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날.
깊은 슬픔이 무엇인지 알아버린 것만 같았던 날.
내 것인 줄 몰랐던 감정이 내 것임을 알게 된 날이었다”
삶의 굽잇길에서 마주하게 되는 슬픔의 첫 순간들
짙은 어둠 속 터널을 지나 그 순간들을 기억하는
기찻길 마을 다섯 아이의 이야기
작가 손홍규의 연작소설 『너를 기억하는 풍경』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2001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수상하며 데뷔한 그는 이상문학상, 백신애문학상, 노근리평화문학상 등 굵직한 문학상을 두루 휩쓸며 한국문학에서 독보적인 색채와 탄탄한 서사로 그 위상을 오래 지켜왔다. 그간 낯설고 팍팍한 도시의 주변부, 그곳에서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가난하고 지질한 인생들을 통해 “사라져가는 공동체적 삶과 인간성 소멸의 현실을 풍자적으로 그려”냈다고 평가받는 그는 이번 작품에서는 이야기의 무대를 1980년대 어느 기찻길 시골 마을로 옮겨왔다.
기찻길을 사이에 두고 위아래 마을에서 나고 자란 다섯 아이의 성장담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내는 이 책은 “너를 기억하는 풍경”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짙은 어둠 속 터널을 지나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그때 그 시절을 돌아보고 기억하는 어른들을 위한 성장소설이다. 다섯 명의 또래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그들의 이야기를 다섯 편의 작품으로 묶어낸 연작소설로, 우리가 삶의 굽잇길에서 마주하게 되는 슬픔의 첫 순간들을 작가 특유의 진중하면서도 유려한 문체로 섬세하게 풀어냈다. 장편소설 『예언자와 보낸 마지막 하루』 이후 3년 만이고, 소설집으로는 『당신은 지나갈 수 없다』 이후 4년 만에 출간하는 이 책은 역사와 인간에 대한 진지한 탐구를 통해 소설 세계에 깊이를 더해왔던 작가 손홍규의 초심을 반영하는 문학적 바탕일지도 모른다. 때로는 어른보다 더 어른스럽지만 유년기의 순진무구함을 고이 간직하고 있는 아이들의 성장담이 흥미롭게 펼쳐지는 이 책은 상처와 아픔, 슬픔이라는 인간 본연의 존재론적 문제를 1980년대 스러져가는 농촌의 소슬한 풍경 속에 녹여내며 가난과 모순, 차별과 폭력이라는 시대의 굴곡과도 자연스럽게 버무려놓았다. 작품의 주제의식을 시대적 맥락과 연결 지으면서 특유의 의뭉스러운 유쾌함으로 읽는 재미를 놓치지 않는 것은 작가의 탁월한 재능이 돋보이는 지점이다.
슬픔이야말로 우리를 철들게 한다지만 이별과 상실, 미움과 혼란, 죽음과 같은 삶의 비극적 국면은 아이들에게 그 자체로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마음속에서 낯선 감정이 생겨나고 그 감정의 정체를 마침내 깨닫게 된 날.” “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바로 그날은 누구에게나 평생 잊히지 않는 기억일뿐더러 때로는 깊은 상흔을 남기기도 하며, 무릇 유년기가 막을 내리고 삶에 돌이킬 수 없는 변화가 닥쳐오는 것을 감지하게 되는 결정적 순간일지도 모른다. 시대적 배경은 다르지만 세대를 뛰어넘는 존재론적 고민과 문제의식이 작품 곳곳에 포진해 있다는 점에서 같은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청소년 독자들의 공감을 자아내기에도 충분하다.
“미약하게 감지했던 삶의 비밀 같은 게 꽃향기를 담은 밤공기가 콧속으로 와락 밀려 들어오는 순간처럼” 덮쳐오는 그 시기를 서정적이고도 날카롭게 포착해낸 이 책에서 독자들은 어느덧 중견작가의 반열에 올라선 손홍규의 성숙하고 농익은 글쓰기를 확인할 수 있으니, 작품 내내 따스한 시선을 견지하는 작가의 온기가 여운처럼 남는다.
“다시 터널 앞에 섰다. 내가 잊은 풍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알게 되었다. 어떤 기대도 품지 않고 기억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커다란 기대임을” 「작가의 말」에서
삶이 슬프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
세대를 뛰어넘어 우리 모두에게 건네는 위로와 응원
이 책에 실린 다섯 편의 연작들은 지금과는 사뭇 다른 1980년대 기찻길 마을을 배경으로, 다섯 명의 또래 아이들이 초등학교 5학년에서 중학교 1학년에 이르는 시기를 그려냈다.
