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퍼큐비클

문학과지성 시인선 612

백가경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25년 3월 25일 | ISBN 9788932043548

사양 변형판 128x205 · 228쪽 | 가격 12,000원

책소개

“이것은 놀이가 아닙니다
여기서는 지금만 있을 뿐입니다
오직 한 번만 있을 뿐입니다”

출구 없이 확장되는 공간이 만들어낸 현실 조정 시간
업그레이드된 미래적 시어를 설계하는 백가경의 첫번째 시집

나의 모호한 ‘시 찾기’ 과정에서 단 한 가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미스터리함, 기이하고 으스스함 그 자체다. 그 감각만큼은 분명하게 내 것이다. 나는 이 힌트를 쥐고서 시를 찾기 위해 프릭 쇼를 열었던 오래된 서커스 천막, 이름 모를 건축가가 설계한 사형 집행소, 바퀴벌레들이 춤추는 지하의 클럽, 인간의 멸망을 기억하는 바이러스의 숙주, 아이도 노인도 거부하여 언젠간 모두의 입장을 금할 것 같은 으리으리한 펜션 등을 머릿속에서 짓고 부수고 다시 건축하여 그 안에 들어가본다. [……] 내가 초대한 기이하고 으스스한 이곳이 당신들에게 조금 재미있기를 혹은 조금 웃기기를 그것도 아니면 조금 막막하기를, 아주 잠깐이라도 좋으니 조금 살 만해지기를 (가장) 바란다.
―‘시 찾기 노트’(『시 보다 2023』, 문학과지성사, 2023, pp. 124~25) 에서

명징한 언어로 현실 너머 다른 차원의 세계를 공고하게 구축하고 확장해나가는 백가경의 첫번째 시집 『하이퍼큐비클』이 문학과지성 시인선 612번으로 출간되었다. 백가경은 202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후 『시 보다 2023』에 작품이 수록되는 등 문단과 독자들의 주목을 받아왔다. “미학적 자유로움은 정확함 위에서 탄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아름답고도 투명하게 상기시켜주는 시인”(김현‧김행숙‧박준 시인, 2022 『경향신문』 신춘문예 심사평)이라는 평처럼, 그는 잘 짜여진 형식과 구조 위에 지극히 현실적인 현상을 자유롭게 구축해 새로운 차원의 문을 열어 보인다.
시집의 제목인 “하이퍼큐비클”은 정사각형의 모든 변을 시공간을 초월해 n차원으로 확장한 다포체 하이퍼큐브, 사무실 등 공간 속에 구역을 구분 짓기 위해 설치한 칸막이를 뜻하는 큐비클로 이루어진 조어로,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현실의 벽과 인간을 가두고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출구 없음’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총 4부로 구성된 53편의 시 속에서 비극적 풍경은 미래적인 방향으로 바뀌고, 기존의 관습들은 본 적 없는 형태로 부서지고 재탄생하는 장면이 하나의 놀이처럼 펼쳐진다. 슬픔과 고통으로 가득 찬 현실을 놀이로 전복시키면서 놀이의 “일원이 되지 않고 즐거워”(「관성에 젖은 사람이 반복적인 일상과 구획에서 벗어나기 위한 공포스러운 시도」)지는 익숙하고 낯선 세계, 한번 빠지면 헤어날 수 없는 『하이퍼큐비클』 세계가 우리 곁에 도착했다.


“당신이 하는 모든 것이 아무 소용이 없다면
무엇을 할 건가요?”
―트랜스 상태의 노동자 차원에서

콘크리트와 철골구조에 가로막혀 있습니다

네 면의 벽에 가로막혀 있습니다

공기에 가로막혀 있습니다

[……]

