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 저격

조효원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24년 7월 16일 | ISBN 9788932042954

사양 변형판 140x210 · 335쪽 | 가격 20,000원

책소개

언어는 만방이며 세계는 곧 책이다.
세계가 책이 아니라면 우리 역시 존재가 아닐 것이다. […]
독자를 저격하는 것은 구원하는 일과는 아무 상관 없다.
살리는 것은 영원의 책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책은 독자를 죽이기 위해서만 존재해야 한다.


비평가이자 번역가, 서양인문학자로 이름을 알린 조효원(연세대 독문과 교수)의 비평 에세이 『독자 저격』이 출간되었다. 벤야민에 대한 학술적 연구에 주력하면서, 야콥 타우베스, 조르주 아감벤, 칼 슈미트, 베르너 하마허, 대니얼 헬러-로즌 등의 저작을 번역해 국내에 소개하는 등 활발한 연구 및 저술 활동을 해온 조효원의 『독자 저격』은 전작이었던 『다음 책—읽을 수 없는 시간들 사이에서』를 낸 지 꼭 10년 만에 선보이는 신작이다. 2010년대 이후 계간지 『문학과사회』 『인문예술잡지F』 등의 지면에 발표했던 길고 짧은 글 16편을 모았다. 저자는 언어와 문학, 독자와 저자, 책과 세계, 종교와 정치, 역사와 미래 등에 관해 도발적인 질문을 던지며 지적이고도 흡인력 있는 글을 완성했다. 수수께끼를 내포한 듯한 저자 특유의 정연한 문장들이 겹겹이 포개어지며 독자적인 스타일을 구축하는 한편, 글의 구성 및 형식상의 실험에서 위트와 유머 감각이 드러난다.
표제작 「독자 저격」은 0과 1, 즉 없음과 있음의 숫자를 번갈아 부여하면서 찰나의 책과 영원의 책을 대비시키고 제멋대로 읽을 자유, 막강한 독해의 자유라는 힘을 지닌 독자를 어떻게 저격할 수 있을까’를 물으며 독서 행위에 대한 이론적 성찰을 시도한다. “책은 독자를 쏠 수 있지만, 독자는 책을 쏠 수 없다. […] 책은 오직 준비된 독자만을 쏠 수 있다. […] 어떤 계기로든 한 번이라도 책에 의해 처참히 거꾸러져 본 독자는 생의 길목에서 맞닥뜨리는 모든 책의 문맥과 행간을 독자적으로 주파할 힘을 얻는다”(55쪽). 이 글이 ‘독자’들을 끌고 가는 곳은 현실의 독서 연마술 따위가 아니라 영원의 책이 존재하는 이념의 차원이다. “찰나의 책은 아무런 문제도, 아무런 마찰도 일으키지 않는다. 찰나의 책의 세계는 실로 평화롭다”(70쪽). 반면 영원의 책은 고통의 불길을 내리꽂는다. 오직 죽이는 일에만 관심을 두는 영원의 책은 모든 생의 근본적 리듬인 연속성을 무너뜨리고, 타격을 입은 독자는 주어진 삶의 감각에 충실할 수 없게 된다.
그렇다면, 쏘는 시늉만 할 수 있을 뿐 독자를 타격하지 않는 찰나의 책만을 읽을 것인가. “찰나의 책을 채우고 있는 수많은 활자가 바로 영원의 책을 망각으로 뒤덮는 미세먼지인 셈이다. 우리 시대가 먼지와 활자를 구별할 수 없게 된 시대라는 사실을 살벌한 현실로서 지각한 독자가 만에 하나라도 있다면, 필시 그는 숨통을 조여오는 고독에 휩싸여 있을 것이다”(61~62쪽). 찰나의 책, 휘발성 콘텐츠들이 시선을 강탈하는 시대에 독자를 죽이기 위해서 존재하는 책이란 어떤 것일까? 작금의 시대에 대한 자조 섞인, 어딘가 비관적인 전망 속으로 가라앉은 저자의 글 끝에는 ‘그럼에도’가 매달려 있다. 그럼에도 희망은 있을진대 그 희망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서양인문학자 조효원 교수의 신작 비평 에세이
‘알 게 뭐람’의 시대정신과 문학의 미래 그리고 문헌학에 대하여

