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 중 한 명이 죽으면 그 무덤 위에서 춤을 추자”
그해 여름, 사랑과 죽음을 만났다
폭풍과 함께 덮쳐온 사랑의 열기와 죽음
그리고 입술이 포개지며 봉인된 우리의 맹세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 수상 작가 에이든 체임버스의 대표작
아동문학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상 수상 작가 에이든 체임버스의 대표작 『내 무덤에서 춤을 추어라』(고정아 옮김)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프랑수아 오종 감독의 영화 「썸머 85」의 원작 소설로도 잘 알려진 이 작품은 10대 소년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삶과 사랑, 성과 죽음이라는 깊이 있는 주제를 탁월하게 다루었다는 점에서 뛰어난 성장소설이자, 짧지만 열정적이었던 두 소년의 사랑 이야기를 흡입력 있게 그려낸 퀴어 소설이기도 하다.
작품의 화자이자 주인공 ‘핼’은 영국의 바닷가 마을 사우스엔드로 이사 온 16세 소년으로, 어릴 적 TV 프로그램에서 보았던 영원한 단짝 친구에 대한 열망을 마음 깊이 간직하고 있다. 자신들의 사랑은 “여자들의 사랑을 뛰어넘는다”라고 말한 다윗과 요나단과 같이, 이 세상 어딘가에는 내가 그를 찾듯이 나를 찾는 사람이 있다고. 그런 핼 앞에 어느 날 운명처럼 또 다른 소년 ‘배리’가 등장한다. 갑작스러운 폭풍에 휘말려 바다에 빠진 핼을 구해준 일을 계기로 두 소년은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둘 중 한 명이 죽으면 그 무덤 위에서 춤을 추자”라는 맹세와 함께 한여름 폭풍처럼 덮쳐온 뜨겁고도 설익은 사랑이 시작된다. 하지만 서로 다른 성격을 지닌 두 소년의 사랑은 점차 어긋나게 되고, 찬란한 첫사랑의 설렘만큼이나 어두운 비극의 그림자가 드리우는데……
“내가 해초 틈에 빠진 날부터 그가 죽은 날까지 49일이었다. 그가 ‘그것’이 되기까지.” 7주, 49일, 1,176시간, 7만 560분, 423만 3,600초. “그 모든 시간 동안, 그리고 그 후로도 많은 시간 동안 나는 질문했다. 왜 배리였을까?”
“약속해. 내가 먼저 죽으면 내 무덤 위에서 춤을 추겠다고.”
“약속할게. 오직 너를 위해서. 다른 이유는 없어.”
이 책은 흥미롭게도 “무덤 훼손” 사건을 전하는 짧은 신문 기사로 시작한다. 영국 사우스엔드 소년 법원에 출석한 16세 소년, 그는 “죽은 소년의 무덤에서 이상한 장난을 치다가 체포되었다.” 친구의 무덤에 침입해 무덤을 훼손한 혐의로 기소된 소년은 작품을 이끌어가는 화자이자 주인공인 핼로서, 이 책은 핼이 왜 친구 배리의 무덤 위에서 춤을 추었는지에 대해 배리와의 첫 만남에서부터 그가 주검이 되기까지 걸린 7주 동안의 일을 써 내려간 117개의 단편을 묶은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주인공 핼의 내밀한 자기 고백이 작품 전면에 드러나 있으며, 마치 한 편의 영화를 찍듯 중간중간 삽입된 ‘수정’과 ‘리테이크’ ‘액션 리플레이’ 등의 표시는 일련의 사건들을 겪고 난 뒤 현재 시점에 도달한 핼이 과거를 돌이키며 다시 고쳐 쓰거나 강조하고 생략한 결과물로서의 재현임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이에 덧붙여 작품의 일부를 이루는 핼의 담당 사회복지사 ‘앳킨스’ 씨의 여섯 편의 현장 보고서는 핼이 처한 상황을 객관적으로 드러내주는 한편, 보고서에 담긴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핼의 이미지와 핼이 직접 쓴 자기 고백적 글쓰기와의 선명한 대비를 통해 수많은 청소년에게 존재할 개별적 서사를 암시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이 책의 묘미는 작품 내내 두 소년의 판이한 성격이 뚜렷하게 대비되어 나타나듯, 싱그러운 젊음의 열기와 죽음의 어두운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대비되면서 작품의 분위기를 입체적으로 이끌어간다는 데 있다. ‘영원’을 갈망하면서 ‘죽음’이라는 주제에 깊이 골몰하는 핼은 “모든 것에 답이 있다고 생각”하며 “뭐든지 이해해야 직성이 풀리는” 순진무구한 관념적 성향의 소유자다. 