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무거울 때 나를 그 무거움에서 헤어나게 하는 것은
자연과 시이다”
197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시인 정현종이 담아낸 삶에 대한 ‘음미’의 흔적
여기 실려 있는 글들에서, 많이 부족한 대로, 삶에 대한 무슨 ‘음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이랴.
―‘책머리에’에서
정현종 시인이 2003년에 펴낸 산문집 『날아라 버스야』가 2015년 개정판을 거쳐 2024년, 문학과지성사에서 30여 년 만에 “빛-언어 깃-언어”라는 새로운 제목의 두번째 개정판으로 출간되었다. 경쾌하고 밝은 제목에 걸맞은 느낌의 표지로 2015년 새 옷을 입은 지 9년 만에 제목도 표지도 전혀 다른 책인 듯 완전히 탈바꿈하여 다시 한번 독자들을 찾아온 『빛-언어 깃-언어』의 특별함은 무엇보다 바뀐 제목에서부터 시작된다.
‘빛-언어 깃-언어’는 책의 3부 제목이기도 한데, 수록된 글의 제목으로 부의 제목을 붙인 1부· 2부와 달리 ‘빛-언어 깃-언어’는 3부의 「시에 대한 몇 가지 생각」이라는 글에서 한 번 등장하는 말이다. 하지만 이 한 번의 언급 은 강렬하게 책의 중심을 관통한다. 이것이 바로 60년에 달하는 시간 동안 시인으로 살고 있는 정현종의 시론이 담긴 말이기 때문이다.
‘빛-언어 깃-언어’는 정현종 시인의 시론으로 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열쇠라 할 수 있다. 2022년 출간한 열한번째 시집 『어디선가 눈물은 발원하여』(문학과지성사)에 수록된 산문 「시를 찾아서」에 이에 대한 설명이 자세히 나와 있다. ‘스튜디오 바이블’에서 진행한 온라인 강연을 정리한 이 글의 마지막 챕터 소제목도 ‘빛-언어, 깃-언어’이다.
“여명의 빛이 만물을 드러내 보여주듯이, 시적 언어는 사물의 의미와 가치, 그 존재 속에 내장되어 있는 깊이와 넓이를 드러내 보여”준다고 여기는 시인에게 ‘빛-언어’는 시적 언어와 같은 말이다. 정현종 시인에게 “시적 상상 활동 속에서 시간과 공간은 무한에 이어”지고 “시적 시간은 항상 태초”이기 때문이다. 또한 시인은 “‘가벼움’에 대한 느낌과 관념을” 새들을 통해서 얻는다고 밝히고 있다. 한데 “예술이 우리를 짓누르는 지상의 짐에서 해방한다든지, 삶을 견디게 해준다든지 하는” 바슐라르나 니체 등 “인류의 뛰어난 정신들이 한 이야기”가 곧 “마음이 가벼워지며 힘을 얻는다는 것”이므로, 시가 ‘깃-언어’라는 의미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버스마저 날아가게 하는, 깃처럼 가벼운 시의 힘. 전혀 다른 듯했던 이전 제목 “날아라 버스야”와 “빛-언어 깃-언어”는 어쩌면 같은 말이기도 할 것이다.
“그 새벽의 빛과 새를 나는 지금 은유로 읽으려고 한다.
시의 언어는 말하자면 그 빛이나 새와 같은 것이다”
─생생한 삶의 체험에서 나온 시에 대한 지금-여기의 증언
가장 멀리는 1975년부터 가장 가까이는 2002년까지, 1965년 문단에 나온 이후 자신만의 독보적인 시 세계를 구축하며 왕성하게 활발한 시기에 써 내려간 시인 정현종의 삶과 시, 예술과 책에 대한 ‘음미’의 흔적이 이 한 권에 오롯이 담겨 있다.
