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한 대중 음악 평론가가 ‘재즈’에 대하여 쓴 일종의 보고서이다. 저자는 재즈의 전반적인 역사와 그것의 개요, 그리고 재즈의 주변부를 끌어들여 그것들과의 관계를 면밀히 살피고 있다. 보다 쉽게 재즈에 접근하는 방법을 배우고 재즈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책이다.
[책머리에]
음악은 늘 우리의 곁에 있다. 그런데 그것은 마치 공기와도 같아서, 어느 경우에는 그것이 우리 곁에 있는지조차 알 수 없을 때도 있다. 거리를 지나치다가 문득 들리는 어떤 선율이 우리를 먼 과거의 추억으로 데려가주기도 하고, 혹은 갑자기 자기도 모르게 어떤 곡조를 입으로 흥얼거리다가, 그것이 왜 흥얼거려졌는지 생각해보면 뭔가 풀 수 없는 실타래 같은 것이 머릿속에 뒤엉켜 있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 그 음악들은 늘 우리 곁에, 어쩌면 우리의 내부에 우리도 모르게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심장 박동, 호흡의 주기, 귓속에서 찡- 하고 울리는 알 수 없는 소리, 방귀 소리(언제나 듣기 좋은 음악만 있는 것은 아니다) 등등이 가장 원초적인 음악이다. 그러니까 우리 몸 자체가 음악을 연주하는 악기이다. 이렇게 따지면 음악은 우리의 무의식에 연결되어 있는 어떤 것 정도가 아니라 몸 자체의 생물학적인 속성 가운데 하나다. 게다가 자연의 그 수많은 소리, 신비한 소리, 아름다운 소리, 무서운 소리, 시끄럽거나 조용한 소리, 그리고 마지막으로 침묵-우리는 그것을 들어서 알고 있지 않은가. 자연은 소리로 이루어져 있다. 우리는 그 소리의 오묘한 흐름과 율동을 원리라고 생각하며, 그것의 거의 본능적인 체계화가 바로 음악이다.
재즈는 음악의 그러한 본질에 매우 충실하다. 재즈는 목소리이다. 그냥 막연한 ‘소리’가 아니라 특정한 이름과 색깔을 가지는 특정한 소리, 목소리이다. 그것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소리가 아니라 몸의 소리이다. 몸이 괴로워서, 기뻐서 내는 소리이다. 재즈하는 사람들, 듣는 사람들은 그 소리 자체를 가지고 그 소리를 내고 또 껴안는 자신의 몸을 하늘로 상승시키거나 지하로 하강시킨다. 처음에 그것은 흑인들의 독특한 방식이었다.
재즈는 처음에는 미국 남부의 흑인들의 목소리였다. 그것은 그들만의 것이었고, 우리의 목소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 남부의 그 목소리가 음반을 타고 전세계로 전파되면서,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왜냐하면 그 소리가 살아 있는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문명의 사람들은 그 목소리를 잃어버렸다고 말한다. 혹은 우리도 가지고 있는 어떤 것이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미국의 클래식 작곡가인 존 애덤스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록 음악보다는 솔이나 고스펠 음악에 매우 큰 흥미를 느낍니다. 그것은 아마도 내가 살았던 캘리포니아의 오클랜드에 아주 강렬하고 정열적인 방식으로 고스펠을 보존하면서 살고 있는 중요한 흑인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루는 고스펠 그룹의 리허설에 초대받았던 적이 있지요. 나는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교회 구석에 처박혀 있으리라 마음먹고 거길 갔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서는 고스펠의 힘있는 울림에 완전히 감동받고 말았습니다. 어찌나 감정이 북받치고 직접적이었는지 듣는 그 즉시 눈물이 쏟아지더라구요. 물론 가수들도 마찬가지로 격앙된 상태였습니다. 나로서는 이것이 신을 찬미하기 위한 음악의 직접적인 형태로 여겨집니다. 아시다시피 요한 세바스찬 바흐의 삶 전체가 이러한 일로 이루어져 있잖아요. 그 역시 신의 영광을 위하여 음악을 창조했습니다. 그는 음악이 엄청난 감정적인 힘과 구원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았던 거지요. 나는 20세기의 음악이 종종 너무 지적이고 논쟁적인 음악이 되어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힘을 상실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우리 모두는 모더니즘의 세례를 받았고 그 영향권내에서 성장했으며 거기서 빠져나왔습니다만 지금은 좀더 영적인 힘이 강한 음악을 위하여 작업하고 있습니다.”
