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지성사의 소설 시리즈 <문지작가선>
오늘의 눈으로 다시 읽는 어제의 문학, <문지작가선>이 2019년 7월 첫발을 떼었다. 또 한 번의 10년을 마무리하는 2019년, 문학과지성사는 한국문학사, 나아가 한국 현대사에 깊은 족적을 남긴 작가와 그들의 작품을 가려 뽑아 문학성을 조명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나갈 목록 구성이 필요한 때라고 판단했다. 하여 현재까지, 진지한 문학적 탐구를 감행하면서도 폭넓은 독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한국문학의 중추로서 의미 있는 창작 활동을 이어온 작가들을 선정하고, 그들의 작품을 비평적 관점에서 엄선해 독자들에게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또한 권별 책임 편집을 맡은 문학평론가들의 해제를 더하여 해당 작가와 작품이 지니는 문학적‧역사적 의미를 상세하게 되새긴다.
<문지작가선>의 시작점은 억압된 시대 속 정치적 격변기를 거치며 권력과 사회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문학의 언어로 표현한 ‘4‧19세대’ 작가다. 최인훈, 김승옥, 서정인, 이청준, 윤흥길, 김원일의 중단편선과 한국 현대 여성소설의 원류인 오정희, 박완서에 이어 최윤의 중단편선을 선보인다.
“그리고 미로 속으로 들어가라. 그것을 두려워할수록 길을 잃으리라.”
부재의 자리에서 완성되는 우정에 대하여
최윤 중단편선 『하나코는 없다』
“독백의 형태로 말해지는 ‘부재증명의 우정’을 통해 지난 30여 년간 가장 완벽한 방식의 우정을 탐색해”(조연정)온 소설가 최윤의 중단편선 『하나코는 없다』가 문지작가선 아홉번째로 출간되었다. 이번 중단편선에는 1994년 제18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한 표제작을 비롯해 「회색 눈사람」(1992년 제23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당신의 물제비」(1992) 「워싱턴 광장」(1994) 「굿바이」(1999) 「분홍색 상의를 입은 여자」(2015) 등 작품 활동 초기부터 최근까지 펴낸 최윤의 대표작 10편을 수록했다. 수록작 가운데 「워싱턴 광장」 「속삭임, 속삭임」(1993)「열세 가지 이름의 꽃향기」(1995) 등 8편은 2018년, 문지클래식 6으로 출간되었던 최윤의 소설집『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에 미수록된 작품들이다.
책임 편집과 해제를 맡은 문학평론가 조연정은 몇 가지 분류를 거쳐 최윤의 소설을 다시 읽는다. 타인의 비밀한 삶을 목격한 자의 ‘증언’이 담긴 「회색 눈사람」 「속삭임, 속삭임」 「워싱턴 광장」, 가족의 불가해한 죽음을 둘러싼 고통스러운 경험을 ‘독백’으로 재구성한 「당신의 물제비」 「밀랍 호숫가로의 여행」(2002) 「굿바이」 「동행」(2012). 나아가 “누군가의 죽음에 대한 유일한 증인이 되어주는 남다른 우정”을 그린 「회색 눈사람」 「분홍색 상의를 입은 여자」가 있다. 최윤의 소설에서 “부재의 자리에서 완성되는” 우정은 다시 말해, 결코 완벽하게 헤아릴 수 없는 타인의 삶으로 건너가 부재를 더듬어봄으로써, 살아남은 ‘나’가 혼자인 불행을 딛고 이후의 삶을 스스로 구원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최윤은 타인의 부재 속에 “확인 불가능한 자신의 부재를 미리 경험하”(조연정)는 화자를 등장시키며 그로부터 작가 자신의 소설 쓰기의 윤리를 확장한다. 고통 한가운데에 선 화자의 ‘애도’는 증언이나 독백을 통한 ‘대신 쓰기’의 방식으로 죽은 자를 향하고 있을 뿐 아니라, 기록 과정에서 복기하는 화자 자신의 한 시절과 상처마저 보듬는다. 이는 시대의 야만은 냉철하게 인식하되 그 안에서 피고 지는 인간의 삶을, 끈질긴 생명력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는 최윤 소설이 지닌 가장 큰 특징이다.
