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와 응시

박혜경 비평집

박혜경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1997년 3월 5일 | ISBN 9788932009193

사양 신국판 152x225mm · 330쪽 | 가격 8,500원

책소개

글쓰기의 운명은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더 덧나게 하는 것이라고 여기는 저자의 평론집. 저자는 자신의 삶이 결국 끊임없이 견뎌내야 할 하나의 상처에 지나지 않음을 곳곳에서 고통스럽게 확인하고 있다.

[머리말]

아무런 말도 떠오르지 않는다. 너무나 많은 말들이 가슴속에서 들끓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이 순간 내 자신이 그 모든 말들이 다 빠져나가버린 텅 빈 껍질처럼 고즈넉하고 황량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때맞춰 물을 줄 정성도 세심하게 가지를 치고 거름을 뿌려줄 손도 없는 이 황량한 마음의 밭에서는 말들도 더 이상 자라지 못하는 것일까? 성어(成語)가 되기 전에 먼저 사어(死語)가 되어버린 말들, 그 자욱하게 뒤엉킨 채 말라가는 마음의 잡초들 사이로 나는 너무나 오랫동안 헤매어 다녔던 것 같다.

한동안 제대로 글을 쓰지 못했다. 그것은 어느 순간부터 나를 사로잡았던 비평적 글쓰기에 대한 시건방진 회의 때문이었던 것 같기도 하고, 끝없이 검은 안개를 뿜어내는 시간의 블랙홀 속에서 길을 잃은 듯한, 삶에 대한 무력감과 두려움으로 뒤범벅된 내 내면의 어떤 소용돌이 때문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나의 마음속에서 나에게 버림받은 말들은 우우 떼지어 몰려다니며 날카로운 비명을 질러대거나 어둠 속에서 웅웅거리며 내게 알 수 없는 음산한 전언들을 보내오기도 했다. 아아, 그때 글쓰기는 내게 벗어나고 싶은 하나의 강박이었다. 벗어나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더 짓눌리는 수렁 속으로 나를 이끌고 들어가는 강박. 그렇다면 그 강박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이제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그 강박을 내 삶의 몫으로 더 치열하게 껴안아버리는 일일까?

글쓰기는 삶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들여다보고 그 상처를 치유하는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젊은 시절의 한때 내 삶을 이끌었던 것은 “상처받고 응시하고 꿈꾼다”라는 어느 시인의 말이었다. 그런데 글을 써나가면서 나는 진정한 의미에서 글쓰기의 운명이란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더 덧나게 하는 것이라고, 아니, 그 상처의 내면을 응시하고 그 상처의 의미를 덧나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존재가 짊어질 수밖에 없는 어떤 피할 수 없는 비극의 깊고 어두운 심연으로 내려가는 길을 지시해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상처의 치유란 상처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더 열심히 끌어안는 것일지도 모른다. 돌이켜보면 나에게 있어 삶이란 결국 끊임없이 견디어내야 할 하나의 상처에 지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그 상처의 치열한 끌어안음이 내게 남아 있는 유일한 꿈꾸기의 방식이 아닐까? 그 역설에 기대어 다만 내가 바라는 것이 있다면 내 자신 그 견디어내야 할 몫으로서의 삶의 무게를 아무런 환상 없이 보다 의연히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글쓰기를 통해서 그 견디어냄의 자세가 좀더 깊어질 수 있기를. 그리하여 다시 한번 그 역설에 기대어 삶에 대한 나의 언어적 응시가 존재의 보이지 않는 심연에 좀더 가깝게 다가설 수 있기를, 어쩌면 그 존재의 심연 속에서 언어가 길어올리는 것이 종내에는 존재의 허무에 대한 인식에 지나지 않는 것일지라도, 언어는 또 소멸해가는 시간 속에 그 어떤 존재의 흔적을 남기는 것이므로.

남들이 책을 내면서 항용 토로하는 ‘부끄럽다’는 말이 한갓된 췌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 책을 묶으면서 나는 그 무엇보다도 절실히 실감하고 있다. 첫 평론집이 나온 이후 너무 오랜만에 묶는 책이어서 이미 기억 저편의 어둠 속에 잠겨 있던 묵은 글들까지 내 부끄럽고 부질없는 욕심에 등을 떠밀려 끌려나오고 말았다. 그러나 10년도 안 되는 그 동안의 시간적 격차를 아득한 심리적 거리감으로 되돌아보면서, 찬찬히 하나씩 쌓아나가는 문화적 축적 없이 끊임없는 변화만을 추구하는 시대적 조류의 부박함에 대한 불만스러운 생각 또한 없지 않다. 어쨌든 부끄러움을 무릅쓰고서라도 이전의 글들을 정리(整理)함으로써 나는 이제 그 글들을 정리(情離)하고 싶다. 그리고 다시 시작하고 싶다. 그 동안 멀리서 가까이서 지켜보아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를 드리며……

– 1997년 초여름에, 박혜경

목차

책머리에


자본주의 시대의 문학과 문명 비판 의식
80년대 비평문학에 대한 반성적 회고
사인화(私人化)된 세계 속에서 여성의 자기 정체성 찾기
정신주의 시, 무엇이 문제인가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시인들
빈 몸과 바람의 시-정현종
식인(食人)의 현실과 그 언어적 대응-김혜순
존재의 쓸쓸함을 비추는 빈자의 등 하나-이진명
탈속화된 식물성의 세계, 그 너머-김휘승
성속(聖俗)의 하나됨, 혹은 선적(禪的) 부정의 정신-최승호
소통 불능의 시, 그 절망의 어법-김정란·이영유
무릉의 삶, 무릉의 시-오규원


운명과 역사가 만나는 자리-이청준의 『인간인(人間人)』
가부장적 제도하에서의 여성들의 삶-김향숙의 『떠나가는 노래』
저문 날의 삽화, 혹은 소시민적 삶의 풍속도-박완서의 『저문 날의 삽화』
개인과 세계의 불화를 바라보는 존재론적 시각-김인배의 『후박나무 밑의 사랑』
추억, 끝없이 바스러지는 무늬의 삶-신경숙의 『풍금이 있던 자리』
불모의 삶을 감싸안는 비의적 문체의 힘-『바람의 넋』 이후의 오정희의 소설들

작가 소개

박혜경 지음

박혜경은 경북 경주에서 태어났다. 동국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같은 대학원에서 국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198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평론 부문에 「폐쇄와 부정의 회로」로 당선되어 평단에 진출했다. 현재 계간 『문학과사회』 편집 동인으로 활동 중이며, 인하대학교 연구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비평 속에서의 꿈꾸기』 『상처와 응시』 『세기말의 서정성』 등이 있고, 편저로는 황순원 소설선 『별』 『독 짓는 늙은이』 등이 있다. 제14회 소천 비평 문학상(2002)을 수상했다.

전자책 정보

발행일 2012년 8월 28일 | 최종 업데이트 2012년 8월 28일

ISBN 978-89-320-0919-3 | 가격 7,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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