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영화적 순간에 잠시 빛을 발하고 이내 사라져버린
희망의 기억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이미지 세계와 그 텅 빈 어둠 속 존재들이 남긴 흔적에 대한
사회학자 김홍중의 에세이, 그리고 단상들
아피찻퐁, 타르콥스키, 지아장커, 켈리 레이카트…
영화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세계의 얼굴들
진정성에서 속물주의로의 ‘우리 사회의 마음’의 전환을 포착한 『마음의 사회학』으로부터 최신작 『서바이벌리스트 모더니티』까지, 한국 사회의 집단 심리를 분석하고 마음을 사회학적으로 재구성하는 저서들을 발표하며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킨 바 있는 사회학자 김홍중의 영화 에세이 『세계에 대한 믿음』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이 책은 『서울리뷰오브북스』 『뉴래디컬리뷰』 등에 연재했던 영화에 관한 7편의 에세이와 한편에 따로 적어두었던 단상들을 각 편의 “부기” 형식으로 엮은 것으로, 학술적인 분석의 도구와 언어를 내려놓고, 더 이상 어떤 믿음을 갖는다는 것이 불가능해 보이는 오늘의 세계를 영화가 제공해준 시선으로 바라본 기록이다.
김홍중은 이 부서진 세계를 살아가는 불안정한 사람들과, 오랫동안 도구적인 용도로만 해석되어온 숱한 비인간 존재들, 그리고 우리의 이해 영역 너머에 있는 불가해한 순간들의 빛과 그림자를 보여주었던 여러 감독들의 작품을 경유해, 이 시대에 희망을 갖는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 가능하다면 그것은 어떤 모습의 희망일지를 이야기한다. 저자는 텅 빈 어둠 속에서 주체의 자리를 비우고 다른 존재가 들어올 수 있도록 하는 영화적 보기의 경험이, 평소 보지 못하던 것을 바라보게끔 함으로써 세계에 대한 또 다른 이해를 가능하게 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저자 특유의 강렬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체로 쓰인 이 책은 이러한 영화적 경험이 만들어내는 정동적 흔들림과 망막에 흔적처럼 남아 있는 이미지의 기억을 말로 재구축해 독자들과 공유해보려는 ‘시도(에세이essay)’이다.
영화를 통해 세계를 믿는다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에게 다시 세계에 대한 믿음을 주는 것,
이것이 바로 현대 영화의 힘이다.”_질 들뢰즈
이 책의 제목 『세계에 대한 믿음』은 “영화는 세계가 아니라 이 세계에 대한 믿음을 찍어야 한다”라고 말한 들뢰즈 책의 문구에서 빌려온 것으로, 이전의 저작들에서도 종종 영화의 사례를 불러들여 새로운 사유의 가능성을 모색한 바 있던 저자가 본격적으로 영화를 중심에 두고 이야기하는 첫 책이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에서 시작해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지아장커, 켈리 레이카트, 아키 카우리스마키까지 그가 오랫동안 깊은 애정을 갖고 보아온 여러 감독의 작품들이 등장한다.
저자는, 스스로를 “영화를 보러 다니는 평범한 남자”라고 칭하며 영화를 분석하는 것을 거부하고 영화를 본다는 것 자체, 즉 관객의 영화적 체험에 관해 질문을 던진 바 있는 프랑스의 미술비평가 장 루이 셰페르와 마찬가지로, 이 책의 목적이 영화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해석하거나 감독론을 펼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한다. 그는 스스로를 비평가 혹은 영화애호가(시네필)가 아니라 일종의 영화 환자인 “시네 페이션트(cine-patient),” 즉 영화의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무언가 변형이 일어난 사람, 주체의 자리를 비우고 영화가 드러내는 다른 세계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그러한 체험을 기꺼이 감수하는(patient) 사람으로 제시한다. 그런데 이러한 수동성의 강조는 의례적인 겸양의 몸짓이 아니다. 저자가 드러내놓고 밝히지는 않았지만, 영화를 통해 세계에 대한 재인식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저자의 시도는 ‘언어와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 ‘미래를 약속하는 힘인 상상력이 아닌 어떤 미래도 약속하지 못하는 파상력’ ‘순간적으로 출몰하는 이미지의 힘(정치적인 것과 이미지의 만남)’에 대해 관심을 보여온 그가 견지하던 사회학자로서의 입장과 모종의 친연성이 있다.
