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비를 맞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604

황동규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24년 5월 31일 | ISBN 9788932042787

사양 변형판 128x205 · 156쪽 | 가격 12,000원

책소개

“이것 봐라. 죽은 나무가 산 잎을 내미네.
풍성하진 않지만 정갈한 잎을.
방금 눈앞에서
잎눈이 잎으로 풀리는 것도 있었어.
그래 맞다. 이 세상에
다 써버린 목숨 같은 건 없다!”

바닥없는 열정과 응시로
삶의 처처에서 발견하는 환한 깨달음

“이 시집의 시 태반이 늙음의 바닥을 짚고 일어나
다시 링 위에 서는 (다시 눕혀진들 어떠리!) 한 인간의 기록이다.”
―「시인의 말」에서

시인 황동규의 새 시집 『봄비를 맞다』(문학과지성 시인선 604, 2024)가 출간되었다. 1958년 미당 서정주의 추천으로 『현대문학』에 「시월」「동백나무」「즐거운 편지」를 차례로 발표하며 등단한 황동규는 묶어낸 시집마다 특유의 감수성과 지성이 함께 숨 쉬는 시의 진경은 물론 ‘거듭남의 미학’으로 스스로의 시적 갱신을 궁구하며 한국 서정시의 새로운 현재를 증거해왔다. 시집 『봄비를 맞다』는 쉼 없는 시적 자아와의 긴장과 대화 속에서 일궈낸 삶의 깨달음을 시로 형상화해온 시력(詩歷) 66년의 그가 미수(米壽)를 두 해 앞두고 펴낸 열여덟번째 시집이다. 전례 없는 팬데믹의 공포가 엄습했던 2020년 가을의 복판에 전작 『오늘 하루만이라도』가 선보였으니 근 4년 만에 다시 새 시집으로 독자들을 찾은 셈이다. 전작에 이어 이번 시집 역시 그간 꾸준히 쓰고 발표한 시 59편과 함께 시 편편의 주요한 처소(處所)이자 생의 후반 이십 년 가까이 시인의 발걸음과 감각을 붙잡아두고 진한 즐거움을 안겨준 공간에 대한 소회를 담은 산문(「사당3동 별곡」) 한 편을 더했다.
이번 시집에서 황동규는 녹록지 않은 노년의 삶을 이어가는 노정에도 여전히 시적 자아와 현실 속 자아가 주고받는 대화를 포기하지 않고 생의 의미와 시의 운명을 함께 묻고 답하는 데 전력을 다한다. “걸으리,/ 가다 서다 하는 내 걸음 참고 함께 걷다/ 길이 이제 그만 바닥을 지울 때까지”(「그날 저녁」), “다시 눕혀”지더라도 “늙음의 바닥을 짚고 일어나”(「시인의 말」) 이어가는 것이 자신의 삶임을 명료하게 의식하는 그의 시는 누구나 열망하나 쉬이 넘볼 수 없는 여유와 온기와 다감함 역시 잊지 않는다. “끄트머리가 확 돋보이는 시”(「사월 어느 날」)를 향한 한결같은 열정과 함께, 삶에 대한 유쾌하면서도 진지한 긍정의 진술이 가닿는 환한 깨달음, “그렇다, 지금을 반기며 사는 것”(「겨울나기」)이란 시인의 다짐을 거듭 곱씹게 되는 이유다.


“집콕의 극치는 역시 혼자 있음.
그 있음에 외로움 하나라도 빠뜨리면 / 혼자 없음.”
─코로나 파편들의 시간, 막다른 골목에서 존재의 의미를 찾다