문학장이 총체적 무관심 속에서 공론장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 지 오래다. “이제 세계는 문학과 관련하여 아무것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로 우글거린다”(128쪽). 이 책의 저자 역시 많은 부분 위기에 대한 인식을 사유의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프롤로그」에서 저자는 “정말로 비극적인 것은, 기준을 조율하고 확립하려는 모든 노력이 ‘알 게 뭐람’의 정신 앞에서 일거에 수포로 돌아간다는 사실”이라고 하면서 이 책은 “그 비극에 대한 인식의 기록”이라고 밝힌다. 오늘날 ‘근대의 사회적 상상’을 지탱해온 거의 모든 주요 개념이 무화되고 있는 위기 상황을 비판적으로 독해한 7장 「일방통행국」에서도 이와 같은 인식이 명료히 드러난다.

바야흐로 세계는 전대미문의 ‘일방통행국’으로 재편되었다. 국가라는 명칭을 장식으로만 달고 있는 이 ‘세계국가’에서는 모든 것이 오직 일방통행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대관절 어디로 향하는 일방통행이란 말인가? 아마 누구든 직감적으로 답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복잡하고 어렵고 심각한 모든 문제가 말끔히 사라진 공간, ‘구독’과 ‘좋아요’의 각축이 모든 눈과 귀를 지배하는 세상, 요컨대 모든 일이 카메라 연출에 의해 통제되는 예능 만능의 낙원으로. (130쪽)

그 밖에도 이 책에는 현실을 조망하고 역사와 소통하는 가운데 다양한 방식으로 문제의식을 고찰하고 비평을 시도한 진중한 글들이 수록되어 있다. 4장 「이론과 무한의식」은 파산의 운명에 처한 이론의 여정을 따라가본다. 투쟁, 패권, 음모, 운동, 제휴, 해석, 위조, 이름, 역사, 무한, 착오 등으로 이어지는 사유가 흥미롭게 전개된다. 6장 「문학과 결의론의 미래」는 한때 유행한 사사키 아타루의 논의와 대결하면서 문학의 근원적 본질을 재사유한다. 저자는 푸코가 말한 ‘말할 수 없지 않은 것’으로서의 문학을 ‘결의론’과 연결 지어 되돌아보면서, 그 미래를 생각해본다.
8장 「궁지에서 궁진하기」에서는 베버의 ‘세계의 탈주술화’ 테제, 즉 계산될 수 없는 것은 무가치, 무의미하다고 간주되는 사회의 도래에 맞서 천천히 읽을 것을 가르치는 문헌학의 가치를 옹호한다. 이를 위해 니체, 세스토프, 부르디외, 로티 등의 사례를 통해 탐구주의자와 아이러니스트의 사유 방식에 대해 이야기한다. 문헌학의 그리스어 어원은 ‘로고스에 대한 사랑’을 가리킨다. 이를 다시 번역한다면 ‘글을 바치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따라서 로고스에 대한 성찰을 전개하는 과정에는 “‘어떤 존재에게 어떤 글을 어떻게 바칠 것인가’라는 근본적-상황적 고민이 시종일관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당겨져 있어야 한다”(203쪽)고 저자는 말한다. 10장 「문헌학의 파레시아」는 프로이트, 아우어바흐, 하마허의 저술을 문헌학적 투쟁의 사례로 바라보면서 독해한다. 이들의 사례를 통해 ‘상아탑의 (재)건축’을 위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11장 「자유주의의 자유의지」는 「사도행전」 속 아나니아와 삽피라 일화와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통해, 자유주의의 본질을 이론적 차원에서 숙고한다. 파레시아(진실 말하기)에는 거짓말의 자리가 없고 아첨에 반대된다고 규정되었으나, 오늘날에는 “가장 뛰어난 아첨꾼이 가장 존경받는 파레시아스트로 등극”하고자 하며, “자유주의의 자유의지는 파레시아의 가능성을 끝까지 압살”하고자 한다고 지적한다.
13장 「말하는 천재」는 세계의 질서와 폭력에 관한 슈미트와 벤야민의 사유와 입장 차이를 독해해본다. “탁월한 통찰력을 갖추고 평생 문학을 탐독한 법학자”와 “독일 최고의 비평가를 꿈꾼 자유기고가” 사이에서 햄릿을 두고 또 한 번의 논쟁이 벌어진다. 슈미트가 가톨릭주의와 프로테스탄트주의가 대립하던 시대의 분열상을 표현하는 인물로서 햄릿을 바라본다면 벤야민은 결의와 양심이라는 두 극단에서 분열한 햄릿을 텅 빈 내면을 지닌 인물, 일종의 기독교적 섭리 안에서 반전된 인물로 가정한다. 1장 「언어 외과의사의 편지」에서는 카프카에서 발레리, 발레리에서 벤야민으로 건너가며 지속이자 단절로서 ‘하이픈’의 의미를 고찰해본다. 저자는 헤벨의 우화 속 “칸니트페르스탄” 이야기를 통해 “불가해성으로 전락하지 않고 이해의 지평을 뚫을 수 있는” 가능성으로서 하이픈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한다.

