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회 여석기 연극평론가상과 제1회 P. A. F. 비평상을 수상한 안치운의 연극 비평집. 따뜻한 시선과 치밀한 분석으로 한국 연극계의 주목받는 비평가인 저자는 이 책에서, 연극의 주제는 가벼운 것으로, 관객은 대중으로, 연극은 상업화로 옮겨가는 낯설지 않은 현실 속에서의 비평가의 부재와 올바른 위상을 이야기한다.
[머리말]
연극의 비밀
연극과 오지: 울림과 빛
아침가리와 대골이란 곳이 있다. 아침가리는 조선 후기 가난했던 백성들이 학정과 수탈을 피하고, 지식인들이 난을 피해 은둔해서 살았던 오지인 3둔(월둔·삶둔·달둔), 5가리(젖가리·연가리·명지가리·아침가리·명가리)의 하나이다. 그리고 대골은 젖가리골 옆에 있는 큰 골이다. 대골은 강원도 인제군 기린면 방동리에 있고, 아침가리는 방동리에서 진동리로 가다 방동초등학교 갈터분교 앞 방대천을 건너 시작되는 갈터를 들머리로 해서 홍천군 내면 월둔과 삶둔에 닿는 유장한 계곡 가운데 있는 넓다란 터 이름이다. 그곳에 가려면 아홉사리와 같은 구절양장의 산과 계곡을 넘고 넘어야 한다.
오지(奧地)는 중심으로부터 아주 먼 비경지이며, 억압받은 민중들이 연명하기 위하여 찾은 피난처였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순결한 터이기도 했다. 우리는 이곳에 살던 이들을 화전민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산비탈 초목에 불을 지르고, 그 자리에 농사를 지으면서 살았다. 필자는 대학에 들어가 처음으로 배낭을 메고 강원도와 경기도의 깊은 산을 다녔을 때만 해도 화전민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날이 어두워지면 자고 가라고 했고, 곤궁했던 살림이지만 밥상을 차려주기도 했다. 그들 삶의 공간은 집이 아니라 그것을 허락한 산이며 땅이었으리라. 그리고 밤이 깊어지면 오랫동안 가슴속 깊은 곳에 품고 있었던 조상들이 여기에 와서 살게 된 역사를 말해주기도 했다. 촛불 켜진 방안에서 듣는 이야기는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역사였고, 질긴 생명의 위엄과도 같은 것이었다. 기억을 더듬어 그곳에 가보면 지금은 집의 흔적조차 없다.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의 끝부분에서 블라디미르가 하는 대사처럼 “나무만이 살아 있을 뿐이다.”
이른 아침부터 밭을 갈아야 하는 곳이라는 말뜻을 지닌 아침가리와 골이 깊은 대골은 산속의 궁벽했던 살림살이와 함께 땅과 하늘을 가슴에 품는 넉넉함을 짐작하게 한다. 아주 오래 전부터, 이곳에서 흙과 나무로 집을 짓고 모여 살았던 이들은 지금은 거의 다 떠났다. 홀로 남은 집들은 이곳에 태(胎)를 묻은 사람들을 기다리다 지쳐 허물어져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웠다. 밤의 달무리와 계곡의 물소리를 내세우면서 다가오는 대골의 봄날은 어느새 눈부시다. 그리고 폐교된 방동초등학교 아침가리분교 터 한쪽에서 붉은 때찔레꽃의 봉오리들이 활짝 피어오를 때 아침가리는 여름을 맞는다. 그리고도 짬 없이 이어지는 가을과 긴 겨울이 있다.
