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로에서 길 찾기

장경렬 비평집

장경렬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1997년 4월 21일 | ISBN 9788932009490

사양 신국판 152x225mm · 356쪽 | 가격 8,500원

책소개

지난 몇 년 동안 언어의 미로에서 길찾기를 계속해온 저자가 자신의 모색을 한 단계 마무리하면서 펴낸 비평집. 7편의 시론과 8편의 소설론이 담겨 있다.

[머리말]

바벨의 도서관, 그 안에 갇혀-머리말을 대신하여
하버드-옌칭 연구소의 배려로 재작년 여름부터 작년 여름까지 1년 동안을 하버드 대학에서 보낼 수 있었다. 어디를 가나 대학가의 풍경은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나는 이 유서 깊은 대학과 그 주변의 생활에 곧 익숙해질 수 있었다. 강의실이나 강연회장, 학교 앞의 서점이나 식당과 주점, 어디를 가든 낯섦은 오래가지 않았고, 그로 인해 나의 생활은 어렵지 않게 일상화의 수순을 밟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언제 가더라도 항상 낯설게 느껴지는 장소가 있었으니, 그곳은 바로 대학의 중앙 도서관인 와이드너 도서관의 서고였다. 도서관 건물 앞의 널찍한 돌층계를 올라 문을 열고 들어가서 현관을 지나면 천장이 높직한 홀이 나오고, 다시 그 홀 한쪽에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면 책을 대출하거나 반납하는 방에 이르게 된다. 문을 뒤로하고 그 방을 가로질러 오른쪽으로 가면 짧은 통로가 나오는데, 그 통로의 끝에는 항상 열려 있는 출입구가 있다. 그 출입구를 통과하면 서고 1층에 이른다. 서고에는 사람의 손이 닿을 만한 높이의 일정한 서가가 한 사람 정도가 들어설 수 있을 정도의 간격을 두고 늘어서 있고, 그 서가 사이로 들어가면 대낮에도 어둡다. 그 때문에 책을 찾아보려면 서가 사이마다 있는 전등을 켜야만 한다. 이처럼 어둠에 잠겨 있는 서가들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는 서고는 ㄷ자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이 서고를 한바퀴 돌아만 보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걸린다. 그런 서고가 출입구가 있는 층을 기준으로 위로 6층까지, 아래로 4층까지 모두 10층에 걸쳐 있으며, 그 가운데 아래쪽의 3층과 4층은 지하 1층과 2층에 해당한다. 아니, 그것도 모자라 지하 2층에서 시작되는 길다란 터널을 따라 옆 건물로 가면 다시 지하 3층 깊이의 서고가 있다. 지하 2층에는 또 하나의 긴 터널이 있는데, 그 터널을 지나면 서류 및 필름을 모아놓은 또 다른 서고가 있는 건물에 이르게 된다. 이 서고 안에 있는 책은 모두 몇 권이나 될까. 들은 바로는 인문학과 사회과학 분야의 책만 약 3백만 권을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3백만 권의 책들이 끝도 없이 꽂혀져 있는 일정한 높이와 간격의 서가 사이를 돌아다니다 보면, 무언가 외경스러운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낯설고 엄청난 세계에 와 있다는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건 정말로 또 하나의 세계이다. 마치 아르헨티나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가 「바벨의 도서관La Bibliotheca de Babel」이라는 단편소설에서 이야기하는 바벨의 도서관과 같은 곳, 보르헤스가 말하고 있듯이 태곳적부터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영원히 존재할 바벨의 도서관과 같은 곳이다. 보르헤스는 바벨의 도서관을 이렇게 묘사한다. 이 도서관에는 무한수의 서가가 평면적으로 동시에 입체적으로 펼쳐져 있으며, 그 서가에는 640권의 책이 진열되어 있다. 바벨의 도서관에 있는 무한수의 책들, 일견 혼돈과 단절의 세계처럼 보이는 이들 책을 지배하는 최소의 법칙이 있다면, 이는 바로 모든 책이 22자의 알파벳에 쉼표, 마침표, 여백을 합친 25개의 기호가 조합을 이루어 형성한 세계라는 것이다. 와이드너 도서관에 있는 책들은 물론 25개의 기호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온갖 언어의 책이 도서관을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목과 저자를 알면 어느 책이든 찾을 수 있는 이곳 역시 최소한의 질서를 지닌 또 하나의 세계, 보르헤스가 이야기하는 바벨의 도서관을 연상시키는 또 하나의 세계이다.