조효원의 『독자 저격』은 독자와 저자와 텍스트에 대한 오랜 독서와 연구, 비판적 성찰이 응축된 책이다. 다시 표제작인 「독자 저격」으로 돌아가본다면, 저자는 독자 세계와 저자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심사위원회’에 관해 이야기한다. 항시 진실할 것을 명하는 검문이 이루어지는 곳. 때를 잘못 만난 ‘영원의 책’은 이 심사위원회에 회부되어 신권 재판 내지 여론 재판을 받고 화염 속으로 던져질 수 있다. 그럴 때 영원의 책은 더 이상 쏠 수 없게 된다. 이는 비단 먼 과거의 일만이 아니라 지금도 심심찮게 벌어지는 현재진행형의 사건일 것이다. 더욱이 “우리 시대는 진실을 검문하는 연옥이 무한대로 팽창하고 있는 시대다. 모든 개인이 제가끔 심사위원회를 만들어 운영하기 때문이다. 작금에 심사위원회 명패를 달고 활동하는 모든 집단은 무한히 자유로운 ‘바깥’으로 뒤집힌 모든 개인의 무정형한 ‘내면’에 의해 구석으로 내몰린 상태다”(63쪽). “중요한 것은 진실을 향한 본능적인 집착을 정확하게 타격하고 분쇄하는 일이다. 심사의 연옥을 철저하게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거대한 개인-심사자들의 리바이어던이 종내 세계의 책마저 완전히 불살라버릴 것이다”(64쪽).


■ 책 속으로

이름은 없는 데서 나오는 동시에 없는 것을 있게 만드는 언어다. 또한 이름은 스스로 있게 만든 그것이 마침내 자립적인—표면상 그렇게 보일 뿐이지만—실체가 되어 전면에 등장하는 순간 슬그머니 물러나는 언어다. 그렇게 이름은 생활세계의 환한 태양이 만드는 극소의 어둠 속에 모습을 감추지만, 결코 사라지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이름은 죽음이라는 궁극의 확실성에 의해 영구히 지탱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을 가진 이름, 존재한 적 없는 사람의 이름, 즉 칸니트페르스탄은 이름의 이름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극단적으로 희한한 이 사태를 결코 이해할 수 없을 테지만, 그럼에도 이것은 우리를 당혹하게 만드는 불가해는 아니다. (1장 언어 외과의사의 편지, 30~31쪽)