대골에는 약초를 캐면서 사는 한 가족이, 앞쪽 사슴생이골과 뒤쪽 연가리 사이 아침가리에는 당귀를 재배하며 밭떼기를 붙이며 사는 세 사람만이 아직도 해질녘 누운 길을 바라보고 있다. 이들은 사륜 구동의 차를 타고 굽이굽이 산허리를 잘라 만든 군사용 작전 도로를 따라오는 이들을 싫어한다. 대신 배낭을 짊어지고 걸어오는 이들은 따뜻하게 맞이한다. 물 흐르는 깊은 계곡을 거슬러 걸음품을 팔며 와야 마음이 흐트러지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아침가리 계곡을 따라 걸어올라오는 이들은 흐르는 물처럼 제 몸을 씻어내야만 비로소 이곳에 사는 이들과 만날 수 있다. 아침가리와 대골에 가면 시선이 단순해진다. 그곳 사람들의 단순한 삶을 바라보게 된다. 그리고 나서 바라보는 풍경처럼 자신도 풍경이 된다. 매혹된 영혼. 자연은 그것을 우리들에게 준다. 아니 우리들을 그렇게 만든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고, 산이 크면 골이 넓다. 아침가리와 대골의 밤, 이곳에서는 밭 한가운데 주저앉아 있을 때나 산길을 오르고 내려오면서 어둠과 마주하는 경우가 많다. 산이 깊고 길이 험하기 때문이다. 어둠이 더 깊어질 대로 깊어지면 밤은 오히려 투명해진다. 이때 말은 줄어들고, 가까이 그리고 멀리서 산이 움직이고 눈짓한다. 산이 내쉰 안개가 밤과 뒤엉킨다. 산의 어둠, 그것은 산에 사는 이들을 아주 단순하게 만들어버린다. 그리고 자연의 소리에 귀기울이게 한다.
내 곁에 와 나를 휘감아도는 어둠. 아직도 대골과 아침가리 어둠 속에서는 뒤돌아볼 수조차 없다. 뒤가 날 두렵게 만든다. 어둠은 내 앞뿐만 아니라 뒤에도 있다. 멀리 숲속의 반딧불이 하늘의 별처럼 어둠에 빛나는 점 하나 찍는다. 불의 터인 부엌의 아궁이에 군불을 지핀다. 어둠이 타들어가 빛이 된다. 밤새 아궁이에 지핀 군불이 꺼지면 다시 아침이다.
어둠에 갇히면 말이 줄어들고, 단순해지는 경험은 극장과 연극이 주어야 하는 경험과 같다. 극장에 가는 것은 제 삶의 무게를 지고 산에 오르는 것과 같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난 아직 이와 같은 경험을 극장에서 해보지 못했다. 오늘날 연극이 거주하는 극장은 정갈한 장소도 아니고, 어둠이 빛이 되는 장소도 아니고, 관객들에게 견딜 수 없는 불안감과 궁금함을 주는 장소도 아니다. 무대 장치와 같은 바위·물·나무·바람·꽃·흔들리는 잎사귀, 숲 등이 조화로운 계곡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천박해진 극장에는 보고 듣는 것들이 주는 울림이 사라져버렸다. 연극과 극장은 관객들이 더 이상 귀향하는 곳이 아니다. 근원이 없기 때문이다.
연극과 극장: 어둠과 미로의 만남
연극에 관한 정의 가운데 오래, 깊이 남는 것은 ‘연극은 만남의 예술이다’란 표현이다. 연극은 만남이되 사방팔방과의 만남이다. 연극은 만남의 미로와 같다. 연극은 데카르트가 “숲속에서 방황하지 마라,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장애물에 유의하지 않고 무조건 일직선으로 나아가는 데 있다”고 한 돌격 앞으로의 주장을 부정한다. 높은 산은 투명함과 숭고함과 즐거움 그 자체이다. 남사당 놀이인 살판이 죽음판이 될 수 있는 것은 되돌아갈 수 없는 직선의 외줄이 주는 긴장감과 위험 그리고 유혹 때문이다. 긴장감이 진동이고, 위험은 파동이며, 유혹의 끝은 감동이다.
