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질 수 없어도 다다르고야 마는 사랑
존재의 마법 같은 결합을 그리는 일루셔니스트
이종산의 여섯번째 장편소설!
시공간 너머 서로를 좇는 간절한 그리움
암흑을 뚫고 불을 밝히는 미래의 가족사
2012년 첫 장편소설로 제1회 문학동네 대학소설상(심사위원 서영채·윤대녕·편혜영·권희철)을 수상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종산의 여섯번째 장편소설 『벌레 폭풍』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수상 당시 “전혀 새로운 감각, 무심하지만 섬세하게 다듬어진 감성, 독특한 발성이 돋보”인다는 평을 받았던 작가는 데뷔 이래 소설집, 장편소설과 더불어 다수의 앤솔러지와 청소년 문학작품을 내놓으며 해를 거르지 않고 활발히 활동 중이다. 『벌레 폭풍』은 2020년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된 SF 단편 앤솔러지 『팬데믹: 여섯 개의 세계』의 수록작 「벌레 폭풍」을 장편으로 개작한 것이다. 전 세계인의 전방위적인 일상에 변화를 불러왔던 코로나 바이러스의 유행과 그로 인한 개인의 물리적이고 정서적인 고립의 문제에서 착안해 놀라운 상상력을 펼쳐 보였던 작가의 소설은, 장편으로 다듬어지면서 여러 에피소드와 등장인물 각각에 대한 밀도 있는 서술이 더해져 진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벌레 떼로 인해 바깥세상과 차단된 채, 실내 생활을 이어가야 하는 사람들 그리고 시공간 너머 그리운 존재를 좇아 기어코 모험을 강행하는 이들의 용기는 우리 삶에서의 변치 않는 가치를 일깨워준다. 작가는 SF, 로맨스 판타지, 퀴어소설 등 다양한 장르를 소화하며, 오늘날 문학 시장의 큰 흐름이 된 장르소설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바탕으로 『경향신문』에 수년간 SF칼럼 〈장르를 읽다〉를 연재한 바 있다. 여러 장르를 융합해 독특한 개성을 획득한 소설가 이종산의 오래고 근원적인 주제 의식을 이 책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천재지변의 불안을 무너뜨리는 사랑
결핍을 함께 견인하며 성장하는 공동체의 역사
멀리서 검은 벌레 떼가 넘실거리는 것이 보였다. 폭풍이 몰려올 조짐이었다. ‘구름이 아니라 벌레 떼 때문에 숲이 어두운 거였구나. 예보에서는 이틀 뒤에나 온다고 했는데.’ 숲이 벌레 떼의 그림자로 어둡다는 걸 알게 되니 불안으로 가슴이 울렁거렸다. 포포는 얼른 산책 모드를 끄고 숲에서 나와 짐을 싸기 시작했다. (pp. 33~34)
선물 같은 하루. 맑고 화창한 날씨. 잠에서 깬 주인공 포포가 아침을 여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그러나 『벌레 폭풍』에서 인물들의 생활은 외부와 단절되어 있다. 스크린 윈도로 내다보는 바깥 풍경은 한없이 아름답지만 뉴스는 곧 다가올 폭풍을 예보한다. 그것은 비바람이 아닌 이미 일상이 되어버린 벌레 폭풍이다. 세상을 까맣게 뒤덮은 벌레들이 전파하는 병의 위험성 때문에 통행을 꺼리는 사람들 대신 드론과 자동차가 거리를 활보한다. 가족과의 산책이 3차원 시뮬레이션을 통해 이뤄지는 것도 익숙한 현실이다. 나무 인형 제작자인 주인공 포포는 대학 과정 교육자인 무이와의 결혼을 앞두고 있으나 두 사람은 한 번도 서로를 직접 대면한 경험이 없다. 