하나코와는 자존심이 상할 일이 없었다. 하나코와는 일이 덧나도 별 두려움이 없었다. 그 일이 있고도 그는 이렇게 출장을 핑계로 그녀를 찾아보려고 하지 않는가. 왜일까?
“우리는 친구잖아요.”
언젠가 그의 실언 앞에서 그것을 무마하느라 하나코가 한 말이었다. 어떤 실수였는지는 물론 기억에 없었다. 그렇지만 그 말이 야기한 불편한 파장은 생생하게 기억에 남았다. 「하나코는 없다」(p. 178)
표제작인 「하나코는 없다」(1994)는 책에 실린 대부분의 작품들과 달리 남성 화자의 시각에서 씌어졌다. 어딘지 신비로우면서도 관대하고, 친밀하면서도 신중한 하나코의 성격은 또래 남자들에게 대상화되어 멋대로 소비된다. 결국 그들이 걷잡을 수 없는 폭력성과 충동으로 일으킨 소동에 휘말렸던 하나코는 화자를 비롯해 무리에 속해 있던 남자 친구들과 멀어진다. 세월이 흘러 동반자이자 동업자인 여자친구와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은 그녀는 화자의 눈에 마치 모르던 이처럼 생소하다. 남성의 동물적인 욕망의 더께에 가려져 있던 진짜 하나코, 장진자의 모습을 마주한 화자의 둔감한 시선과 자신이 받은 충격을 해석할 줄도 모르는 화자의 무지는, 작품을 읽는 독자의 객관을 일관되게 자극함으로써 서늘한 울림을 던진다.
소설뿐 아니라 쓰는 자의 삶 또한 삼인칭이 된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나’의 것을 포함한 모든 개인적 삶이 객관화되는 것은 소설가에게 주어진 선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 민감함이라는 천형을 어느 정도 부여받은 작가라는 범주에 속하는 사람이, 격렬하고 변덕스럽고 무질서하며 자주 추함에 더 가까운 인간이 만들어내는 삶의 격랑 속에서 살아남을 길은 없었을 것이다.
[……]
소설을 잘 쓰는 일은 ‘나’라는 이 삼인칭의 균형을 얼마나 잘 유지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이 균형은 넓은 의미에서 윤리적 균형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이 삼인칭의 균형이 소설을 쓰는 자에게 겸손함을 요청한다. (최윤, 「나는 어떻게 쓰는가」, 『사막아, 사슴아』, 문학과지성사, 2024, p. 45)
작가는 5월 광주의 비극을 다룬 중편소설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1988)를 발표하며 “가장 뛰어난 증언의 문학”(김병익)이라는 수사로 각인되었다. 소설은 영화 「꽃잎」(장선우 감독, 1996)으로도 제작되어 오랜 시간 대중에게 사랑받았다. 유신 체제하에 검열이 극에 달했던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한 「회색 눈사람」과 민족 분단과 이념 갈등의 아픔이 스민 「속삭임, 속삭임」 등에서 읽듯 현대사의 비극을 평생에 걸쳐 껴안은 개인과 다양한 관계의 심부를 들여다보며 작가가 말하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최윤의 소설은 기억을 되살린다. ‘나’의 기억 속에서 타인을, 타인의 기억 속에서 ‘나’를 되살린다. 기억을 한 바퀴 돌아, 혼란한 시간의 구속에서 벗어난 인물들은 과거에서, 현재에서, 미래에서 새로 씌어진다. 최윤의 많은 작품에서 보듯, 죽음과도 같은 고독 상태에서 그리움과 갈구로 시작된 화자의 기록은 타인을 향하고 타인을 이해함으로써 끝내 ‘나’를 찾는 여정이다.
작품의 해제를 쓴 문학평론가 조연정은 말한다. “누군가의 비밀 같은 삶을 기억해주는, 누군가의 부재를 영원히 고통 속에서 잊지 않는, 서로를 살리는 우정을 나누는 관계”, 그리하여 “최윤의 소설이 우리에게 내내 보여준 것은 이러한 돌봄의 마음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최윤 소설의 독백들은 자신에 대한 말하기를 통해 결국 타인의 마음을 더듬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다시 읽는 최윤의 소설은 삶의 비극 뒤에 감춰진 사랑의 힘을 돌이켜 다시금 세상으로 나아가게 하는 간곡한 우정의 지표다.
