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부러워하는 거위 말고
누구나 좋아하는 거위”
청소부 거위와 함께
익숙하고 낯선 배수연의 원더랜드로!
배수연이 만든 시 세상에 나 있는 길도 오래 걷기만 한다면 어디든 도착해 있을 것이다. 어디로 가겠다고 미리 짐작하지 말고, 어디든 상관없다고 걷다 보면, 익숙했던 감각에서 풀려나 길과 길 사이를 유영해 나가는 당신 옆으로 지나쳐 가는 시적 화자들과 친구들을 알아보게 될 것이고, 그 이상한 낯섦에서 오는 소중한 마음과 아름다움을 만날 것이다. 그런 것들에 대한 호의적인 상상이야말로 예술을 살아남게 한 가장 중요한 미덕이 아닐까. 배수연의 원더랜드는 그렇게 걸어보길.
―김영임, 해설 「원더랜드의 “거위들”」에서
“좋은 팔로워, 현명한 팔로워” 거위와 함께
배수연의 원더랜드로 떠나는 여정
특유의 회화적 상상력과 경쾌한 에너지로, 삶의 어두운 부분마저 따뜻하게 감싸 안는 시인 배수연의 세번째 시집 『여름의 힌트와 거위들』이 문학과지성 시인선 609번으로 출간되었다. 2013년 『문학수첩』 신인상을 수상한 배수연 시인은 지금까지『조이와의 키스』(민음사, 2018), 『쥐와 굴』(현대문학, 2021) 두 권의 시집뿐만 아니라 2019년에는 청소년 시집 『가장 나다운 거짓말』(창비교육)을, 올해에는 산문집 『요정+요괴, 찐따』를 출간하며 11년이 넘는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꾸준하고 활발한 작품 활동으로 자신의 시 세계를 공고히 만들어왔다.
특히 두 권의 시집에 각각 등장하는 ‘조이’와 ‘쥐’라는 시적 화자는 그의 시를 따라 읽는 데 주요한 안내자 역할을 했는데, 독자들은 한 권의 시집 안에서 심술궂거나 무례한 유년을 지나 삶을 긍정할 줄 아는 어른으로 자라는 시적 화자의 성장을 지켜보며 이 세계를 향한 시인의 따뜻한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슬픔과 폭력 가운데에서도 삶 쪽으로 윙크를 보내는 조이, 절대적 존재 앞에서 방황의 시간을 보내지만 결국 어른스러운 모습을 보여주는 쥐의 모습은 시인의 밝고 경쾌한 태도와 유머를 만나 “언어를 통한 구원의 가능성을 보여주”(시인 김근)기에 충분했다. 많은 독자와 평단이 배수연의 시를 주목하고 지지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번에 출간하는 세번째 시집 『여름의 힌트와 거위들』에 이르러 시인은 익숙한 듯 낯선, 또 다른 배수연 원더랜드로 향하는 새로운 길을 펼쳐 보인다.
모두네 집에 가면
모두 혼자 있다
우편함은 없고 회전문이 있는데
슈캉슈캉 바람에 귀가 접힐 정도로
그렇게 빠른 회전문은 처음이었다
거위가 먼저 들어가고
두더지가 들어가고
머뭇거리는 내 엉덩이를 누가 발로 차주었다모두네 집은 문보다 창이 몇 배로 크고
문보다 복도가 훨씬 많다
복도에서부터 집사와 요리사, 청소부와 정원사를 위한
면접과 리더십 교육이 진행된다
누구나 리더가 될 수는 없어요
저는 좋은 팔로워, 현명한 팔로워예요
왼쪽 복도에서 또랑또랑 거위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 회전문은 자동문이 아니었어
누군가 끊임없이 들어오고 나간다 빠르게
유리에 손이 붙었다 떨어진다 맥박처럼또 다른 복도에 줄을 선 채로
거위 나 두더지는 「클레먼타인」을 불렀다
모두 혼자 있었지만
함께 들었다
―「모두네 집」 부분
시집의 처음에서 가장 먼저 기다리고 있는 것은 “회전문”이다. 배수연의 원더랜드로 가기 위해서는 우선 “모두네 집”에 있는 “회전문”을 통과해야 한다. “모두”라는 누군가가 있는 곳이자, 일정한 수효나 양을 기준으로 그 전체를 뜻하는 “모두”가 있는 곳. 두 가지 의미를 가진 하나의 단어가 만들어낸 이 공간에서 독자들은 언어유희를 넘어 기존에 알고 있던 세계가 확장되는 특별한 경험을 하게 된다.
