-‘백과
전서’의 인식론적 전략)을 내 나름대로 비교하여 보았다. 이 두장에서의
공통된다고 느꼈던 부분들을 몇가지로 나누어 서로 비교해 보고, 또 차이점도
생각해 보았다. 우선 3장과 5장의 비슷한 점을 크게 여섯가지로 나누어 살펴
보고자 한다.
첫째, 3장의 부르주아 층과 5장의 지식인층은 사회, 문화 전반에서 서열을 나누는
각자의 ‘잣대’를 가지고 있었다. 부르주아는 ‘생산력’을 중시하여 생산을 하지
않는 층은 무시해 버리는 과감함을 지니고 있었고, 지식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지식의 기준’에 의해 지식의 체계를 만드는 고도의 과감함을 보인다.
둘째, 부르주아와 지식인들은 그들의 질서 체제를 유지시켰던 권위 계층에 대해
직접적으로 몸으로 부딪히는 방법이 아닌 간접적으로, 그러나 확실하게 그들
계층의 존재가 새로운 권력층으로 부각됨을 뚜렷이 나타냈다. 3장에서는 귀족에
대한 부르주아의 “물질적 주도권 전환”을 5장에서는 성직자에 대한 지식인층의
“정신적 주도권 전환”을 드러내고 있다.
셋째, 이러한 위계질서를 흩뜨려 놓는 변환 방법을 위해 그들은 3장에서는
〈도시의 설명서〉에서 5장에서는 〈백과전서〉에서, ‘책’이라는 지식의 가면을 쓴
도구를 사용한다.
넷째, 그러나 그들이 사용한 그 도구에는 몇가지 비논리적이고 비일관적인 면들이
나타난다. 3장의 부르주아는 〈설명서〉에서 세 가지의 읽기를 제공한다. 그것은
몽펠리에를 고관들의 행진으로서 다음으로는 일련의 신분으로서, 마지막으로는
생활양식의 장면으로서 제시하고 있는데 그 셋은 각기 자체 내에서 모순을 가지고
있었으며 다른 두 가지와 모순되고 있다. 그러나 단턴은 여기에 이 자료의 매력이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 비일관성을 통하여 우리는 출현하려고 애를 쓰는 세계에
대한 신선한 상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많은 설명을 붙이고 있는데,
이는 자신의 세계에 의미를 만들어 내려는 욕구에 끌리기는 하지만 그 과업에
적당한 틀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을 뜻함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5장의 지식인들은
‘시대의 요구와 당위성’에 의해 모순적으로 보이는 여러 학자들의 모든 논리들을
끌어 들인다.
다섯 번째로, 부르주아와 지식인들은 기존의 질서 체제의 주축을 이루었던 종교적
권위(성직자)를 〈설명서〉나 〈백과전서〉에서 거의 무시하는 과감성을 보이고
있다. 〈설명서〉에서 부르주아는 행진에서 큰 의미를 차지했던 성직자의 전통적
의미를 완전히 재배치시킨다. “성직자는 이 도시에서 큰 존경을 받지 않는다.
그들은 일상생활에서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고 기술하며 표면상 중시했었던
성직자를 제외시켜 버린다. 그런 뒤에 2신분이었던 귀족을 1신분으로, 자신들을
2신분으로 승격시켜 놓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스스로를 모든 종류의 국가에서
언제나 가장 유용하고 가장 중요하고 가장 부유하다고 결론지어 버리며 또
중간에서 1신분을 지원하고 그 의도에 따라 3신분을 조정하는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 〈백과전서〉에서는 부르주아가 했던 것보다도 더 치밀한 의도아래
성직자들을 제외시킨다. 그들이 나누었던 도식의 분량이 이것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교회사는 작은 가지로서 「예비 논고」의 원문에서는 단 한 문장으로 서둘러
지나갔고 그 말미에 첨부된 베이컨의 나무에 대한 논평에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부르주아의 비판적인 표현보다도 아예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논외의 것으로
간주해 버린 그들에게서 더욱 위험함을 느낄 수 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구체제에 있었던 ‘경계의 영역’을 해체시키고 새로운 ‘경계’를
만들어 낸다. 부르주아는 이 과정에서 귀족이라는 구분 선에 자신들을 끊임없이
포함시키려고 노력하면서 선을 지우려고 하지만 3신분이 그들의 경계선을
넘어가려는 데에는 대단히 엄격했고 그것을 최대의 위협으로 느꼈다. 그러나
평민들의 기질을 비판하면서도 그들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데에는 후했음을 알 수
있다. 지식인들은 성직자들의 영역을 침범한다. 성직자들이 그 동안 고수해 왔던
경계의 영역을 깨면서 지식을 하나의 권력으로 등장시킨다. 그러면서 세계의
발전이 전적으로 자신들과 같은 지식인들의 영향력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성직자에 의해 이끌어 진 과거와는 다른 경계를 긋는다.
이상으로 3장과 5장의 공통점들을 찾아 보았다. 그러나 이 두 장 사이가 공통된
것들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부르주아와 지식인들이 주도권 전환의 과정에서
각각 다른 태도를 보이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신에 대한 자세이다.
부르주아는 단순히 인간 내의 한 계층을 대상으로 해서 투쟁을 벌였지만,
지식인들은 단순히 성직자 정도가 아닌 신을 대상으로 한 아주 위험한 투쟁을
벌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부르주아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계급 나열에
의미를 부여하고 민감해 하지만 지식인들은 신과 인간 사이의 질서에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려 하고 있다. 디드로와 달랑베르의 지식의 나무를 보더라도 종교를
미신으로 비하시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고양이 대학살에서 다른 장보다도 3장과 5장을 비교하게 된 것은 18세기 프랑스
문화에서 다음 시기로 향해 가는 분위기가 부르주아와 지식인들에 의해서 이끌어져
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생각에서였다. 확실히 그들은 다음 시대를 준비하고
맞이하는 진보적 계층들이었고 또 다음 시대에서 그들은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된다.
처음 내가 고양이 대학살을 읽을 때에는 거의 소설 읽을 때와 같은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었다. 그러나 한 장 한 장 읽어 나가면서 소설 이상의 그야말로
18세기의 현장에 들어가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함축된 텍스트에서 그 방대한
사고를 할 수 있다는 것은, 그리고 책에 쓰여진 것만을 한정지어 생각하게 하는
것이 아닌 그 이상의 고찰을 이끌어 내게 한다는 것은 이 책의 또다른 매력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단턴이 5장의 지식인들을 설명하면서 그들이 〈백과전서〉에서
어떻게 모순점을 보이고 있나 하는 설명과 추리과정을 친절히 설명할 때 나의 짧은
지식의 양 때문에 굉장히 이해하기가 힘들었다는 것을 고백해야할 것 같다.
그런면에서 ‘고양이 대학살’은 나에게 책 읽는 방법에서 동기부여를 해 주는
계기로서의 역할도 해 주었다. 그리고 책이 어떻게 쓰여지고 있는가 하는 방법론을
보여준다. 예전에 그냥 지나치기 쉬웠던 문헌에서 어느 한 시대의 보편성을 찾아
나서는 것(설사 그 문헌이 그 시대를 대표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거의 근접한다는
믿음 아래)이 역사를 재구성하는데 또다른 기여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다.
평소 역사에 대해 잠들어 있었던 나에게 ‘고양이 대학살’은 나에게 〈자명종〉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