이전 제목이었던 “날아라 버스야”는 산문집 2부 마지막 글인 「아름다움에 대하여」에 실린 시의 제목으로, 1999년 출간된 시인의 시집 『갈증이며 샘물인』(문학과지성사)에 수록되어 있다. 「아름다움에 대하여」가 씌어진 1997년 당시, 버스에서 꽃다발을 든 사람을 둘이나 본 시인이 “그 꽃들이 버스 안을 환히 밝혀, 여기가 달리는 낙원이구나 싶은 생각이 절로” 나서 그날 저녁 써 내려간 시가 「날아라 버스야」라고 시인은 밝힌다. 또한 이번 제목이자 시인의 시에 대한 생각을 그대로 담고 있는 ‘빛-언어 깃-언어’에 대한 이야기가 실린 3부의 「시에 대한 몇 가지 생각」에는 새벽 숲을 걸었던 시인의 경험이 그려진다.
아직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운 새벽, 숲길로 걸어 들어가 길을 더듬어 가는데, 동쪽 하늘이 푸르스름하게 동트면서 오솔길이 하얗게 떠오르고 나무들의 초록빛도 보이기 시작했다. 그 순간의 내 감격을 위와 같은 미지근한 산문적 서술은 전혀 담아내지 못하지만 그때 나는 이 세상이 매일같이 새로 창조되고 있음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던 것이다.
[……]
다름 아니라 후투티라는 새가 저 앞 오솔길 위에 앉아 있다가 나를 보자 목털을 곤두세우면서 날아올랐는데, 그 순간 내 속으로 그 새가 이 지구를 두 발로 거머쥐고 가볍게 날아올랐다는 느낌이 지나갔다. 그 새는 말하자면 신화적인 새였던 것이다.
그 새벽의 빛과 새를 나는 지금 은유로 읽으려고 한다. 시의 언어는 말하자면 그 빛이나 새와 같은 것이다. 시는 바로 빛-언어이며 깃-언어이다. 되풀이할 것도 없겠지만, 사물을 새벽의 여명처럼 창조하는 말, 끊임없는 시작으로서의 말, 빛 속에 떠오른 하얀 숲길 위에서 날아오른 그 새처럼 무겁고 무거운 걸 가볍게 들어 올리는 말―시는 그러한 말이며, 그렇지 않을 때 그것은 예술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지니기 어렵다.
―「시에 대한 몇 가지 생각」
시인은 자연과 삶 속에서 끊임없이 시와 시에 대한 생각을 만난다. 그것은 시를 ‘사는’ 일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정현종 시인이 6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지치지 않고 계속해서 활발하게 시를 쓸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리고 그의 시는 물론이거니와 산문 또한 50년 전, 20년 전 씌어졌어도 여전히 ‘현재’의 생생한 감각을 지니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빛’과 ‘깃’, 그의 언어가 바로 자연에서 왔기 때문이다. 우리가 훼손하지 않는 한, 거기 그렇게 늘 현재로 존재하는 자연의 언어가 바로 정현종 시인의 언어다.
『빛-언어 깃-언어』는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물, 현상, 시에 대한 시인의 한결같은 시선과 그 시선이 담은 소회를 진솔하고 깊이 있게 전한다. 1부 ‘현재를 기다린다’에는 유년과 대학 시절을 포함한 과거의 추억, 그때에 잊지 못할 장면과 사물에 대한 단상, 그 시절 시인의 시간을 채웠던 독서의 경험, 인간과 세상사에 대한 성찰이 담겨 있다. 2부 ‘추락이여, 안녕’은 저자의 예술론이 담겨 있는데 춤, 몸, 바람으로 이어지는 시인의 미학에 대한 깊은 성찰이 돋보인다. 3부 ‘빛-언어 깃-언어’는 시인이 오랫동안 견지해온 시론과 함께 외국 시인들에 대한 시인론이 실려 있다. 네루다, 바예호, 로르카는 정현종 시인에 의해 국내 독자들이 한발 더 다가설 수 있게 된 시인들이기도 하다. 그들에 대한 깊은 애정과 공감 어린 술회는 현실을 가볍게 날아올라 시적 비상을 보여주었던 시인들에게 보내는 찬사이자 뛰어난 시인론으로, 다시 한번 독자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하다.
