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트 솔티

황모과 소설집

황모과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24년 11월 22일 | ISBN 9788932043388

사양 변형판 124x188 · 304쪽 | 가격 17,000원

책소개

“누군가와 연결되지 못하면
아무리 많은 말을 알아도 허전했다”

한국과학문학상, 2021·2024 SF 어워드
양성평등문화상 신진여성문화인상 수상 작가
한국 SF의 미래, 황모과 두번째 소설집

2019년 한국과학문학상 중단편 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한국 SF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 작가 황모과의 두번째 소설집 『스위트 솔티』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수상 당시 “소설의 본질이라 할 수 있는 ‘감동’을 선사”(김보영 소설가)했다는 찬사와 함께 작품성과 주제의식 모두 인정받은 그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만 했던 인물과 사건을 재조명하는 작업을 꾸준히 해오고 있다. 특히 자신이 속한 국가와 집단으로부터 외면받아온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위해 SF적 장치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작품들은 과거의 역사를 돌아보고 오늘날 현실에 비판적으로 접근한다.
이번 소설집 『스위트 솔티』에서 황모과는 삶의 터전을 떠나 이방인이 되어야만 했던 인물들을 ‘사라지는 존재’가 아닌 여전히 ‘남겨진 존재’로 그리고 있다.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정체성의 혼란을 겪어야만 했던 이들은 사회가 자신들을 비정상적으로 성장하게 만들거나 혹은 시대 지체자로 만들 때 혹은 아예 늙고 병들기만을 바라며 기억을 왜곡하고 조작하려 할 때조차도 자신의 고유함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한다. 앞서 세상을 떠난 이들에 대한 죄책감과 살아남았다는 사실에 대한 허무는 자기 존재의 대한 물음과 세상에 대한 의문으로 이어진다. 시공간의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인간성의 회복과 희망적인 미래를 말해온 황모과는 개개인 모두가 디아스포라가 되어버린 세상에서 사라진 목소리들을 찾아나가며 자신만의 세계를 확장해나가고 있다. 우리 모두가 난민이라는 ‘작가의 말’은 오늘날 인위적으로 형성된 삶의 경계와 무수히 많은 차별의 벽을 허물고 말겠다는 의지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참혹한 세상에서 인생의 단맛과 짠맛을 모두 보여주며 다시금 살아가고자 하는 용기는 불어넣어주는 여덟 편의 이야기가 되어 지금 막 우리에게 당도했다.

르 귄은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을 알고 들판의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남은 사람들도 궁금했다.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지하실과 터널을 마주할 수밖에 없으며 이를 반드시 마주해야만 한다. _「작가의 말」에서


기록되지도 기억되지도 않을 사람들

「오메라시로 돌아가는 사람들」의 ‘나’는 스물여덟에 만화가가 되겠다는 무모한 결심을 안고 도쿄에 도착한다. 어학원이라는 한정된 장소와 불안정한 일자리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체류 기간까지. 한국과 일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화자의 ‘난민성’과 겹쳐지는 것은 뜻밖에도 치매에 걸린 이웃 할머니와 길고양이이다. 할머니의 자식들은 할머니를 고향인 ‘오메라시’로 모시려 하지만 그곳은 군대의 해산과 집단 자살을 종용받은 학살의 터로 공포와 죄책감으로 점철된 장소다. 화자는 자신에게는 일본인 할머니를 책임져야 하는 의무가 없다고 스스로 상기시키지만 “오메라시는 할머니의 트라우마 속에도, 내 현실 속에도, 결국 어디에나 존재하는 곳”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무언가를 은폐하고자 하는 사회는 그것이 ‘개인의 자발적 선택’이기를 밀어붙이”(황유지 문학평론가)려 한다. 「순애보 준코, 산업위안부 김순자」는 전범 국가와 기업이 자신들이 저지른 범죄를 회피하기 위해 조선인 성노예로 살았던 김순자의 기억을 교란시켜 역사를 조작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아소후토 센터는 평생을 사람들의 냉대와 차별에 짓눌려 살아야 했던 김순자에게 필남 오빠라는 가상의 첫사랑을 세뇌시키고, 연구자인 ‘나’는 거짓 증언을 반복하는 그녀가 답답하고 안쓰럽기만 하다. 끔찍한 기억이 남아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기 싫어 울부짖는 일본인 할머니와 가상의 첫사랑 필남 오빠를 일평생 그리워하는 김순자. 살아가는 내내 정체성의 혼란을 겪어야만 했던 이들은 혼자 남겨졌다는 죄책감에 정신착란 증세를 보인다. 이는 개인의 참혹한 과거 혹은 지나간 역사가 아니다. 여전히 오키나와 주민들은 본토와의 노골적인 차별과 미군 기지 주변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고 위안부 문제 역시 일본으로부터 구체적인 사과와 보상을 받지 못한 상태에 놓여 있다. 해결되지 않은 역사와 함께 자란 각 소설의 화자 역시 할머니들을 안쓰럽게 바라볼 뿐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소설은 현실의 무력함을 보여주고 있다.


