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없는 밤

위수정 소설집

위수정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24년 7월 22일 | ISBN 9788932042992

사양 변형판 128x188 · 388쪽 | 가격 17,000원

책소개

“사랑한다는 말이 너무 멀게 느껴졌다
모르는 단어 같았다”

평등한 밤 같은 건 오지 않는 불가능의 세계 속에서
노래가 되지 못한 채 울리는 허밍들

김유정작가상 수상작 「오후만 있던 일요일」
이효석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아무도」 수록!
평단과 독자, 모두가 기다려온 위수정의 두번째 소설집

소설이란 언제나 당대의 윤리나 규범, 도덕을 벗어난 자리에서, 오히려 그것들을 의심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 그러므로 인간과 세계에 대해 좀더 깊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에요. [……] 저는 누군가를 위로해주겠다는 마음으로 글을 시작한 적은 없어요. 다만, 제가 할 수 있는 한에서 어떤 상황이나 인물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요.
―인터뷰 「위수정 X 이소」(『소설 보다: 봄 2022』)에서

“견고해 보이는 외관과 달리 내적인 불안과 충동에 항상적으로 노출된” ‘은의 세계’를 “차갑고 섬세”(김형중 해설)한 문체로 그려내며 평단과 독자의 주목을 받아온 작가 위수정의 두번째 소설집 『우리에게 없는 밤』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첫 소설집 이후 2년 만에 찾아온 이번 책에는 2022년 제23회 이효석문학상 우수상을 수상한 「아무도」를 시작으로 같은 해 제2회 김유정작가상 수상작인 「오후만 있던 일요일」을 포함하여 총 열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2017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중편소설 「무덤이 조금씩」이 당선된 이후 5년 만에 출간한 첫 소설집에 여덟 편의 작품이 실렸던 것과 비교해볼 때, 다시 2년 만에 출간하는 두번째 소설집에 실린 열 편의 작품은 첫 소설집 이후 작품에 대해 한층 커진 기대와 관심으로 작가가 더욱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이어왔다는 사실의 방증이라 할 수 있겠다. 특히 앞서 밝힌 바와 같이 2022년에 연이어 문학상을 수상한 「아무도」와 「오후만 있던 일요일」은 각각 수상 소식을 전하기에 한 계절 앞서서 문학과지성사의 ‘이 계절의 소설’에도 선정되어 2022년 봄과 가을, 한 해에 두 번이나 작가의 이름을 <소설 보다>에서 만날 수 있었다.
위수정의 소설은 인물이 처한 상황, 내면의 상태를 자세히 들여다보는 방식으로 독자를 작품 한가운데로 끌어들인다. 나와는 동떨어진 배경 속에, 나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시간을 살고 있음에도 소설 속 인물의 삶을 읽는 이로 하여금 고스란히 감각하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담담하고 절제된 문장과 적절한 거리를 두고 작품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작가의 집요한 응시가 향하고 있는 곳에서 독자를 기다리는 것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망과 그로 인한 고통의 감각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작품의 특징으로 종종 중산층 이상의 계급성을 이야기할 때 “그들이 가진 속물성, 그들이 학습한 교양이 내면의 욕구나 본능과 충돌하는 지점들에 주목하고 싶었”다고 밝히며, “돈이나 교양으로 극복할 수 없는 것들이 삶에는 분명히 있고 그러한 정말과 좌절의 경험이 동일하게, 그러나 각각 다른 방식으로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답한다(인터뷰 「위수정 X 선우은실」, 『소설 보다: 가을 2022』). 결국 위수정의 작품 속 인물들의 경험은 읽는 이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중산층 이상의 계급’, 다시 말해 “맘먹으면 별다른 준비나 계획 없이 한적하고 철 지난 바닷가로 여행을 떠나 물에 몸을 담근 후 자연산 재료로 만든 해물탕 정도는 먹다 남길 수 있는 수준의 부”를 “필수적인 ‘토대’”(김형중 해설)로 삼는 위수정의 ‘은의 세계’는 이번 책에 수록된 열 편의 소설에서 더욱 확장되어 금의 세계, 혹은 그 반대의 흙의 세계까지 뻗어 나간다.