치매를 앓던 할머니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허둥거리는 ‘수’(「기찻길을 달리는 자전거」), 울창한 대숲에 웅크려 앉아 가느다랗게 늘켜 우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버지를 미워해도 되는 건지 자문하게 된 ‘준’(「어느 날 대숲에서」), 으레 이야기는 행복하게 끝나기 마련인데 삶은 상상처럼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깨우치게 된 ‘영’(「가난한 이야기」), 무덤덤하기 그지없던 가족들이 어딘가에서 얼굴을 돌린 채 울면서 살아왔음을 알아차린 ‘민’(「소가 오지 않는 저녁」), 그리움이란 누군가를 향한 마음이고 잃어버리고 없는 것을 가리키는 단어라는 걸 깨닫게 된 ‘희'(「손금」)까지 이 책에는 예민하고도 혼란한 시간을 겪어내는 다섯 아이의 성장통이 오롯이 담겨 있다. 우리가 삶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슬픔의 첫 순간들을 담담한 어조로 담아내고 있는 이 책은 독자들에게 공감과 더불어 뭉클한 감동을 선사한다.
주인공들 외에도 이 책에는 가족, 이웃, 친구와 같은 주변 인물들이 골고루 생명력을 가지며 작품 속에서 살아 숨 쉰다. 아이들은 친구들과 티격태격 장난이나 풋사랑의 설렘을 나누기도 하고 서로의 비밀을 들키는가 하면, 어른들이 나직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이야기에서 알 수 없는 삶의 비밀을 엿듣기도 한다. 작품은 시종일관 서정적으로, 때론 유쾌하게 전개되지만 그 한편에는 도시로 사람들이 떠나가며 허물어져가는 농촌의 풍경이라든가 폭력적인 아버지, 시위에 나갔다가 정신이 이상해져서 돌아온 형, 미국에 입양된 아픈 동생을 그리워하는 오빠 등 시대의 굴곡과 아픔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그 시절 기적을 울리며 캄캄하고 어두운 터널을 지나가는 기차는 고향을 떠나 도시 주변부에서 고단하고 비틀린 삶을 살아갈 인생들의 서글픈 앞날을 예견하게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삶의 기적을 기대하게 하는 희망을 품고 있기도 하다. 다시 터널 앞에 선 작가는 이 작품에서 오래도록 기억하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말한다.
터널을 지나 미지로 나아가는
너를 기억하고 기다리는 기적 같은 이야기
『너를 기억하는 풍경』의 또 다른 묘미는 내 가족과 이웃, 고향 마을의 풍경과 사건들, 가슴 고이 묻어두었던 감정까지 그때 그 시절을 감질나는 사투리와 능수능란한 언어로 되살려내며 이제는 사라진, 오래되고 아름다운 것들을 새삼 일깨운다는 데 있다. 확독이나 양푼과 같은 가재도구들이며 소소한 먹을거리, 논밭이 펼쳐진 마을 풍경 너머 저 멀리 기적을 울리며 다가오는 완행열차와 연탄을 싣고 나오는 트럭들 사이로 잿빛 분탄이 날리는 연탄공장의 모습까지 지금과는 사뭇 다른 그때 그 시절의 정경이 정겨운 색채로 펼쳐진다. 그 시기를 지나온 어른 세대에게는 나고 자란 터전에 대한 애틋한 추억과 감동을 불러일으키며 청소년들에게는 한층 다양한 문학의 세계를 체험하게 한다. 이렇듯 세대를 뛰어넘는 공감의 장을 마련하는 이 책은 작가 손홍규가 초등학생 딸을 위해 쓴 작품이기도 하다. 묵묵히 지켜보고 응원하는 것. 그 시기를 힘겹게 지나온 우리를 위로하는 동시에 이제 막 캄캄하고 두려운 길로 나서는 아이들을 응원하는 책이다.
“나는 너와 함께 터널 앞에 서 있었다. 너의 이야기가 아닌데도 너는 귀를 기울였지. 이 풍경이 내 슬픔마저 나누어 가졌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듯.