반면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하고 그로써 삶이 뒤바뀐 배리는 생명력 가득하고 자극을 좇으며 순간을 살아가는 충동적 성향의 소유자다. 작품의 서두에서부터 배리의 죽음을 알리는 이 책은 충만한 에너지와 성적 매력이 넘치는 배리를 ‘그것―주검’이라는 단어와 포개어놓음으로써, 재기 발랄하고 수다스러우며 사랑스러운 이야기 아래 시종일관 죽음의 이미지를 겹쳐놓는다. 이 책의 제목 ‘내 무덤에서 춤을 추어라’ 역시 ‘네가 죽은 걸 기뻐한다’는 뜻의 관용구 ‘네 무덤에서 춤을 춘다’를 비튼 표현으로, 원래는 조롱한다는 의미고 배리가 이런 제안을 한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겠지만 정작 핼에게 그것은 사랑의 맹세이자 광적인 집착이 되어 작품 전체에 짙은 아이러니를 드리운다.
현재 시점에서 주검이 된 배리의 죽음을 되새기며 과거 회상을 통해 함께여서 좋았던 시절을 되살리는 사랑과 죽음의 이중주는 작품 내내 긴장의 끈을 놓지 않으면서 팽팽한 평행선을 유지하지만, 이미 예고된 죽음에 서서히 근접해간다는 점에서 불안의 그림자가 짙게 깔려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주인공들은 절망보다는 생동의 기운으로 불안한 청춘의 뜨거운 춤을 추려 한다. 사랑과 이별, 상실과 죽음이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주제를 본격적으로 다루면서도 결말까지 유지되는 유쾌한 분위기는 삶을 살아가는 과정에서 실수를 저지르고, 상처를 주고받으며, 실패와 상실을 경험하지만 거기 파묻히지 않고 새롭게 일어나는 것이 우리의 영원한 숙제임을 일깨운다. 작가 체임버스는 그것을 핼의 입을 빌려 “자신의 역사에서 탈출하는 것”이라고 전한다.
사랑과 죽음의 이중주,
불안한 청춘의 뜨거운 춤을 그려낸 틴에이지 로맨스
이 작품 『내 무덤에서 춤을 추어라』를 영화화한 프랑수아 오종 감독에 따르면 “열일곱 살에 처음 이 책을 읽었다. 청소년기에 대해 이야기하는 이 책을 보자마자 사랑에 빠졌다…… 아직 확정된 것이 아무것도 없는 나이에 섹슈얼리티의 가능성은 무한히 깊다. 남자가 되고 싶지만 가끔 여자 같다고 느끼기도 하는 식으로 복잡한 감각들이 뒤섞여 다가온다. 아마도 세상의 모든 10대를 향한 질문이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 자신 동성애자이기도 한 오종 감독은 “영화의 원작은 매우 보편적인 힘을 가진 서사”이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두 소년의 사랑 이야기, 오직 그뿐”이라고 강조한다.
동성애건 이성애건 에로스는 이성의 통제 영역을 쉽게 벗어나는 뜨거운 에너지다. 이 에너지를 다루는 일은 인생 전체에 걸친 성장 과제이지만, 모든 것을 처음 경험하는 청소년기에는 더욱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작가 체임버스는 작품에서 사랑과 욕망, 정체성과 감정의 혼란, 불안과 죽음에 이르기까지 청소년기에 접하게 되는 숱한 고민을 아우르면서 그 안에 성 문제를 주요하게 엮어낸다. 이를 통해 작가는 성이 어떤 개별적 경험 항목이 아니라 어른 되기의 모든 면에서 부딪히는 매우 핵심적 요소임을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하지만 이 책의 진정한 장점은, 주인공들의 탐색이 성 문제를 단단하게 끌어안으면서도 그것을 뛰어넘는 정신 영역으로 넓고 깊게 이어진다는 데 있다.