연극의 매력은 직선 위를 그냥 가로질러 가는 것이 아니라, 길 위에 머물게 하고, 길을 잃게 하는 데 있다. 길이 없는 곳, 길이 에둘러 있는 곳에서 돌고 돌아가는 것은 퇴보가 아니다. 연극은 길을 막는 숲과 같다. 길이 있는 곳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길을 막아 길 위에 머물게 한다. 막힌 길 위에 오랫동안 서 있을 수 있는 것, 그것이 성숙이다. 이를 위해서는 숲과 같은 미로 속에 빠져 앞으로 가는 것과 뒤로 가는 것의 구별이 없어지는 경험을 해야 한다. 그것이 미로라는 지형이 우리들에게 주는 만남의 미학이다.
미로(속의 연극)는 입체(의 연극)에 속한다. 장애물을 만나면 그 곁에 가까이 가기. 그것과 마주하기. 그것의 울림에 귀기울이기. 이 모든 것을 권태로운 것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스스로가 맑아지는 것으로 경험하기. 그러나 한국 연극은 앞으로만 가는 초고속 산업 사회의 자취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중심의, 중심의 한복판으로 이어지는 직선을 긋고 그 위에서 앞으로만 나아간다. 나아갈수록 큰, 더 큰 연극의 땅과 좋은, 더 좋은 연극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순간 연극은 멈춘다. 앞으로만 나아가려는 연극은 아주 작고 작은 것들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앞으로라는 방향과 빠른 속도주의야말로 연극과 작가들이 경계해야 할 위험이다. 그 결과 연극의 수명은 줄어들게 되고, 작가들은 상실된 기억을 되짚어보려는 신경강박증에 빠지고 만다. 앞으로 내딛는 발걸음에 고개를 뒤로 젖히며 시선을 돌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공연과 작가 그리고 비평을 포함해서, 오늘날 한국 연극은 중증의 기억상실증으로 고통받고 있다. 보이는 것은 뒤가 아니라 앞뿐이다. 그러나 앞은 멈추어 있지 않고 나아갈 뿐이다. 그럴수록 나아간다고 믿는다. 의지와 관계없이 몸은 휩쓸려 나아간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전체적으로 휩쓸려 앞으로 가는 한국 연극의 강박증을 문제삼고, 그것에 짓눌려 있는 몸의 현상을 말하고자 씌어졌다.
연극에는 정복해야 할, 도달해야 할 고지가 없고 흩날리는 깃발이 없으며 결정적인 승리라는 것이 없다. 길 위의 나그네가 목적지에 도달했다고 믿는 순간 길은 사라지고 없다. 있다면 그것은 마음이 흐트러진 이들이 이르렀다고 믿는 길에 대한 허명이며, 자신에 대한 착각일 뿐이다. 필자가 이 책을 위하여 쓴 글의 제목을 ‘연극의 비밀’이라고 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필자가 글을 쓰는 것은 연극의 비밀을 지키기 위하여 미로 속을 헤매는 나그네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그 동안 산속의 길은 얼마나 황홀했던가. 미쳐버리고 싶었던 그 길들이며, 그 길들 위에 길로 누워 포개지고 싶었던 길들의 유혹이며, 앞으로 가기 싫어 멈추어 자꾸만 뒤돌아보았던 길들의 추억은 내 안에 고스란히 자리잡고 있다. 그 황홀했던 체험들은 견딜 수 없는 우울의 한 겹을 덜어내주었다.
– 1998년 2월, 안치운
머리말
제1부
연극의 대중화와 비평의 제도 / 연극 비평, 사유할 권리 / 몸의 연극 / 포르노 연극과 연극의 자율성 / ……그리고 지금, 당신의 직업은? / 아르토와 한국 연극, 그 위험한 풍경
제2부
영월로 가는 옛길: 이강백론 / 몸과 숨의 집: 김광림론 / 몸에서 몸으로: 이병훈론 / 연극, 그 불온한 꿈과 행위: 무세중론 / 몸의 상처와 기억의 소리: 심재찬과 강월도론 / 몸과 사물의 연극: 필립 장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