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꿈은 충분한 망각을 통과해야지만
현실과 같은 구체적인 실감을 획득하는 법이니까”
닮음과 다름, 오마주와 패러디, 소속과 분리
더 나은 영원을 기록하기 위해 씌어진 허구들
언어의 꿈속으로 끈질기게 파고드는 강대호의 세계
현실과 허구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언어의 꿈속으로 파고드는 소설가 강대호의 첫번째 소설집 『혹은 가로놓인 꿈들』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2020년 『쓺-문학의 이름으로』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는 인간세계를 미시적으로 탐구하기 위해 소설 속에서 ‘쓰기-읽기’의 모든 것을 시도하며 자기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나가고 있다. 작금의 한국문학이 삶의 단면을 담아내 독자의 공감에 호소하려 한다면, 강대호의 소설은 “망치로 독자를 후려쳐 각성케 하고, 머잖아 그 독자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작가가 되어 각성을, 벼락을 역사를 이어”(문학평론가 양순모)나가게끔 추동하는 것이다. 이렇듯 보기 드문 재능을 가진 소설가의 작품을 읽는 독법은 단 한 가지뿐이다. 자신이 알고 있는, 혹은 알고 있다 여기는 삶의 여러 행태에서 벗어나 ‘충분한 망각’ 속에서 오롯이 작품에만 몰두하는 것. 이때 소설이 그리는 꿈의 세계는 현실과 다름없는 구체적인 실감을 획득하게 되고 작품의 세계관은 더욱 공고해진다. “하나의 삶을 구축하는 구체성이란 결코 하나의 삶의 구체성이 아니라는 것”이라는 작가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강대호의 소설은 우리의 삶이 하나의 구체성에 의해 작동하는 것이 아닌, “하나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 매일 매일 매 순간 굴러가”야만 하는 하나의 굴레임을 보여준다. 미발표작 다섯 편을 포함해 총 아홉 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혹은 가로놓인 꿈들』은 좋은 소설이란 근시안적 미래에 관해 낙관하는 것이 아닌 아직 오지 않은 더 나은 영원을 말하는 것이라는 걸 보여준다.
ⅰ. 창작 욕구
팀장 k를 포함 총 열두 명으로 구성된 팀이 인공지능 ‘DEUS EX MACHINA’를 변론하는 과정을 담은 「‘DEUS EX MACHINA’를 위한 변론」은 인공지능이 집필한 데뷔작 서른 편을 읽기 위한 독법과 ‘동시-다중 창작’이 가능한 ‘클론’의 무작위적이고 압도적인 글쓰기 방식을 보여줌으로써 글쓰기 창작의 범주와 그 한계에 관해 묻는다. 보르헤스의 역사적인 단편소설 「바벨의 도서관」에 기원을 두고 시작한 이들의 프로젝트는 보르헤스 연구뿐만 아니라 <도서관>에 부여된 ‘410페이지에 40행, 각 행 80여 개의 검은 글자, 25개의 철자 기호 수’라는 존재 법칙을 탐구하는 데 골몰한다. “어떤 깨달음이란 충분한 발표를 거쳐야지만 식빵처럼 두툼한 부피감을 얻는”다는 전언처럼 이들의 연구는 한 작가의 창작욕과 이를 재현하려는 인공지능의 욕망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전시하고 통제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까지 맹렬하게 파고든다. 자신의 연작소설집 『스핀오프』(문학실험실, 2022)에 수록된 두 편의 동명 소설 「프란츠 카프카」를 대상으로 삼은 작품, 「두 가지 <프란츠 카프카>에 붙이는 한 가지 주석」은 소설가 k의 작품에 영향을 끼친 바스코 포파와 보르헤스의 연관성을 짚어나가며 강대호식 메타소설의 극점을 보여준다. 제도권에 소속된 문학평론가의 비평과 모씨라는 인물의 개인 블로그를 병치시켜 보여줌으로써 작가 개인이 문단에 의해 호명을 받고 또 외면받는 것까지 단계적으로 보여주는 이 작품은 모씨가 헌책방에서 이경림의 『상자들』을 발견하고 이상야릇한 고양감을 느끼는 것으로 끝맺는다. 작가의 창작욕을 앞서 씌어진 작품들에 대한 오마주와 패러디를 통해 보여주는 강대호의 소설은 앞서 활동한 선배 작가들에 대한 경의와 자신이 앞으로 써나가야 하는 미지의 세계에 대한 갈증을 통해 글쓰기의 고뇌과 공허함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ⅱ. 인정 욕구
