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대 한국 시의 역사에 굵은 점을 찍으면서 등장한 후, 끊임없는 모험과 분출되는 실험으로 우리 시대의 정신적 위기를 노래한 이성복의 시선집. 이 책에는 20년의 세월에 걸쳐 있는 시인의 정신적 방황과 그 치열한 싸움이 압축되어 있다.
[기획의 말]
70년대말 언저리 시의 역사의 한 지점에 굵은 점을 찍으면서, 우리는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마침내 이성복이 왔도다. 그의 등장은 날카로운 빗금을 시의 역사에 그어놓았다. “첫 키스의 추억”과도 같은 것. 끝내 못 잊어, 수많은 후배 시인들과 평론가들이 회귀를 시도할 모천의 샘물이 그 자리에서 솟아올랐다.
그 모천의 이름은 분출 연상이라는 이름을 가진다. 그로부터, 70년대의 시를 밑받침했던 이미지와 주제 사이의 균형이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마치 초자아의 검열을 돌파한 충동 에너지들처럼 그의 이미지들은 분수처럼 솟구치고 폭포처럼 쏟아져내렸고, 또 멈출 줄 몰랐다. 이 분출하는 이미지들의 범람 속에, 그러나, 그는 자유로운 욕망의 물고기들을 방생하지 않았다. 그는 특이하게도, 독재 정권에 짓눌려 있는 한국인들의 정신적 위기를 한 컷 한 컷 새겨넣었고, 그럼으로써, 그의 이미지들은 행복의 환상극이 아니라 음산한 재앙의 파노라마를 연출하였다.
이미지와 주제 사이의 이 극단적인 파열, 안드로메다 성운과 지구의 내핵 사이의 거리만큼 머나먼 이 간격으로부터 이성복 시의 풍요성이 탄생하였다. 그의 시는 한국 사회에 대한 정치적 알레고리라는 해석으로부터 초현실주의적 방언이라는 해석에 이르기까지 한없이 다양한 해석의 용광로가 되었다. 이 다양한 해석 자체가 강압적인 정치 상황에 억눌린 한국인이 살아내기 위해 시도한 다양한 실험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이 실험의 용광로로부터 한 가닥 금빛 전망을 제련해낸다. 그는 정신적 위기의 총체를 치욕으로 압축하고 이 치욕을 끝끝내 살아내는 표상으로서 인고의 어머니를 탄생시킨다. 형태학적 차원에서는, 분출하던 자유 연상이 이미지의 집중, 이미지의 “빛나는 정지”로 그의 고행을 완결한다.
이성복의 시적 여정은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인고의 어머니는 살아냄의 표상으로 떠오른 그 만큼, 현실로부터 멀어진다. 시인은 그의 어머니를 다시 현실과 같은 높이로 끌어내릴 필요를 느꼈을 것이다. 그 모색의 결과로 그의 유명한 ‘연애시’가 탄생한다. 연애시에 와서 인고의 어머니는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뀐다. 이로부터 시는 삶의 표상을 빚어내는 장이 아니라, 삶을 나누는 복수 존재들의 실천의 장이 된다. 그 나눔의 장에서 사랑하는 존재들은 사랑의 완성을 위해 끝끝내 이별해야만 한다. 연애시의 아름다움은 만남과 헤어짐의 동시성에서 나타나는 정서적 밀도의 다양한 결을 느끼게 해주는 데서 온다. 사랑과 이별 사이의 당김과 풀음이 연애시의 주제학이라면, 그것의 형태학은 전통적 율격의 재구성으로 나타난다. 그는 소월·만해가 보여주었던 전통 율격의 대화성을 수용하면서, 앞선 시인들의 일방향적 대화(그리움의 호소, 다짐 등등)를 양방향 대화로 바꾸어놓는다. 지나가는 길에 덧붙이자면, 그의 율격의 비밀에 접근한 평문은 아직 없다.