일상의 이완이자 또 다른 시와의 만남을 예비하는 시간으로 부지런히 여행을 챙겨온 시인에게 4년 남짓 코로나 거리두기가 낳은 ‘집콕의 일상’은 그 끝을 짐작 못 할 긴 겨울처럼 예사롭지 않은 일격이었을 터다. “[혼자] 있음이 [혼자] 없음보다 한참 비좁고 불편하다”(「코로나 파편들」)는 생각이 고여가는 나날, “아침이 가고 저녁이” 와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무음의 둔주곡”처럼 “소리도 빛도 땜질 자국도 없”이 “건성건성” 살 줄 알았건만(「건성건성」) 웬걸, “걷잡을 수 없이 헝클어”(「흩날리는 눈발」)지기 십상인 노년의 삶은 마스크를 꺼내 쓰고 몇 걸음 집 밖 행보를 그리는 순간부터 주저와 응전을 오가는 치열함과 맞닥뜨린다. 그렇게 나선 눈길 외출에서 새삼 바닥의 맨홀 뚜껑이나 참새는 물론이고, 숱한 망설임을 뒤로하고 집을 나선 시인 자신을(「여드레 만에 집을 나서며」), 또 떨어진 꽃잎 하나가 물길을 절묘하게 막아선 모습을 감탄하는 데서(“계속 버티네! 하긴 버팀만으로도 / 이 코로나 세상에 남아 있을 격 갖춘 게 아니겠나,”) 우리는 황동규 시의 여전한 생기와 활력을 본다.


“이런 일 다 집어치우고 싶지만 / 봄비가 속삭이듯 불러내자 /
미처 못 나간 것들이 마저 나가는데 / 어떻게 막겠나?”
─술렁이는 발코니의 시간, 바빠지는 감각들, 다시 고르는 호흡들

영하의 겨울, 아파트 발코니에 사이좋게 세를 든 소철과 알로에, 문주란의 바랜 색과 빛을 우두커니 바라보며 적적해하던 심중도 잠시, 붉게 움튼 제라늄 몇 송이와 고사할 줄로만 알았던 고무나무가 석양을 향해 번쩍 쳐든 잎들의 광경에서 시인은 “지금을 반기며 사는” 삶의 태도(「겨울나기」), 그 아름답고도 절실한 생의 의미를 환기한다. 어디 그뿐인가. 봄가을, 벚꽃과 은행나무가 마치 불길처럼 번져 환하게 메운 덕분에 “발코니에서 홀린 듯 내다”보게 되는(「마음 기차게 당긴 곳」) 오래된 아파트 단지는 시인에게 세상 어느 곳 부럽지 않은, “멍 기차게 때리는 공간”이다. 동시에 “남은 내 삶에도 혹시 불길이 댕긴다면” 분노와 섭섭함으로 “헝클어진 마음을 정신없이 태워” 끝내 “마음 텅” (「불타는 은행나무」) 비우고픈 희망을 키우는 곳이자, 애당초 미움이나 섭섭함을 고이게 두지 않는 편이 낫다는 명쾌한 현실 인식을 외면하지 않는 장소이다.


“뵈든 안 뵈든 묵묵히 기는 몸 하나하나가
오색빛 새로 두르게 노래하시게.”
─우연이 겹쳐드는 산책길의 시간, 삶의 경이로움은 계속된다

“허리 부실에 코로나 겹쳐 막다른 골목 다된 이 삶”(「눈물」), “시력 청력 계속 줄고 / 기억력, 감탄, 섬뜩하게 졸았지만”(「삼세번」), 끝끝내 포기할 수 없는 시인의 일상이 있다. 거의 모든 집이 야트막한 담장과 잘 가꾼 꽃밭을 가졌던 사당3동, (이제 자주 오르지는 못해도) 서달산을 낀 채 현충원까지 오고 가는 산책로에서 보고 듣고 만져본 아기자기한 즐거움과 수시로 마주하는 반가움이 그것이다. 시인의 후반생과 시작(詩作) 둘 다의 중요한 동력으로 역할해왔음을 이번 시집에 수록된 숱한 시편이 생생하게 증명한다. “시는 시인 자신의 삶을 형상화하는 것”이며, 시를 완성하는 과정에서 “시적 자아의 윤리적이고 미학적인 면은 사용하되 내가 삶과 부딪히며 생긴 구체적인 면을 살려가는 것이 중요하다”(2016년 호암예술상 수상 기념 초청 강연에서) 말해온 황동규의 시론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살아 있는 어떤 것 하나라도 대면할 수 있어야 / 마음 붙이지. // […]조그만 만남이라도 산 것과 마주치면 / 생짜 삶이 화끈하게 달려든다.”(「속되게 즐기기」)
이번 시집의 서시로 자리한「오색빛으로」는 시집을 통틀어서 유일한 미발표작이다. 시인이 공들여 벼린 가장 최신의 작품으로 전복 껍데기의 이미지와 운명에 빗댄 시(인)론으로도 읽히는바, 그 시적 사유와 삶의 통찰이 깊고 눈부시기만 하다. “더 낭비할 것이 사라진 순간 / 몸 있던 자리 훤히 트이고 / 뵈지 않던 삶의 속내도 드러나겠지. /[…]/ 뵈든 안 뵈든 묵묵히 기는 몸 하나하나가 / 오색빛 새로 두르게 노래하시게.”