■ 책 속으로
건드리기만 하면 과거의 앙금은 언제나 그 가라앉은 상태로부터 피어오른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나올 것 같은 눈을 뜨고 있는 과거가 없는 건 아니겠지만, 그러나 과거의 앙금은 ‘피어’ 오르지 않으면 안 된다. 꽃처럼 피어나는 과거, 왜 과거가 꽃처럼 피어나는가. 내가 지금 살아 있기 때문이다. 현재가 피어나기를 내가 바라기 때문이다. 매일매일이 새날이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하여 현재가 피어나기를 기다린다. 나는 내일이 아니라 끊임없이 현재를 기다린다. 나는 현재를 기다리고 있다.
―「현재를 기다린다」
마음이 무거울 때 나를 그 무거움에서 헤어나게 하는 것은 자연과 시이다. 봄비나 여름비와 달리 겨울비가 음산한 까닭은, 추운 데다가 낙목(落木)을 비롯해 모든 게 회색이기 때문일 터인데, 날이 개고 해가 나면서 반짝이기 시작하는 그 물방울의 빛을 보면서 보는 사람의 몸과 마음도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는 것은, 그 빛의 이쪽으로의 전도(傳導)가 그야말로 육체적이라고 할 만큼 직접적이고 강력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빛에 대해서 (가령 여러 종교가 말하듯이) 추상적인 이야기를 아무리 많이 해봤자 그 물방울이라는 빛 전도체에 비하면 아무 효과도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 물방울-빛과 경쟁할 수 있는 게 있다면 시적 이미지뿐일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하여」
시가 하는 일은 여러 가지로 말해볼 수 있겠지만, 인간의 체험과 기억의 내용을 상상 속에서 신화적인 것으로 연금(練金)해내는 것이라고 말해볼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시로 노래하기 전에는 그런 줄 몰랐던 사물의 가치가 시를 통해서 떠오르고 피어난다는 점에서 시는 가치의 샘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때 가치를 갖게 된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신화적인 것으로 편입됨을 뜻하며 시의 그러한 창조적 동력의 원천은 시인의 생리인 꿈꾸기이다.
―「시, 가치의 샘 영혼의 강장제」
■ 책머리에
“음미되지 않는 삶은 가치가 없다”(소크라테스)라는 말이 참으로 옳은 말이라고 한다면, 여기 실려 있는 글들에서, 많이 부족한 대로, 삶에 대한 무슨 ‘음미’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면 얼마나 다행이랴.
2015년에 낸 『날아라 버스야』라는 책을 제목을 바꿔 다시 낸다.
2024년 봄
정현종
■ 차례
책머리에
1부 현재를 기다린다
재떨이, 대지의 이미지
5분짜리 추억 두 컷
호박꽃등
대학 시절
날자, 우울한 영혼이여
현재를 기다린다
카테리나의 추억
세속에서의 명상
액땜으로서의 말
낙엽 그리고 도시의 우울
빵을 가지러 가는 네 손을 낮추어라
신은 자라고 있다―가이아 명상
내 인생의 책들
2부 추락이여, 안녕
나무 예찬
몸에 대하여
바람과 춤―탄력과 가동성
춤, 불타는 숨―이사도라 덩컨의 자서전에 부쳐
추락이여, 안녕
사과 이야기―미적 가치에 대한 단상
평화와 천진성의 세계―장욱진의 그림
새벽의 메아리
아름다움에 대하여
3부 빛-언어 깃-언어
시란 무엇인가
박명의 시학
시, 가치의 샘 영혼의 강장제
마음의 무한―시가 꿈꾸는 것
시에 대한 몇 가지 생각
메아리의 시학―로르카 읽기
숨 막히는 진정성의 시―바예호 읽기
인공 자연으로서의 시―네루다 읽기
큰 화육(化肉), 위대한 동화(同化)―다시 네루다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