“그곳에는 지금 눈이 내리니? 모든 것을 평등하게 만드는 눈이?
그러나 여기에 그런 눈은 내리지 않을 것이다”
저 얼음처럼 차가운 취향의 장벽 앞에 드러난 폐허의 자리

‘취향’은 고작 이별의 이유나, 존중하면 그만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강력한 사회적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계급을 형성하고 재생산하는 일이 취향의 몫이다. 아마도 고전적인 마르크스주의자라면 계급이란 취향이 아니라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에 따라 결정된다고 고집스레 강변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건 댁들 취향이고) 작가 위수정에게 취향은 그와 다르다. 위수정에 따를 때 취향은 넘어설 수 없는 계급 간 경계를 획정하고 유지시킨다.
―김형중, 해설 「눈만 내리면 평등한 밤이」(p. 365)에서

이번 소설집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김형중은 위수정의 소설에 따르면 금, 은, 흙 세계의 경계를 획정하고 유지시키는 것은 ‘취향’이라고 설파한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아무도」의 희진과 「오후만 있던 일요일」의 원희, 「제인의 허밍」의 규희와 「우리에게 없는 밤」의 라이온퀸 그리고 「몬스테라 키우기」의 민희에서 보듯, 적극적으로 취향을 드러내지는 않지만 이미 풍요롭고 안정적인 삶을 누리며 다른 이들이 따라 할 수 없는 여유가 몸에 배어 있는 금의 세계 사람들은 오히려 다른 세계를 욕망하기까지 하지만 결코 자신이 가진 것을 과감히 버리지는 못한다. 한편 「제인의 허밍」의 한나와 같은 은의 세계 사람들은 끝없는 모방으로 금의 세계에 다가가려 하지만 거대한 취향의 장벽 앞에서 좌절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궁핍한 삶을 살아내는 일이 무엇보다 우선 과제인 흙의 세계 사람들에겐, 비슷한 취향을 가졌으나 결국은 돈 문제로 헤어지고 마는 「플루토, 너의 검은 고양이」 속 동거인들처럼 취향이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거나, 「우리에게 없는 밤」의 지수와「집」의 화자처럼 자신의 폐허를 다시금 확인하게 해주는 것일 뿐이다. 이제 각각의 작품 속에서, 작가가 깊이 들여다보고 묘사하는 이 세계 속의 인물들을 만나보자.


「아무도」

그런 식으로 내가 점점 더 외롭고 고통스러워진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생각을 그대로 두었다. 이러려고 집을 나온 거니까. (p. 14)

희진은 다른 남자를 마음에 품고 남편 수형을 떠나 혼자의 삶을 시작한다. 하지만 그 남자와 함께하는 삶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아내와 아이를 사랑하고, 가족을 지키고자 하는 유부남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도 그를 향한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그로 인해 더욱 고통스러운 스스로를 방치하는 희진의 곁에는 이 모든 것을 알고도 한결같이 다정하고 따뜻한 부모님과 남편이 있다. 한편 희진의 욕망을 욕하는 사람, 반대로 그 꿈처럼 모호한 현실을 유지하길 바라는 사람 역시 아무도 없기에, 희진은 결국 자신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것임을 안다.

「오후만 있던 일요일」

원희는 불협화음에 매력을 느끼지 못했다. 기승전결이 있는 고전적인 곡들을 선호했다. 그런데 고주완의 공연 이후로 달라졌다. 원희는 이렇게 단번에 취향이 다른 쪽으로 열리는 경험을 해본 기억이 없었다. (p. 59)

여유롭고 안정적인 삶을 살고 있는 육십대의 원희는 친구 수임의 권유로 젊은 피아니스트 고주완의 연주회에 갔다가 그에게 빠진다. 오랜 시간 잊고 지낸 감각이 살아나면서 원희는 처음 경험하는 온라인 팬 카페 활동에 활력을 느끼기도 하고, 지금껏 매력을 느끼지 못했던 불협화음으로 이루어진 곡들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이러한 즐거움도 잠시, 고주완의 공연 후 젊은 여성에게 경멸 어린 말을 듣게 된 원희는 셋째를 임신 중인 딸과 치매를 앓고 있는 시모를 둔 자신의 현실을 자각한다. 매혹적인 불협화음에서 빠져나오고 싶지 않은 욕망과 현실 사이의 슬픈 간극은 원희에게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어쩐지 원희의 미래는 고급 실버타운에 있는 듯 보인다.