아마도 이 상호적인 나눔이 항상 화해를 예감케 하지는 않았다. 이별의 결단 자체가 전제이자 결과로 두고 있던 화해는 실천의 차원에서 늘 고통의 발생기가 된다. 구체성의 자리에 놓인 시는 비명과 갈증으로 목이 하얗게 쉰다. 이성복의 시는 다시 한번 변모한다. 그는 “오직 몸부빔에서만/꺼지는 불, 살아 움직이는 불”의 괴로운 모험을 기록하기 시작한다. 이럼으로써, 그는 초기의 분출 연상의 형태학으로 홀연 되돌아간다. 다만, 커다란 변화가 있으니, 초기의 그것이 한국인의 정신적 위기를 투시했다면, 오늘의 분출 연상은 진정한 만남을 향해 나아가는 모험의 천변만화를 좇는다.
……그 모험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이상에서 기술한 이성복 시의 기나긴 노정이 이 한 권의 책에 압축되어 있다. 압축은 원본보다 모자라기만 한 것이 아니다. 동시에 그것은 원본보다 넘쳐난다. 이 넘쳐남과 모자람의 비율과 꼴을 가늠해보는 것은 독자들께서 누릴 또 다른 즐거움이다.
– 1996년 11월
[기획의 말]
Ⅰ. 어떤 싸움의 기록
1959년 / 정든 유곽에서 / 구화(口話) / 출애급(出埃及) / 돌아오지 않는 강(江) / 여름산 / 금촌 가는 길 / 꽃피는 아버지 / 어떤 싸움의 기록 / 모래내·1978년 / 벽제 / 세월의 집 앞에서 / 그날 / 그러나 어느 날 우연히 / 제대병 / 몽매일기(蒙昧日記) / 사랑일기(日記) / 밥에 대하여 / 세월에 대하여 / 다시, 정든 유곽에서
Ⅱ. 약속의 땅
서시(序詩) / 테스 / 나는 식당 주인이 / 치욕에 대하여 / 강변 바닥에 돋는 풀 / 다시 봄이 왔다 / 격렬한 고통도 없이 / 희미한 불이 꺼지지는 않았다 / 신기하다, 신기해, 햇빛 찬연한 밤마다 / 강 / 또 비가 오면 / 수박 / 성모성월(聖母聖月) 1 / 금빛 거미 앞에서 / 분지일기 / 귀에는 세상 것들이 / 마음은 헤아릴 수 없이 / 오래 고통받는 사람은 / 꽃피는 시절 1 / 남해 금산
Ⅲ. 물 건너기
느낌 / 서해 / 바다 / 산길 5 / 숲속에서 / 강 1 / 어머니 1 / 역전(易傳) 3 / 비단길 1 / 비단길 2 / 그대 가까이 5 / 강가에서 3 / 비 2 / 이별 1 / 길 1 / 애가 1 / 숨길 수 없는 노래 4 / 샘가에서 / 편지 1 / 편지 2
Ⅳ. 천사의 눈
높은 나무 흰 꽃들은 등(燈)을 세우고 1 / 높은 나무 흰 꽃들은 등(燈)을 세우고 5 / 높은 나무 흰 꽃들은 등(燈)을 세우고 7 / 높은 나무 흰 꽃들은 등(燈)을 세우고 8 / 높은 나무 흰 꽃들은 등(燈)을 세우고 12 / 높은 나무 흰 꽃들은 등(燈)을 세우고 14 / 높은 나무 흰 꽃들은 등(燈)을 세우고 15 / 높은 나무 흰 꽃들은 등(燈)을 세우고 23 / 높은 나무 흰 꽃들은 등(燈)을 세우고 24 / 높은 나무 흰 꽃들은 등(燈)을 세우고 27 / 높은 나무 흰 꽃들은 등(燈)을 세우고 32 / 높은 나무 흰 꽃들은 등(燈)을 세우고 35 / 정물 / 봄밤 / 음악 / 삼월 / 바다 / 11월 / 호랑가시나무의 기억 / 천사의 눈
[나의 시를 말한다] 당집 죽은 대나무의 기억
[연보]
[원문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