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일지
“참으로 오래 싸워야 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영영”
―김기태 김멜라 김복희 김이설 김형중 문보영 박솔뫼 서효인 소영현 손보미 송희지 이미상
이장욱 임유영 황정은―
■ 문학과사회 하이픈: 탄핵-일지(본문 발췌)
비상계엄이 선포된 12월 3일부터 1월 27일까지,
고이고 부글대다 마르며 다시 끓어 넘치는 모든 과정에 대한 사유와 감각의 기록
「완벽하지 못한 날들」 _김기태
서울 서부지법에 침입했던 이십대 청년이 유치장에서 작성한 수기가 1월 21일에 보도되었다. 그는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고. ‘빼앗긴 주권을 되찾아 다시 시민으로 거듭나고자’ 담벼락을 넘었다고 주장했다. 1월 26일에는 누적 수강생 백만 명이 넘는 한국사 강사 전한길 씨가 부정선거 가능성과 거야 폭정을 지적하며, ‘행동하는 양심’을 강조하는 입장문을 게시했다. 글의 말미에서 그는 “슬픔도 노여움도 없이 살아가는 자는 조국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라는 네크라소프의 시구를 인용했다. 이 시구는 40년 전에도 인용된 적 있다. 당시 대학생이었던 유시민 씨는 전두환 정권의 사법부에 제출한 ‘항소이유서’를 같은 인용으로 끝맺었다. 이른바 ‘서울대 민간인 감금 촉행 고문 사건’과 관련해서다. 그 오류와 업보에도 불구하고 항소이유서 자체는 군부독재에 대한 고발로서 널리 회자되었고, 네크라소프의 시구도 덩달아 유명해졌다. 그리고 40년 후, 이는 군부를 동원해 국회 해산을 꽤했던 계엄령을 계몽령으로 윤색하는 데에 재인용된다. 혼란하다. (pp. 12~13)
「계엄 파편」 _김멜라
계엄이 선포되고 우여곡절 끝에 해제되었던 날, 늦은 새벽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엄마는 그 소식을 듣고 곧장 국회 앞으로 가려 했었다고 말했다. 나는 또다시 그런 일이 생겨도 엄마가 가선 안 된다고 만류했다. 추운데 차도 없이 할머니 혼자 그 밤에 어디를 가느냐고. 엄마는 택시를 타고 가면 된다며 이번에도 빨리 국회로 달려갔던 사람들 덕분에 이만큼 막을 수 있었다고 했다. 나는 과거 시위 때 내가 겪었던 크고 작은 폭력 사태가 떠오르며 순간 엄마가 곤봉에 맞아 피 흘리는 망상이 가득 찼다. 옅은 공황 상태에 빠진 나는 급기야 나 자신을 인질 삼아 엄마를 겁박했다. 그럼 내가 먼저 달려가겠다고, 내가 앞장서 담장을 넘고 저것들을 가만 안 돌 테니(실제로는 이보다 더 과격한 표현을 썼다) 엄마는 집에 계시라고 했다. 엄마는 잠시 아무 말이 없더니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나중에 통화하자며 전화를 끊었다. (p. 25)
「산통 깨기(記)」 _김복희
2024. 12. 23. 월요일. 서울. 굉장히 추위.아침 뉴스 보도로 트랙터가 남태령을 넘어 용산에 당도하였음을 보았다. 날이 무척 찼는데.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에 소액을 후원하는 것으로 마음의 빚을 달랬다. 남태령에 모인 분들에게 큰 빚을 졌다. 코를 풀 때마다 코피가 나는 추위에. 그러나 물은 안 먹히고 커피만 들이켜는 중. 이 부담감을 불쾌하다고 감각하는 사람들도 있겠지?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헌재의 브리핑에서 윤이 서류를 받지 않아도 송달의 효력이 발생함으로 간주한단다. 그래, 열아홉 번이나 서류를 안 받는 건 말도 안 된다. 법 앞에 모두 평등함.