「제인의 허밍」

한나는 잠시 후면 제인이 된다. 거울을 보며 입꼬리를 올려보았다. 입만 보면 사람들은 한나가 미소 짓는 줄 알 것이다. 얼굴을 상상하겠지. 자신의 취향에 맞는 눈동자와 콧대와 이마와…… (p. 90)

한나는 무선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공부를 하는 방송인 ‘제인의 허밍’을 운영하는, 20만 구독자를 가진 인플루언서 유튜버이다. 간혹 허밍으로 노래를 따라 부르며 고급한 취향을 자연스럽게 노출하는 한나의 방송은 그녀에게 그전과는 다른 부를 가져다주었지만, 처음부터 살아온 세계가 달랐던 규희와의 재회를 통해 한나는 다시금 자신이 따라 갈 수 없는 거리를 느낀다.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고급한 취향이 단지 흉내일 뿐이라는 것을 확인한 규희와의 만남 이후, 한나는 방송에서 더욱 과감한 모습을 보여주며 자신이 동경하는 제인 버킨의 모습에 한 걸음 더 다가가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우리에게 없는 밤」

견고하고 단단한, 얼음으로 만든 벽 앞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그런 건 실제로 본 적도 없는데. 실수로 손이라도 닿으면 얼음에 손이 붙어버려 뗄 수 없는, 억지로 떼었다가는 살갗이 찢어져 피를 볼 것이 분명한. 지수의 내부에서 빨간불이 깜박였다. 위험하다고. (pp. 134~35)

지수는 고등학교 때 부터 재미 혹은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조건 만남’을 가져왔지만, 대학교 2학년인 지금은 필요에 의해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아르바이트로 이 일을 계속하고 있다. 진심으로 고양이들을 돌보는 친구 은선과 함께하며 경제적인 도움을 주고 있는 지수는 은선이 그리는 미래에 자신이 빠진 것이 못내 서운하다. 어느 날 라이온퀸이라는 아이디로 연락해 온 여성과 고급 호텔에서 인상적인 시간을 보낸 지수는 은선과 자신에게는 평등한 밤이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하며 폐허뿐인 현실의 자리를 확인한다.

「몬스테라 키우기」

습관이라고 했다. 발소리를 내지 않고 걷는 것. 문을 세게 여닫지 않는 것. 보육원 원장은 정이 많았으나 예절 교육에 엄격한 편이었다고 했다. 민희는 보육원 출신이라는 말을 누군가의 입에서 실제로 들어본 적이 처음이었다. (p. 168)

마약중독 치료 후 요양을 겸해 해안 도시의 고급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는 민희는 보육원 출신의 지역 대학생 한재순을 룸메이트로 들인다. 민희는 경제적인 부분을 책임지고, 재순은 집안 살림을 꾸리면서 민희를 돌보며 둘은 점차 가까워진다. 한편 재순이 박재희란 이름으로 민희의 집과 그 외에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원래 자신의 것인 양 가장하여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것을 알게 된 민희는 처음에는 그것을 흥미로워하지만, 어느 날 잠든 자신의 발 사진과 함께 올라온 “자본주의의 개년. 왜 사는 걸까”라는 문구를 본 뒤 알 수 없는 배신감으로 재순에게 선을 긋는다. 박재희는 인스타그램에서 그 문구를 오타였다고 정정하지만 한번 멀어진 민희의 마음은 회복되지 못하고, 결국 민희는 재순을 집에서 내보낸다.

「플루토, 너의 검은 고양이」

싫다…… 아, 이것은 억울함이 아니라 싫은 감정이구나. 혐오구나. (p. 211)

서로를 연인이라 생각하지 않지만 생활을 공유하는 두 사람. 취향이 비슷했고, 어떤 점에선 조금 어긋나도 크게 문제될 일이 없었던 두 사람이지만, 작고 검은 새끼 고양이를 만난 이후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인터넷으로 주문한 고양이 물품이 채 도착하기도 전에 고양이는 엄청난 병원비를 남기고 떠났고, 둘 사이엔 허공의 냉기만이 남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대화 끝에 결국 감정이 격해진 두 사람은 결국 돈 이야기를 끝으로 헤어지고 만다.