예기치 못한 순간 출몰하는 이미지의 힘
“영화는 우리에게 시선을 제공한다”
이 책은 예를 들어, <웬디와 루시> <믹의 지름길> 등 성장하고 진보하는 대신 붕괴하는 세계를 살아가는 21세기 미국 민중의 빈곤하고 불안정한 삶을 주로 그려온 켈리 레이카트 감독의 작품들을 보았던 체험을 되짚으며, 우리가 영화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다면, 그것은 확실한 메시지나 사상이 아니라 마치 우연히 카메라에 찍힌 듯이 덧없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어떤 이미지들이 주는 희미한 감응의 형태를 띤다고 말한다. 저자는 이를 들뢰즈와 과타리의 ‘기관 없는 신체’ 개념을 변형하여 ‘기관 없는 희망’이라 부르는데, 그것은 희망의 통상적 기능인 미래의 전망이나 계획, 약속이 결여된 역설적 희망, 다시 말해 유토피아적 상상력이 보장하는 세계를 결코 그려내지 못하는 희망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미지들은 우리의 세계에 대한 강력한 증인이 되어, 예기치 못한 순간에 떠올라 결정적인 힘을 발휘하게 될 수도 있다.
“가령 웬디가 알래스카로 떠나기 전에 주차장을 지키는 늙은 경비원이 소녀의 손에 쥐여주는, 꼬깃꼬깃 구겨진 지폐 두 장. 이유도 대가도 없이 베풀어진 허름한 선물. 저 6달러로는 웬디의 인생에서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그럼에도 저 증여가 일어나는 세계와 그런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 세계는 결코 동일한 세계가 아니다.”_162쪽
저자가 갖고 있던 문제의식은 지아장커의 작품들을 경유해 영화의 리얼리즘에 대해 질문하는 글에서도 드러난다. 이 책은, 영화의 리얼리즘에서 중요한 것은 영화가 현실을 얼마나 사실적으로 묘사했는가가 아니라, 작품에 포획된 실재의 함량은 얼마인가 혹은 영화 속에서 실재가 얼마나 강력하게 꿈틀거리고, 생동하고, 말하고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강변한다. 지아장커는 동시대 중국 현실을 규정하거나 설명하려 들지 않고, “수많은 이야기와 정동을 함축한 장소와 시간, 인물과 도시, 사물과 건물, 의복과 음식을 그것들의 물성 그 자체로 영화에 불러내 그것들 스스로 말하도록 만들었다.” 저자에 따르면, 영화에서 실재란 그것을 본 이전과 이후를 단절시키는 힘의 이름이다.
“<스틸 라이프>의 마지막 장면에서 우리는 지아장커 인민주의, 지아장커 리얼리즘의 탁월한 상징을 만난다. 펑제를 빠져나가는 한싼밍의 머리 뒤로 마치 환각처럼 외줄을 타는 사내가 허공을 걸어가고 있다. 고공에서 외줄을 타는 사람, 발을 헛디디면 떨어져 죽는 사람, 그러나 그 줄을 밟고 살아나가는 사람이 있다. 이 영화는 감독이 인민에게 바치는 헌사다. 협소한 줄처럼 위태로운 곳을 걸어가는 생존주의자. 생존의 협곡을 헤쳐가는 자. 그것이 삼협이건, 지하 갱도건, 공장이건, 혹은 거리건, 인민은 그렇게 살아나가는 것이다.”_129쪽
이 책에서 다루는 감독들의 영화에서 공통적인 것은 그들의 영화가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던 존재들을 포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피찻퐁의 영화에는 귀신, 동물, 퀴어, 그리고 남방 부처의 기묘하게 불안한 미소를 띤 태국 민중의 얼굴이 등장하며, 타르콥스키의 영화에는 중력에 속절없이 패배하는 인간들, 일종의 ‘러시아적 백치(유로지비)’들이 등장한다. 또한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에는 도주하고 숨는 존재들, 저자의 표현을 따르자면 “존재=도망인 존재들”이, 레이카트의 영화에는 사회적 연결망이 모두 끊어진 외로운 낙오자들이 등장한다. 저자는 초창기부터 영화가 사회정치적 삶에서 주변화되고 망각된 민중의 삶을 카메라에 담아왔다고 말한다. 영화의 등장과 더불어 민중적 생명의 세부들이 사회의 집합 기억에 등록되기 시작했다. 인민의 얼굴은 영화적 진리가 서리는 특권적 장소가 된다. 더 나아가, 영화는 불시에 나타났다 사라지는 검은 개, 무성히 자라는 식물, 폐수가 흐르는 개울물처럼 인간이 아닌 존재들, 비생명까지 세계의 증언자로 호출한다. 영화를 본다는 것이 주체를 비우고, 그 빈자리를 다른 세계에 내주는 경험이라고 했을 때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바로 이들이다. 순간, 굳게 닫혀 있던 세계의 틈이 드러나 어디로 향하는지 알 수 없는 도주로가 열린다. 어둠 속 환영이 지배하는 단 몇 시간 속에서 우리는 이 고통스러운 세계에 대한 믿음을 다시 회복하게 될지도 모른다.