나는 이 와이드너 도서관에 들어설 때마다 항상 바벨의 도서관에 들어서는 것과 같다는 느낌, 그에 따른 외경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름 방학이 되고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 여름 학기 수업이 시작되었다. 방학 동안에는 도서관 문이 오후 5시에 닫히는데, 여름 학기 수업이 시작되었으니 도서관 개관 시간이 다시 연장되었을 것으로 미루어 생각하고서는 5시 10분전쯤 서고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3층으로 올라가 출구 반대편 쪽에 있는 서고로 가서, 서가 사이의 바닥에 앉아 전등을 켜고 한가하게 이책 저책을 뒤적였다. 찾던 책을 다 찾아가지고 출입구로 되돌아간 것은 1시간쯤 지나서였다. 그런데 아무리 문을 밀어도 문은 꼼짝하지 않았다. 뜻밖에도 출입구의 문은 밖으로 잠겨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나는 수백만여 권의 책들 사이에 갇히고 만 것이다. 도서관을 닫는 시간을 방송으로 미리 알리는데, 아마도 방송이 있고 나서 서고에 들어갔던 것 같다. 이 서고의 지하 2층에는 앞서 말했듯이 서류와 필름을 보관하는 장소로 통하는 터널이 있으며, 그 터널을 지나 또 다른 서고로 가서 몇 층을 올라가면 바깥으로 나가는 문이 있다. 혹시 그쪽 문은 열려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지하 2층으로 내려가 희미한 불빛에 잠긴 터널을 따라갔다. 그러나 터널이 끝나는 지점의 출입구 역시 밖으로 잠겨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내일 아침까지는 이 무수한 책들 사이에 갇혀 있어야 한다. 이런 생각을 하며 터널을 통해 지하 2층의 서고로 되돌아왔다. 서고에 다시 들어서자 통로의 천장에 걸린 희미한 전등빛에 비친 서가들과 그곳에 빽빽히 꽂혀 있는 빛바랜 고서들이 눈에 들어온다. 마치 사진이나 영화에서 본 지하 무덤에 들어와 있는 듯한 느낌, 모든 책의 오래된 영혼들이 숨을 죽인 채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듯한 느낌, 그 영혼들이 한낮의 잠에서 깨어나 정적 속에서 나를 응시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일순간 마음을 어지럽힌다. 전에는 갖지 못했던 느낌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를 압도하는 것은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는 이 공간에 갇혀 죽은 듯이 말이 없는 무수한 책의 영혼들과 함께 하룻밤을 지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 순간 나의 의식은 보르헤스가 말하는 바벨의 도서관에 대한 상념으로 가득 찬다.

「바벨의 도서관」의 주인공과도 같이 나는 무한수의 서가로 이루어진 도서관에 갇히고 만 것이다. 보르헤스에 의하면 그 소설 속의 주인공은 바벨의 도서관 안에서 태어나 그곳에 갇힌 채 하나의 책을 찾아 일생을 편력한다. 그러나 그는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이제 그 안에서 죽음을 맞이할 채비를 하고 있다. 그가 찾아 헤매던 책은 과연 어떤 책인가. 그것은 바로 모든 책에 접근하기 위한 암호 또는 그 모든 책에 대한 완벽한 요약을 담고 있는 책이다. 이 책은 옛날 어떤 사서의 말을 따라 신(神)과 유사하다고 전해지고 있다. 아득한 옛날부터 사람들은 이를 찾아 헤맸지만 결코 찾을 수 없는 책, 실제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는 그 책을 그는 찾아 헤맸던 것이다. 죽음에 이르러 그는 자신이 아니더라도 누군가 그 책을 찾을 수 있기를, 아니 누군가 단지 읽고 검토할 기회만이라도 갖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한다.

