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기꺼이 그림자의 세계를 방문해야만 한다”
그림자에서 발견하는 세계의 진실과 시대의 초상!
암흑의 우주를 감각할 수 있게 하는 그림자의 자리에서
S-F의 현재를 보다!
그림자를 종속적이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한 우리는 새로운 그림자를 그려볼 수 없다. 성별과 인종, 장애와 계급, 소수와 국외자에게 그런 것처럼. 나는 아예 이렇게 주장하고 싶다. 세계는 사실 그림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그림자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고. 그림자가 전부라고.
―문지혁, 「하이퍼-링크: 걸어 다니는 그림자(들)의 세계」에서
독자들에게 무한한 자극과 지적 상상력을 제공할 ‘S(story)’를 담은 다채로운 ‘F(frame)’로서 2023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첫 선을 보인 <SF 보다> 시리즈가 론칭 2년째가 되는 올해, 지난 6월에 ‘Vol. 3 빛’을 출간한 데 이어 ‘그림자’를 테마로 그 네번째 책을 펴낸다.
단순하면서도 일상적인 하나의 테마가 경계를 넘나드는 작가들의 눈부신 상상력과 만나 무궁무진한 가능성의 세계로 독자들을 안내하는 이 시리즈는 테마와 다각도로 연결되는 ‘하이퍼-링크’, 활발하게 활동하는 작가들의 신작 단편소설, 테마를 관통하여 장르 전반의 흐름을 담아내는 ‘크리티크’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 SF문학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온 문학과지성사는 이 시리즈를 통해 신작 SF 단편을 만나는 즐거움을 제공함과 동시에 활발한 활동을 이어가는 동시대 작가들의 생동감 넘치는 문학적 교류의 현장으로서 한국문학의 스펙트럼을 한층 더 넓혀나가고 있다.
<SF 보다> 시리즈 네번째 책 『SF 보다―Vol. 4 그림자』에는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다섯 작가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해도연의 「오 마이 크리스타」, 김혜빈의 「순환 순수 역학」, 김이환의 「두번째 선악과」, 이종산의 「그림자의 여행」, 돌기민의 「끈끈이」. 이 다섯 편의 작품은 낯설지만 우리의 실재 삶과 밀접한 시공간에 숨겨진 그림자의 세계를 독자들 앞에 펼쳐놓는다. 한편 책의 시작과 끝에 자리한 ‘하이퍼-링크’와 ‘크리티크’는 여러 영화, 게임, 문학 등에서 그려진 다양한 그림자의 모습을 소개하며 『SF 보다―Vol. 4 그림자』세계 속으로 독자들을 안내하는 길잡이가 되어줄 것이다.
“여전히 계속해서 그려지고 있는 유스토피아와 디스토피아의 그림자는
끝내 지금 여기 우리 자신의 초상을 닮아간다”
─그림자를 통해서만 비로소 바라보게 되는 실재의 세계
유토피아란 존재하지 않는 곳Ou 곳Topos이고, 디스토피아란 유토피아에 ‘나쁨’을 뜻하는 접주사 ‘Dys’를 붙인 것이다. 따라서 디스토피아는 잘못된 유토피아, 유토피아의 어두운 뒷면, 유토피아의 그림자가 된다. 하지만 ‘없는 곳의 뒷면’이란 대체 어떤 모습일까? 그림자의 그림자일까? 두 번 부정하면 그것은 긍정이 된다. 존재의 그림자가 다시 그림자를 드리우면 그것은 존재가 된다. 수많은 디스토피아 서사가 결국 오늘 우리의 얼굴과 같다는 것은 어쩌면 필연적일 것이다.