학기 말 성적 처리, 시와 산문 원고가 수 편. 모두 1월 중 마쳐야 하는데 완전히 손에 잡히지 않아 놓고 있었다. 미치겠네.하지만 안 미치겠지. 마음이 다급하다. 이 시국에 시를?이라는 질문은 이제 그만뒀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시국 혹은 국면, 뭐든 사태사, 세상이, 시에 어떻게 녹아 나올 것인가 이것이 문제. 내 한계가 드러나겠지. 그러나 이것이 시의 한계는 아닐 것이고. 시가 나보다 나은 존재임을 믿는 수밖에 없겠지. 뉴스를 끌 수가 없다. 김수영을 생각하자. 일단 한 과목 성적 처리를 마쳤다. (pp. 35~36)
「2024년 12월, 2025년 1월의 메모」 _김이설
2025년 1월 19일계엄 발표 47일 만에 헌정사상 첫 현직 대통령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그리고, 서울 서부지방법원 점거 폭동. 이런 장면이나 폭동이라는 단어는 영화 혹은 다른 나라에서나 벌어지는 줄 알았다. 윤석열 구속영장 발부에 대한 일부 극우·극성 지지자들의 불법 폭력 행동으로 법원 외벽 파괴 및 내/외부 시설물을 파손한 행위로 아흔여 명의 경찰 및 민간인까지 부상을 입었다.
폭동이 벌어지는 장면을 실시간으로 본다는 것은 굉장히 공포스러운 경험이었다. 계엄령 발표하던 날 총 들었던 군인들의 모습이 떠오르고, 저렇게 미쳐 날뛰는 인간들과 우리가 같은 세
계의 한 시민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모멸감과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진정제를 먹었고.
혐오를 혐오하는 것은 정당한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했다. 저들은 우리를 이해하지 않는데 우리에게는 저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대화하기 위해 애쓰는 과정이 필요한 걸까. 유의미하
고 가치로운가. 저들은 노력을 안 하는데 왜 우리는 노력하는가. 저들은 안 참는데 왜 우리는 참는가. 저들은 인간이길 포기하고도 당당한데 왜 우리는 인간처럼 살기 위해 조심하고 사려하고 걱정하고 염려하는가. (p. 52)
「좌파적 우울」 _김형중
존 오스틴의 이분법에 따를 때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라는 문장은 ‘수행적 발화’인지 ‘사실적 발화’인지 모호한데 의미상으로는 수행적인 문장이 서술상으로 사실적인 문장으로 기록된다. 말하자면 저 문장들은 (이 헌법과 함께 이제부터) 대한민국의 정체는 민주공화국‘이어야 한다’는 명령법을 평서법으로 기술한다. 제11조 제1항의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라든가 제10조의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라는 문장도 마찬가지다. 알다시피 모든 국민이 법 앞에 평등했던 적은 유사 이래 한 번도 없었고 , 모든 국민이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진 적도 물론 없었다. 그러나 저 문장들은 실현되어야 할 그 가치들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발화함으로써 법을 정립하고 국가를 정초한다. 이하 모든 법률은 바로 저 수행문들이 지시하는 바를 수행하기 위해 입법되고 수정되고 변경된다. 말하자면 헌법이란 자크 비데가 말한 ‘선전제’와 같다(『마르크스와 함께 푸코를—메타구조란 무엇인가』, 배세진 옮김, 생각의힘, 2021). 마치 언젠가 실현되어야 할 자유와 평등에 관한 계약이, 이미 성립된 적이 있었던 것처럼 선언하기, 사후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계약을 이미 체결된 것처럼 전제하기. 공화국의 이상은 그런 식의 과거 참조적 허구 위에서만 성립한다. 그러나 그와 같은 허구의 위력은 어마어마해서 그것이 부인된다면 공화국 전체의 법률과 이상과 가치가 그 존립 근거를 상실하게 되는 사태를 초래한다. 헌법을 부정하는 내란죄의 형량이 사형과 무기징역밖에 없는 이유다. 요컨대 ‘헌법재판소를 파괴하라’라는 구호는 1987년 체제 성립 이래 가장 반국가적인 구호다. 따라서 국가를 수호하기 위해 국민저항권을 발동했다는 저들이 가장 반국가적인 세력이라는 것은 명백하다. (pp. 63~64)
「앤아버의 나무들과 우체국 그리고 실어증」 _문보영
오전에 소식을 듣고, 내내 뉴스를 시청했다. 한국으로 새벽 1시경, 국회는 본회의를 열어 계엄 해제 요구 결의안을 가결했다. 소식을 접하고 한 시간 뒤, 수업을 들으러 갔다. 친구들은 “South Korea, martial law?” 하고 물었다. ‘한국이 왜 갑자기 계엄령’ 대체로 어처구니없다는 뉘앙스였다. 그들 중 한 명이 내게 다가와, “그래서 넌 괜찮아” 하고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대화를 이어갈 힘이 없었다. 그날 하루 동안, martial law를 martial arts로 여러 번 잘못 말할 뻔했기 때문에, 입을 다물었다. (대통령이 무술을 발표했습니다,라니.) 수업에 가고 싶지 않았고, 발표는 더더욱 하고 싶지 않았다. 한국은 새벽이었지만 가족과 친구들은 모두 깨어 있었고 , 그들과 통화하고 싶었다.
