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 6편의 중 단편으로 묶여진 이 작품집은 초기에서 중기까지 작가의 문학적 열정이 가장 뜨거울 때 씌어진 것들 중 선별된 것으로 현실의 쓸쓸함을 투명하게 응축시킨 작가의 문학적 삶의 정면을 만날 수 있다.
[기획의 말]
말의 의미와 삶의 의미는 다르다. 그것은 말은 꿈이며 삶은 현실인 까닭이다. 그래서 말의 아름다움과 삶의 쓸쓸함이 생겨난다. 그러나 말이 만들어내는 꿈이 삶을 어루만져주지 않는다면 아마도 삶은 좀더 쓸쓸할 것이다. 우리가 삶의 쓸쓸함을 견딜 수 있는 것은 말이 만들어내는 저 불투명한 희망 때문이다.
윤후명의 소설은 말이 만들어내는 꿈이다. 그는 삶의 쓸쓸함이라는 날줄을 말의 꿈이라는 씨줄로 촘촘히 얽어서 우리 앞에 내놓는다. 우리가 삶의 가난함과 부질없음과 초라함을 문득 아름다운 눈길로 다시 들여다보는 것은 그의 말이 만들어내는 꿈 때문이다. 그의 소설 속에서 삶은 항상 쓸쓸하지만 이 쓸쓸함이 그의 말을 통해 빛나는 아름다움으로 환치되고 있는 모습을 본다. 그의 소설에서 마지막 페이지를 넘겼을 때 우리가 가슴 가득 안게 되는 저 야릇한 색깔의 목적 없는 아름다움, 김치수가 “아름다움의 매서움”이라고 부른 바 있는 그 아름다움은, 윤후명 소설에서만 맛볼 수 있는, 우리네의 비속한 삶에 대한 독특한 채찍이며 사랑이다.
윤후명은 우리 모두가 현실 속에 유토피아를 건설하기 위해 조급하게 날뛸 때 현실 밖의 세계를 끌어들여 우리들의 삶을 새롭게 조명했다. 그것은 그가 우리의 부산스러운 몸짓에 스며들어 있는 허망함을 날카로운 안목으로 일찌감치 엿보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가 가지고 있는, 세계를 인식하고 표현하는 특유의 시적 전망과 언어 탓이었을까? 어쨌건 80년대라는 가파른 시대에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윤후명의 소설은 현실의 가파름을 아랑곳하지 않는 말의 자유로움으로 우리들의 갑갑한 존재 구속성을 질책했다. 그의 상상력은 빈대떡을 앞에 놓고 막걸리를 마시는 생활 속에서도, 옆자리에서 들려오는 울분에 찬 드높은 현실 비판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이름 모를 새들과 바닷가의 앵무조개들로부터 실크로드의 도시와 역사에 이르는 자유로운 비상을 향유하고 있었다. 스스로 터무니없는 꿈인 것을 알면서도 그는 “따분할 때면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몽둥이로 상어라도 때려 잡으며 살아가리라. 그리하여 작은 섬처럼 살다가 죽어가리라”라는 이 고집스러운 상상력을 발동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직접적 현실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자유롭게 비상하는 그의 소설 언어는 고통의 신음 소리와 저항의 자세를 동반해야만 제대로 된 소설로 간주해주던 80년대에 홀로 쓸쓸히 자유로웠으며, 산문적인 세월 속에 수놓은 그의 시적 상상력은 크게 박수받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도 뚜렷이 이채로웠다.
이런 점에서 윤후명의 소설은 시의 몸에 아로새긴 산문의 무늬이다. 그의 소설 속에서 현실적인 시간과 공간, 아픔과 고통, 외로움과 쓸쓸함은 마치 검은 탄소가 다이아몬드의 투명함으로 변모하는 것처럼 시적인 몸체의 투명함 속으로 변형된다. 그리하여 우리 눈앞에 드러나는 그의 소설은 삶의 쓸쓸함을 투명하게 응축시킨 빛나는 아름다움이다.
1996년 11월, 기획위원
작가 후기: 어두운 길모퉁이에서의 읊조림
이제껏 써낸 중단편 소설들 가운데 「돈황의 사랑」 계열을 제외하고(왜냐하면 그것들만으로 하나의 연작 장편이 되므로), 이렇게 골라 뽑아 한 권의 책으로 엮는다. 나름대로 나의 한 세계를 나타내기에 부족함이 없겠다 싶지만, 그것은 독자의 몫이다.
돌이켜보아 지난 내 삶이 이른바 미로 찾기였다고 하더라도, 이 소설들은 그 길모퉁이마다의 충실한 기록이었다는 꼬리표를 다는 데 나는 주저하지 않는다. 현실 상황이 매우 어렵게 전개되고 있었던 저 어두운 계절에 나는 오히려 내 가치관과의 싸움에 몰두해 들어갔고, 따라서 “문학은 무엇이 어찌 됐든 언어 미학을 바탕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그 어두운 길모퉁이에서 외로이 읊조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문학을 하는 사람으로서, 안으로 자기 자신의 성찰을 꾀함으로써 내적 필연성을 획득하는 것이 또한 밖으로 더 넓은 세상을 향한 바람직한 발걸음임을 나는 굳게 믿고 있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변함없이 ‘나’를 길라잡이 삼은 소설들을 써왔고, 언제까지일지는 몰라도 앞으로도 여전히 그 자세는 쉽게 흐트러질 것 같지 않다. 물론 ‘나’는 다른 누구의 ‘나’일 수도 있다는 점에서, 나는 내 성찰을 통하여 외부와의 교감을 꾸준히 꿈꾸면서, 말하자면 삶의 존재론적인 의미를 찾는 데 골몰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그 ‘나’라는 존재가 광대무변한 우주의 미로를 헤매는 전혀 불가능한 그 누구로 결말이 날지라도 말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들이 ‘인간은 죽는다’는 엄정하고 냉혹한 진리 앞에서,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야 한다는 구차한 논리의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해도 좋다. 다만, 그 누구와 더불어 우리의 존재의 의미를 이야기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이 방법뿐이라고 믿기에 이 소설들을 썼다고 말하는 선에서, 나는 물러나기로 한다.
뜻깊은 책을 엮게 해준 문학과지성사에 감사드린다.
– 1996년 11월, 윤후명
[기획의 말]
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
새의 초상(肖像)
검은 숲, 흰 숲
원숭이는 없다
모든 별들은 음악 소리를 낸다
[작가 후기]
[연보]
[원문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