자기 존재를 인정받지 못한 인물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의심하고 상대방과 자신을 파멸의 길로 이끈다. 예술의 뒤에 반드시 고통이 뒤따르는 것은 타인의 평가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어떤 예술가도 자기 자신의 작품에 완벽하게 만족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인간의 생존권 앞에 인정 욕구를 놓을 수밖에 없게 만든다. 죽음을 앞둔 순간까지도 박지유의 시에 매혹된 채 그의 시선집 작업 과정에 대해 묻는 「아이들의 신」의 박 교수 역시 끝끝내 자기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한 인물이다. 그의 뒤치다꺼리를 자청했던 대학원생 화자에게 그는 꽤 아름다운 문장을 쓰는 사람이었으나 문제는 박 교수 자신이 이를 인정하려들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훗날 동네 바보라 불리던 설기의 작품이 유명 예술가의 눈에 들어 재평가를 받게 되었던 것처럼, 뛰어난 예술은 그 가치에 대한 정의를 언제 달리할지 모른다. 자신에게 뛰어난 재능이 있음에도 스스로를 파멸에 이르게 하는 인물도 있다. 「늦잠」의 화자인 ‘나’는 자신의 꿈을 마음대로 조종하는 ‘루시드 드리머’가 된 이후에도 하늘을 날지 못한다. “적당히 자애롭고 예민한 또 적당히 이해할 수 없는 면을 가지고 있는” 어머니 이명숙의 굴레에 갇힌 채로 영원히 매 맞는 아이에서 자라나지 못하는 것이다. 광기에 사로잡힌 이명숙이 악귀로 변한 상태로 어린 화자를 먹지도, 자지도 못하게 하고선 폭력을 일삼을 때도 ‘나’는 작은 저항조차 하지 못한다. 그런 화자가 자신에게 루시드 드림을 전수해준 k의 재능에 최초의 굴욕을 느끼고, 열정보다는 굴욕을 느끼고, 참을 수 없는 굴욕과 증오를 느끼는 것은 귀신 같은 어머니가 아닌 살아 있는 인간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욕구가 잠재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전」은 수록작 중 인정 욕구가 가장 짙게 나타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나무 저택의 아이가 섬을 떠나는 것을 시작으로 다중시점으로 전개되는 이 작품은 증조부로부터, 조부로부터, 늙은이로부터, 할아버지로부터 전해진 모욕과 역사를 다중 시점으로 전개한다. 불에 타 전소된 나무 저택과 이명숙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연기와 함께 사라진 너. 강대호의 소설에서 ‘불’은 인정 욕구에 시달리던 인물들을 화마와 함께 삼켜버린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아예 사라졌다고 할 수는 없다. 나무 저택이 화재 이전보다 더 공고하게 지어진 것처럼, 불길을 피하지 못한 루시드 드리머 역시 비로소 자유를 얻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두려워했던 것은 단숨에 찾아오는 죽음이 아닌 그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한 채 홀로 견뎌내야만 하는 시간이었을 테니까.