비정상적인 성장 혹은 시대 지체자가 되는 것

역사가 진실을 왜곡하려 할 때 가장 먼저 피해를 입는 건 다름 아닌 개인이다. 「시대 지체자와 시대 공백」은 기득권에 의해 역사에서 사라져야만 하는 위치에 놓인 개인이 시대 지체가가 되어 다른 세계에 떨어진 이야기를 다룬다. 소설 속 ‘장형철’은 간단한 시력 교정을 통해 약시를 고칠 수 있음에도 눈앞이 보이는 시대가 아닌 자신의 아내와 딸이 기다리는 과거로 돌아가고자 한다. 스마트보디 갱신 센터에서 일하는 나는 ‘장형철’이 지금의 시대에 순응해 건강하게 살아가길 바라지만 “평범하기에 무력함을 느끼는 사람들, 평범한 절망을 아는 사람들이 만들어낸 시대”에서 중요한 것은 완전무결한 스마트보디가 아닌 보이지 않더라도 더 많은 것들을 말할 수 있는 자신들의 ‘진짜 삶’이었다는 걸 차츰 깨닫게 된다.
인류에게는 더는 다른 생명체를 양육할 자원도 여력도 없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타고난 시절」은 탄생 직후 양육 시간을 단축하는 센터에서 자라나는 아이들의 이야기이다. 화자인 ‘나’의 유일한 기쁨과 목표는 아이들을 돌보는 ‘여정 쌤’의 마음에 들어 칭찬을 받는 것이다. 인류의 고효율 성장을 목표로 3년 안에 성장해야 한다는 센터의 존립 취지에 어긋나는 아이들은 퇴행했다는 이유로 퇴소를 해야만 한다. 이곳에서는 조금 느리거나 뒤처지는 아이들은 퇴행자라 불리며 손가락질당하고, 또래보다 빠른 성장을 하는 아이는 견제 대상이 된다. 소아과로 이동이 결정되면서 퇴소를 하게 된 화자는 그간의 센터에서 시뮬레이션을 통해 그려왔던 모든 게 허상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두 편의 소설은 미래의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하지만 결코 먼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 사회는 급속도의 산업화로 몸살을 앓았음에도 여전히 끊임없는 경쟁과 시시각각 매겨지는 순위 속에서 허상의 성장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이다. 개인이 사회의 요구에 따라 비정상적으로 성장하기를 바라는 세계에서는 아무런 미래도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소설은 예리하게 꼬집는다.