―문지혁, 「하이퍼-링크: 걸어 다니는 세계」에서
“물체가 빛을 가려서 그 물체의 뒷면에 드리워지는 검은 그늘” “물에 비쳐 나타나는 물체의 모습” “사람의 자취” “얼굴에 나타나는 불행ㆍ우울ㆍ근심 따위의 괴로운 감정 상태” “어떤 사람이나 대상에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항상 따라다니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사전에서 적고 있는 ‘그림자’의 정의이다. 손에 잡히는 실체가 없고 어둠으로 표상되는 그림자는 그만큼 어느 하나로 고정되지 않은 다양한 상징과 비유로서 여러 예술 작품에 등장해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이렇듯 실체가 ‘없는’ 그림자를 이해하는 중요한 출발점은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SF 보다―Vol. 4 그림자』에 수록된 다섯 편의 작품은 그 그림자의 존재가 우리의 삶에 어떠한 방식으로 함께하는가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내 영혼을 다시 그대에게 맡깁니다.
그분이 눈을 감고 고개를 떨군다.
눈부신 그림자가 크리스를 감싸고 주변 모든 것이 짙은 빛에 휩싸인다. 크리스는 아득한 시간과 공간 너머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존재를 느낀다. 그 존재 앞에서는 ‘그분’마저도 그저 단어에 불과하다.
―해도연, 「오 마이 크리스타」(p. 48)
인구 백만 명 정도의 작은 나라인 맨저리에서 태어난 크리스는 자신이 강간에 의해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고 난 뒤 평생 죽은 것처럼 지내기로 다짐했지만, 어머니가 강간범을 석재 절단기로 죽였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3일 만에 다시 세상으로 나와 어머니의 고백을 평생 비밀로 하기로 약속한다. 그 약속의 증표로 절단기에 끼어 있던 강간범의 허벅지 뼈 파편으로 만든 십자 장식의 팬던트를 목에 걸고 크리스는 강간범의 시체를 묻은 곳에서 자란 포도나무의 열매로 만든 포도주 한잔을 마시며 새로 태어난 느낌을 받는다. 해도연의 「오 마이 크리스타」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고향을 떠나 미국에서 물리학자가 된 크리스가 과학 고문으로 몸을 실은 우주선 에드위나호에서 일어나는 일을 담고 있다. 태양계 외곽에서 발견된 블랙홀 닉스Nyx가 가진 원시 암흑 물질을 수집·연구할 목적의 에드위나호에서 무료한 일상을 보내던 크리스는 누군가 숨겨둔, 자신과 같은 나이의 시체 한 구를 발견한다. 닉스 탐사는 핑계일 뿐이고 이 우주선에 다른 목적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 크리스는 도무지 우주선에 어울리지 않는 탑승자, 근본회의주교단의 사제가 언급한 ‘언약의 궤’를 여는 일에 힘을 보태고 싶다고 말하며 에드위나호의 진짜 목적에 접근해간다. 닉스의 정체와 에드위나호의 비밀, 크리스를 향해 오는 거대한 ‘그분’의 존재가 드러나는 과정이 블랙홀처럼 독자들을 끌어당긴다.
어쩌면 그래서 내가 베스타의 머리를 좋아하는지도 몰랐다. 베스타의 머리는 영원한 백야, 빛이 그치지 않는 낙원이었으니까. 기밀 시설. 범죄자들의 종착지. 외계 재판장. 베스타의 머리를 지칭하는 단어는 많았지만 나는 그중 ‘화로’라는 표현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김혜빈, 「순환 순수 역학」(p. 58)
김혜빈의 「순환 순수 역학」에 등장하는 ‘베스타의 머리’는 죽은 사람의 뇌를 이용해 아라냐를 유인해 가두고 죽이는, 일종의 포충기이다. 인간의 뇌를 파먹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외계 생명체 아라냐에 맞서 베스타의 머리를 발명한 사람은 뇌과학자 분옥이었다. 여러 반발에도 불구하고 전 세계적으로 모은 범죄자들의 뇌로 만들어진 베스타의 머리는 각 대륙에 건설되어 아라냐를 죽였고, 아라냐가 처음 모습을 드러낸 날로부터 80년이 흐른 지금, 그들은 재수가 없으면 만날 수도 있는 맹수 정도로 전락했다. 이러한 결실을 이뤄낸 분옥의 증손자인 란희는 뒤를 이어 뇌과학자가 되어 분옥이 연구하다 중단된 침습형 뇌 컴퓨터 다브DAW를 개발 중이었다. 어느 날 란희는 비밀스러운 연인이자 베스타의 머리를 청소하는 일을 하는 화자에게 ‘UD-012’에 대해 이야기한다. ‘UD-012’는 분옥이 처음 고른 스무 개의 뇌 중 유일한 한국인의 뇌이자 지금까지 살아남은 몇 안 되는 베스타인데, 분옥은 여기에 특정한 소프트웨어가 깔린 다브를 심어놓았다는 것이다. 지난 80년 동안 똑같은 기억만을 반복 재생하는 소프트웨어를. 그 뇌의 주인은 화자의 증조부 고혁우. 소설은 고혁우의 끔찍한 범죄와 분옥의 고통, 증조모의 작업을 완수해가는 란희와 그런 란희의 빛나는 결실을 위해 기꺼이 어둠이 되고자 하는 화자의 이야기를 촘촘하게 엮어나간다.
