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사회 하이픈 (2024년 겨울)

문학과사회 편집동인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24년 12월 10일 | ISBN 1227285X

사양 신국판 152x225mm · 128쪽 | 가격 15,000원

책소개

■ 문학과사회 하이픈: 문학-현실(본문 발췌)

「읽히고 버려질 글」 _이은지
픽션이 논픽션으로부터 어느 정도까지 자유로울 수 있을지, 픽션이 얼마만큼 경계적일 수 있고 또 자기 지시적일 수 있을지 등을 결정하는 것은 픽션의 몫이 아니다. 그러한 결정은 가상의 규약이 체결됨으로써 발생하는 한시적인 효과를 통해 이루어지며 이때 이 규약의 영토는 언제나 픽션 바깥에 있다. 위와 같은 고지가 영화나 드라마가 시작하기 ‘직전’에 자리하지 그 안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이 영토야말로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 지대에 가깝다. 달리 말해 어떤 이야기를 픽션과 논픽션의 경계에 위치시키는 것, 어떤 이야기로부터 그러한 경계를 생성하고 사유하는 것은 작가의 권한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다른 이들이 하얀 거짓말이라는 상호적인 약속에 동참함으로써만 발생한다. 그리고 하얀 거짓말의 규약을 앞세워 현실을 보다 적극적으로 환기하도록 구조화된 재현물이 사회 고발적이거나 사회 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 않을 경우에 이는 불가피하게 관음의 체제로 미끄러질 위험을 안고 있다. (pp. 14)

「비평의 자리」 _최가은
페미니즘 리부트 이후 재현의 윤리가 ‘더 구체적으로’ ‘더 리얼하게’라는 삶에 대한 우위의 질문으로 전환될 때 비평은 그 리얼함의 성격과 양상, 그것이 동요시킨 재현/대의의 원리에 주목했을 뿐만 아니라 ‘리얼한 것의 참칭’에 은폐된 정치적 보수성을 의문시하며 문학의 ‘허구성’과 ‘가상성’에 대한 집요한 관심을 수행했다. 이번 사태에서 부각된 외침, 즉 ‘더 허구적으로 재현하라’는 요청은 바로 이 허구성에 대한 탐구의 연장선에서, 바로 그러한 종류의 분석을 촉발하고 요구하는 형태로 그것에 얽혀 있는 독자의 읽기–쓰기 행위와 더불어 사유되어야 하는 문제이다. 그러나 고작 ‘공론장’의 중재자 정도로 상상되는 비평은 문학을 중심으로 실천되는 온갖 종류의 담론적 네트워크를, 말하자면 문학에 관해 생산되고 폐기되며 경합하고 충돌하는 담화 및 담론의 복잡성을 단일한 입장을 지닌 개체들의 연합으로 균질화하며 수행된다. 이처럼 간편한 구상 속에서 요구되는 비평의 책임은 문학에 관해, 그리고 현실에 관해 해소될 수 없는 문제들을 해소할 수 없는 차원에서 반복적으로 선언하는 일 이상이 되기 어렵다. (pp. 30)

「포함하여 쓰고 있는 문장」 _홍성희
김현지와 정지돈, 사적 경험과 공적 글쓰기, 실제 삶과 문학적 재현, 언어의 소유권자와 비소유권자 사이에서 발생한 어떤 사실에 대하여 김현지의 언어와 정지돈의 언어는 ‘문학’에 관한 다른 문법 규칙을 전면화한다. 그리하여 여러 층위의 사실 문제들을 포함하는 동시에 경유하여 다시 애초의 문학에 관한 사실 판단의 문제로 이야기가 되돌아올 때, 서술될 수 있으나 입증될 수 없고 합의될 수 있으나 그 자체로 드러날 수 없는 사실에 대하여 언어를 단지 겹쳐가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애초에 그러한 사실이 왜 발생했고 어떻게 발생할 수 있었으며 어떻게 사실 자체를 입증 불가능하게 만들고 있는가, ‘문학’이라는 사실의 조건 자체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일일 것이다. 그때 이야기는 작가에게 집중된 재현의 윤리나 독자에게 집중된 읽기 및 말하기의 윤리처럼 사실로부터 윤리학의 차원으로 한 걸음 물러서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지금 여기의 사실과 관계하여 각자의 작가와 독자 들에게 ‘문학’은 어떤 관용어와 닿아 언어 규칙을 만들어내고 있는 단어인지, 문학의 이름으로 만나고 모이며 담론과 공론의 장을 만들고 또 그 내부를 향해 발화하는 모두에게 ‘문학’은 무엇을 말할 수 있게 하고 무엇을 말할 수 없게 하는 장치인지, 그렇게 각자가 ‘문학’을 포함하여 쓰고 있는 문장은 무엇인지를 와글와글 되돌아보는 방식으로, 사실의 언어 자체에 자꾸 발 디뎌보는 방식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사실에 관하여서는 언제나 몇 가지의 논점이 있으므로, 사실의 하나로서 문학에 관하여 몇 가지의 논점이 내내, 남아 있으므로. (pp. 50~51)