ⅲ. 생존 욕구
죽음이 필연이 아닌 선택이 되어버린 사회를 배경으로 하는 「현재에서 지속되는 과거(들)」은 죽음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을 내포한다고 주장하는 ‘이드’와 병원 이전의 세대를 살아온 ‘모씨’ 허무로 가득한 세상에서 전쟁놀이를 일삼는 ‘좀비(들)’ 그리고 이 모든 상황을 톺아보는 ‘너’라는 화자의 입장에서 각각 전개된다. 어쩌면 좀비들이 고통을 더 사랑할지도 모른다는 새로운 관점은 주어진 삶을 수행해나가는 일의 갑갑함을 보여주는 동시에 ‘죽음’ 역시 하나의 망각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더 나은 삶을 살자는 약속으로 시작하는 「더 나은」은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크고 덩어리진 질문 앞에 “우리는 살아오며 수많은 실존 양식을 폐기”하고, “거짓말은 더 많은 거짓말을 낳”았음을 자각한다. 더 나은 침대를 사기 위해서는 그게 어떤 침대인지를 정의해야 하고,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서는 실존의 모양부터 살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우리가 우리 자신이 아니어도 상관없다는 것. “더 나은 영혼을 기록하기 위해 씌어진 이 오래된 구도자의 허구들”(문학평론가 전청림)은 삶이란 누군가에 의해 정의되는 것이 아닌 자신의 망각 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강대호의 소설은 조금의 지루함도 용납하지 않는다. 촘촘하게 직조된 언어의 숲을 빠져나오면 그 끝에는 작품의 결말이 아닌 각자의 삶이 가로놓여 있다. 소설에서는 닮음과 다름, 오마주와 패러디, 소속과 분리와 같은 이중적인 장치들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고 이는 우리가 문학작품을 읽는 또 하나의 즐거움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신을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망각의 세계와 자신만의 언어는 학습되는 것이 아닌 살아 있는 삶 속에서 체득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강대호의 소설은 말한다. 삶도 죽음도 그저 선택에 불과한 일일 뿐이라고. 이 책, 『혹은 가로놓인 꿈들』은 우리가 일상 세계에서 간과하고 있는 것, 삶과 죽음보다 더 두려운 허무와 망각에 대해 말한다. 더 치열하고, 더 구체적으로 삶의 고삐를 놓지 않고 눈앞에 있는 심연으로 뛰어드는 것. 단 하나의 재능이 자신에게 주어진 읽기와 쓰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을 때의 결과물을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소설은 허구일지언정 그는 절대로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더 나은 시작과 더 나은 삶을 바랄지언정 반드시 도래할 미래를 섣불리 발명하지도 않는다. 그는 단지 모든 함수를 점쳐보는 성실한 수학자처럼, 고정된 착각을 의심하는 철학자처럼 끈질기게 언어의 꿈속으로 자기 자신을 밀어붙일 뿐이다.
_전청림, 해설 「세 개의 무기력과 영원히 더 나아지는 꿈」에서
■ 작가의 말
다시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역시 상상의 구체성 ―그러나 종종 나를 쓰게 만드는 것은 상상 불가능성의 구체성 같고 ―그것이 한없이 버겁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리라. 하지만 어쨌거나 놀랍게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는데 ―나는 내가 꿈꿨던 삶을 살고 있다는 것.
하나의 삶을 구축하는 구체성이란 결코 하나의 삶의 구체성이 아니라는 것.
언제인가부터 ‘당신’이란 말을 쓰지 않으면 소설을 완성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당신이 무사히 도착했기를 ―이 책 앞에 앉은 당신의 구체성을 내가 결코 상상할 수 없다 하더라도.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좋은 꿈 꾸세요.
강대호
■ 책 속으로
역사적으로 세계의 질서에 불만을 품고 이를 붕괴시키고자 했던 많은 예술가가 실상 혐오라는 세계의 다른 질서를 견고하게 쌓아왔듯이, 이 이상한 세계에서 한 방향으로 걷는 것은 동시에 그 반대편으로 걷는 것이고, 어쩌면 아직도 많은 이가 예술에 대한 갈망을 놓지 못하는 이유 역시 바로 이 (반)탐험에 대한 설명할 수 없는 애수 탓이다. 영원히 어느 방향으로도 걸어 ‘나갈’ 수 없는 삶에 대한 망각. 이것이야말로 예술을 지탱하는 불온한 근간일지 모른다.
―「‘DEUS EX MACHINA’를 위한 변론」
여기, 당신이 남겨둔 시가 있다. 박지유의 시가 그랬듯, 설기의 조각이 그랬듯, 당신 자신조차 무엇을 쓰는지 무엇을 행하는지 모르고 남겨두었을 시. 단 한 줄도 불태우지 않고, 단 한 줄의 거짓말도 보태지 않은, 끔찍하도록 사랑했던 당신의, 또 한 편의 시가 여기.