스크린 윈도를 통해서 촘촘하게 일상을 공유하고, 습관을 관찰하고 확인했을 뿐이다. 포포는 ‘스킨포비아’로 타인과의 실제 접촉을 꺼린다. 무이와의 결혼을 결정하면서 그가 겪는 두려움과 불안은 벌레 폭풍의 시대에 보편적인 증상으로 설명된다. 포포는 결혼을 앞두고 무이와 실제로 만남을 가질 것인지, 가정을 꾸린 후에 두 사람의 공간을 분리할 것인지 합칠 것인지에 관한 고민에 빠진다. 반면 무이는 포포를 실제로 만나고 접촉하고 싶어 하지만, 약혼자의 불안과 걱정을 이해하기에 충분히 배려하며 합의하에 생각할 시간을 갖기로 한다. 이렇듯 이종산의 소설에서 인물들은 환경의 변화로 인한 생활상의 여러 제약을 받아들이며 각자의 방식으로 고유의 생활을 유지하는 한편 확장하려 분투 중이다. 좋아하는 일을 놓지 않고 좋아하는 사람을 잃지 않기 위해 그들은 스스로의 한계를 지속적으로 시험한다. 가족일지라도 연인일지라도 모두 다 털어놓을 수 없는 저마다의 사연을 지닌 채.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들이 화합하는 장소는 사랑이 약속된 곳이다. 밀애를 속삭이던 건물, 사랑하는 이가 가꿔온 성역과도 같은 생활공간. 가치관과 그에 따른 행동 방식, 표면적인 말 뒤의 숨은 의도까지, 엇갈리기 쉬운 수많은 미로를 지나 이종산 소설 속 인물들은 서로의 마음 깊은 곳에 천천히 도달한다.
‘결혼’과 ‘양육’이라는 생명의 여정을 둘러싼
자아의 대범하고 숭고한 확장
“오늘이 세상의 마지막 날이라면 어떨 것 같아?”
포포가 무이에게 묻는다.
“상관없어. 지금 우리 같이 있잖아. 그거면 된 거 아냐?”
무이가 책상 의자에 앉아서 말한다. 무이는 그 의자에서 일어날 생각이 없어 보인다.
“맞아. 내 생각도 정확히 똑같아.” (p. 261)
소설 속 또 하나의 인물, 포포의 언니인 민정은 홀로 아이를 양육하며 원가족 내 중재자를 자처하고 타인의 상처와 아픔을 끌어안는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전염병에 걸린 애인을 찾아 곳곳을 헤맨 끝에 결국 만나지 못하고 발길을 돌리지만, 짧게 주고받은 메시지로부터 ‘사랑은 이별을 두려워한다’는 믿음을 확인하고 새로운 희망을 길어 올린다. 도래하고야 말 헤어짐의 순간을 연기하며 서로의 곁을 지키는 것, 인생의 고락을 최대한 가까이에서 수단을 초월해 나누는 것. ‘사랑’이라는 두 음절의 단어가 아쉽게 압축해버린 숱한 사랑의 장면을 『벌레 폭풍』은 섬세하게 그려낸다.
“미래에도 사람은 사랑을 하고 가족을 필요로 할 것이라는 답을 냈습니다. [……] 사람들은 가까운 존재를 사랑하며 살아가고, 놀랍게도 가까운 존재만이 아니라 한 번도 본 적 없는 먼 존재들까지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라고 ‘작가의 말’에서 밝혔듯 이종산은 특유의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문체로, 모두에게 열린 화법으로, ‘사랑’이라는 주제를 새롭게 탐색한다. 친밀함은 구체적이고 물리적인 현실을 필요로 하는가? 접촉이 담보되지 않는 세계에서 인간의 마음과 마음은 어떻게 맞닿을 수 있는가? 미래 사회에서 가족의 결합이 갖는 의미는 무엇인가? 다양한 질문을 던지면서 작가는 또 한 발짝 독자에게 다가선다. 소설가로서 이종산이 사랑해 마지않는 인물, 민정이 그러하듯 “언제든 불을 나눠줄 준비가 된 사람”의 이야기, 언제나 “가슴속에 하나씩 살아 있는 불”(‘작가의 말’)을 꺼뜨리지 않고 타인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갈 용기를 간직한 삶이 여기에 있다.