「불화하는 ‘나의 이야기’―재현의 윤리 이후를 상상한다」 _이희우
이제 말할 수 없는 자와 말할 권한을 가진 자의 분리를 상정하는 것 자체가—그것을 비판하기 위해 상정하는 경우에서조차도—지나치게 경직된 이분법으로 보인다. 그러한 틀은 등단이라는 제도가 여전히 주요 등용문인 한국 문단의 안팎을 분석할 때는 유용하지만, 훨씬 더 광범위하고 모호한 동시대의 공론장에서 형성되는 권력과 세력, 영향력을 분석할 때는 무용지물이다. 오히려 초점은 다양한 채널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말할 수 있는’ 이들 사이의 차이에 맞춰져야 할 것이다. 각자가 각자의 방식으로 말할 수 있다고 해도, 어떤 언어에는 다른 언어를 왜곡하거나 변형할 더 큰 권력이 있다. 더 무거운 물체가 공간을 휘게 하는 것처럼. 그것은 그 언어가 어떤 자격을 부여받았기 때문일 수도 있고, 이미 많은 목소리를 결집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즉 이 힘의 차이는 특정 제도가 발행하는 ‘자격’의 유무와 무관하지 않지만, 반드시 일치하지도 않는다. 일반적으로 작가는 여전히 작가 아닌 이들보다 더 큰 말할 권한을 갖고 있지만, 모든 상황과 맥락에서 작가가 강자인 것은 결코 아니다. 또 독자의 의견이 결집했을 때 출판사나 문예지 같은 제도적 장치들에 강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 가령 트위터의 흐름이 문학 제도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음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때 여론의 흐름은 인용의 연쇄가 구성하는 ‘타래’로 가시화된다. (p. 70)

「빈 문서 1」 _천희란
나는 작가이고 독자입니다. 한편 이 지면에 상세히 쓰기에 적절하지 않을 뿐 다른 창작물에 의해 대상화되었던 당사자이기도 합니다. 내 위치는 복잡하고 나의 입장 역시 대체로 분열적이고 혼란스럽습니다. 끊임없이 스스로의 관점을 점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도와 작가, 독자가 공동체로서 지난하더라도 이 분열과 혼란을 함께 겪어나가기를 바라는 것이 순진한 이상으로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탁월한 이론적 경험과 문학적 직관으로 단번에 이 문제를 해소하기를 기대하기보다 완성되지 않은 관점들이 수용될 수 있는 대화의 장이 지속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매끈한 언어로 완결된 논리를 구성하지 못한 망설이는 목소리들이 더 많이 출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런 경험으로 우리가 문학을 통해 감당하려 했고 계속해서 감당하려는 위험과 그 위험을 함께 모험하는 공동체의 가치를 새롭게 감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어진 매수를 한참 넘어섰음에도 도입부를 쓰고 지울 때처럼 아무것도 쓰지 못한 것만 같습니다. 이러한 글에 어울리는 제목도 끝내 찾아낼 수 없었습니다. 나는 그저 조금 지쳤으나 절망하지 않고, 회의에 빠지더라도 냉소하지 않고 싶습니다. 어쩌면 이것만이 내가 이 글을 수신하는 모두에게 전할 수 있는 의미 있는 메시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pp. 86~87)