하지만 한 가지 말하고 싶었다. 계엄 포고령에 무서운 단어가 있다고. ‘처단’이라는 단어인데, 그 단어는 영어를 사용하는 매체에서 대부분 ‘punishment’라고 번역되었다고. 그러나 ‘처단’은 ‘punishment’가 아니다. 교사가 학생을 교실 뒤편으로 보내 손을 들게 하는 것이 punishment가 아닌가? 처단은 죽음을 연상시키는 단어라고. 피가 묻은 단어라고. 그러니 execution이 더 맞다고. 혹은 더한 단어가 필요하다고. 번역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싶었다.
목소리가 사라졌기에 말할 수 없었다. (pp. 71~72)
「나는 뭔가 말을 할 거야」 _박솔뫼
가까운 주변 사람들 중에 농사를 짓는 사람은 없지만 부모님 모두 전남이 고향이고 어릴 때 시골에 놀러 가면 마주치는 어른들은 모두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카메라에 잡히는 전국농민회총연맹(전농)이나 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전여농)의 얼굴들은 왜인지 모두 어릴 때부터 본 얼굴들 같다는 생각을 했다. 농민들의 시위를 보다 어릴 때 할머니 집 기둥에 걸려 있던 양곡협회 팻말 같은 것이나 오래된 흑백사진 속 농군학교 현수막 같은 것을 떠올리다 보면 백남기 농민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진다 아주 빠르게. 2015년 시위에서는 아니 성인이 되고 참여한 대규모 시위에서는 늘 물대포를 피해 다녔던 기억이 있는데 모두가 아는 것처럼 그것으로 백남기 농민은 돌아가셨다. 나는 여기까지 썼을 때 당시 기사 사진이 떠오르면서도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 밀어내고 싶어서 애쓰게 된다. 짧게 사진을 설명했다가 다시 지우고 넘어간다. 그러고 보면 여기까지 쓰는 데도 대통령의 이름을 쓰지 않기 위해 몇 줄을 지웠다. 기사 사진을 설명하고 싶지 않은 마음과 대통령의 이름을 글자로도 쓰고 싶지 않은 마음은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쓰는 내 안에서 벌어지는 힘을 쓰고 당기는 움직임은 결국 내가 무언가를 지키고 싶은가 하는 마음으로 향하는 것 같다. 그러나 대통령의 이름을 쓰지 않는 것으로 무엇을 지키고자 하는 것일까. 백 번쯤 외치고 백 번쯤 쓰는 것이 나을 것이다. (pp. 82~83)
「교차 기록」 _서효인
5월 17일저녁 7시 40분, 임시 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 전국 확대안이 8분 만에 의결되었다. 신군부는 전국 대학에 계엄군을 투입했다. 자정 넘어 계엄군은 경장갑차 여덟 대와 전차 네 대를 앞세워 국회를 봉쇄하였다. 임시국회는 열리지 못했고 계엄은 당연히 해제되지 않았다. 계엄포고령 10호가 발령됐고 김대중 등의 주요 정치인과 학생운동 수뇌부가 체포되었다. 그날 밤 광주에 7공수여단 2개 대대가 즉각 배치되었다.