보르헤스가 말하는 이른바 모든 책에 접근하기 위한 암호 또는 그 모든 책에 대한 완벽한 요약을 담고 있는 책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여기에는 긴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우리의 세계가 250여 가지라는 한정된 수의 원소로 이루어져 있듯이 바벨의 도서관을 구성하는 모든 책도 25개라는 한정된 수의 기호로 이루어져 있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즉, 그가 말하는 ‘도서관’은 ‘우주’나 ‘세계’를 암시하기 위한 것일 수 있으며, 유추에 의해 도서관의 모든 책은 우주 안의 모든 현상과 사물을, ‘신과 유사한 책’은 모든 현상과 사물을 지배하는 보편 진리로 풀이할 수도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소설의 주인공은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는 보편 진리를 찾아 일생을 헤매는 우리 자신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래서 어쨌단 말인가. 나는 지금 자의적(恣意的)인 유추 과정을 통해 살아 숨쉬는 은유를 질식시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살아 숨쉬는 은유를 질식시키고 그 자리에 하나의 고착된 임의적인 의미를 세우는 것은 아닌가. 사실 보르헤스의 소설이 인간이란 일정한 수의 원소로 구성된 무한수의 사물과 현상 사이에서 확신조차 할 수 없는 보편 진리를 찾아 헤매다 죽어가는 존재임을 말하기 위한 것이라면, 이는 전혀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진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처럼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진부한 메시지를 추정해내는 작업이 다름아닌 문학 텍스트 읽기인가. 또는 드러난 기호가 숨기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의미를 유추해낸 다음 이를 고착화 또는 탈신비화하는 작업에 불과한 것이 문학 텍스트 읽기인가. 보르헤스의 도서관 이야기가 갖는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라고 생각하던 순간부터 나는 이런 회의에 시달려야 했다. 그리하여 나는 한때 보르헤스의 도서관 이야기는 무언가 별도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의미의 핵심을 갖는 이야기로 보고자 한 적도 있었다. 「바벨의 도서관」을 도서관과 책에 관한 이야기 그 자체로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보르헤스의 도서관 이야기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가 말하는 바벨의 도서관은 여기 지금 내가 갇혀 있는 도서관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가 세계 또는 우주와 같은 공간일 수 있고, 책은 그 자체가 보편 진리라는 환상을 창출해내는 동인(動因)일 수도 있다. 또한 소설의 주인공은 언어 기호가 무수한 조합을 통해 이루어놓은 책의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헤매는 사람일 수도 있다. 결국 보편 진리에 대한 믿음 때문에 사람들이 ‘신과 유사한 책’이라는 환상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책이 존재하기 때문에 보편 진리라는 환상이 생긴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책을 형성하는 언어 기호가 보편 진리라는 환상을 만든 것이고, 그 환상이 사람들에게 보편 진리에 대한 믿음을 갖도록 하는지도 모른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언어 기호는 단순히 외부의 현상을 수동적으로 설명하기 위한 방편이 아니라 현상을 구성하는 동시에 의미를 생성하는 주체일 수 있으며, 도서관이란 외부 세계와 관계없이 책으로 인해 저절로 생성된 ‘보편 진리라는 환상’을 숨기고 있는 ‘미로’일 수 있다. 따라서, 보르헤스가 암시하고 있듯이, ‘신과 유사한 책’은 도서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신과 유사한 책’과 언젠가 어디에서든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환상은 또 하나의 환상을 낳기 때문이다. 환상이 낳은 환상에 사로잡혀 사람들은 도서관의 서가를 돌며 책장을 뒤적인다. 마치 불빛을 찾아 모여드는 부나방과도 같이. 매혹된 그들에게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책과 언어 기호는 인간이 만든 것이지만, 그것들이 인간의 의식을 지배하는 미증유의 힘을 지니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미증유의 힘을 지닌 책들, 저 무수한 책들 사이에 문자 그대로 갇혀 있다. 따지고 보면, 문학을 공부한다는 명분 아래 언어 텍스트의 세계에 갇힌 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내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그리고 소설의 주인공이 ‘신과 유사한 책’을 찾듯이 언어 텍스트 어딘가에 숨어 있는 궁극의 의미를 찾는 사람이 나인지도 모른다. 자의적으로든 타의적으로든 나는 도서관에 갇힌 소설의 주인공처럼 언어 텍스트에 갇혀 진리 또는 의미라는 환상을 찾아 헤매고 있는지 모른다. 결국 나는 바로 지금 이 순간 도서관에 갇혀 있듯이 어차피 언어 기호의 세계에 갇혀 있는 존재가 아닐까. 그처럼 갇혀 있으면서도 갇혀 있다는 의식을 하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는 존재가 바로 나 아닐까.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마음이 가벼워진다. 어차피 갇혀 지내는 것이 나의 존재 방식이라면, 갇혀 있다는 생각에 마음 답답해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마음의 여유를 되찾고 지하 2층에서 층계를 타고 다시 지상으로 올라간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창밖으로 보이는 세계에는 어스름이 드리워져 있으며, 여기저기 보이는 불빛이 별처럼 아름답다. 불빛에 눈을 주는 순간 무한 공간에서 빛은 일직선이 아닌 곡선의 형태로 진행한다는 아인슈타인의 논리에 생각이 미친다. 이러한 논리에 따르면, 우리의 인식이 미칠 수 있는 우주의 영역에는 한계가 있고, 따라서 우리가 속해 있는 우주란 유한한 것이다. 그처럼 우리가 속해 있는 우주가 유한한 것이라면, 우리가 속해 있는 우주 바깥쪽에 존재하는 또 다른 세계를 인정해야만 한다. 창밖의 저 세계는 바로 그와 같은 또 하나의 세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밤 이 공간을 벗어날 수 없듯이 나는 결코 내가 몸담고 있는 세계에서 벗어나 다른 세계로 갈 수 없다. 아니, 다른 세계로 갈 수 없다는 말을 하기에 앞서 나에게 주어진 세계를 헤매기에도 벅차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미지의 대양 앞에 펼쳐진 바닷가에서 헤매는 아이와 같은 존재인지도 모른다. 뉴턴의 말처럼 바닷가에 널린 조가비 가운데 보다 더 예쁜 조가비를 줍기 위해 이리저리 헤매는 아이, 해질녘까지 기껏해야 몇 개의 조가비밖에 줍지 못하는 아이와 같은 존재가 나인지도 모른다.