나 역시 너의 풍경이 되어 언제까지나 너를 기억하고 기다리겠지. 네가 오지 않아도 괜찮다. 기적을 기다리는 동안 기적은 이미 이루어졌으니까.” 「작가의 말」에서
■ 책 속으로
수는 명호를 만나면 묻고 싶었다. 이사 간 걸 후회하지 않느냐고. 물론 명호는 어깨를 으쓱하며 이런 일은 어른의 결정이라 후회하고 말고 할 게 없다고 답하겠지만 그래도 묻고 싶었다. 지금까지 잘해준 이유가 누나 때문이었냐고.
수가 느낀 감정은 배신감이었지만 명호가 무얼 배신한 거냐고 묻는다면 달리 대답할 말이 없었다. 뚜렷하지는 않아도 명호에게 의탁했던 무언가를 돌려받고 싶었다. 수가 준 적 없으나 명호가 가져가버렸고 명호가 가져가지 않았음에도 수가 건네준 적 있는 그걸. (「기찻길을 달리는 자전거」 28~29쪽)
시간이 흐른 뒤 많은 이들이 말했다. 동서에 대한 원한이 아무리 깊다 해도 출상하는 날 꼭 그런 식으로 악담을 해야 성이 풀리겠냐고. 참으로 욕쟁이 할머니답다고. 그러나 수는 그런 말을 믿지 않았다. 대신 누군가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는 이들은 미워해서는 안 되는 거라고 믿었다. (「기찻길을 달리는 자전거」 49쪽)
세월이 흐른 뒤에도 준은 그날을 잊지 못했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던 날. 다시 태어났다기보다 방금 태어난 것처럼 혼란스럽고, 그냥 혼란스러운 게 아니라 깊은 슬픔이 무엇인지 알아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던 날. 내 것인데도 내 것인 줄 몰랐던 감정이 내 것임을 알게 된 날이었다. 적어도 그때부터…… (「어느 날 대숲에서」 69쪽)
아버지는 겁쟁이다. 연탄공장 사장에겐 굽신거리고 어머니에게만 고함을 치니까. 그것도 술기운을 빌려야만 하니까. 술에 기대고 싶었다면 어머니가 아니라 연탄공장 사장에게 대들어야지. 그러지는 못하고 어머니만 윽박지르니까. 기타도 못 치고 노래도 못 부르니까. 어머니에게 다정하지 않고 예의 바르지 않으니까. 그런데도 아버지라니. 아버지라니. (「어느 날 대숲에서」 83쪽)
영이 몰랐던 적은 없었다. 인정하지 않았을 뿐이다. 인정하기를 유예한 거였다. 삶은 신비로 가득하므로 섣부르게 인정했다가 후회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지나치게 현실적으로 굴지 않고 삶의 신비가 다가올 수 있도록 기다려주기.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 기회를 자신에게 허락하기. 삶이 슬프지 않은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그 슬픔을 미루고 미룰 뿐. 삶은 미루어둔 슬픔이었다, 영에게는. (「가난한 이야기」 150~151쪽)
무슨 말이든 해봐. 밤이 새도록 해가 떴다가 다시 지도록 바람이 불었다가 그치도록 계절이 바뀌었다가 되돌아오도록 언제까지나……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진대도 이대로 곁에 머물면서 네가 들려줄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테니 무슨 말이든 해주렴. 그래 그렇게…… (「소가 오지 않는 저녁」 194~195쪽)
손은 눈물을 쥐기 좋게 생겼다. 눈물이 차오른 눈을 감고 두 손바닥으로 지그시 눈두덩이를 누르면 손바닥에 눈물이 고이고 그 손바닥을 떼면 손금을 따라 눈물이 흘렀다. 요한이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희는 깨달았다. 손바닥이 왜 그런 모양인지를. (「손금」 228쪽)
수도 언젠가는 알게 될 거였다. 여닝도 그리움으로 읽을 수 있지만 진짜 그리움은 명사가 아니라는 걸. 그리움은 누군가를 향한 마음이고 그 사람을 향해 달려가는 감정이어서 언제나 동사라는 걸. 그러기에 그리움에 가장 가까운 영어 단어는 동사인 미스miss일 수밖에 없음을. 그리워하는 건 잃어버린 것이고 아직은 아니라 해도 결국 잃게 될 것을 가리키므로. (「손금」 229쪽)
■ 차례
기찻길을 달리는 자전거
어느 날 대숲에서
가난한 이야기
소가 오지 않는 저녁
손금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