“늙음은 온갖 불편의 집합이다. 마지막으로 정리할 게 무엇인가 생각할 때가 되었다.
그러나 지금도 아침에 해가 뜨고 아파트 발코니에선 꽃들이 피고 지고 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시, 물빛으로 환한 시간이.”
―「뒤표지 글」에서

세월을 거스를 수 없는 시인의 ‘육체’는 “‘휙휙 돌아가는 계절의 회전 무대나 / 갑작스런 봄비 속을 / 제집처럼 드나들던 때는 벌써 지났”을지 모른다. 그에 반해 시인의 ’정신‘은 지난가을 고사한 줄만 알았던 나무가 빗속에서 연두색 잎을 터뜨리는 순간을 놀라움 섞인 반가움으로 환대한다. 그렇게 “이 세상에 / 다 써버린 목숨 같은 건 없다!”(「봄비를 맞다」)고, “지금을 반기며 사는 것”(「겨울나기」)이야말로 이 한생(生), “미련 없이 우연을 제대로 누리는 삶”(산문 「사당3동 별곡」)으로 거듭나게 할 거라며 우리 마음에 불을 지핀다. 황동규 시 특유의 극서정시(劇抒情詩)는 고목의 속삭임으로도 그 진면모를 드러낸다. “‘이런 일 다 집어치우고 싶지만 / 봄비가 속삭이듯 불러내자 / 미처 못 나간 것들이 마저 나가는데 / 어떻게 막겠나?’” 그렇다. 별것 아닌 사소한 삶의 전경은 살아 숨 쉬는 시(인)의 열정으로, 삶의 경이(驚異)로 이어진다. 맞다. “늙음의 바닥을 짚고 일어나 다시 링 위에 서는 (다시 눕혀진들 어떠리!) 한 인간의 기록이”(「시인의 말」) 숭고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 책 속으로

이제 이 몸 나이테 꽉 차 터지기 시작한 나무,
살펴보니 잘 안 뵈는 속도 한참 비었다.
올빼미 한 쌍쯤 들어와
몸 절반 크기 얼굴 끄덕끄덕
말없이 주인들처럼 살았으면.
[…]
이리 왔다 저리 갔다 마음 다잡는 놈도 있고
벽을 콕콕 쪼아대는 녀석도 있다.
잡새들! 다시 보니
아, 세월에 밀려 내팽개쳐진 나의 잡생각들!
신문 읽다가 나도 모르게 부르르 떨던 놈까지.
잡생각이면 어때?
새든 생각이든 모질게 퍼붓는 비바람을
조금이라도 따뜻하게 가려주는 일,
살아 있는 자면 해줄 만한 일이 아닌가?
―「속이 빈 나무」 부분

곧은 금 굽은 금 가리지 않고
앞서 긋다 만 금부터 먼저
물결이 금들을 지우고 있다.
흔적도 없이.
나의 금도 이렇게 지워지리라.
긴장할 거 없다 몽상도 없다.
그어진 금 거두고 새 금 긋는 거다
―「2022년 2월 24일(목)」 부분

새 여권 신청하며 검색기에 엄지 올려놓고

아무리 눌러대도 금들이 나타나지 않는다.
마스크 벗어 들고 승강이 끝에 수속을 마친다.
찜찜하다.

손가락에 묻은 스탬프 액 물티슈로 지우며
생각을 헤치듯 구청을 나온다. 햇빛이 왈칵.
가만, 나도 모르게 세상 여기저기 찍어놓고 갈 물증을
지워버리고 살게 됐어.
홀가분하지.
느낌들을 가볍게 밀며 걷는다.
―「지문」 부분