■ 책 속으로
그러나 20년 뒤에 다시 나타난 SV-3는 너무 강했다. 사람들을 감염시키는 속도도 훨씬 빨라졌고, 사람뿐만 아니라 개, 고양이, 소, 말, 양, 닭과 오리까지 감염시켰다. 몇십 년 사이에 여러 나라가 열대기후로 변하면서 검은가시모기의 개체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난 것도 SV-3의 힘을 강화시키는 데 한몫했다. 바이러스가 피에 섞인 검은가시모기 떼는 3년째 대륙 이동을 하면서 전 세계에 SV-3를 퍼뜨리고 있다. (p. 58)
“어머, 자기 스킨포비아였어?”
“몰랐어? 난 완전히 스킨포비아지.”
말해놓고 포포는 생각한다. ‘근데 난 진짜 스킨포비아이긴 한데.’ 포포는 떠오른 생각을 무이에게 그대로 말한다.
“난 진짜 스킨포비아이긴 해.”
“난 스킨포비아랑 다음 달에 결혼하는 사람이고.”
무이가 그렇게 말하고 웃는다. 무이와 있으면 항상 이렇다. 진지한 주제로 대화를 나누다가도 결국은 함께 마주 보고 웃게 된다. 그건 포포가 무이를 사랑하는 수만 가지 이유 중 하나다. (p. 98)
“여기 집들은 왜 창문이 없어?”
민정은 자신이 방금 알아차린 사실에 소름이 돋아서 묻는다. 포포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한다.
“벌레 들어오면 안 되니까.”
“창문이야 방충 시스템 설치하면 되잖아. 어차피 종일 열어두는 것도 아니고, 잠깐씩 열어놓으면 될 텐데. 네가 사는 집에도 창문이 없어?”
“응, 없지.”
민정의 호들갑에 포포가 살짝 방어벽을 세운다. 민정은 포포가 벽을 세운 걸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이 계속 말이 나온다.
“난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 아무리 그래도 집에 창문 하나 없다니 너무 삭막한 거 아니야? 그런 집에서 답답해서 어떻게 사니. 난 숨이 막혀서 하루도 못 살 것 같아.” (p. 123)
그렇다면 이타적인 것은 무엇일까? 이타적인 것이 이기적인 것보다 옳은가? 자기 자신의 삶을 다른 사람에게 맞추고 희생하는 것이 더 훌륭하고 도덕적인 것일까? 포포는 그런 생각을 하며 계속 나무토막을 다듬는다. 이것이 포포가 생각하는 방식이다. 손을 움직이면서 생각하는 것. 포포는 나무 인형들을 만들며 수많은 생각을 했고, 자신의 인생을 바꾼 결정들을 내렸다. 오늘 밤에도 포포는 나무 인형을 하나 만들 것이고, 인형이 완성될 쯤에는 무이의 제안에 대한 답도 정리될 것이다. (p. 153)
하지만 지금 민정이 가장 두려운 것은 그를 만나지 못하고 돌아가는 것이다. 여기에 온 이상 그의 얼굴을 잠깐이라도 봐야 했다. 아주 잠깐이라도 그의 손을 잡고 싶었다. 그를 만지고 그의 체온을 느끼고 싶다. 그게 사랑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사랑 따위. 사랑이라는 단어는 개소리다. 단어는 아무것도 설명해주지 못한다. 감정을 가둬버린다. 너무나 쉽게 압축해버린다. (p. 190)
“근데 불안하지 않아?” 지금 하려는 말은 참견이 아니라 걱정이다. 언니가 하나뿐인 동생을 걱정하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은가. 민정은 속으로 생각하고 있다.
“뭐가?”
포포는 역시 시치미를 뗀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무슨 뜻으로 한 말인지 다 알면서. 민정은 됐다고 하고 넘어가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결국은 계속 말하게 된다.
“본 적도 없는 사람하고 결혼하는 게.” (p. 219)
■ 차례
1장
2장
3장
4장
5장
에필로그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