“좋은 영화를 보았을 때 나는 들뢰즈가 말하는 ‘세계에 대한 믿음’이 조금 더해진 기쁨을 느낀다. 세계에 대한 믿음이 생기려면, 자기가 삭감되어야 한다. 자기가 덜어내지고, 자기의 중심성이 흐트러지고, 자기가 사라져야 한다. 그 사라진 빈자리만큼 세상이 나타난다. 그 세계의 주인은 내가 아닌 타인들이다.”_7쪽
■ 책 속으로
<열대병>은 두 사람이 함께 살아낸 공통의 사랑도 궁극적으로는 서로 다른 두 실재로 분열되어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 깊은 친밀성의 영역에서조차 우리는 하나가 될 수 없다. 우리는 그저 자신이 만든 기억과 관점과 이미지와 욕망의 구축물에 갇혀 살아간다. 이것이 어쩌면 영화, 뇌, 생명의 쓰라린 공통점일지도 모른다. <열대병>의 전반부와 후반부가 소통하지 못하듯, 통과 켕은 분리된 채 하나로 융합되지 못한다. 통의 실재는 켕의 실재와 접점이 없다. 이들은 모나드다. 이들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접촉은 짧은 시간 주먹을 핥아주는 것, 혹은 죽여 그 살을 먹음으로써 영혼을 흡수하는 것뿐이다._1장 「침잠의 미학」, 25쪽
하지만 ‘세계’를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디서 우리는 그것을 배우는가? 들뢰즈에 의하면, 그것은 (좋은) 영화를 통해서다. 말하자면 영화는 20세기에 나타난 새로운 예배의 형식이다. 그것은 ‘인식’ 장치나 ‘오락’ 장치이기 이전에 ‘믿음’의 장치였다. 교회나 성당이 아닌 극장에서 수행되는 예배… 그래서일까? 엔딩 크레딧이 내려가고 햇빛에 눈을 찡그리며 극장을 나설 때, 우리는 언제나 약간의 현기증과 수치심을 느끼며, 금지된 종교를 숭배하고 온 자들처럼, 영화가 주던 기만적 현실감을 결코 압도하지 못하는 저 허약하고 구멍 뚫린 공허한 실제 세계로 어색하게 숨어들지 않던가? _2장 「세계에 대한 믿음」, 47쪽
영화는 이 구텐베르크 은하계의 ‘바깥’으로 가는 한 출구다. 비상구exit다. 영화적 인간은 안티-돈키호테다. 그는 꿈을 꾸지도, 구성하지도, 해석하지도 않는다. 세계를 자신의 의지대로 능동적으로 자유롭게 상상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세계를 볼 수밖에 없다. 자아와 세계를 매개하던 언어의 권력은 스크린 앞에서 정지한다. 세계를 상상하고 구성하던 자아도 무력해진다. 영화적 주체가 스크린을 바라볼 때 주도권을 잡는 것은 문자로 쉽게 담아낼 수 없는 구질구질하고 퀴퀴하고 난잡하고 때로는 혼돈스럽게 생동하는 이미지들이다._2장 「세계에 대한 믿음」, 49쪽
20세기 시네마의 역사에서 <부운>보다 더 암울하고 허무적인 멜로드라마를 찾기는 쉽지 않으리라. 격렬한 실패나 격정 이후의 파국을 그리는 작품은 많지만, 이처럼 파멸이 봄비와 같이 부드럽게 영화 전체를 적시며, 천천히 영화를 보는 자의 감성 전체를 함몰시키고 무너뜨려가는, 잔혹할 정도로 부드럽게 희망을 제거해버리는 그런 작품은 거의 없다. 주인공의 죽음으로 이야기는 종결되지만, 그 몸뚱이가 사라지고 난 후에도 웃음이 남아 떠도는 체셔 고양이처럼, <부운>이 그린 어두운 연애는 이야기의 종결 이후에도 기이한 힘으로 남아, 유령처럼 이 세계를 떠돌고 있을 것만 같다. _3장 「번개, 여자, 타나토스」, 93~94쪽