모든 책=세계-내-존재는 늙어가지만, 물건으로서 책의 나이는 만들어지는 순간 곧바로 영구히 고정된다. 다시 말해, 책은 늙어가지 못한다. 책의 시간은 찰나 아니면 영원 둘 중 하나다. 찰나의 책이 젊고 단순하며 바쁜 독자에게 결코 마르지 않는 획일적인 매력을 뽐낼 수 있다면, 영원의 책은 처음부터 뒤처진 독자, 복잡하게 비참한 독자, 바쁘지 않지만 끊임없이 조급한 독자를 엄중하게 심문하고 지루하게 문책할 수 있다. 모든 늙어가는 독자는 생의 어느 고비에서든 영원의 책의 소환을 받는다. 물론 그 소환에 그가 실제로 응할지, 아니면 거부하거나 회피할지 여부는 기본적으로 그의 자유의지에 달린 문제다. (3장 독자 저격, 58~59쪽)

이론은 파산하려고 태어난다. 이론의 운명은 파산이다. 표면상 지속하는 듯 보이는 순간에도 실제로 이론은 파산선고의 지배에 예속되어 있다. 이론의 본령에 대해 궁리하는 자에게 파산의 책임을 돌리는 일은 분명 부당하지만, 이는 사실 어쩔 수 없는 일이며 또한 어쨌든 이론의 운명이 제정한 법에 따른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파산한 이론—엄밀히 말하자면, 이것은 군더더기 표현이다—의 세계에서는 오직 제때 제 몫을 챙기지 못한 자만이 책임을 진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대개 그 책임을 가장 무겁게 느끼는 이들이 하는 일은 (다시) 이론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4장 이론과 무한의식, 74쪽)

현세의 저자가 독자를 상대로 글이나 책을 쓴다면, 영혼의 저자는 말 그대로 ‘세계를 쓴다.’ 그것은 싸움의 기록이다. 여기서 혹자는 ‘역사’라는 단어 혹은 이념을 떠올릴 수 있겠으나, 만약 그 역사를 어떤 단위 혹은 실체로 간주한다면 그릇된 생각이다. 왜냐하면 엄밀히 따지자면 완전히 끝에 다다르지 않은 역사는 (아직) 제대로 된 역사일 수 없으며, 끝에 다다른 이후의 역사는 (더 이상) 필요 없는 역사일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세계에 역사는 존재한다. 그러나 무한히 다양하고 종잡을 수 없는 사건, 과정, 상황으로서만 존재한다. 요컨대 역사는 너무 많거나 아직 없다. (5장 영혼의 저자, 107쪽)

문학의 근본과 존재 이유를 묻는 일은 갈수록 희한하고 볼썽사나운 짓거리로 전락하고 있다. 작금에 문학의 이름 아래 행해지는 거의 모든 ‘행사’는, 설령 그 이름을 상실하거나 박탈당한다 해도 하등 아쉬울 게 없다고 큰소리치는 뻣뻣한 제스처에 의해 철저히 ‘관리’되는 듯 보인다. 게다가 이른바 문학의 ‘대행자’는 수틀리면 언제라도 직접 그 ‘간판’을 떼어버릴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물론 그들은 입버릇처럼 문학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고백한다. 놀랍고 기이한 풍경이다. (6장 문학과 결의론의 미래, 110쪽)

우리는 단지 가까스로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러나 이마저도 극단적으로 불확실하다. 이 두려운 불확실성을 오롯이 껴안은 채, 탐구주의자는 읽고 쓰고 또 읽는다. 그는 신을 믿지 않는 자신을 믿지 않는다. 또한 그는 구원을 믿지 못하는 자신을 구해줄 수단을 눈앞에 두고, 가없이 주저한다. 그것이 정녕 옳은 선택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탐구주의자는 존재의 모든 차원과 국면에서 무한하고 무정형한 속박을 느낀다. 그래서 그는 ‘주체’와 ‘인간’에 대해—다른 무엇에 대해서도—함부로 떠들지 않는다. 탐구주의자는 반反현대의 반半지성이다. (8장 궁지에서 궁진하기, 172쪽)

