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세대가 그려내는 가을의 소설적 풍경
독자에게 늘 기대 이상의 가치를 전하는 특별 기획, 『소설 보다: 가을 2024』가 출간되었다. <소설 보다>는 문학과지성사가 분기마다 ‘이 계절의 소설’을 선정, 홈페이지에 그 결과를 공개하고 이를 계절마다 엮어 출간하는 단행본 프로젝트로 2018년에 시작되었다. 선정된 작품은 문지문학상 후보로 삼는다.
<소설 보다> 시리즈는 젊은 작가들의 소설은 물론 선정위원이 직접 참여한 작가와의 인터뷰를 수록하여 7년째 독자들의 큰 호응을 얻고 있다. 앞으로도 계절마다 간행되는 ‘소설 보다’는 주목받는 젊은 작가와 독자를 가장 신속하고 긴밀하게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충실히 해낼 것이다.
『소설 보다: 가을 2024』에는 2024년 가을 ‘이 계절의 소설’ 선정작인 권희진의 「걷기의 활용」, 이미상의 「옮겨붙은 소망」, 정기현의 「슬픈 마음 있는 사람」 총 세 편과 작가 인터뷰가 실렸다. 해당 작품은 제14회 문지문학상 후보가 된다. 선정위원(강동호, 소유정, 이소, 이희우, 조연정, 홍성희)의 자유로운 토론을 거쳐 선정한 작품들의 심사평은 문학과지성사 웹사이트에서 확인할 수 있다.
* 도서는 1년 동안 한정 판매될 예정이다.
가을, 이 계절의 소설
우리는 저마다의 기억을 간직한 채 살아간다. 과거의 인상적인 경험들을 머릿속에 겹겹이 간직하고 있는 기억은 내일의 문을 열고 걸어 나가는 원동력이 되기도 하고, 여러 갈림길 앞에서 하나의 길을 택해야 할 때 확신을 주기도 한다. 이러한 기억이 행동이 되고 경험으로 자라나 하나의 생(生)을 만들어낸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소설 보다: 가을 2024』는 지난날을 반추하며 오래도록 곁에 머물 기억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세 편의 작품을 소개한다.
권희진, 「걷기의 활용」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그것뿐이어서 남들이 노동을 하듯 하루 종일 걸었다”
권희진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서사”(심사위원 최수철·조경란)라는 평을 받으며 올해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신예 작가다. 등단작 「러브레터」에서 함께 시간을 보낸 인물들 덕분에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은 화자를 그려냈던 작가는 이번 선정작 「걷기의 활용」에서 한때 가장 가까웠으나 영영 멀어진 인물들과 나누었던 대화와 추억을 회상하는 주인공을 따라 걸어간다.
태수 형과 ‘나’는 오랜 시간 가깝게 지낸 친구로 슬픈 일이 있을 때나 별일 없는 나날 중에도 만나 술잔을 기울인다. 여자친구와 이별과 재회를 반복하던 태수 형 그리고 일자리를 찾지 못해 걷기를 소일거리로 삼는 ‘나’가 서로를 찾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따져보면 이야기의 주제나 관심 대상도 다르고, ‘나’가 형에 대해 아는 건 사소한 것들 뿐이지만, 그 기억은 사실 “오랫동안 애정을 갖고 지켜봐야만 알 수 있는 것들”(문학평론가 이소)이다. ‘나’조차도 알 수 없는 태수 형을 향한 감정은 오해와 이해를 거듭하면서도 “일정한 보폭의 걸음처럼 잔잔하고 자연스럽게 전개”(문학평론가 조연정)되며, 지나갔으나 결코 사라질 수 없는 청춘의 감정을 돌아보게 한다.
자신조차 종잡을 수 없는 감정들로 인해 ‘나’는 혼란스러워 합니다. 상대의 마음을 얻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건 사랑이 아니야,라며 비관적으로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저의 관점으로 보자면 ‘나’의 이러한 고뇌마저 모두 사랑처럼 보입니다. 그랬으면 하는 바람이기도 합니다. 자신 안의 감정들을 긍정하고 어느 순간에는 더는 아프지 않았으면 하기 때문입니다.
「인터뷰 권희진×이소」에서
이미상, 「옮겨붙은 소망」
“당신들이 끼어들 틈은 없어요. 남편의 죽음은 우리 부부의 것이에요”
이미상은 2020년 겨울, 2021년 겨울, 2020년 여름에 이어 네번째로 ‘이 계절의 소설’에 선정되며 <소설 보다>로 만나게 되었다. 매번 전작을 뛰어넘는 신선한 소재와 독창적인 발상의 작품을 선보여온 작가는 「옮겨붙은 소망」에서도 새로운 층위의 이야기를 발굴해내며 끝없는 질주를 예고한다. 이 소설은 누군가의 죽음 이후 물려받은 물건, 시간, 소망 등이 남은 이의 삶을 얼마큼 변화시킬 수 있는지를 “기억이라는 특별한 형식”(문학평론가 소유정)에 기대어 보여준다.
‘나’와 같은 빌라에 사는 이웃 n&n’s는 인스타그램 라이브 방송에서 원하는 앤티크 소품 및 빈티지 주얼리를 구매하기 위해 ‘나’를 “클릭 도우미”로 고용한다. n&n’s의 소망(혹은 가벼운 빈말)을 대신 이뤄주던 남편이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 그녀의 쇼핑이 열흘 만에 다시 시작된 것이다. 쇼핑 라이브가 방영될 때마다 그녀의 집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며 일하는 ‘나’는 n&n’s 부부의 지난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노동하지 않고 자신의 시간에 매몰되다 우울증을 얻은 채 남편이 남기고 간 시간까지 떠안은 n&n’s가 ‘나’에게 그 시간을 모두 증여하는 소설의 절정은 슬픔, 애도를 넘어 우리에게도 위트 가득한 희망을 건넨다.