여성의 적극적인 욕망 실현과 인간을 찾아온 여행

온라인 성 착취물 피해자 ‘수빈’은 가해자인 남편과 공범들보다 더 큰 형벌인 40년간의 ‘수면형’을 치른 뒤 신부 양성 학교 ‘요조 브라이덜 하이스쿨’의 화장실 청소부로 빙의한다. 자신이 떨어진 세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수빈은 학생들에게 자신이 지어낸‘이야기’를 들려준다. 운이 나쁘면 중년 남성의 열여덟번째 부인이 될 수도 있다며 ‘천부적 남성권’을 운운하던 소녀들은 도서관도 책도 없었던 학교 안에서 스스로 이야기를 만들고 동인지를 발행하면서 자기 자신의 숨겨진 욕망에 눈을 뜬다. 이들이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목적지는 가부장제가 만들어낸 환상 속의 요조숙녀가 아닌 “트집잡히고, 비난당하고, 겁박당하고, 탄압받고 박해받다 처형당해도 절대로 죽지 않는 전설의 마녀”이다. 소설은 여성이 자신의 솔직한, 때로 속물적인 욕망을 확인하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다양한 여성 서사와 여성 욕망의 가능성을 견지한다.
「여행이 다시 당신을 찾아옵니다」는 팬데믹 이후 인간을 대신해 여행을 하고 화면을 송출하는 인공지능 로봇 ‘나그네’의 이야기를 다룬다. 한 여행자의 삶의 태도를 마음속에 고스란히 품게 된 나그네는 오랫동안 여행 대리인으로 일해오면서 이용자의 마음을 세심하게 살피게 된다. 하지만 인간은 자신을 대신해 여행을 다니는 로봇을 함부로 발로 걷어차거나 폐기하는 걸 서슴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설은 “여행이 다시 당신을 찾아”온다고 말한다. 잠시 엿본 모든 순간이 로그에 새겨지는 ‘나그네’의 목적지가 “데이터가 손상되거나 혹은 무가치해질 때까지, 대리할 여행이 없어질 때까지, 사람들이 여행지로 돌아올 때까지” 모든 장소를 포함한다는 점에서 인간의 미래의 명암을 모두 조명하고 있다. 두 편의 소설은 인간이 자신들의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타인 혹은 사물에게 환상을 강요하거나 희생을 요구해왔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결국 가장 중요한 것은 소녀와 로봇 개개인의 욕망이라는 점에서 인간의 욕망은 하나의 시대적 가치나 기술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다시 펼쳐지는 모험의 세계

「나의 새로운 바다로」는 인간에 의해 멸종 위기에 놓인 벨루가 무리의 ‘앵지’와 인간에 의해 제작된 로봇 벨루가 ‘벨카’의 유대와 모험을 다루고 있다. 뇌사 상태에 빠진 딸의 뇌를 AI와 결합해 로봇 벨루가를 만든 연구자 ‘엄마’는 ‘벨카’의 생명과 안전을 핑계로 자신과의 일상이 분리되기를 거부한다. 하지만 벨카가 자신과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리로 받아들이는 벨루가 무리와 ‘앵지’와의 긴밀한 사랑과 우정을 보고 서서히 독립할 수 있도록 독려한다. ‘벨카’는 자신의 이름이 아닌 죽은 딸의 이름을 부르는 ‘엄마’에게 상처를 받고 벨루가도 로봇도 인간도 아닌 자기 정체성을 두고 괴로워한다. 하지만 자신의 곁에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 자체를 사랑해주는 ‘앵지’에게 용기를 얻어 스스로 모험을 떠나게 된다. 인간과 로봇이 서로 유대감을 쌓을 수 있다는 상상을 넘어 로봇과 동물이 서로 공명하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또 다른 희망을 제시한다.
표제작 「스위트 솔티」는 엄마 배 속에서 킬링필드를 경험한 캄보디아 출신의 친구로부터 영감을 얻어 탄생했다. 주인공 ‘무티하라’는 배에서 태어나 자란 보트피플로 자신은 엄마의 자궁에 있었을 때부터 배 위에서의 흔들리는 삶을 좋아했다고 생각한다. 바다 위에서 태어난 그는 배에서 여러 엄마의 손을 타며 자라게 된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엄마의 나라 ‘바다 거품’은 언제나 상상 속 장소일뿐이지만 달이 유난히 크게 뜬 밤이면 ‘무티하라’의 머릿속에는 고향을 그리워하는 노래가 들려온다. 배에서 다섯 개의 언어와 다채로운 사고방식을 배운 ‘무티하라’는 이곳이 아닌 다른 삶의 터전을 찾아 나서지만 정작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른다. 땅 위에서는 배를 그리워하며 어지럼증에 시달려야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신에게 짜고 매운 사람이라는 의미의 ‘솔티’라는 애칭을 붙여준 ‘린다’를 만나 서로에게 삶의 욕망과 타인과의 관계에 대해 배우게 된다. 이렇듯 황모과의 소설은 진정한 모험은 새로운 곳을 찾아 떠나거나 발견하는 것이 아닌, 낯선 이와 만나 자신의 세계관을 확장시켜나가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우연히 만나 시작된 세계에서 우리는 반드시 타인에게 상처를 받고, 입히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 모든 순간이 다디달다고 할 순 없지만, 함께 울고 웃을 사람이 없다면 모험은 시작될 수 없다. 이렇듯 작가 황모과는 아픈 역사와 현실의 막막함, 인간의 이기심을 모두 보여주면서도 다시 모험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이 책, 『스위트 솔티』는 황모과 SF 세계의 또 다른 모험의 시작이 될 것이다.