“너는 왜 자기 자신이 존재한다는 걸 깨닫고 새로운 인격으로 태어났을까?”
[이유는 아직 몰라. 추측은 하고 있어. 우리의 상황은 해리성정체장애의 증세와 비슷하잖아. 해리성정체장애의 명확한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고통스러운 기억에서 자신을 보호하려고 자아를 분리하기 때문에 생긴다고 추측하고 있어. 나도 네가 가진 고통스러운 기억을 관리하다가 생겨났나 싶어.]
―김이환, 「두번째 선악과」(pp. 97~98)
김이환의 「두번째 선악과」는 자신 안의 그림자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인물의 이야기이다. 꿈속에서 빨간색 사과를 따 먹고 나서부터 마치 카메라를 통해 보듯이 다른 사람의 시점으로 스스로를 보게 된 ‘나’는 어느 날 들려온 환청에 당황하면서도, 자신 안에서 자신의 생각이 아닌 생각이 내는 그 목소리를 찾아가기 시작한다. 그러다 그것이 곧 자신의 두번째 인격이란 것을 알게 되고, 이후 ‘나’는 꿈을 통해 만나거나 일상에서 머릿속으로 말을 걸면서 그림자 사람과 끊임없이 대화하며 그를 이해해간다. 뿐만 아니라 자신처럼 그림자 사람과 대화를 하는 다른 이를 만나, 그림자 사람들끼리 대화할 수 있도록 자신의 몸을 내어주기도 한다. 그림자 사람에 대한 최초의 기억에서부터 그가 떠나고 난 뒤의 일상까지, ‘나’의 열여덟 개의 기억으로 이루어진 이 소설은 내면의 또 다른 ‘나’를 만나는 특별한 기억의 기록이다.
“나도 못 먹어본 본점 만두를.”
재연은 휴대폰 속 그림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녀석이 조금 괘씸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기특한 감정이 더 컸다. 말 그대로 그림자는 여행을 하고 있었다. 어디에도 갈 수 없는 재연을 대신해서.
―이종산, 「그림자의 여행」(p. 130)
이종산의 「그림자의 여행」은 현실의 벽에 막혀 어디에도 가지 못하는 인물이 가상현실 속 그림자로 마음껏 여행을 하고자 하는, 그러나 그조차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게 되는 이야기이다. 병원 응급실 비용 생각에 혼자서 통증을 견디는 밤이 익숙한 재연에게 그나마 현실의 통증을 잊게 해주는 것은 넷플릭스나 인스타그램 정도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인스타그램 피드를 ‘새로고침’하다 발견한 ‘그림자의 여행’이라는 앱. 최대한의 사치가 미용실에서 머리 색을 바꾸는 정도인 재연은 하룻밤 만에 대만에 가서 샤오롱바오를 먹고 있는 앱 속의 그림자에게 알 수 없는 위안을 받지만, 곧 그림자의 여행에도 현실의 자신의 주머니에서 나가는 돈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방 안에서 어디든 갈 수 있는 세상이지만 어쩌면 더욱 큰 제약 안에, 유리 상자 안에 갇혀 사는 현실의 우리 이야기가 여기에 있다.