착상에서 탈고까지 무려 12년이 걸린 이 책은 지금까지 11개국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대중적으로도 큰 인기를 누렸다. 빠른 장면 전환과 다양한 스타일의 교차, 얼마간의 미스터리에 더해 ‘핼’과 ‘배리’ ‘카리’라는 개성 넘치는 캐릭터의 세 주인공을 둘러싼 불꽃처럼 타오르는 로맨스, 무엇보다 화자인 핼의 재치 넘치는 표현과 예기치 못한 사건이 시종일관 흥미진진하게 펼쳐지는 이 책은 독자들에게 깊은 울림과 함께 흥미로운 독서를 선사할 것이다.
이 책은 고정아의 번역으로 2007년 국내에 처음 소개되었다. 요즈음에 맞게 수정·보완하였으며 새로운 옷을 입고 독자들 앞에 선보이게 되었다.
■ 책 속으로
물결치는 짙은 검정 머리칼 아래 장난스러운 미소가 담긴 넓고 잘생긴 얼굴, 또 그 밑으로 낡고 바랜 청 셔츠와 바지도 최신 수상 스포츠 패션인 듯 입을 수 있는 중간 키의 단단한 몸.
배리 고먼 등장. 18세 1개월. 자세한 내용은 앞으로 계속 이어짐. 이 친구가 바로 그것―주검―이 된 친구다.
그가 반짝이는 노란 배에서 웃는 얼굴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청바지를 들어 올렸다.
내 청바지다, 재난 중에 나와 함께 배에서 튕겨 나간.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의 끝의 시작. (1부 29쪽)
그것은 커다란 수수께끼 중 하나다. 우리가 상대방을 좋아한다는 걸 어떻게 몇 분 만에 알게 되는 걸까? 이 사람과는 순식간에 일어나는 그런 일이 해마다 마주치는 수백, 수천 명의 사람들과는 왜 일어나지 않는 걸까? 나는 이 일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해보았지만 아직도 모르겠다. 우리가 누군가를 좋아할 때 얼굴 생김새나 몸매만 보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그 사람의 삶의 방식도 전부가 아니다. 그것은 무언가 다른 것이고 그게 무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일이 일어나면 그렇다는 걸 알게 되고 그걸로 끝이다. 그날 아침 그런 일이 일어났다. (1부 75쪽)
“……그런데 네가 하고 싶은 일은 뭐야?”
“다 좋고 다 싫어.” (2부 106쪽)
나는 욕실에서 15분을 보내며 거울에 비친 ‘아름다운 몸’을 최대한 배리의 시각으로 관찰했다.
솔직히 말하면 내 무릎 모양은 그리 만족스럽지 않다.
욕실 거울은 반신 사이즈밖에 안 되고 면도하기 좋은 높이에 걸려 있다. 하반신을 관찰하려면 물구나무를 서야 하는데, 그러면 특정 신체 부위들이 아름답지 않게 늘어질뿐더러 제대로 볼 만큼 자세를 오래 유지하기도 힘들다. 아니면 욕조 가장자리에 올라서야 하고 이것은 상당한 위험을 동반한다. 우리 집 욕조는 가장자리가 좁은 데다 휘어져 있어서 줄타기 곡예 같은 걸 펼쳐야 하는데, 자칫하다가는 균형을 잃고 욕조에 떨어져서 뼈가 부러질 수도 있고 더 나쁘게 반대 방향으로 미끄러지면 다리를 욕조 가장자리에 걸친 채 넘어질 수도 있다.
아마도 머지않아 무릎을 공개해야 할 상황이 생길 게 분명하기에―생각해보니 나는 어제 이미 낄낄대는 구경꾼들 앞에서뿐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는 배리 앞에서 그 일을 세 번에 걸쳐서 실행했다―, 미리 내 팔다리의 모양을 살펴보고 미래의 상황에 대비해 나를 어떤 식으로 선보여야 할지 결정해두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다. (2부 141~142쪽)
그때로부터 여러 주가 지난 지금도 내가 그런 일에 더 잘 대처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마 그때만큼 화가 나고 배신감이 들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그때보다 강해졌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렇기를 희망한다. 또 친구가 내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라 자신의 본래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을 좀더 너그럽게 바라볼 수 있게 된 것 같다.