12월 4일
문밖에 계엄군을 둔 상태로 국회는 계엄 해제를 의결했다. 그러나 대통령은 계엄 해제를 발표하지 않았고 많은 사람이 뜬눈으로 밤을 새운 듯했다. 두어 시간 자고 일어나 출근 준비를 했다. 아이들은 학교에 갔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그날따라 자유로는 평화로웠다. 전날의 내란 시도가 실패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디로 향했을까? 자유로와 강변북로를 지나 용산으로 갔을까? 여의도? 광화문? 그곳에서 계엄군을 맞닥뜨렸을까? 나에게는 딸이 둘이나 있는데?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내 머릿속 계엄군은 곤봉을 들고 사람을 내리찍는 이미지로 남아 있다. 매년 봄 금남로와 충장로에서, 아니 동네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사진이었다. 어젯밤 군인들의 복장은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국회에 모인 사람들의 머리를 개머리판으로 타격하지 않았다. 사람들을 길바닥에 굴리지 않았다. 트럭에 태워 데려가지 않았다. 총으로 쏴 죽이지 않았다. 그리하지 못하였다. 만약 그렇게 했다면 우리는 서울 시내 곳곳에서 많이 잡혀가고 또 많이 죽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사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 저녁을 먹으며 딸아이가 말했다. 친구 아빠는 어제 여의도에 갔대. 아니, 여긴 파주인데? 대단하시다. 아이가 특유의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아빠는 왜 가지 않았죠? 용기가 없었나요? 그날 처음으로 웃었다. (pp. 86~87)
「거울 방에서: 저항의 역미러링이 말해주는 것」 _소영현
계엄령이 선포되던 날, 국회에 갈 수 있는 거리에 있었는데도 그곳에 가지 않아서 부끄러웠던 마음으로(여채현, 21, 대학생), 밤새 남태령역의 대치 상황을 라이브 방송으로 보면서 힘들어진 마음으로(이은비, 43, 킨츠기 공예가), 그곳에 친구가 있다는 말에 ‘친구에게 핫팩을 갖다주겠다’는 마음으로(조단원, 32, 개발자) 그곳에 가서 ‘함께’ 길을 열었다. 그런 마음들이 ‘말벌 아저씨처럼’ 저절로 몸을 움직이게[정금(활동명), 40, 콜센터 상담원] 했다는 것이다. 이들의 경험이 그곳에 있던 이들에게, 이 사회의 소수자들에게, 더 나은 공동체를 꿈꾸는 이들에게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사회의 진전에 대한 희망을 그렇게 불어넣었다. 2016년의 광화문광장과는 다른 비교 기준이 설정되었고, 광장 정치에 대한 논의의 중심축은 꽤 수정되어야 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페미니즘 대중화 이후 교착 상태에 처했던 연대와 연결에 대한 새로운 상상과, 교차적 정체성을 둘러싼 구체적 논의가 가능해졌다. (pp. 106~107)
「힘」 _손보미