암흑에 가로막혀 있습니다

언어에 가로막혀 있습니다
―「옥탈」 부분

이 시집에는 생존을 위해 매일 업무 공간에 갇혀 비슷한 일을 반복해야 하는 노동자가 등장한다. 「조난당한 큐비클과 트랜스패런트칼라」의 주석에 “이곳에서 일하는 자는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으며 돌이킬 수 없는, 과로 상태다”라는 구절은 ‘시인의 말’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 시에 등장하는 화이트칼라의 진화 버전인 ‘트랜스패런트칼라(TC)’는 시공간을 초월해 일하다 일과 일이 아닌 것조차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곳은 현실이 아닌 하이퍼큐브가 확장한 새로운 차원이고, TC는 멸종 위기 개체이며, 화자는 TC를 “몰카”로 관찰하고 관객에게 중계하는 중이다. 파티션에 갇혀 “오류와 오해”를 제거하기 위해 “손가락을 가만두지 못하”는 사무직 노동자가 시 속 차원에서는 보기 드문 인물처럼 그려지는 것이다. “딸칵” 하는 소리가 시 전반에 울려퍼지며 “혈중 산소가 적”어지고 “시간을 가늠할 수 없”을 때까지 개미처럼 일하는 모습은 마치 오늘날 현대인을 비유하는 듯 보이지만, 백가경의 세계에서는 재미난 에피소드에 불과하다.
출구가 없는 곳에서 노동자의 양상이 변모하다 끝내 희귀한 사건이 되는 일은 「사이파이 사일런스관 애장품 가이드 투어」에도 드러난다. 이 시의 화자는 기원전 3세기 철학자인 ‘사이파이 사일런스’에 대한 전시물을 관객에게 설명해주는 가이드다. 그에 따르면 사이파이는 생전 “욕조를 만들다 관을 만들고 관으로 만들던 것을 욕조로 만”들던 한 석공에 대한 연구에 탐닉했는데, 그 석공은 “‘평생 밥 먹고 잠자는 시간만 빼고’ 욕조와 관을 깎”다가 일명 “교차 관–욕조”에 따뜻한 물을 받아 누운 채 “행복한 최후를” 맞이한다. 반복되는 삶 속 자유를 잃고 쓰러져가는 우리에게 탈출구는 죽음뿐이라는 현실을 상기시키는 대목처럼 보인다. 하지만 시 속에서 이것은 전시관에서 들려주는 아득한 과거의 일이며, “시간으로 따지면 거의 찰나의 시간 동안 지구형 행성의 ‘고대 인류의 삶’을”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에 불과하다. 그러니 오작동이 생겨 죽음 또는 낯선 차원에 이르더라도 “코드를 꽂는 정도의 시간”만큼만 “여유를 갖고 기다”리면 된다.
시집에서 말하는 노동자의 공간이 꼭 파티션으로 채워진 사무실이나 방에만 한정되는 것은 아니다. 「아이디어 라이더」는 택배 배송 기사의 작업 현장을 박스에서 기어 나온 “벌레 하나”가 묘사하는 방식으로 전개되며, 결국 과로로 쓰러진 노동자가 영면하는 곳은 택배 수신처 문 앞 “박스 테이프를 떼다 만 종이 박스” 안이다. “곧 벽돌공을 그만 둘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으로 버티며 하루하루 벽돌을 쌓던 벽돌공은 어느 날 그것이 스스로 쌓아 올린 “벽이었다”(「벽돌공의 벽돌벽」) 는 걸 문득 깨닫고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과거 전태일이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속았다는 기분 든 적 없어? 좋은 밤 보내길」)라고 외치던 비극적인 시대가 TC와 석공, 택배 기사, 벽돌공의 이야기와 별반 다를 것 없다는 인식을 하는 순간, 백가경의 시적 공간은 “복제된 현실이 눈앞에 있다는 인식은 작은 틈을 만”들고, “벌어진 틈새를 비집고 나온 무언가가 시공간을 비틀고, 닮은 모습만큼 자리를 넓”(p. 215)힌다.


“나쁜 소식은 비행기가 고장이 나서 우리가 곧 낙하한다는 것
좋은 소식은 바닥없는 세계에 진입했다는 것”
―계급 구조와 약자의 차원에서

『하이퍼큐비클』 전반에 짙게 드리운 죽음의 기운은 이처럼 개선되지 않고 점점 더 곪아가는 자본주의 시스템과 그에 따라 양극단으로 나눠지는 계급 구조에서 기인한다. [……] 백가경은 깊이를 잴 수 없는 겹겹의 지층을 낱낱이 살피며 시간과 공간, 차원을 넘나드는 고고학적 탐구로 인간을 발굴한다. 새삼스럽지만 낯설게, 인간이어야 하는 인간을 칸막이 밖으로 구출하는 그의 시는 닫힌 세계의 출구를 연다.
―소유정, 해설 「입체 전시 ‘하이퍼큐비클’을 위한 서문」(p. 225)에서