우리 모두가 우연으로 이 세계에 떨구어졌다. 그리고 우리는 타자성으로 인해 저마다 깊은 상처를 입었다. 우리는 모든 경계에 책임이 있고 우리에게는 재생이 필요하다. 황모과는 지금 경계에 귀 기울이고 책임에 대하여 쓰는 중이다. 그것이 그가 경계를 책임지는 방식이다. 경계를 지워나가는 방식이다. 그는 지금 현실과 SF를 온몸으로 가로지르는 중이다.
_황유지, 해설 「이토록 다디달고 짜디짠 SF와 현실 가로지르기」에서


■ 작가의 말

이십대 후반부터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다. 괴롭고 우울한 날엔 늘 자책과 자학으로 가득한 일기를 썼다. 2017년 즈음부터 한국 SF소설을 읽으면서 일기를 소설로 확장해보기 시작했다. 자기반성이나 성찰이란 명목의 체념이 조금씩 내 안에서 이름을 바꾸게 된 것은 SF소설을 쓰면서부터였다. 그중에서도 이번 소설집 맨 앞에 실은 「오메라시로 돌아가는 사람들」은 소설 집필의 전환점이
된 작품이라 각별하다. 제목을 보고 알아챈 분들도 있겠지만 어슐러 K . 르 귄의 단편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의 오마주다. 르 귄의 작품에 대한 소시민적 응답이기도 하다. 르귄은 오멜라스를 떠나는 사람들이 자신이 가고자 하는 곳을 알고 들판의 어둠 속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남은 사람들도 궁금했다.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지하실과 터널을 마주할 수밖에 없으며 이를 반드시 마주해야만 한다.
(후략)
2024년 11월 황모과


■ 책 속으로

할머니는 지금도 전쟁의 한복판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오메라시로 돌아가길 그토록 거부했는데, 포기한 걸까? 이제 모두가 귀찮아하는 존재가 되어 자포자기하는 마음이 된 걸까? 가지 않겠다던 결심까지 잊어버린 건 아닐까? 할머니의 눈은 매서웠다. 자신의 처지를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나 같은 이웃을 원망하는 듯했다. 할머니는 단출한 짐 옆에 놓인 짐처럼 한참 서 있었다. 나는 작은 창문으로 할머니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봤다.
―「오메라시로 돌아가는 사람들」

나는 장형철 씨에게 곧장 동의서 작성을 독촉했다.
“시술 비용은 미래복지부 긴급구호사업, 시대 지체자 지원 보조금으로 전액 충당됩니다. 본인 부담은 일체 없어요. 아시겠죠? 이 시대의 일원이 되겠다는 이 확약서에 서명하시면 바로 시술을 집행합니다. 시술 후 통증은 거의 없고요. 3일 이내에 완료됩니다. 동의하시겠습니까?”
―「시대 지체자와 시대 공백」

누군가와 연결되지 못하면 아무리 많은 말을 알아도 허전했다. 마음이 허전할 때면 노랫소리가 더 크게 들려왔다.