지아장커의 영화는 길에 대한 영화다. 과거에 그 길의 이름은 혁명이거나 연대였다. 하지만 이제 그의 영화에서 그 길들은 한없는 외로움과 모호성 속에 잠겨 있다. 함께 가는 길, 가야 하는 길, 갈 수 있는 길은 이제 없다. 모두가 흩어졌다. <소무>의 주인공은 홀로 남아 길에 던져진다. <플랫폼>은 개혁개방 이후 중국 인민들이 맞이하게 된 길의 이상 증식, 길의 폭발과 분열에 관한 것이다. 고독하기 때문에 외로운 것이 아니라, 길들이 분열하여 나의 길은 오직 나 자신이 가야 하는 것이기에, 그것이 너무나 확고한 것이기 때문에 외로운 것이다. 한 도시에 갇혀 있는 청춘 군상들을 그려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는 본질적으로 ‘로드 무비’다._4장 「리얼 스스로 말하게 하라」, 118쪽
리얼리즘이란 이런 것이다. 현실과 영화가 얼마나 비슷한가, 얼마나 있는 그대로 현실을 재현했는가? 이렇게 묻는 대신 리얼리스트는 다음처럼 질문한다. 내가 찍은 영화 속에서 실재는 얼마나 강력하게 꿈틀거리고, 생동하고, 말하고, 명령하고 있는가? 작품에 포획된 실재의 함량은 얼마인가? 감독 자신이 동시대 중국 현실을 규정하고 재현하고 설명하려 들지 않고, 수많은 이야기와 정동을 함축한 장소와 시간, 인물과 도시, 사물과 건물, 의복과 음식을 그것들의 물성 그 자체로 영화에 불러내 그들 스스로 말하도록 할 때, 지아장커는 탁월한 리얼리스트다. […] 무언가 사라지기 시작할 때, 소멸할 때, 붕괴할 때, 기능이 정지했을 때, 그때 리얼은 이미지로 말한다. 영화에서 실재란 그것을 본 이전과 이후를 단절시키는 힘의 이름이다._4장 「리얼 스스로 말하게 하라」, 121쪽
레이카트의 영화에는 기관 없는 희망의 모멘트들이 있다. 그것이 ‘희망’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은 세계의 파국과 삶의 불행에서 벗어날 희미한 가능성이 시사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관이 없다’고 말해져야 하는 이유는 그 가능성에 레이카트가 어떤 실체도, 의미도, 서사도, 설명도, 가치도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다. 남는 것은, 순간 우리 마음을 눈부시게 비추고 환각처럼 사라져버리는 무상한 이미지뿐이다. 전망 없는 세계에 불현듯 나타났다가 흔적도, 약속도, 미련도 없이 사라지는, 불타는 떨기나무 같은 이미지. 그런 특이성의 순간들이 소화되지 않는 뼛조각처럼, 지울 수 없는 얼룩처럼 레이카트의 영화에 잔존한다._5장 「기관 없는 희망」, 161~162쪽
■ 차례
프롤로그
1장 침잠의 미학: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2장 세계에 대한 믿음: 안드레이 타르콥스키
3장 번개, 여자, 타나토스: 나루세 미키오
4장 리얼 스스로 말하게 하라: 지아장커
5장 기관 없는 희망: 켈리 레이카트
6장 유머의 영성: 코엔 형제와 아키 카우리스마키
7장 붕괴와 추앙 사이: 박찬욱과 박해영
에필로그
미주
출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