하지만 인생의 기이한 점 하나는, 한 번 경험한다고 다음번에 더 잘한다는 보장이 없다는 것이다. 이 세상에 완전히 똑같은 경험이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경험을 통해 변화한다. 하지만 매번의 새로운 경험은 예전의 일들만큼이나 대처하기 어렵다. (2부 154쪽)
“약속해.” 그가 말했다.
“약속이라면―”
“내가 먼저 죽으면 내 무덤 위에서 춤을 추겠다고.”
〔……〕
“모르겠어. 이해를 못 하겠어서 그래.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
“그래서 내가 조르는 건지도 몰라. 이해를 못 하니까. 너는 뭐든지 이해해야 직성이 풀리니까. 그렇잖아? 너는 늘 그걸 원해. 이해하는 거. 하지만 어떤 것들은 이해할 수 없어. 절대로. 그러니까 약속해. 나를 위해서.”
더 이상 따지는 건 소용없을 것 같았다. 그가 원하고 있다. 그러니 굳이 싫다고 할 이유가 무엇인가? 그는 지금 나에게 이제껏 내가 원하던 것을 주지 않았나? 그가 엉터리 같은 맹세를 원하고 있었다. 지킬 필요 같은 건 없어 보이는 맹세를. 마법의 콩을 가진 소년이 내게 맹세를 원한다. 그 순간 내가 그에게 해주지 못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약속할게.” 내가 말했다. “오직 너를 위해서. 다른 이유는 없어.”
그러자 멍든 입 위에 찢어진 입술이 포개지면서 우리의 맹세는 봉인되었다. 옛이야기 속 소년들처럼 손가락에 피를 내어서가 아니라. (2부 207~209쪽)
그때 우리는 시간을 느끼지 못했다. 시간이 느껴진 것은 떨어져 있을 때뿐이고, 그때의 시간은 끝이 없는 것 같았다. 우리가 함께 있으면 시간은 문제 되지 않았다. 우리가 하는 일도 문제 되지 않았다. 우리가 그 일들을 한 건 함께할 일이 필요해서였다. 다른 건 필요 없었다. 우리에게는 한 가지 의무밖에 없었다. 함께 있어야 한다는.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3부 223쪽)
아버지는 알았다. 알고 있다. 내가 배리와 어울리기 시작한 뒤 어느 시점부터 아버지는 사태를 파악했다. 배리가 남자들이 친구라는 말로 의미하는 것 이상의 친구라는 걸.
왜 아버지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을까? 아버지는 별로 생각이 없는 분이라고 생각해서? 그런 걸 눈치채기에는 너무 둔하다고 여겨서? 만약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잘난 척하는 원숭이가 될 것인가.
아버지는 당연히 알고 있다. 그동안 나는 굳이 숨기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언젠가 아버지와 이 일을 이야기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앳킨스 씨, 아직은 아니다. 그러기 전에 나는 먼저 나 자신을 정리하고 내가 누구인지 확실히 알아야 한다. 그 일은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4부 330~331쪽)
“그러니까 네 말은 배리가 그저 내 상상의 산물이었다는 거지?” 내가 웃음을 시도하면서 말했다.
카리가 미소 지었다. “그랬는지도 모르지.”
“헛소리야! 배리는 이 세상에 있었어. 내 곁에 있었어. 나하고 잠도 잤어. 물론 너하고도. 배리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걸 너도 알잖아.”
“그래, 누군가 존재했지. 하지만 그 사람은 네가 생각하던 그런 사람이 아니었어. 또 내가 생각하던 사람도 아니었는지 몰라.”
“네 말은 우리가 사람들을 상상으로 꾸며낸다는 거잖아. 말도 안 돼.”
“아니, 그럴 거야. 아마 우리는 우리 자신도 꾸며내고 있을 거야. 우리가 원하는 모습으로.” (4부 339쪽)
■ 이 책의 구성
네 개의 부
117개의 단편
여섯 편의 현장 보고서
두 편의 신문 기사에 담긴 삶과 죽음
그리고 이야기의 진행을 도와주는 몇 개의 농담
하나 또는 세 개의 수수께끼
몇 개의 각주
그리고 이따금의 낭패
옮긴이의 말―불안한 젊음의 뜨거운 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