「멜론」

나는 숙주가 된 기분이야. 남편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런 말이 어딨어. 아니, 무슨 기분인 줄은 알겠는데 그 말은 좀 심하다. 축복아, 방금 말은 못 들은 걸로 하자. (p. 241)

마흔이 넘어 1년 남짓의 연애를 한 뒤 새로운 관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결혼을 한 ‘나’와 남편 지운. 함께 사는 생활에 점점 익숙해지면서 결혼 1주년 기념 여행을 계획하던 이 부부에게 사십대 중반의 나이에는 불가능할 거라 생각했던 자연 임신이라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 일을 ‘축복’이라 여기며 모든 생활을 배 속 아이 중심으로 생각하게 된 남편과 달리, ‘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신체적·정신적 변화에 큰 혼란을 느끼며 남편에 대한 분노를 쌓아간다.

「9」

혜신은 그날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그것이 무엇인지 되물었다. 돈 때문이었을까. 정말로, 돈 때문에? (p. 252)

지인들과 함께 놀러 간 스키장에서 카지노에 첫발을 들인 혜신은 자신이 알던 세상과는 동떨어진, 낯선 장소라 느꼈던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다. 잃은 돈을 되찾아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기 위한 혜신의 분투는 절박하게 발버둥 칠수록 그녀를 더욱 추락시킬 뿐이다. 늘 잃기만 하다가 오랜만에 돈을 따는 운이 좋은 날이 찾아와도 혜신은 쉽사리 집으로 돌아갈 마음을 먹지 못한다.

「집」

우리는 너무 오래 한곳에만 있었어. 다녀오면 좋을 거야. 달라질 거야. (p. 297)

빌라 전세 사기로 집이 경매에 넘어간 진과 부모가 진 빚을 갚는 데 지친 ‘나’는 나란히 회사를 그만두고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 ‘나’가 다니던 은행에서 빼돌린 돈으로 두 사람은 도시와 국경을 옮기며 여행을 이어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진은 집에 남겨진 것들을 걱정하며 돌아가고 싶어 한다. ‘나’는 진에게 돈을 보냈다며 곰팡이가 피지 않고 죽은 사람이 없는 집을 얻으라고 말하고, 좋은 집을 구해놓으라는 메모를 남긴 뒤 떠난다. 비행기를 타고 추운 나라로 떠난 ‘나’는 얼어붙은 호수에 누워 얼음 아래, 물속에 있을 것만 같은 자신의 집으로 가라앉기를 기다린다.

「몸과 빛」

이런 순간이 모두에게 공평히 찾아오는 것은 아니다. 충만한 삶을 사는 이들은 좀처럼 접하지 못하는 순간이다. (p. 330)

1톤 트럭에 치여 도로를 피로 적시며 죽은 자신의 죽음을 보는 ‘나’의 모습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유령이 된 ‘나’는 육신과 기억이 점점 희미해지는 것을 느끼며, 자신을 친 배달 노동 운전자의 이후 시간을 따라간다. 궁핍한 삶을 살던 운전자는 처음엔 사고를 낸 충격으로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이내 합의금에 대한 걱정에 괴로워하고 종내 자신이 여자를 죽였다는 죄책감에 고통스러워한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것 외에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무력감에 ‘나’는 쓸쓸히 그를 떠나고, 빛 속에 몸을 잃고 사라진다.

계급의 장벽 앞에서 저마다 다른 모양의 고통을 감각하며 자신만의 폐허를 확인하는 인물들의 세계는 다름 아닌 우리가 살고 있는 바로 이곳이다. 작가는 지금, 여기, 우리의 밤을 들여다본. 모든 것을 평등하게 만드는 눈은 내리지 않을 것이고, 폐허를 고스란히 드러내며 남의 흉내일 뿐인 허밍만 읊조리는 밤을. 그 밤의 한가운데에서 내뱉는 사랑한다는 말은 모르는 단어처럼 멀게 느껴지겠지만, 어쩌면 그것이 위수정식의 위로일지도 모른다.