때로 사람들로 하여금 무언가 쓰도록 만드는 이유는 이토록 지독히 단순하다. 매순간 죽음이 엿보이지 않는데도 꼭 쓸 필요가 있을까. 누구나 완전히 사라져버리지는 않을지도 모른다는 착각을 가지고 쓴다. (최윤, 「왜 쓰는가」, 『수줍은 아웃사이더의 고백』, 문학동네, 1994, p. 205.)
■ 책 속으로
미소가 지워져버린, 이제는 무표정하게 떠올라오는 아름다운 사람의 얼굴까지. 이 마지막 얼굴은 그 빈자리의 가장자리를 더 깊고 넓게 패게 했을 뿐. 어떤 얼굴도 그 빈자리를 메워주지 못한다.
[……]
그래도 그녀는 이 마지막 얼굴로 잠시 되돌아온다. 갑작스럽게 등장해 의심해보기도 전에 요지부동으로 자리를 잡는 하나의 확신이 그녀 몸속에 한 줄기 차가운 바람을 일으킨다. 「굿바이」(pp. 33~34)
그러나 불가지론과는 무관하게 과학의 세계는 늘 예상 외의 놀라운 결과를 연출하며 이 앞에서 과학자는 한계성과 무한성이라는 심히 아름다운 상반된 우주의 법칙을 마주하게 된다. 그때 과학자는 자신이 질문을 잘못 던졌음을, 다른 방식으로 질문을 던져야 함을 인정하는 것을 배운다. 「당신의 물제비」(p. 87)
어느 날 아침, 머릿속 가득히 한 곡의 이중창이 채워져 있었다. 머릿속 작은 우주뿐 아니라 방 안 가득히, 도시 가득히 그리고 저 먼 우주까지 가득히. 그것은 여느 상쾌한 이른 아침 휘파람 곡으로 되어 입술 사이를 새어 나오는 작은 행복의 표시 같은 것은 아니었다. 때가 지나가버린 유행가 가락이며, 음악이라기보다는 부르짖음에 가까운 그런 이중창. 「워싱턴 광장」( p. 91)
아, 기분 좋은 장소에 대해서라면 서울에서 편안하고도 그들의 마음의 상태에 잘 맞는 장소를 그녀만큼 잘 고를 줄 아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그녀가 택하는 장소는 다방이건 술집이건, 어떻게 지금까지 이곳을 발견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들이 자주 지나치는 거리의 아주 평범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그러나 꼭 인상에 남을 만한 한 가지 특징들을 가지고 있는 곳. 기억에 남을 정도로 편안한 등받이가 있는 좌석이라든지, 각별한 장식이나 혹은 독특한 모양의 찻잔…… 그녀는 그런 것을 잊지 않고 지적했고, 그 방면에 다소간 둔감한 그 같은 사람도 얼마 후에는 말을 거들 정도는 되었다.「하나코는 없다」(p. 173)
“그렇게 날 몰라요?”라고 전화로 말하던 하나코의 음성은 가끔 유령의 목소리처럼 그의 귓가에 울리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런 종류의 질문에 대답하기에 그의 삶은 너무 원대한 이유로 분주했다. 「하나코는 없다」(p. 192)
진행자는 옆으로 물러서고 J는 미리 연출된 율동을 그리면서 준비된 테이블에서 카드 마술을 시작한다. J의 동작과 표정, 손놀림, 모두 아름답다. J가 저렇게 아름다운 것은 그 애가 살아남았기 때문이다. 「동행」(p. 390)
■ 차례
회색 눈사람
당신의 물제비
워싱턴 광장
속삭임, 속삭임
하나코는 없다
열세 가지 이름의 꽃향기
밀랍 호숫가로의 여행
굿바이
동행
분홍색 상의를 입은 여자
해제
부재증명의 우정 | 조연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