자본주의 시스템이 낳은 계급 구조는 노동자의 계층 상승을 어렵게 하고, 태어날 때부터 성별이 정해져 그에 따른 시스템이 고착화된 세계 속 인간은 성차별 문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따라서 하이퍼큐비클 속 인간은 지층을 이루는 퇴적물의 유해일 뿐 그 이상이 될 수 없다”(해설, p. 222). 백가경은 사회적 문제를 도표, 그래프, 기둥, 화살표 등에 적용해 시각화시키고 현실을 변형된 차원으로 구현하며 복잡해진 형식에 대한 이해를 돕는다.
2022년 신당역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한 「신당역 사망 사고 관련 재발 방지 대책 아이디어 제출 양식」은 연번, 내용, 기대 효과, 비고를 정리한 4열 3행의 표로 이루어져 있다. 이 시는 마치 누군가에게 보고하기 위해 만든 절차적 행위처럼 보인다. 그 내용이 국민적 관심이 빨리 사그라들기만을 바라는 교통 공사 “영업 사업소” 직원들의 마음처럼 직관적이고 터무니없기 때문이다. “얘들아 행복한 해피를 봐 행복해” 행의 ‘기대 효과’는 “슬픔은 주머니에 넣”는 것이고, “유능한 공무원의 죽음 앞에서 유능한 아이디어 하나씩 유능하게 내주세요 뽑히면 뭐 줌”이 ‘비고’란을 채우고 있다. 젠더적 갈등으로까지 번졌던 사건임에도 뚜렷하게 개선된 점이 없는 작금의 현실을 고발하는 음성처럼 들린다.
한편 「기둥 세우기」에는 절취선으로 나뉜 세 개의 칸이 등장한다. 첫번째 칸은 프랑수아 2세의 부인이자 여왕인 메리 스튜어트, 두번째 칸은 예술가 차학경의 생애가 담겨 있고, 세번째 칸은 비어 있다. 권력 다툼에서 패한 후 단두대에서 “십자가와 기도서, 묵주 두 개를 허리춤에 찬 채”로, 남편의 작업실을 찾아가다 “건물 관리인에게 강간과 살해를 당”한로 채로 죽음을 맞이한 비극적인 생애들이 각 칸을 채우고 있다. 이제 화자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사항은 “세번째 칸을 채우고 절취선을 따라 자”르는 것이다. 그다음에 “기둥의 끝에 내 사지를 묶”어 “고문하”고 “고통을 주”고 “(세 개의 기둥을) 여행하”도록 권하면서 이 이야기가 유별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약자에 속한 모두의 이야기가 될 수 있음을 암시하고 위로하는 듯하다.

여자아이
남자아이
허리가 굽은 노인
나이 든 여자
다리를 다친 부랑자
팔을 잃은 소녀
어제 태어난 아기
죽어가는 아기
―「크리스마스」 부분

『하이퍼큐비클』은 사회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약자일 수밖에 없는 이들을 여러 번 호명한다. 고용주가 아닌 노동자 역시 갑을 관계로 볼 수 있을 터. 계층을 허물거나 관계를 전복하기 어렵다면 결국 우리 앞에는 비극적 결말이 준비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백가경은 “암시하기 위해” “생존하기 위해” 지치는 법 없이 3차원의 공간을 “걷는다”. 곧이어 “날씨가 날씨이기를 멈추게 하고” “세상이 세상이기를 멈추게 하고” “빵이 빵이기를 멈추게 하는” 고차원의 순간으로 시공간을 끊임없이 비튼다. “그런 시를 데려오리라”(「Dummy No. 1―캔버스 위 15개의 구멍, 다회성 퍼포먼스 영상 「환촉」(60min), 40x164cm」)라며 걸어가는 단단한 다짐은 지금도 계속 확장하며 우리의 세계로 진입하고 있다. “회전 때마다 비틀렸던 발목이 한순간 똑바로 서는 기쁨을 만끽하며!”(「표류하는 세계의 극장」).


■ 책 속으로

기타리스트의 연주는 위층까지 증폭되었고 이를 듣던 소설가는 트라우마적 층간 소음을 떠올렸다 멜로디가 손에 익을 때까지 백 번 천 번 간이침대에 걸터앉아 연습하는 사람의 방 아래 살던 소설가는 아름다운 멜로디도 반복되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표류하는 세계의 극장」 부분