■ 책 속으로

하지만 나는 당신과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당신이 이 일을 결코 잊지 못하리라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럼에도 너와 함께 생활하기 위해. 아주 오랫동안 함께 살기 위해. 부모는 되지 않고.
어떤 마음은 없는 듯, 죽이고 사는 게 어른인 거지. 그렇지? 그런데 어째서 당신들은 미래가 당연히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가 _「아무도」(pp. 42~43)

그러나 갈 수 있을까. 바로 앞에서 보고 있는 장면들이 원희에게는 너무 아득하고 먼 곳 같았다. 마치 다른 세계를 보고 있는 듯. 문득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슬픔이 깊은 통증이 되어 올라왔다. 눈물이 흘러 내렸다. 터져버린 눈물은 멈추지 않았고 원희는 아이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고통스러웠다. 원희는 손을 떨며 불협화음의 볼륨을 높였다. _「오후만 있던 일요일」(pp. 84~85)

꺄흐띠에. 너도 하나 사. 튼튼해. 안 질리고.
한나는 웃었다. 웃는 것 말고 다른 적절한 리액션을 찾지 못했다. 꺄흐띠에. 한나는 규희의 발음이 오래 귀에 남았다. 까르띠에가 아니라 꺄흐띠에. 그래, 나도 꺄흐띠에 하나 사야겠다. 한나는 웃었고 규희는 그런 한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자신이 왜 웃는지 규희는 영원히 알 수 없으리라. 마음에 또다시 무언가 찰칵 채워지는 소리를 들었다. 규희 너는 알 수 없는 것들. 너를 이렇게 자연스럽고 환하게 만드는 것들. 너도 이제 그런 걸 좀 알아야 하는 나이 아니니?_「제인의 허밍」(pp. 111~12)

은선아, 우리는 이미 몸을 너무 많이 쓴 걸까. 그래서 이런 걸까. 폐허인가. 그곳에는 지금 눈이 내리니? 모든 것을 평등하게 만드는 눈이? 그러나 여기에 그런 눈은 내리지 않을 것이다. 창문을 열어볼 필요도 없지. 손을 대는 순간 모두 사라져버리는 것들. _ 「우리에게 없는 밤」(p. 158)


■ 작가의 말

두번째 소설집이다. 첫번째 소설집에는 여덟 편을, 이번 소설집에는 열 편을 싣게 되었다. 그러니까 발표를 스무 편 가까이 한 것인데, 아직도 소설을 시작하지 않은, 아니 시작하지 못한 기분이다. 여전히 작가라는 이름이 낯설다. 어쩌면 그건, 적어도 내게 있어서는, 글을 쓴 시간이나 분량과는 무관하겠다는 생각도 든다. 작가라는 직업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라지 않는 걸지도 모르겠다. 겸손함이라든가 자아 성찰과는 무관한 의미로.

