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가 일상 가운데에서 건져올린 철학적 사회학적 도덕적 성찰을 문명과 인간의 본질이란 측면과 관련시켜 접근하고 있다. 서양의 수필이 갖는 품격과 비교해도 떨어지지 않을, 품위 있고 자유로운 문체의 지적인 산문집.
[머리말]
일부에서 소크라테스 이후 가장 중요한 철학자라고도 일컫는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자가 전문적 철학 논문 외의 다른 글을 쓴다는 것은 외도이며, 그러한 외도를 하는 철학자를 속물로 취급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자신의 지도 교수였던 러셀도 노골적으로 경멸하여 상대해주지 않았다. 나는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에는 별로 매력을 느끼지 못하지만 위와 같은 방식으로 자기 자신에 철저했던 비트겐슈타인에게는 매료된다. 그러나 그와는 달리 철학자가 철학 외의 글을 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난 30년 동안 직업적 철학자로 살아오고 있지만 어려서부터 사상가, 글쟁이, 특히 철학적 시인이 되기를 꿈꾸었던 나는 철학적 글쓰기 외에도 다른 양식의 글쓰기를 내적으로 필요로 하고 그러한 글쓰기가 나름대로의 의미를 지닌다고 변명하고 싶다.
글쓰기는 어떤 인간이든 갖지 않을 수 없는 여러 가지 요청으로서 나타나는 인간적 몸짓이다. 세계와 삶 그리고 그런 것들의 의미에 대한 영원한 지적 문제가 있는가 하면, 일상적 생활에서 항상 부닥치는 정치적, 사회적, 윤리적 문제를 결정해야 하는 실천적 문제가 있다. 어떤 사실이나 경험은 지적으로 이성의 틀 안에서 철학·과학 그리고 평론의 형식을 띠고 표상된다. 그러나 정서의 틀 안에서 감성으로만 파악되고 시나 수필의 형식으로만 표현될 수 있는 현상과 경험의 영역이 있다.
오랜 외국 생활을 청산하고 모국에 돌아온 지 벌써 5년이 넘었다. 그 동안 나는 적지 않은 수의 철학 논문, 그 밖의 논술, 시사적 칼럼, 시와 수필을 써서 발표했다. 여기에 모은 글들은 이렇게 해서 생긴 것들을 모은 것이다.
한 문학 장르인 ‘수필’은 ‘시도’ 혹은 ‘시험’을 뜻하는 불어 ‘essai’의 번역이다. 문학 장르로서 수필은 16세기 프랑스의 작가 겸 사상가 몽테뉴가 같은 이름의 책을 내면서부터이다. 이 작품은 몽테뉴 자신의 여러 생각들을 그때그때 자유롭게 적어둔 기록이다. 그의 이런 수필은 오늘날 한국에서 인기가 있는 수필과는 그 성격이 다르다. 한국에서 수필은 흔히 약간의 재치가 담긴 신변 잡기에 가깝다. 그러나 몽테뉴의 수필은 철학적, 시회학적, 도덕적 성찰에 가깝다. 오늘날에도 서양에서 수필은 신변 잡기보다는 어떤 지적 문제에 대한 간략하고 자유로운 성찰을 뜻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수필의 성격은 폭이 넓다. 찰스 램같이 일상적 주제를 다룬 어떤 포인트가 있는 이야기가 수필일 수 있는가 하면, 파스칼의 『팡세』와 같은 철학적 단상을 수필로 부를 수 있다. 후기 하이데거의 『오솔길』도 깊은 철학을 담고 있는 수필로 볼 수 있다. 필자는 『명상의 공간』(1984)에서 하이데거와 유사한 형식을 갖는 수필을 시도했다. 아무튼 수필이라는 글쓰기는 많은 가능성을 갖고 있다.
한 편의 수필을 시작할 때마다 나는 재치 있고, 아름답고, 깊이 있고, 신선한 명문을 창작해보자 애써보면서도 써서 발표하고 나면 마음은 언제나 불편함을 느끼곤 한다. 그런데도 짤막한 이 글들을 쓸 때마다 내가 나름대로 힘을 기울여 썼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것들은 적어도 나에게는 귀중하다.
– 1997년 5월, 포항공대 연구실에서, 박이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