문학도로서 나의 존재란 바로 그런 것이 아닐까. 문학 텍스트라는 한정된 세계를 이리저리 헤매면서 보다 더 마음에 드는 의미의 단편들을 주워 모으는 존재, 궁극의 의미를 찾는 일에는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기껏해야 마음에 드는 단편적 의미들을 찾아내고는 희열을 느끼는 존재, 그러면서도 궁극의 의미를 찾는 양 허세를 부리는 존재, 바로 그런 존재가 나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나에게 주어진 텍스트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가비를 줍던 아이가 가끔 눈을 들어 저 멀리 펼쳐진 대양을 바라보듯이, 그리고 지금의 내가 저 바깥 세계로 눈길을 주듯이, 언젠가 나는 텍스트에서 눈을 들어 저 미지의 세계로 눈길을 줄 수도 있지 않은가. 아니, 언젠가는 이 세계를 벗어나 새로운 세계와 우주로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르지 않은가. 마치 대양 앞의 바닷가를 헤매던 아이가 배를 타고 대양으로 나갈 수 있듯이. 또는 내일 아침이면 내가 이 도서관을 벗어나 바깥 세계로 나갈 수 있듯이. 어쩌면 언어 텍스트 바깥쪽에 존재하는 세계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직접적인 것이 바로 ‘현실’이라고 지칭되는 세계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이라는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이 세계 역시 또 하나의 텍스트는 아닐까. 우리가 ‘현실’이라고 말하는 세계 자체가 또 하나의 언어 세계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세계조차 언어 세계인 이유는 무엇보다도 우리는 결코 언어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요컨대, 현실 세계가 기호 세계일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사유 및 인식 세계 자체를 구성하는 근원적 요소는 언어 기호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에게 언어 기호의 세계에서 벗어나기란 근원적으로 불가능한지도 모른다. 설사 벗어날 수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또 다른 언어 기호의 세계에 갇히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도서관 또는 텍스트의 세계와 그 바깥쪽의 세계를 구분하는 일 자체가 부질없는 짓인지도 모른다. 마치 보다 더 마음에 드는 의미의 단편을 찾아 도서관을 또는 텍스트의 세계를 헤매듯이, 어디를 가나 우리는 보다 더 마음에 드는 의미의 단편을 찾아 헤맬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세심하고 밝은 눈길로 세계라는 텍스트 위를 헤매는가에 있을 것이다. 즉, 세심하고 밝은 눈으로 텍스트를 읽는 일이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주어진 일차적 과제인 것이다.