―「아이들의 신」
아이는 오만했다. 오만한 것은 멋진 일이다. 진짜 오만한 것은 말이다. 진짜 오만한 것은 자기밖에 다른 오만한 사람이 없다는 뜻이다. 진짜 오만한 것은 유일하게 오만하다는 뜻이다. 나는 아이의 오만함을 사랑했다.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전」
“전 가끔 좀비들을 이해할 것 같아요. 지루한 거예요! 좀비를 혐오하는 이들은 그들이 고통이 두려워 좀비가 되었다고 말하지만 제 생각은 다릅니다. 그들은 오히려 누구보다 고통을 사랑하고 갈구하는 사람들입니다. 너무 지루했던 거죠! 어떤 고통도 결과적으로 죽음을 상상케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지독한 허무죠. 어쩌면 좀비가 되어 거리를 뛰어다니며 총질을 해대는 이들과 강화유리 너머로 그들을 관찰하고 혀를 차며 무료한 하루를 보내는 이들 사이엔 큰 차이가 없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그들은 모두 지루한 겁니다. 좀비도, 또 당신도요.”
―「현재에서 지속되는 과거(들)」
우루는 제 머리 위로 모종의 장력이 발생함을 느꼈다. 마치 팽팽히 당겨진 실처럼 자신을 하늘로 끌어 올리려는 힘이 있었고, 우루는 이를 따라 날아오르는 대신 회전을 지속했다. 존재가 아래로 활짝 펼쳐지는 것처럼 아득한 환희를 느꼈다. 환희는 죽음을 상상케 했다. 우루는 환희가 상상케 하는 죽음 안에서 영원과 포옹한 적이 있다고 믿었다.
―「용빌, 혹은 가로놓인 꿈들」
감은 눈 안으로 은은하게 스며드는 햇볕이 짧고도 기이인………………………… 잠의 여운을 점차 밀어내듯이. 그러므로 이때 ‘다시’가 암시하는 모종의 망각이 언제 또 일어났는지에 대한 추궁은 다시, 유보될 것이다. 어떤 꿈은 충분한 망각을 통과해야지만 현실과 같은 구체적인 실감을 획득하는 법이니까, 아무려나.
―「두 가지 「프란츠 카프카」에 붙이는 한 가지 주석」
네가 조금씩 꿈으로, 비행으로 치닫는 동안 이명숙은 조금씩 안개와도 같은 무기력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너의 얼굴에서 죽음을 본 이후, 이명숙은 너를 패지 않았다. 네가 아직 k를 만나지 않은 시절, 또 루시드 드림에 깊게 빠지지 않은 시절에도 이명숙은 종종 너의 얼굴에서 죽음을 보았고, 죽음은 이명숙의 모든 말을 앗아갔다.
―「늦잠」
“나는 오후 1시에서 오후 2시 사이에 태어났다. 정확히 기록해두지는 않았지만 오후 2시에 가까웠다고 어머니는 말했다. 오후 1시 56분이나 오후 1시 39분 따위 시각을 떠올릴 수 있다. 나는 오후 1시 56분에 태어났을 수도, 오후 1시 39분에 태어났을 수도 있다. 어쩐지 거짓말을 하는 기분이다. 나는 오후 1시에서 오후 2시 사이, 정확하지 않지만 오후 2시에 가까운 시각 태어났다. 그것만이 진실이다.”
―「반아」
더 나은 삶을 살자. 우리는 약속했다. 언제인지는 말하지 않을 것이다. 언제였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어느 날이었다. 언제인가. 더 나은 삶을 살 것이다. 우리의 대화는 종종 기도처럼 들렸다. 발언과 독백을 구분하지 않았다. 말했으나 듣는지는 불분명했고 그럼에도 대화는 흘렀으므로, 누군가는 듣고 있었을 것이다. 어디엔가 닿기는 닿았을 것이다. 닿은 곳에선 종종 전언과 분간되지 않는 말이 돌아왔다.
―「더 나은」
■ 차례
‘DEUS EX MACHINA’를 위한 변론
아이들의 신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전
현재에서 지속되는 과거(들)
용빌, 혹은 가로놓인 꿈들
두 가지 「프란츠 카프카」에 붙이는 한 가지 주석
늦잠
반아
더 나은
해설│세 개의 무기력과 영원히 더 나아지는 꿈·전청림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