「아무도」를 쓸 때에는 인칭에 관해 생각했다. 단순하고 정직한 마음에 관한 소설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인칭을 잠깐 고민했던 것이 나를 가라앉게, 그러므로 담담하게 만들었다.
「오후만 있던 일요일」은 예전에 많이 들었던 ‘어떤날’의 앨범을 다시 들으며 썼다. 나는 어릴 적부터 허무나 권태에 관해 일가견이 있다고 생각해왔다. 어쩌면 삶의 진실을 본능적으로 남보다 빨리 알아차린 건 아닐까, 하고. 그것이 나의 비극이라고. 하지만 사실 나는 허무와 권태가 싫었기 때문에, 그것을 간절히 떨치고 싶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에 파고드는 인간이라고, 그게 좀더 나의 진실에 가까운 것 같다고 지금은 인정한다.
요즘에는 종종 유튜브를 본다. 유튜브는 나와 무관한 세계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제인의 허밍」을 쓸 때에도 그랬다. 지금 다시 쓴다면 또 다른 작품이 나올까.
「우리에게 없는 밤」은 제목을 먼저 떠올렸다. 처음 제목을 염두에 두었을 때에 마음에 담고 있던 인물과 서사가 있었지만, 소설을 시작하면서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되었다. 이 소설의 제목은 이번 소설집의 제목이기도 한데, 이 소설이 소설집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읽히지는 않았으면 한다. 오히려 이 제목은 이번 소설집을 아우르는 제목으로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다음 소설집이 나온다면 그때에는 작품 제목이 아닌, 소설집만의 제목을 지어보고 싶다.
한창 식물 키우기에 관심을 가지던 때에 「몬스테라 키우기」를 썼다. 불과 2년 전쯤일 뿐인데 몬스테라 알보의 가격이 폭락하여 이제는 웬만하면 누구나 가질 수 있는 품종이 되었다. 얼떨떨해진 나는 퇴고 과정에서 시세에 맞추어 작품에 약간의 수정을 가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대로 두었어도 큰 상관은 없었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플루토, 너의 검은 고양이」는 가장 짧은 시간에 쓴 가장 짧은 작품이다. 그래서인지 소설집을 엮을 때 다시 읽으며, 내가 쓴 글 같지 않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게 좋았다.
「멜론」은 일종의 ‘납량 특집’ 기획으로 쓴 소설이다. 예전부터 나는 ‘무섭고 불길한데 왠지 웃음이 비실비실 나오는 글’을 쓰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무섭고 불길하기만 한 글은 비슷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은데 거기에 웃음을 더하는 일은 멀기만 하다. 하지만 뭐, 목표란 원래 요원한 것이니까. 아닌가.
「9」는 수년 전에 카지노에 가본 기억으로 썼다. 나는 운을 시험하는 모든 것에 쉽게 매혹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러한 것에 결코 매혹되지 않는 이들에게 훨씬 끌린다.
「집」은 오랜만에 긴 여행을 마친 후,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시작했다. 나는 집중력이 짧고 시간 낭비가 주특기인데, 특히 비행기 안 같은, 낯선 이들과 촘촘하게 부대끼는 공간에서 눈에 불을 켜고 소설을 쓴 기억을 떠올리면, 역시 마감은 무서운 것이며 글쓰기의 가장 중요한 동력이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는 것을 싫어한다. 애초에 몸이 아침형으로 설계되지 않은 것 같다. 나이가 들면 일찍 일어나게 된다는데 나도 그럴까? 아직도 나는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에 창을 열고 밤공기를 마시고는 하는데, 그럴 때마다 맞은편 빌라의 복도에 불이 깜빡 켜지는 것을 본다. 처음에는 무섭다가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다. 「몸과 빛」은 죽음 이후에 대해,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물질적인 방식으로 써보고 싶었던 글이다. 나는 죽음에 대해 많이 생각하지만 깊게 이해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처음 소설집을 낼 때에는 내가 과연 두번째 소설집을 낼 수 있을까 궁금했다. 따뜻하게 응원해주신 문학과지성사 여러분꼐 감사를 전합니다. 많은 힘이 되었어요. 처음을 함께해준 원경 씨, 나무와 행복하기를. 마지막까지 세심하게 살펴주신 필균 선생님께 존경의 마음을 전합니다. 무엇보다 김형중 선생님의 글을 함꼐 싣게 되어 이 책이 제게 더 소중해졌습니다.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요즘에는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끝’에 대해서 생각한다. 오늘의 끝, 만남의 끝, 마음의 끝. 결국 몸의 끝을. 몸이 없으면 마음도 없다고 믿는다. 그것이 위안이 된다.
여기에, 여전히 미성숙한 내가 있다. 자주 반복적으로 징징대는 나를 견뎌주는 이들의 얼굴이 떠오른다. 내가 생생하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이들의 힘으로 나는 어설프나마 의욕을 끄집어내어 생활인으로 살아내고 있다. 그들에게 사랑과 감사와 존경을. 그리고 나의 열두 살 강아지 쪼무에게도.

나의 말과 내가, 나의 글과 내가, 내가 말하지 않고 쓰지 않은 것과 내가, 일치될 수 있기를 바란다. 불가능한가. 그러므로 나는 내가 계속 쓰기를 바란다. 쓸 수 있기를.

2024년 7월
위수정

목차

■ 차례

아무도
오후만 있던 일요일
제인의 허밍
우리에게 없는 밤
몬스테라 키우기
플로투, 너의 검은 고양이
멜론
9

몸과 빛

해설 | 눈만 내리면 평등한 밤이_김형중
작가의 말

작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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