잠시나마 혹은 간헐적으로 대학을 상아탑으로서 존립하게 해주었던 ‘마지막 불씨’를 나는 ‘문헌학Philologie’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려 한다. 바꿔 말하자면 상아탑의 존재 이유는 (1차적으로 그리고 최종적으로) 문헌학에서 찾을 수 있고 찾아(져)야 한다. 누구나 쉽게 예측할 수 있듯, 여기서 도입된 문헌학의 개념은 고문서나 희귀 문헌 혹은 고전 작품을 수집-편집-주해하는 일련의 고루한 실천과는 거의 아무런 관련이 없다. (물론 그러한 실천은 그것대로 지속되어야 한다.) 그보다는 차라리 이 개념을 축자적으로 해석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즉 해당 단어의 그리스어 어원을 보자면, 문헌학Philologie은 ‘로고스logos에 대한 사랑philia’을 가리킨다. (10장 문헌학의 파레시아, 202쪽)

숄렘의 관점에 따르면, 유대교의 계시 전통으로부터 아무리 멀어진 유대인이라 하더라도 그가 유대인의 역사를 기억하고 또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그에게는 “안식일의 유대인”이 될 자격이 주어진다. […] 이와 달리 벤야민의 눈에 비친 현대 유대인은 기독교인이나 무신론자와 하등 다를 바 없이 계시로부터 가뭇없이 소외된 존재다. 다시 말해 근본적으로 그에게는 시나이산과 올림포스와 파트모스 모두가 베를린이나 파리 혹은 모스크바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었다. 그런 이유에서 벤야민은 하가다의 자리에 모든 경계를 초월할 수 있는 동화를 등장시킨다. (12장 두 명의 독일인과 세 명의 유대인, 263~64쪽)

목차

■ 차례

겸멸
Prologue 죽음의 죽음
1. 언어 외과의사의 편지
2. 이어 쓰기와 베껴 쓰기—위조문헌학을 위하여
3. 독자 저격
4. 이론과 무한의식
5. 영혼의 저자
6. 문학과 결의론의 미래
7. 일방통행국
Interlude 주저앉음
8. 궁지窮地에서 궁진窮盡하기—학문과 탐구와 웃음에 대하여
9. 약속의 땅과 내전의 끝
10. 문헌학의 파레시아—상아탑의 (재)건축을 위하여
11. 자유주의의 자유의지
12. 두 명의 독일인과 세 명의 유대인—바람과 역설과 아브라함에 대하여
13. 말하는 천재
Epilogue 죄 없는 자들의 천국
출전

작가 소개

조효원 지음

비평가. 번역가. 서양인문학자. 성균관대 독문과를 졸업하고 같은 과 대학원에서 발터 벤야민의 초기 언어 이론에 관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독문과 박사 과정을 수료한 뒤 미국 존스홉킨스대 유럽어문학부와 독일 베를린자유대 독문과에서 방문 학생으로 수학했다. 미국 뉴욕대(NYU) 독문과에서 바이마르 정치신학에 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강대 유럽문화학과 교수로 재직했고, 현재 연세대 독문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논문으로 「A Cloud of Words: A Reflection on (Dis)appearing Words of Benjamin and Wittgenstein」 「Humor or Dying Voice: Hamlet between Walter Benjamin and Carl Schmitt」 「Vergangene Vergängnis: Für eine Philologie des Stattdessen」 등이 있고, 지은 책으로는 『부서진 이름(들): 발터 벤야민의 글상자』 『다음 책: 읽을 수 없는 시간들 사이에서』가 있으며, 옮긴 책으로는 조르조 아감벤의 『유아기와 역사』 『빌라도와 예수』, 야콥 타우베스의 『바울의 정치신학』, 대니얼 헬러-로즌의 『에코랄리아스』, 칼 슈미트의 『정치신학 2』 『정치적 낭만주의』, 베르너 하마허의 『문헌학, 극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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