놀랍게도(이 글을 쓰면서도 정말 놀랍기만 하다), 가까스로 계엄이 해제된 걸 제외하면, 이 진행자의 말 중 들어맞은 것은 하나도 없다. 계엄을 해제할 때 국민의힘 소속 국회의원 대부분은 참석하지 않았다. 진행자는 “진영이고 나발이고 없다”라고 말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탄핵안을 소추할 때 국민의힘 소속 국회의원들은 나가버렸다. 그로도 모자라 한 달 후, 체포를 거부하며 관저에 숨어 있는 윤석열을 응원하고, 찾아가고, 옹호하는 발언을 했다. 어차피 1년만 지나면 사람들은 이런 일이 있었는지 잊어버릴 거라는 말도 했다. 심지어 ‘백골단’이라는 말을 입에 올렸다. 군인 간부들은 상관의 머리에 총구를 겨누는 대신 그냥 지시에 따랐다. 나중에 밝혀진바, 윤석열 일당은 아주 오랫동안 회의에 회의를 거듭하며 끔찍한 계획을 세웠다. 윤석열은 결국 감옥에 들어갔지만 그렇게 되기까지 우리는 너무 많은 고통과 상처에 노출되었다. (p. 113)
「계속 쓰기」 _송희지
지난 12월과 1월에 나는 한밤의 위헌적 계엄으로부터 비롯된 수십 겹의 벽에 밀렸다가, 연대와 타인의 선의에 힘입어 잠시간 버텼다가, 또 힘없이 밀려나기를 반복했다. 그러는 동안 무엇도 쓰지 못했고, 쓰기의 근육을 차츰 잃어가는 듯한 느낌에 휩싸여 종종 무력해졌다. 한때 나는 계엄을 ‘돌파하는’ 문학을 상상했다. 무력함, 분노, 공허함, 염려 등의 감정을 극복하고 현실을 날카롭게 진단할 뿐 아니라 미래를 타진해보기까지 하는 문학작품, 그런 언어, 그런 형식, 그런 목소리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겼다. 즉 특정한 종류의 문학을 탈출구로 상정하며 그에 몸 맞추어 벽을 통과할 궁리를 했다. 그러나 이것은 허상을 좇는 일이다. 앞서 쓰기의 힘을 간과한 채 ‘어떻게 쓸 것인가’를 먼저 생각했던 것과 다를 바 없는 착오다. 쓰는 이에게(나아가 읽는 이에게도) 문학이란 돌파의 부품이 아니라, 돌파를 시도하는 과정 자체다. 어쩌면 벽에 뚫려 있겠다고 여겨지는 어떤 형태의 구멍보다 벽에 의해 하염없이 밀려나는 일, 잠깐이라도 밀리지 않으려 애쓰는 일, 그 과정에서 쓰이는 복잡하고 세세한 내 몸의 부분들을 느끼고 알아가는 일, 벽 너머를 상상하며 취해보는 무수한 종류의 포즈, 그 과정에서 저도 모르게 뱉는 신음 따위가 문학에 더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pp. 135~36)
「○○도 ○○도 없는―구멍 뚫린 문형과 캐치프레이즈-화되는 작가의 명언」 _이미상
그날의 일기를 옮겨 적는다.“이제는 찍어 누를 시간. 여야정 협의체로 모양새를 좋게 하고 분열을 최소화하려던 수는 물 건너가고. 계엄은 이견이 있을 수 없는 최후의 보루여야 하는데 이 상식이 깨지면 이제 우리는 항구적인 정신적 내란 상태에서 살아가야 하는 거 아닌지. 국민의힘 지지자는 존중할 수 있어도 계엄 옹호를 어떻게 받을 수 있겠냐. 상식을 되돌리기 위하여 찍어 누를 수밖에 없게 되었고 그것이 낳을 깊은 상처와 분열과 향후 수년은 이어질 음모론이 끔찍하다. 아마도 기필코 ‘우리’가 대승을 거두게 될 테지만 승리가 클수록 반대편의 원념도 깊을 테니 내가 바란 것은 뜨뜻미지근한 승리, 건조한 처리—‘이제는 헌법재판소의 시간’—였는데.”