현재 A를 경험하고 있으나 그것으로부터 연상된 수많은 추억이 떠올라 머릿속은 A를 지나 Q까지 가 있겠지요. 그러다 A에서 Q까지가 뭉쳐져 이름 붙일 수 없는 거대한 감정의 기둥이 되고, 때로는 그 기둥이 쿵쿵 내리치는 진동에 마음이 뒤숭숭해지기도 하겠지요. 다행히 ‘나’는 무엇보다 자신을 말없이 많이 아꼈던 사람과의 추억 속에서 지내기에 슬프지만 행복합니다. 그가 현실에서 보는 많은 사물과 느끼는 경험에 n&n’s와의 추억이 들어 있을 겁니다.
「인터뷰 이미상×홍성희」에서
정기현, 「슬픈 마음 있는 사람」
“슬프지 않은 사람들은 슬픈 얼굴을 하고
슬픔 한가운데 선 사람들의 기색을 살피다 집으로 돌아갔다”
2023년 문학웹진 <LIM>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정기현은 데뷔작 「농부의 피」에서 회사 일과 농사를 병행하는 주인공의 이야기를 그려내며 독자들에게 존재감을 드러냈다. 이번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은 거여동의 고가교 기둥에 빼곡하게 적힌 낙서를 읽는 데서 출발해 번호를 달고 반복하며 이어지는 낙서를 하나씩 찾아내듯 화자의 일상과 내면을 퍼즐 조각처럼 맞춰나간다.
평일 교회에서 만난 기은과 준영은 각자 시간을 보내다 함께 탁구를 치고 동네 주변을 산책한다. 준영은 동네 곳곳에 최근에도 업데이트된 듯한 낙서들의 존재를 기은에게 알려준다. “김병철 들어라”로 시작해 욕과 원한으로 끝나는 내용을 따라 걷다 보면 그간 무수히, 무심하게 지나친 길목의 모든 것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다. 그 후 기은은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새로운 낙서를 발견하거나 재미있는 사건이 생기면 준영을 떠올린다. 결말에 가까워질수록 낙서 속 주인공에 대한 의문이 해소되지만 어쩐 일인지 기은은 “정체 모를 슬픔을 감각”한다. 이 소설은 ‘슬픈 마음 있는 사람’은 슬픔에 잠식당한 것이 아니라 잠시 찾아온 슬픔을 돌볼 수 있는 “주체적인 상태”에 있으므로 “자신의 슬픔과 결별할 수 있는 계기를 되찾”(문학평론가 강동호)을지 모른다는 짐작을 우리에게 전한다.
여러 가지 모양의 인형 눈알을 가지고 다니다 그때그때 눈알을 바꿔 끼울 수 있다면, 당연한 말이지만, 같은 대상도 완전히 달리 보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 우리에게 주어진 반복이 어제와 전혀 다를 것 없는 반복이라면 나도 인물도 불행해지기 십상이니 일단 달리 바라보기부터 시도해볼까, 다른 모양의 눈알을 잠깐 착용해볼까, 하는 생각을 자연스레 하게 되는 듯합니다.
「인터뷰 정기현×이희우」에서
■ 책 속으로
돌이켜 보면 형과 마지막으로 만났던 그날은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었다. 나는 집을 나서기 전에 우산을 챙길까 말까 고민하다가 비가 오면 맞겠다는 심산으로 그냥 나갔었다. 그래서 비가 왔었나. 치킨과 술과 형을 남겨두고 가게에서 나와 [……] 나는 뭔가를 맞았던 것 같은데 그게 비였는지 눈이었는지 모르겠다. 비가 올 정도로 따뜻하지는 않았고 눈이 올 정도로 춥지는 않아서 물과 결정, 그 중간의 어떤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걷기의 활용」
그때 이미 나는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대못과 모자 핀이 우리에게 무시무시한 미래를 알리고 있었다. 세이사쿠의 아내가 증오가 아니라 사랑 때문에 남편의 눈알을 터뜨렸듯 n&n’s도 남편과 사이가 나쁘기는커녕 긴밀해서, 부부로 사는 내내 다른 사람은 모르는 둘만의 은밀하고 달콤한 게임에 도취되어 있어서 본의 아니게 남편을 죽게 하리라는 끔찍한 예언이었다.
―「옮겨붙은 소망」
김병철은 죽고 없구나. 기은은 김병철의 결말을 듣자마자 준영에게 김병철이 죽었대요, 하고 알려주는 장면을 떠올렸다. 준영은 김병철이 아직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는 시간 속에 있고 기은은 이미 김병철이 죽고 없는 세계에 와 있다. 말하자면 기은은 준영보다 자세한 미래에 와 있는 셈이었다. 기은은 준영에게 김병철이 죽었대요, 말해줌으로써 가뿐히 준영의 손을 잡고 함께 미래로 올 수 있었다.
―「슬픈 마음 있는 사람」
■ 차례
권희진, 「걷기의 활용」
인터뷰 권희진×이소
이미상, 「옮겨붙은 소망」
인터뷰 이미상×홍성희
정기현, 「슬픈 마음 있는 사람」
인터뷰 정기현×이희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