세심하고 밝은 눈으로 텍스트 읽기, 이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당위적인 명제에 생각이 미치자 문득 오래 전에 이 도서관의 서고 어딘가를 헤매고 다녔을지도 모를 폴 드 만Paul de Man의 모습이 떠오른다. 한때 하버드 대학의 대학원생이었던 그만큼 세심한 눈으로 텍스트 읽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는가를 설득력 있게 말한 사람은 아마도 드물 것이다. 그의 논의는 「문헌학으로의 복귀The Return to Philology」라는 글을 통해 전개되는데, 이 글은 자신의 스승 가운데 하나였을지도 모르는 이곳 하버드 대학의 영문과 교수 월터 잭슨 베이트Walter Jackson Bate의 「영문학 연구의 위기The Crisis in English Studies」라는 글에 대한 반박문 형태로 씌어진 것이었다. 베이트는 「영문학 연구의 위기」에서 인문학이 “자기 파괴의 길로 접어든 채 일찍이 겪어본 적이 없는 최악의 허약한 상태”에 처해 있음을 개탄하면서, 그 이유를 ‘문학 이론’에 대한 점증적인 “관심 집중”에서 찾는다. 드 만은 베이트의 주장과 관련하여 자신의 글을 통해 이론에 대한 “관심 집중” 때문에 인문학이 “허약한 상태”에 빠져들게 된 것인가, 아니면 애초에 인문학이 “허약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이론에 대한 “관심 집중”이 뒤따르게 된 것인가를 묻는다. 이 물음에 어떠한 답을 할 수 있든간에, 베이트의 논리는 기득권자의 무책임한 책임 전가일 수도 있고 드 만의 표현 그대로 “공격적인 자기 방어”일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책임 전가 또는 “공격적인 자기 방어”에 대항하여, 드 만은 ‘이론’에의 관심은 전통적인 문헌학으로의 복귀를 통해 인문학의 강화를 목표로 하는 것임을 역설한다. 논의의 과정에서 그는 문학 공부와 관련하여 자신이 체험했던 바를 회상한다. 회상의 대상은 드 만이 이 대학에 다니던 시절 만났던 교수 루벤 브라우어Reuben Brower이다. 드 만은 자신의 글에서 무엇보다도 “베이트의 하버드 대학교 동료인 루벤 브라우어가 1950년대에 대학 학부 과정의 일반 교양 과목으로 가르친 ‘문학 해석’이라는 강의”에 주목한다. 그에 의하면, “학생들이 다른 사람들의 글에 관하여 글을 쓰기 시작하게 되었을 때, 브라우어는 그들에게 고려 대상인 텍스트에서 유도된 것이 아니면 어떤 것도 말하지 말도록 지시를 내렸”으며, “텍스트에 실제로 사용되고 있는 특정 언어에 의해 입증될 수 없는 진술이라면 그 어떤 진술도 하지 말도록 학생들에게 지시를 내렸”다고 한다. 바꿔 말해, “텍스트를 세심하게 읽는 것에서 시작하되, 인간의 체험이라든가 역사라는 일반적인 맥락 속으로 갑자기 뛰어들지 말도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브라우어는 “모든 이론에 선행하여 존재하는 단순한 글읽기,” 또는 “언어 구조에 주목하고 이에 반응”하도록 하는 “세심한 글읽기”를 학생들에게 권장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단순해 보이는 “글읽기”라 할지라도 “문학 교육이 신학이나 윤리학, 심리학이나 지성사에 대한 교육의 대체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대단히 공격적인 것으로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 드 만의 주장이다.