“모두네 집”에서 명확한 경계는 걸림돌이 될 뿐이다. 혼자인 “모두”가 있는 곳이자 “모두”가 혼자인 곳이기에, 경계는 흐릿하고 세계는 겹쳐진다. 이곳에 “우편함”이 필요 없는 이유는 ‘직접’ 경험해야 하기 때문이다. “회전문”을 열고 들어가는 경험을 할 때에 비로소 유의미해지는 세계가 “회전문” 너머에 있다. “누군가 끊임없이 들어오고 나”가는 일이 이 세계의 “맥박”이다. 그러니 배수연의 원더랜드에 함께할 준비가 되었다면 기꺼이 “회전문”을 밀고 들어가야 한다.
“모두 혼자”이지만, 결코 혼자는 아닐 이 여정에는 “회전문의 박자를 세는” 두더지, “좋은 팔로워, 현명한 팔로워”인 거위가 함께다.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뿐이다. 거위는 나를 이끄는 리더가 아니라, 내 옆에서 힘이 되어주는 팔로워라는 것. 그리고 회전문의 박자를 세는 두더지의 박수. 혼자 남은 슬픔을 담은 노래 「클레먼타인」을 부르게 되더라도 이 노래를 함께 듣는 이가 있다는 것을 잊지 않을 때, 우리는 이미 이상하고 낯선 원더랜드에 들어와 있는 것일 테니.
“불행과 불행한 삶은 다른 거지”
고통의 잔해를 청소하는 거위
“좋은 팔로워, 현명한 팔로워”라는 자기소개에 걸맞게, 거위는 시집 전반에 걸쳐 시적 화자 ‘나’와 정서적 거리를 친밀하게 유지하면서 그 옆을 지킨다. 잠든 ‘나’의 곁에 향기 좋은 모과를 가져다 놓거나(「거위와 모과」) “나란히 책을 읽”거나(「여름의 힌트와 거위들 1」) “여행 계획을 세우며 삼각지를 걷는”(「컵켘」) 식이다. 뿐만 아니라 거위와 ‘나’의 관계는 어린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어린 시절 ‘나’는 새끼 거위들과 함께 욕조에 몸을 담그고 목욕을 했고, 무럭무럭 자란 그 거위 중 “이제 나와 욕조에 들어가길 좋아하는 거위”는 한 마리뿐이다(「거위와의 목욕」). 이쯤 되면 거위는 ‘나’의 유년에 남겨진 또 다른 자아로 보이기도 한다.
거위를 친구라 여기는 이가 많다 그 이유는
거위가
건강하거나 건강하지 않아서이다
뚱뚱하거나 비쩍 말라서이고
못생기고 예뻐서이고
구덩이에 빠졌거나 빠져나와서이다
으훼훼 웃다가 으엉으엉 울어서
이혼했다가 결혼해서
들어주다가 말해서
말하다 들어주어서이다[……]
누구나 부러워하는 거위 말고
누구나 좋아하는 거위
―「반짝이는」 부분
거위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어도 상관이 없다. 누가 부러워할 만한 모습일 필요도 없으며, 거기 있다는 것만으로 반짝이므로 거위는 “누구나 좋아하는” 존재이자 친구이다. 청소부가 되고 싶은 우리 모임에서 이미 청소부인 거위는 모임의 회장이기도 하다(「정기 모임」).
이번 시집에서 시인이 중요하게 다루는 것이 ‘청소’인데, 거위의 역할이 바로 청소를 하는 것이다. 어쩌면 시인은 유년의 불행으로 삶에 남은 더러운 먼지와 얼룩을 청소하기 위해, 거위가 사는 또 다른 세계가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시인이 원하는 것은 “청소가 필요 없는 세상”(「컵켘」)이 아니다. 삶에 닥쳐오는 다양한 모양의 불행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고무장갑과 막대 걸레, 레몬 향 세제”(뒤표지 글)를 들고 청소하는 과정도 삶의 다음 장으로 넘어가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 여기서 ‘청소’는 ‘불행’을 ‘불행한 삶’으로 이어지지 않게 하기 위한 과정이며, “누구도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기 위해/기억에는 의지가 필요”(「독서 모임―『여자전』」)하다고 말하는 시인에게 ‘거위’는 그 의지가 발현된 또 다른 자아일 것이다. 이 거위를 “불행한 낙관주의자”(「여름의 힌트와 거위들 2」)라고 부른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거위는 불행을 가졌지만 거위의 삶은 불행하지 않다는 것. 그는 이미 청소부이니까.
배수연 시인이 앞선 시집에서 담아왔던 성장담은 이번 시집에서 전혀 다른 차원으로 옮겨간 듯 보인다. 유년 시절 ‘나’의 자아가 현재의 ‘나’를 다음 삶으로 넘어가게 하는 특별한 성장담. ‘청소’라는 익숙한 방식으로, ‘불행’과 ‘불행한 삶’을 분리시키면서, 유년의 내가 어른의 나를 다시금 성장하게 하는 기적 같은 이야기가 지금 배수연의 원더랜드에서 펼쳐진다.