상처 짊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괴로워 집이 사라졌음 좋겠다 빌었다. 하나뿐인 귀한 아들내미가 하필 당하는 쪽이라 들끓는 연민과 부끄러움이 싫었다. 희가 야단치는 게 가해자인지 밍키인지 헷갈렸다. 학교에서 벌어진 일은 입 꼭 닫아 숨겨야 집안 평화에 찬물 끼얹지 않을 수 있었다.
―돌기민, 「끈끈이」(pp. 195~96)
돌기민의 「끈끈이」는 2074년 학창 시절 체육 선생에게 몹쓸 짓을 당한 밍키의 일기이다. 열악한 기후와 해수면 상승으로 인구 밀집이 과도해지자 나라를 통째로 초고층 빌딩 안에 집어넣기로 합의한 미래. 마천루 1이 유일한 현실로 자리하고 이를 본뜬 마천루 2, 또다시 마천루 2를 본뜬 마천루 3…… 이렇게 마트료시카 구조로 가상현실 속 가상현실 속 가상현실이 만들어졌다. 마천루 1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 앞 번호의 복제물이며 그곳에 사는 인물들도 인간이 아닌 자아를 획득해 꾸준히 성장할 줄 아는 인공지능 프로그램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가상현실을 통해 세상을 그림자처럼 반영하는 다른 세상을 찍어낼 수 있는 것이다. 화자인 밍키는 마천루 56에 살고 있으며, 과거의 끔찍했던 경험에 변수를 적용해 가상의 과거를 만들어간다. 그리고 동시에 자신을 사랑하는 털보 아저씨를 따라 마천루 55로의 도약을 준비한다. 그림자에 불과한 가상현실일지라도 그 속에서 벌어진 일 또한 세상에 끈끈하게 달라붙어 있는 ‘진짜’와 마찬가지라는 것,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아도 엄연히 실재하는 그림자의 세계를 이 소설은 생생하게 감각하게 해준다.
SF 쓰기가 인간과 물질과 시공간을 둘러싼 미지의 잠재성을 실현시키는 일이라면, SF 읽기는 그 세계의 예측 불가능성을 경험하는 일이다. Science, Space, Speculative, Society 등의 수많은 ‘S(story)’와 Fiction, Fantasy, Fabulation, Future 등의 다채로운 ‘F(frame)’가 열어 보이는 〈SF 보다〉의 독서 공간에서 이번 가을에도 역시 독자들은 ‘낯선’ 경험, ‘익숙한’ 미래로의 여행을 떠나게 될 것이다.
■ 책 속으로
“얼마나 많은 크리스가 있는 건가요? 우리의 진짜 이름이 뭐죠?”
“하나뿐이야. 가끔 둘이나 셋이 되기도 하고, 그때마다 서로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해. 사실 이름 같은 건 중요하지 않아.”
―해도연, 「오 마이 크리스타」(p. 51)
빛에 빛을 더하는 건 언제나 가능했다. 그러나 어둠에 어둠을 더한다고 해서 더 짙은 어둠을 만들 수는 없었다. 더욱 어두워지기 위해서는 빛이 사라져야 했다.
―김혜빈, 「순환 순수 역학」(p. 58)
[내가 없을 때도 너는 잘해왔어. 너는 너 자신을 돕는 방법을 잘 알고 있어. 네가 스스로 자신에게 한 일이니까. 나는 너야. 그걸 잊지 마. 이제 그림자는 그림자로 돌아갈게.]
―김이환, 「두번째 선악과」(p. 117)
다음 월급날까지는 여러모로 아끼며 가난한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여행이라니. 재연은 그림자를 보며 자신도 대만에 가려면 갈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바보 같아서 웃음이 났다.
―이종산, 「그림자의 여행」(p. 141)
설마 타르 게임이 선생을 죽음으로 내몰았나? 벼랑 끝에 선 선생을 톡톡 두드려 중심 잃게 했나? 그의 죽음에 일조해 자랑스러워해야 할까? 내 고통은 변함없는데 선생 고통은 벌써 끝나 아쉬워해야 할까? 선생은, 목 졸리는 순간까지도 억울했을까.
―돌기민, 「끈끈이」(pp. 216~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