글을 쓰는 시점에서—그렇다, 몰아 쓰는 일기다—어제, 윤석열 지지자들이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 문형배의 집 앞으로 몰려가 시위를 벌였다. 탄핵심판이 열리면 상황이 정리되리라고 순진하게 믿었던 것이 부끄럽다. 그럼에도 초기에 불법 계엄은 이견이 있을 수 없는 헌정 질서 파괴 행위라는 것이 우리의 머리에 상식으로 뿌리내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고, 어쩌면 그것이 계엄보다 민주주의를 흰개미처럼 조금씩 오래도록 꾸준히 갉아먹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두고두고 화난다. (pp. 145~46)
「계엄 일기」 _이장욱
2025년 1월 22일—음울한 전망일기를 마무리하는 나의 손에는 어쩐지 힘이 없다.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문장들이 무기력하게 느껴진다. 그냥 기분 탓만은 아닌 것 같다. 탄핵이 인용되더라도 우리는 ‘계엄’으로부터 ‘자유’를 구출하는 데 지극한 곤란을 겪을 것이다. 향후 이삼십 년 동안 한국의 극우는 번성할 것이다. 그것은 거의 불가피할 것이다. 모든 상황이 그렇게 말하고 있다. 코호트 이론을 빌리지 않더라도, 지난 몇 달의 과정은 일종의 ‘세대 체험’으로 작동할 것이다. 어쩌면 계엄 대통령의 진정한 죄는 바로 이 지점일지도 모른다. 배타적 극단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극우 정치의 대중화에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주었다는 것. (p. 160)
「일기 모음: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선택―2024. 12. 3~2025. 1. 27(20), 총 22편의 짧은 일기」 _임유영
2024. 12. 14. 토요일.오전 내내 뉴스만 보다가 점심 먹고 나섰다. 열차를 수월하게 탔다고 생각했는데 도중에 앉아서 좀 쉬긴 했음. 실컷 다 와놓곤 야외에서(엥?) 발작 시작. 사람이 적은 뒤쪽으로 얼른 빠졌다. K에게 미안했다. 탄핵소추안 가결이 선포되고 엄청난 환호 소리가 광장을 메웠다. 내 옆에서 같이 보고 있던 어떤 아주머니가 “뭐예요? 된 거예요” 물어서 “네, 됐대요!” 대답하는데 조금 벅찼다. 나에게 오늘은 이 장면으로 기억되겠군, 생각했다. 대답을 들은 아주머니는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손뼉을 치며 깡충깡충 뛰었다. 하늘도 예쁘고 사람들은 기쁘고 대로변의 건물들이 빛나고 멀리 국회의사당이 사뭇 점잖게, 제자리에 좌정 중. (p. 169)
「日記」 _황정은
12월 23일 오전 한시십육분남태령을 어떻게 일기로 옮길까.
뭐라고 쓰든 남태령에서 나온 말들에 비하지 못할 것이다.아침이 되어서야 전농의 트랙터 투쟁단을 맞이하러 남태령으로 간 사람들이 거기서 밤을 새웠다는 걸 알았다. 내가 습관적으로 체념한 자리에 찾아간 사람들이 있었고 그들이 그 자리를 지켰고 막힌 길을 뚫었다. 2030 여성들, 성소수자들.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들, 동료들이 거기 다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단편 원고를 쓰려고 가지 않았다. 실시간 영상으로 현장의 소리를 듣고 눈으로는 원고를 보면서 내 늙음을 돌아보았다. 그게 되지 않을 거라고 먼저 믿는 마음, 보고 들은 바대로 학습된 포기. 부끄러우면서도 오늘은 그 부끄러움이 기꺼웠다.
남태령으로 가고, 남태령에 머문 사람들이 끝내 내던지지 않은 사랑을 계속 생각한다. 시간이 흘러도 이 경험은 뭉개지지 않는 흔적이 되겠지. 우리가 거기 있었고 곁에 선 서로를 알아갔다, 알아보았다는 감각과 기억. 남태령에서 그렇게 타인을 만난 여성들은 이전과 또 다를 것이다. 탄핵이 어떤 결과에 이르든 남태령에서 서로 연결되었던 사람들에게, 그리고 그들을 경이로 목격한 사람들에게 세상은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이걸 겪은 사람과 겪지 않은 사람의 차이도 크겠지.
그것이 걱정되면서도 너무 설렜다.
놀라운 사람이 이렇게 많다. (pp. 194~95)
■ 차례
| 하이픈 | 탄핵 – 일지
김기태 완벽하지 못한 날들
김멜라 계엄 파편
김복희 산통 깨기(記)
김이설 2024년 12월, 2025년 1월의 메모
김형중 좌파적 우울
문보영 앤아버의 나무들과 우체국 그리고 실어증
박솔뫼 나는 뭔가 말을 할 거야
서효인 교차 기록
소영현 거울 방에서, 저항의 미러링
손보미 힘
송희지 계속 쓰기
이미상 ○○도 ○○도 없는 구멍 뚫린 문형과 캐치프레이즈
이장욱 계엄 일기
임유영 일기 모음: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선택
황정은 日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