「회색 지대에 머물기, 검은 펜으로 쓰기」 _문지혁
다만 비겁해지지 않기 위해, 보다 정직에 가까워지기 위해 계속 쓴다. 이렇게 말해보자. 작가는 회색 지대에 머문 채 검은 펜으로 쓰는 사람이라고. 나는 그것이 반박 불가능한 윤리적 이분법 위에서 안전하고 무해한 회색 펜으로 쓰는 것보다 정직하다고 느낀다. 작가는 틀릴 수 없고 질 수 없는 싸움을 하는 사람이 아니다. 땅을 짚고 헤엄치는 한 우리는 먼바다로 나갈 수 없다. 존재를 얄팍하게 만드는 것은 되레 한 줌의 정의만을 손에 꼭 쥐고 있는 사람들이며, 작가는 그런 이들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사람이다. 그건 폭력 아니냐고? 그렇다. 흰 종이 위에(실은 백색 화면 위에) 검은색으로 쓰는 것 자체가 이미 폭력이다. 두들겨 맞으며, 때로는 주먹을 휘두르며 우리는 겨우 앞으로 나아간다. 일어서고 쓰러지면서, 폭력으로 가득한 세상에 몇 줄의 폭력으로 대항하며 한 뼘만큼의 회색 지대를 넓히는 것이다. 재현의 윤리와 윤리적 재현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작가의 윤리이고, 이 윤리의 승패는 아직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링 위에 올라서는 것, 결과를 모르면서 게임을 시작하는 것, 상대방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면서 주먹을 뻗는 바로 그것만이 유일하게 윤리적인 작가의 윤리라고 나는 믿는다. (pp. 95~96)

「‘정지돈-김현지 사건’에 대한 메모」 _이연숙
‘무단 인용’이 잘못인가? 잘못이라면 어떤 잘못이며, 얼마나 큰 잘못인가? 이 글은 처음부터 ‘무단 인용’이 다른 누군가에게 상상적이든, 실재적이든 위해를 끼칠 수 있으므로 잘못이라고 가정하고 있다. 하지만 다시 묻건대 어떤 잘못이며, 얼마나 큰 잘못인가? 정확하게 따져 묻자는 것이 아니다. 온갖 문제가 얽혀 있기에 지나치게 거대하게 느껴지는 이번 사건을 각각의 요소로 분리해 생각해보자는 것이다. 여기서 분리는 목적이 아니라 과정으로서 중요하다. 요컨대 ‘무단 인용’을 성폭력의 일종으로 확대해서 해석하는 것은 물론 가능하지만, 이를 유일한 목적으로 둔다면 ‘무단 인용’의 가능한 여러 해석 방식이 장려되는 대신 오히려 ‘무단 인용’이 왜 성폭력인가를 증명하기 위해 더 많은 논쟁을 해야 할 수도 있다. 세상만사가 그렇듯 양자는 깨끗이 분리될 수 없겠지만, 그럼에도 분리하려 시도하지 않는다면 사건은 오히려 ‘공론 장’ 속에서 소외되고 말 것이다. (p. 110)

「실재가 침투할 때 흔들리는 극장의 감정에 관하여」 _양근애
여전히 극장에 틈입하는 현실, 침투하는 실재는 어떻게 연극이 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지 못했다(아니, 이 질문에 답하는 일이 가능하기는 한가). 최근 신촌극장에서 공연된 「이번 작업은 좀 열어두기로 하죠」(이연주·전진모 연출, 2024)는 경험을 토대로 한 연극 만들기가 필연적인 실패를 향한 미완의 과정임을 숨기지 않는다. 이 연극은 실제 경험과 이 경험으로 구성된 대본과 그 대본의 내용을 발화하는 배우와 발화된 대사를 문자화하는 자막의 겹들을 통해 모종의 창작 방식을 메타화하는 작업이다. 작가의 경험은 문자로 번역되어 대본에 가라앉았다가 배우에 의해 메시지로 환원되지 않는 맥락을 둘러 입는다. 배우의 발화와 동시에 휘발되었던 대사는 자막에 의해 해석의 층위로 소환되었다가 극장의 공기 속으로 흩어진다. 같은 대사를 여러 차례 다른 방식으로 반복한다. 차이의 발생이 틈을 벌린다. 작가의 경험은 배우에 의해 다시 씌어지고 관객에 의해 다시 읽힌다. 연극을 만들게 한 애초의 경험이 있던 자리는 흔적으로만 존재한다. 실재는 같은 방식으로 실재하지 않는다. (p. 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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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차례

| 하이픈 | 문학 – 현실

이은지 읽히고 버려질 글
최가은 비평의 자리
홍성희 포함하여 쓰고 있는 문장
이희우 불화하는 ‘나의 이야기’—재현의 윤리 이후를 상상한다
천희란 빈 문서 1
문지혁 회색 지대에 머물기, 검은 펜으로 쓰기
이연숙 ‘정지돈–김현지 사건’에 대한 메모
양근애 실재가 침투할 때 흔들리는 극장의 감정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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