몸 다 내주고 나서
전복 껍데기는 오색빛 내뿜지.
몸 없어진 곳에 가서도 노래하시게.
더 낭비할 것이 사라진 순간
몸 있던 자리 훤히 트이고
뵈지 않던 삶의 속내도 드러나겠지.
좋은 날 궂은 날 가리지 않고
어디엔가 붙어 기고 떨어져서 기는
아프면 누워 기고 실수로도 기는
기느라 몸 없어진 것도 모르고
계속 기고 있는 몸 드러나겠지.
마음먹고 다시 둘러보면
주위의 모두가 기고 있다.
저기 날개 새로 해 단 그도 기고 있다.
뵈든 안 뵈든 묵묵히 기는 몸 하나하나가
오색빛 새로 두르게 노래하시게.
―「오색빛으로」 전문

세상 뜰 때
아내에게 오래 같이 살아줘 고맙다 하고
(말 대신 손 한번 꽉 잡아주고)
가구들과는 눈으로 작별, 외톨이가 되어
삶의 마지막 토막을 보낸 사당3동 골목들을
한 번 더 둘러보고 가리.

[…]
살던 아파트 지척, 구두 수선 퀀셋 앞
콘크리트 바닥에
산나물 고추 생밤 내놓고
무작정 앉아 있는 할머니한테서
작은 밤 한 봉지 사 들고
끝물 나뭇잎들 날리는 서달산에 오르리.
[…]
운 좋게 귀여운 다람쥐 만나 밤 몇 톨 꺼내놓고
몇 발짝 걸어가다 되돌아와 밤 다 내려놓고
길에 굴러 들어온 돌멩이는
슬쩍 걷어차 길섶으로 되돌려보내고
서달산 능선 길을 아끼듯 걸으리.

[…]
참맹세든 헛맹세든
지난 맹세는 다 그립다.
내일 저녁에도 이 별은 뜨리라.
걸으리,
가다 서다 하는 내 걸음 참고 함께 걷다
길이 이제 그만 바닥을 지울 때까지.
―「그날 저녁」 부분


■ 시인의 말

4년 전 시집 『오늘 하루만이라도』를 상재할 때 앞으로는 좀 건성건성 살아도 되겠구나 했지만 코로나바이러스가 그렇게 놔두지 않았다. 늙음이 코로나 글러브를 끼고 삶을 링 위에 눕혀버린 것이다. 이 시집의 시 태반이 늙음의 바닥을 짚고 일어나 다시 링 위에 서는 (다시 눕혀진들 어떠리!) 한 인간의 기록이다.

2024년 봄에
황동규

목차

■ 차례

시인의 말
1부
오색빛으로 | 히아신스 | 단 사과 | 겨울나기 | 흩날리는 눈발 | 봄비를 맞다 | 이 한생 | 마음 기차게 당긴 곳 | 야트막한 담장 | 사월 어느 날 | 불타는 은행나무 | 터키 에베소에서 만난 젊은이 | 시인 삶의 돌쩌귀 | 바가텔 5 | 몰운대 그 나무
2부
여드레 만에 | 참새의 죽음 | 나갈까 말까? | 어떤 9월 | 건성건성 | 옥상 텃밭 | 코로나 파편들 | 서달산 문답 | 외롭다? | 눈물 | 바닥을 향하여 | 삼세번 | 2022년 2월 24일(목) | 지문 | 해파랑길
3부
비바람 친 후 | 서울 소식 | 담쟁이넝쿨 | 백 나라 다녀온 후배 | 생각을 멈추다 | 조각달 | 속되게 즐기기 | 어떤 동짓날 | 슬픈 여우 | 까치 | 병원을 노래하다 | 호야꽃 | 그리움을 그리워 말게 | 그날 저녁
4부
홍천군 내면 펜션의 하룻밤 | 태안 큰 노을 | 꽃 울타리 | 해시계 | 흑갈색 점 하나 | 그 바다 | 혼불 | 혼불 2 | 묘비명 | 「나는 자연인이다」 | 길 잃은 새 | 한밤에 깨어 | 싸락눈 | 속이 빈 나무 | 뒤풀이 자리에서
산문 / 사당3동 별곡 · 황동규
해설 / 환한 깨달음을 향하여 · 장경렬

작가 소개

황동규 지음

시인 황동규는 1938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학교 영문과와 같은 과 대학원을 졸업했고, 영국 에딘버러 대학 등에서 수학했다. 1958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한 이래 『어떤 개인 날』 『풍장』 『외계인』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우연에 기댈 때도 있었다』 『꽃의 고요』 등의 시집을 펴냈다. 현대문학상·이산문학상·대산문학상·미당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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