“사랑하는 나의 고향 한번 떠나온 후에
날이 가고 달이 갈수록 내 맘속에 사무쳐
자나 깨나 너의 생각 잊을 수가 없구나.”
―「스위트 솔티」

“다 가짜라고? 누가 그런 짓을……?”
“아소후토 센터가요.”
“아니, 아니, 이렇게 생생한데? 사랑한 기억도, 다리를 자르고 싶도록 미워했던 기억도, 날 다시 보러 오지 않아서 용서하지 못했던 마음도, 그래도 어딘가에서 죽지 않고 살다가 아들딸 손자 보고 죽었다기에 다행이라고 마음 쓸어내린 것도 어제 일처럼 또렷한데?”
모든 게 흐릿한 그 시절 기억 중에 또렷한 것이 있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순애보 준코, 산업위안부 김순자」

“아름아, 요즘 어때? 잘 성장하고 있니?”
“음, 잘 모르겠어요.”
그즈음 나는 습관적으로 솔직한 마음을 표현하려 애썼다. 하지만 솔직하게 마음을 드러낼 때 센터 사람들이 모두 낙담한다는 것을 점점 알아챘다. 즉각 분별력을 발휘해 모르겠다는 입버릇을 중단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내가 그들의 말을 이해했다 여기고 안심했다. 단지 모른다는 사실을 밝히지 않았을 뿐인데.
―「타고난 시절」

∈ 바다가 너무 미지근해졌어. 북극까지 더워지면 그때 우린 어디로 가야 할까……? ∋
나쁜 예감이 들수록 앵지와 보내는 시간은 더욱 짧게 느껴졌다. 나와 앵지는 예정된 이별을 일부러 무시했다.
∈ 근데 벨카, 인간 집, 아니 엄마 집엔 이제 매일 밤 가지 않아도 되는 거야? ∋
“응, 엄마도 좀 외로워지는 연습을 해야 할 것 같아.”
나중에 영상을 볼 엄마에게 잘 들리도록 나는 일부러 큰 소리로 말했다.
―「나의 새로운 바다로」

“베키야, 너 마녀가 누군지 알아?”
화장실에 드러누워 동인지 수익금을 세는 베키에게 물었다. 베키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세상을 미혹에 빠뜨려서 화형당하는 여자.”
[……]
“마녀는 영원히 죽지 않는 여자를 말해. 트집 잡히고, 비난당하고, 겁박당하고, 탄압받고 박해받다 처형당해도 절대 안 죽는 여자 말이야.”
―「브라이덜 하이스쿨」

배터리 방전 예상 시간이 떴다. 나는 로커 룸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서둘렀다. 본체가 방전되거나 사고를 당하기 직전에 다른 본체로 데이터를 전송하는 방법도 있지만 나는 한번 접속한 이상 소중하게 다루고 싶었다. 버려져도 상관없는 존재이지만 함부로 버려지고 싶지 않았다. 여행이 내게 다양한 역설을 가르쳐준 셈이었다.
―「여행이 다시 당신을 찾아옵니다」

목차

■ 차례

오메라시로 돌아가는 사람들
시대 지체자와 시대 공백
스위트 솔티
순애보 준코, 산업위안부 김순자
타고난 시절
나의 새로운 바다로
브라이덜 하이스쿨
여행이 다시 당신을 찾아옵니다

해설│이토록 다디달고 짜디짠 SF와 현실 가로지르기 · 황유지
작가의 말│일기의 끝에서 다른 세계와의 중첩을 꿈꾸며

작가 소개

황모과 지음

2019년 한국과학문학상에 「모멘트 아케이드」로 중단편 부문 대상을 수상하며 이름을 알렸다. 단편 「증강 콩깍지」가 MBC 시네마틱 드라마 SF8로 제작되었다. 소설집 『밤의 얼굴들』, 중편소설 『클락워크 도깨비』가 있다. 2021년 SF어워드를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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