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 상실을 당연한 전제로 받아들인 채 환멸에의 탐닉을 즐기는 윗세대의 일단의 풍조로부터 성큼 벗어난 진지한 성찰의 모습을 보였다는 평을 듣고 있는 신예 작가의 첫 소설집. 여덟 편의 중 단편이 실려 있으며 독특한 문체와 유니크한 형식이 잘 드러나 있다.
[머리말]
언제부터인지 내게 삶이란 어떻게든 견뎌내야 할 그 무엇이었다. 아마도 나는 그 생존의 방식으로 ‘말’을 택했던 것 같다. 나이가 들면서 ‘말’의 자리에 ‘글’이 들어왔다. 병적인 수다와 낙서벽은 나의 가장 큰 맹점이기도 했다. 책을 읽고 글을 씀으로써, 나는 내게 주어진 고약하고 가혹한 물질적 세계로부터 도피하려 했다. 지독한 가난과 왁살스러운 무학과 짐승 같은 애정으로 희괴하게 뒤범벅됐던 부모님의 세계로부터. 정신을 말살하는 듯 여겨졌던 물리적인 세계에 대한 강렬한 혐오는 사실상 그것에 대한 태생적인 집착과 공존하는 것이었기에, 나는 나 자신이 두 세계 사이에서 파열하지 않도록 애써야 했다. 여전히 나를 갉아먹고 있는 원시적인 생명력과 자기애와 인정 욕망, 광대다운 열등감과 소심함은 나의 보잘것없는 바탕에 대한 체념적 수용과 함께하는 것이다. 나 자신보다 더 간절하게 소설집을 기다려오신 아버지는 논리적인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나의 소설을 읽으시고 이해하실 것이다. 나는 모든 면에서 그토록 아버지를 닮았고, 어찌할 수 없는 그 척력 때문에 내 속에 들어 있는 아버지를 강하게 밀어내려 했던 것이 아닐까.
학부 4년 동안 가장 감동적이고 인간적인 강의를 들려주신 김윤식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그분은 내게 앞으로도 열정적이고 치열한 삶의 현현으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치기 어린 흥분과 조악한 지력으로 막 노문학을 시작하려고 덤벼든 나에게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학문적인 열정과, 학자로서의 엄숙하고 진지한 삶의 모범을 보여주시는 김희숙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2년 전 겨울, 대학문학상을 계기로 『낯선 시간 속으로』의 작가로서의 이인성 선생님을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생생한 감격은, 당시 내게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었던 분들에 대한 기억, 혹은 상상과 함께 「대가와의 만남」이라는 미발표 소설 속에 간직되어 있다. 그때 나의 살을 떨게 했던 메타적인 것, 멀리 떨어져 있는 것에 대한 강렬한 동경과 애착을, 다시는 경험할 수 없으리라. 내 소설의 치명적인 결함을 꼼꼼하게 지적해주신 성민엽 선생님께도 지면을 통해서 감사드린다.
스무 살도 채 되지 않았던 미성년이 쓴 이 픽션들을, 진정한 경이로움과 신비스러움은 구체적인 것들 속에 존재한다는 기적과 같은 사실을 일깨워준 기태(起泰)에게 바친다.
– 1997년 6월, 김연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