“문학을 단지 역사적이고 인문학적인 주제로 가르치는 대신, 또한 해석학과 역사로 가르치기에 앞서, 수사학과 시학으로 가르쳐야 한다”는 드 만의 주장에서도 확인되듯이, 그의 ‘이론’이 의도하는 바는 바로 이상과 같은 “세심한 글읽기,” 잠재적으로 미증유의 파괴력을 갖는 “세심한 글읽기”인 것이다. 바로 이 때문에 그가 의도한 이론으로의 전환은 다름아닌 “문헌학으로의 복귀”이자 “언어 구조가 생산하는 의미에 앞서 언어 구조 자체에 대한 검토로의 복귀”이기도 한 것이다. 드 만이 말하는 “세심한 글읽기”는 “신비평으로의 복귀”와 다를 것이 없다는 냉소적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의도한 “문헌학으로의 복귀”는 텍스트에서 멀어진 문학 논의를 다시 텍스트 쪽으로 복귀시키기 위한 것이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사실 텍스트에서 멀어진 문학 논의란 궁극적으로 문학을 포기한 문학 논의일 수 있다. 모든 문학 논의가 일차적으로 텍스트에 대한 세심한 읽기에서 출발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세심한 글읽기”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에서, 드 만이 말하는 ‘이론’은 결코 추상적이고 사변적인 논리에 머물기 위한 이론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실제’를 지향하는 이론인 것이다. 사실 이론을 거부하면서 실제를 옹호하는 그 어떤 논의도 그 자체로 이론일 수 있다. 또한 이론을 떠난 실제는 그 자체가 실제일 뿐 이론에 대한 거부나 저항일 수 없다. 다시 말해, 이론에 대한 거부나 저항은 다만 이론을 통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이론을 거부하거나 이론에 저항하는 논의가 명시적인 이론을 통한 것일 수도 있고 암시적인 이론을 통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와 같은 논의 자체가 넓게 보아 이론의 테두리를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이론은 실제를 향한 몸짓이 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안에 거부와 저항을 내재하고 있는 위기 의식 그 자체일 수 있다.