얇게 새어 나오는 빛

네 콧등에서
내 이마로 꽂힌다 빛은
눈 위에서 산발하고

홉뜬 눈
나는 너를 바라보아야 한다
흰 개 앞에 있는 널

라펠 두 비드
뛰어드는 널
―「따뜻한 한계」 부분

사람들 코끼리와 광대가 서 있는 무대로 돈을 던진다
광대는 모르지만 코끼리는 안다 먹을 수 없다는 것이 분
명하다 광대는 두리번거리고 떨어진 돈을 주머니에 주섬
주섬 구겨 넣는다 광대의 주머니에는 작은 구멍이 나 있
고 광대가 돌 때마다 주머니에서 돈이 후드득 떨어진다

광대는 회전하며 떨어지는 돈을 본다

후드득
내가 자빠지는 것보다 재미있어?
광대는 떨어지는 돈을 흉내 내며
자빠진다
오줌이 찔끔
―「비질」 부분

모 대학 연구소는 도시의 불투수 면적이 지구의 물순환을 억제한다고 발표했습니다 (다른 창 켜기) 말하는 것만으로 위로받는다는 걸 그때는 왜 몰랐을까 (다른 창 켜기) 30년 뒤 전 세계인의 80퍼센트 이상이 도시에 살게 될 것입니다 (다른 창 켜기) 친구는 일정 데시벨 이상의 소음을 확인하고 신청인들에게 고통스러우셨겠네요 하고 말했대 신청인들은 친구에게 다음 단계의 조치를 부탁하고 친구는 꼭 그러겠다고 말했대 신청인들은 고마운 마음에 친구의 두 손을 움켜쥐려 팔을 뻗곤 했는데 친구는 마다하고 조용히 현장을 빠져나왔대 소음을 일으킨 원인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지 친구는 소음을 만들어내는 자를 기필코 찾았대
―「다른 창을 켤 수 있을까?」 부분

미래를 부풀리는 확성기처럼 환청은
계속 발음합니다

감옥도 열쇠만 있다면 집이 됩니다 200에 20 선생님 자본주의 떨이로 들여가세요 크고 확실한 불행
방법은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건강한 귀는 닫는 편이 좋습니다
―「오블로모프」 부분


■ 시인의 말

큐비클은 이제 지층을 만들 수 있게 됐다. 본래 인간 과포화 시대에 발명됐으나 현재의 하이퍼모델은 5차원에서 번식한다. 이곳에서 일하는 자는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으며 돌이킬 수 없는, 과로 상태다.

2025년 3월
백가경

목차

■ 차례

시인의 말

1부
하이퍼큐브에 관한 기록 | test 10 | 유타나시아코스터 | 플라스틱폐허애호회에 부치는 작자 미상 자료들 | Fucking Glorious Halt | 관성에 젖은 사람이 반복적인 일상과 구획에서 벗어나기 위한 공포스러운 시도 | 옥탈 | 파멸학 달력 | 조난당한 큐비클과 트랜스패런트칼라 | 딸칵 | 호텔 엑셀시오르 | 사이파이 사일런스관 애장품 가이드 투어 | 따뜻한 한계 | 에델바이스 작은 뜰 펜션 | 임시 정원

2부
표류하는 세계의 극장 | 『관내 여행자』 | 타이틀 매치 | 기둥 세우기 | 비질 | 보이지 않는 영사기사를 위한 매뉴얼 | 9번 집에서 쓴 영화 「비바리움」에 대한 리뷰 | 영화 「보이지 않는 영사기사」 | 마지막 문제 | 서울시립미술관에서 | 등나무 의자가 있는 정물 | 신과 미술관 앞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3부
신당역 사망 사고 관련 재발 방지 대책 아이디어 제출 양식 | 1460은 걷고 있다 | 『인간실격』을 읽는 당신 앞에서 | 결벽증과 미화원 | 아래를 보시오 | 테라 인코그니타의 개 | 공원과 공장 | Cul-De-Sac | 아이디어 라이더 | Dummy No. 1 | 크리스마스 | 다른 창을 켤 수 있을까?

4부
벽돌공의 벽돌벽 | 환상 솔레노이드 | 앤트힐 아트 | 토킹 큐어 | 매소루 | 오블로모프 | 지상의 양식을 읽는 주말 | 불우한 삶을 산 적 없는 시인 | 사이파이 비문에 넣을 간단한 메모 | 비잉 | 리미널 스페이스 | 아타카 | 이곳을 갈아입어야 할 것 같아 | 속았다는 기분 든 적 없어? 좋은 밤 보내길

해설
입체 전시 ‘하이퍼큐비클’을 위한 서문·소유정

작가 소개

백가경 지음

시인 백가경은 2022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독자 리뷰

독자 리뷰 남기기

9 + 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