■ 책 속으로
거위들과 누워서 책을 읽었다
사실은 건축가가 아니라 작곡가가 되고 싶었다는 이야기였다
사실은 시인이 아니라 화가가 되고 싶었다는 이야기였고
사실은 소설가가 아니라 영화감독이 되고 싶었다는 이야기였다그거나, 그거나
퐁퐁이 없으면 거위들은 샴푸로 설거지를 한다그날은 약속한 날이었다
높은 빌딩 근사한 곳에서 밥을 먹는데
거위 하나가 일찍 와 있었다
여기 청소 일 알아봤어
번호가 적힌 쪽지를 가방에 접어 넣었다이건 오크라, 이건 셜랏, 오! 산초와 루바브
그릇은 비행접시처럼 커다랗고 우리는 둥둥
모르는 것들만 골라 먹었다거위들과 나란히 책을 읽을 때
거지의 개와 과부의 고양이
그런 건 우화였다행복한 손님이 많은 곳에서는 청소하지 마
차라리 종합병원은 어때?
사실은 이렇게 말하고 싶었다
부끄러웠고나와 거위들의 부끄러움은 다르지만
함께 책을 읽었다아무도 부탁한 적 없어서 계속할 수 있었다
―「여름의 힌트와 거위들 1」
거위들은 줄을 잘 선다 뒤뚱거리는 것은
당신 기분이라
어느새 당신은 광장이고
광장은 모두에게 아지랑이를 일으킨다
거위들 부리 사이로 침을 흘리며,
광장! 어느 미술관은 이를 두고두고 이야기하지
아주 커어다란 현수막을 걸고
순풍에 헛간 두어 채 옮겨보려고
인부들은 두꺼운 책을 잔득 찍어낼 거야, 하지만 모두가 좋아하는 것은
과자! 미술관 로비에 쌓인 초콜릿 동전 더미
동전을 제일 많이 훔친 거위가 저어기 가네
아지랑이 사이로 고개를 돌리며― 꽉꽉(이봐),
꽉(고양이 오금에는 수염이 있지)!
오금에 수염이 나는 기분은 모르겠지만
뽑히는 기분은 알 것 같은 한낮85톤의 빙하 무너진다
아주 민감한 부분이 뽑히는 기분으로
무릎을 굽히는 거위들, 오
불행한 낙관주의자
―「여름의 힌트와 거위들 2」
의자가 필요해
침대가 필요해
하지만 바닥이 없다면……(걷지도 못하겠지)
화초를 사며 5천 원을 건넨다
거스름돈은 돈이지만 귀찮아하는 사람도 있다
해 지는 언덕 위에 선다
눈을 감았다 뜬다 반짝이고
짤랑짤랑
여기 잘못된 값이 있어요
동네가 잔돈처럼 보일 무렵
나비 떼가 번쩍 곰을 들었으면 좋겠다
―「산책」
■ 시인의 말
오랫동안 안과 밖에서 청소를 한 정옥에게.
그리고 청소부가 되고 싶은 나와 거위들에게.
2024년 11월
배수연
■ 뒤표지 글
거위 1 나는 돌이 될 수도 있고 풀이 될 수도 있다 물이 될 수도 곰이 될 수도
거위 2 나는 상인이 될 수도 있고 목수가 될 수도 있다 배우가 될 수도 학자가 될 수도
거위 3 여기 고무장갑과 막대 걸레, 레몬 향 세제가 있다
거위 4 나는 청소를 하러 간다
■ 차례
시인의 말
1부
모두네 집
새 하늬 마 높
스윙 앤 스냅
여름방학
컬렉터 모임 1
컬렉터 모임 2
광대 없는 마을
모자의 기분
마리골드
거위와 모과
2부
검은 욕조
여름의 힌트와 거위들 1
정기 모임
진저
컵켘
여름 캠프 1
여름 캠프 2
펼쳐진 책
개발팀
반짝이는
3부
간밤에
곰에서 왕으로 1
곰에서 왕으로 2
거위와의 목욕
여름의 힌트와 거위들 2
여름 케이크
우리는 무리
누
시 쓰는 시간
출항
지구에서
건강
4부
브루나이의 스팀
나와 너와 누
포도의 시간
누와 누
일요일
해변
밤의 사슬
산책
누와 누와 누
5부
흰 기둥 잇기
진의 먼지
20세기 악어
바늘땀
없는
독서 모임
가수
개념 학습
예술가
해설 원더랜드의 “거위들”·김영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