문제는 거부나 저항이 어디를 향한 것인가에 있다. 이를 문제삼는 이유는 외부의 타자를 향한 거부나 저항도 있을 수 있지만 내부의 자신을 향한 거부나 저항도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드 만이 자신의 또 다른 글 「이론에의 저항The Resistance to Theory」에서 “수사학적 글읽기들”은 “다른 모든 종류의 읽기와 마찬가지로 이들 자신이 옹호하는 읽기를 여전히 회피하고 또한 이에 저항한다”고 말했을 때, “무엇으로도 이론에의 저항을 극복할 수 없는데, 이론 자체가 곧 저항이기 때문”이라고 말했을 때, 그가 의식한 것은 다름아닌 내부를 향한 저항일 것이다. 내부를 향한 저항이 중요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이론에의 저항은 이론을 역사적 현실이나 일상의 현실이라는 외부 쪽으로 개방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어야 하지만, 그 저항이 외부에서 가해지는 타율적 압력으로만 존재하는 경우 이러한 개방은 결코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론은 어떻게 해서든 자기 방어의 전략을 모색하게 될 것이고, 그리하여 더욱 더 고립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자기 방어의 전략에 의해 고립되어가는 이론은 이론다운 이론이라고 할 수 없다. 이론다운 이론이라면, 이론에의 저항을 자생적으로 생성해나가는 이론, ‘자기 성찰’을 감당해나가는 이론일 것이다. “고귀하면 고귀할수록, 또한 방법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문학 이론은 저항으로 변한다”는 드 만의 발언이 값진 이유는 여기에 있다.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오늘밤 내가 이 무수한 텍스트들 사이에서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손쉬운 것은 보다 더 마음에 드는 조가비, 아니 텍스트를 찾아내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보다 더 마음에 드는 조가비와도 같은 텍스트를 찾기 위해서는 바닷가의 모래밭같이 넓은 이 서고의 어느 쪽으로 가야 할 것인가. 서고를 헤매는 도중 서고의 통로 어두운 저편으로 사람의 형상이 문득 나타났다가 사라진다. 중세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치렁치렁한 차림의 하얀 옷을 입은 여자의 모습이었다. 놀라움과 호기심이 뒤섞인 마음으로 사라진 그녀를 확인하기 위해 통로를 따라갔다. 얼마를 가다보니 서가 사이의 희미한 불빛 아래에서 책을 뒤적이는 그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녀가 인기척에 눈을 들어 내 쪽을 바라보고는 흠칫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내가 그녀의 존재를 예상하지 못했듯이 그녀도 나의 존재를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곧 그녀에게 당신도 나처럼 서고에 갇히게 된 것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자신은 갇힌 것이 아니라 일부러 남은 것이라고 말했다. 좀더 찾아볼 책이 있어서 일부러 남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책 몇 권을 찾기 위해 밤새도록 이곳에 남는 쪽을 택했냐고 묻자 그녀는 웃으면서 나갈 방법이 있다고 말했다. 어떻게라는 나의 물음에 그녀는 다시 한번 웃고는 나가는 길을 안내해주겠다고 했다. 나나 자기와 같은 사람을 위해 아직 잠가놓지 않은 문이 있다는 것이었다. 설명을 하려다 잠시 망설이더니 그녀는 따라오라는 듯이 말없이 앞장섰다. 마치 미로를 지나듯 서고의 통로와 층계를 따라 이리저리 발길을 옮기자 이제까지 내가 알지 못했던 문이 나왔다. 그곳에 이르자 그녀는 문을 가리키고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문을 나서자 나는 다시 바깥 세상에 이르게 되었다. 이미 어둠이 깊어진 바깥 세상은 여전히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내가 책들 사이에 갇혀 있는 동안 세상의 그 무엇도 변한 것은 없었다. 그것이 왜 그리도 신기하던지! 얼마 전에 누군가에게 도서관에 갇혔던 이야기를 하자 그가 나에게 물었다. 화장실이 안에 있었던가라고. 물론 도서관의 서고 안에는 화장실이 없었다. 도서관에 갇혀 하룻밤을 보낼 생각을 하며 나는 왜 그에 대한 걱정을 조금도 하지 않았던가. 심지어 가족이나 친구들이 나의 행방 불명을 놓고 얼마나 걱정할 것인가에도 생각이 전혀 미치지 않았었다. 그곳에는 물론 외부 세계로 통하는 전화도 설치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문학 공부와 텍스트 읽기란 이처럼 밖의 현실을 잊은 채 진행되는 것은 아닐까. 아마도 이러한 반성과 함께 나의 문학 공부 또는 텍스트 읽기는 다시 시작되어야 할지도 모른다.