재즈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보다 밑으로 내려가야 한다. 보다 이전으로 돌아가야 한다. 논리와 구성 이전으로. 재즈에 접근하려면 ‘삶’의 차원, 냄새와 분위기와 흔들림의 차원인 그 맨몸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앞으로 전개될 글들 역시 그러한 차원에 대한 일차적인 고려에서 출발한다. 음악을 등한시해서 그러한 관점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재즈 자체가 그렇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영적인 힘을 지닌 음악을 알아볼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모두 그 목소리를 자신의 내부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역설적인 것은, 고도로 추상화된 음악은 오히려 영적인 힘을 잃는다는 것. 영적인 힘을 지녔다는 것은, 사람 안에 있는 뭔가를 깨어나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재즈는 사라진 우리의 과거이다. 혹은, 결국은 그 사라지는 순간을 목격하고 마는, 체험하는 순간 자체가 사라지는 순간인 일종의 ‘전율’이다. 그래서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위대한 뜻과 정밀한 계산이 공존하는 서양의 건축물이 아니다. 대신 그것은 우리 주위를 맴돌다가 내게 다가온 후 지나가버리는, 걸어다니는 시간 자체이다.
이 책의 1부는 지금은 없어진 『월간음악』에 1994년 11월호부터 1996년 1월호까지 연재한 것을 수정하고 보완한 후 ‘애시드 재즈’에 관한 마지막 장을 보충하여 실은 것이다. 주로 특정한 재즈 스타일과 관련되어 있는 특정한 사람들의 삶을 함께 바라보는 방식을 취했다. 아울러 그 방법이 가지고 있는 방법상의 취약함을 각 스타일의 명인들에 대한 개별적인 접근에 의해 보완하려 하였다. 1부는 일종의 재즈사 개관으로 읽힐 수 있겠다. 2부는 재즈와 주변 예술 장르와의 관계를 보려고 한 시도의 편린들이다. 앞으로 여러모로 보충되어야 할 필요가 있는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보론에 해당하는 「음반의 세계」는 1994년 이후의, 그러니까 비교적 최근의 재즈계의 동향을 보여주는 주요 음반들에 관한 짧은 글들과 함께 보다 깊이있게 알고자 하는 독자를 위해 주요 참고 문헌을 실었다. 흐릿한 풍경으로나마 재즈의 현장을 조망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사실 이렇게 재즈에 대해서 글을 쓰게 될 줄은 몰랐다. 나는 록 음악을 듣다가 점차 재즈를 듣게 되는 길을 간, 그리고 지금은 아무거나 막 듣는 수많은 애호가 중의 한 사람일 뿐이다. 처음에는 왠지 슬퍼서 재즈를 좋아했다. 그때 나는 쓸데없이 우울해하기 잘하는 십대였다. 게다가 지금도 LP를 플레이어에 걸 때면 그때의 묘한 기분에 젖는, 다른 사람이 잘 모르도록 조용하고 친근한 방식으로 대화를 청하는 소리의 세계에 진입하면서 느끼곤 하던 옅은 들뜸으로 되돌아가는, 그저 음악을 좋아하는 국외자의 한 사람으로 남아 있다. 그러니 내 글의 어디를 보아도, 무책임하고 무방법적인 딜레탕티슴만이 난무하는 것 같아 쑥스럽다. 그림처럼 마냥 저 자리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이 음악이라면, 내 글도 그렇게 되기를.
– 1996년 11월, 성기완
[책머리에]
[재즈의 흐름을 따라]
1. 재즈란 무엇인가? / 2. 재즈의 발생 / 3. 뉴올리언스에서 시카고까지 / 4. 사치모! 우리의 루이 암스트롱 아저씨 / 5. 빅 밴드의 화려와 비참 / 6. 듀크 엘링턴-가장 위대한 재즈 작곡가 / 7. 비밥-재즈적 미학의 완성 / 8. 찰리 파커-재즈의 나라에서 자유를 찾은 새 / 9. 비밥에서 쿨로 / 10. 마일스 데이비스-카리스마, 혹은 카멜레온 / 11. 하드 밥과 선법-50년대 후반의 재즈 / 12. 존 콜트레인-위대한 발자국 / 13. 프리 재즈-자유, 그리고 막다른 길 / 14. 재즈-록-록의 시대를 사는 재즈 / 15. 70년대, 퓨전 재즈의 시대 / 16. 애시드 재즈-거리, 복제, 그리고 싸구려의 미학
[재즈, 그리고 재즈의 바깥]
1. 재즈와 영화—대중 문화 시대의 두 형제 / 2. 재즈와 문학—랄프 앨리슨의 『보이지 않는 인간』
[부 록]
[음반의 세계]
[참고 문헌]
[원문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