지난 몇 년 동안 썼던 우리 문학에 대한 글들 가운데 형태가 비슷한 것들을 모아 한 권의 책으로 묶게 되었다. 빛바랜 글들을 놓고 먼지를 털기도 하고 녹을 벗겨내기도 하다 보니 벌써 일 년의 세월이 지났다. 그런데도 구석구석 끼어 있는 먼지와 녹은 여전하다. 어쩌면 더 이상 먼지를 털고 녹을 벗기는 것은 나의 능력 바깥의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에 이제 자리를 털고 일어나려 한다. 이제까지 내가 길을 찾아 헤매던 언어의 미로에서, 바벨의 도서관에서 일단 벗어날 때가 된 것이다. 설사 똑같은 언어의 미로 속으로, 바벨의 도서관 안으로 다시금 들어가 헤매게 된다 할지라도, 이제 그 동안의 길찾기를 마무리해야 할 때가 된 것이다. 세계의 어둠이 깊어가고 나 역시 밤과 새로운 날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 1997년 10월, 장경렬

목차

바벨의 도서관, 그 안에 갇혀-머리말을 대신하여

제1부 시론

시간성의 시학: 시조 시학의 새로운 위상 정립을 위하여
문의 마을과 청진동, 또는 초월 세계와 인간 세계: 고은의 70년대 시와 언어의 문제
생명과 사랑의 시, 그리고 틈과 여백의 시학: 김지하의 『중심의 괴로움』과 ‘생명 사상’
무엇을 위한 시조 형식인가: 윤금초의 『해남 나들이』와 ‘세상 읽기’
시조, 또는 ‘적요의 공간’에 언어로 놓은 ‘수(繡)’: 이우걸의 시세계와 절제의 미덕
현실 인식의 한계와 극복, 그리고 시인의 시적 변모: 이하석의 ‘제3리얼리즘 시학’과 그의 시세계
떠남과 되돌아옴, 또는 밖에서 헤매기: ‘이 세상’의 시인 황지우와 그의 시세계
시인의 사명과 언어의 비일상화: 이정주의 『문밖에 계시는 아버지』와 ‘반(反)독해’를 위한 시

제2부 소설론

이원적 세계 구조의 문학적 형상화: 김만중의 『구운몽』과 작품에 담긴 ‘환몽 구조’의 문학적 의의
삶의 흔적과 흔적으로서의 삶에 대한 기록: 서정인의 『달궁』과 소설 미학의 새로운 가능성
시간·언어·현실의 문제와 글쓰기의 어려움: 이청준의 소설과 한 작가의 방법론적 자기 성찰
‘성장을 잃어버린’ 시절, 그 ‘이율배반’의 시간대: 김주영의 『고기잡이는 갈대를 꺾지 않는다』와 반성장소설로서의 성장소설
‘의미 세우기’에의 저항: 송영의 소설과 그의 탈의미화 전략
뫼비우스의 띠와 클라인의 병: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과 현실 인식의 문제
감성의 언어와 정지의 미학: 한수산의 소설과 서정적 소설 쓰기
유토피아를 찾아서: 최인석의 『내 영혼의 우물』과 현실 초극 의지 읽기의 한 방법
숨은 꽃을 찾아 그리기, 그것의 어려움과 아름다움: 양귀자의 [숨은 꽃]과 소설 쓰기의 의의

작가 소개

장경렬 지음

인천 출생으로, 서울대학교 영문과를 졸업했다. 미국 오스틴 소재 텍사스대학교 영문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 현재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영문과 교수다. 비평집으로 『미로에서 길 찾기』 『신비의 거울을 찾아서』 『응시와 성찰』 『즐거운 시 읽기』가 있고, 문학 연구서로 The Limits of Essentialist Critical Thinking, 『코울리지』 『매혹과 저항』 『시간성의 시학』이 있다. 최근 번역서로는 『아픔의 기록』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노인과 바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 『라일라』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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