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카락은 머리 위의 왕관

문학과지성 시인선 603

이다희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24년 5월 13일 | ISBN 9788932042763

사양 변형판 128x205 · 148쪽 | 가격 12,000원

책소개

“물구나무를 서면 머리카락은 머리 위의 왕관”

현실의 틈새를 오가는 경쾌한 발걸음
어긋나는 일상을 포착하는 마술적 사실주의

경쾌하지만 슬프고, 단정하지만 발칙한 언어를 구사하며 독보적인 시 세계를 선보여온 이다희의 두번째 시집 『머리카락은 머리 위의 왕관』이 문학과지성 시인선 603번으로 출간되었다. “언어의 재현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삶을 끝없는 재현 속에 위치시키”(신용목)며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킨 첫번째 시집 『시 창작 스터디』 이후 4년간 꾸준히 쓰고 다듬은 시 42편을 4부로 나누어 묶었다. 이번 시집에서 이다희는 조금쯤 엇나간 현실의 틈새를 시적 장면으로 변모시키며 한 발짝 더 멀리 나아간다. 지난 시집에서 발랄하고 씩씩하게 일상을 꿰맞추던 화자들이 여전히 자신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충돌하고 성장해가는 모습이 담담한 위로를 건넨다. “물구나무를 서면 머리카락은 머리 위의 왕관”(「머리카락은 머리 위의 왕관」)이 되는 것처럼 사뭇 다른 시선으로 일상을 감각함으로써 이 세계의 예외적 존재들에게 반짝이는 왕관을 씌워준다.


“우린 결코 같은 편이 아니지. 그렇지만 난 그저 네 편이야.”
무심하고 비장하게 세상과 대면하는 존재들

이번 시집의 첫머리에 놓인 「입춘(立春)」은 봄의 기운이 약동하는 이 계절에 더없이 잘 어울리는 시다. 갑작스레 발효된 대설주의보는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는 거리의 속도와 질감을 바꾼다. “사람들이 천천히 걷”고 “사람보다 차가 더 천천히 간다”. 그러나 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녹기 마련이고, 폭설이 지난 후에는 “눈이 아닌 무엇인가가 인간을 사로잡는다”. 분명 무언가 일어났는데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굴러가는 세상에 묘한 괴리를 느껴본 적 있다면, “지나온 길에 꺾인 꽃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얼음꽃”으로 만들어 기억하려는 시인에게 동질감을 느끼지 않을까.
이다희의 화자들은 세상의 인과관계를 납득하지 못하고, 그 규칙에 순응하지 못하는 모습을 애써 숨기려 하지 않는다. 「샌드위치 시스템」의 화자는 “주먹 쥔 손등 위로 돋은 핏줄은 파란색인데 피는 왜 파란색이 아”닌지 고민한다. “피는 왜 파란색이 아닐까 눈은 왜 붉게 충혈되는가 붉은 눈에서 떨어지는 눈물은 어째서 투명한가” 하는 물음이 이어진다. “요 며칠 먹은 것이 별로 없는데 거울 속 뺨은 붉고 건강하니 참 이상한 일”(「미인이 하는 게임」)이라 생각하고, “죄송하다고 말하면서도 눈물이 나게 웃”(「입 모양을 읽었거든」)는다. 그들은 저마다 다른 이유로 세상의 질서와 어긋나지만 “이런 기분을 품고 그냥 사는 일에도 상당한 각오가 필요하”고 “이렇게 살지 않는 일에도 각오가 필요하다”(「사라진 대표님」)는 점에서 일치를 이룬다. 실은 모두가 저마다의 비장함으로 세상과 대면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태양 아래서 나는 네 편이야. 너는 무심하게 내 마음을 밟고 지나가. 행성들을 모아 모래성을 지어줄게. 난 널 안타까워하지 않아. 우린 결코 같은 편이 아니지. 그렇지만 난 그저 네 편이야.
―「하루보다 긴 일기」 부분


“앞뒤 다 잘린 단어가 우리를 절벽 위에 세워두지”
왕관을 쓰고 어디로든 나아가는 소녀들

발코니로 나가 담배에 불을 붙인다 이제는 담배를 태우지 않지만 타고 있는 것을 보고 싶을 때가 있다 바닥이 큰 나사못 네 개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이곳도 운동장이라면 어떤 초록이 가능할까 나는 건물의 소략한 설계도를 머릿속으로 그려본다 [……]

나는 조용한 흑백영화 같은 건반을 들여다본다 피아노는 풍금이 아니지만 발에 제대로 힘을 준다면 연주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건반 위에 손을 올려놓고 호흡을 정리한다 그런데 누군가의 손이 어깨 위로 올라오고 손을 따라 시선이 올라가면 주인은 어디선가 타는 냄새가 난다고 도와달라며 울먹인다 나는 발코니로 뛰어나간다
―「적산가옥(敵産家屋)」 부분

이 시의 화자는 카페로 개조된 적산가옥에서 한가로운 오후를 보내며 어린 시절 아버지의 모습과 한때 이 집을 거쳐 갔을 이들을 떠올린다. 두서없이 이어지는 화자의 회상 또는 상상은 발코니에서 피어오르는 탄내로 인해 급작스레 막을 내린다. 이 시집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김영임은 시 중반부에서 “발코니로 나가 담배에 불을 붙”인 화자의 행위를 예상치 못한 결말과 연결 지으며, 시가 끝나고도 이어지는 시적 시공간의 연장을 설명한다. 그의 말처럼 “독자는 시의 장면에서 풀려났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그 안에 잡혀 있게 된다”.
이처럼 남은 서사를 독자에게 맡기는 시적 전략은 불안과 외로움을 겪어내고 있는 이들이 저마다의 상상력으로 빈칸을 채우게 한다. “앞뒤 다 잘린 단어가 우리를 절벽에 세워”둘 때, 왕관을 쓴 “퀸은 종과 횡과 사선으로 움직일 수 있”(「종과 횡과 사선으로」)는 자유를 얻는다. 그러므로 『머리카락은 머리 위의 왕관』을 읽는 일은 이해에서 상상으로, 다시 믿음으로 나아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이해와 상상과 믿음은 다르지만 서로를 서로에게 덮어씌우면서 소녀는 성장한다”(「121분」). 이 절벽에서 기꺼이 뛰어내려 “눈을 뜨면 항상 맞춤인 내가 있”(뒤표지 글)을 것이다.


■ 책 속으로

어떻게 돌아가야 할까 걸어가야 할까
나는 할 수 없이 벗은 채로 물에 들어가
다시 헤엄을 쳐

그러다가 문득 방금 도착했을 때
이가 달달 떨렸을 때
그때가 한중간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

나는 크게 원을 그려 손으로 발로 마음으로
계속 큰 원을 그려

나 이번엔 도착하면 옷을 집어 입고 그대로 달려나갈 거야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냥 달릴 거야

길은 계속 이어지고 나는 나의 한중간이 조용히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호수를 나와 맨몸으로 서서 이를 달달 떨었던 일은 잊히지 않는다. 뒤도 돌아보지 않겠다는 다짐은 아직도 지켜지고 있다. 내 앞의 풍경들은 점점 바뀌고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생겼다가 사라지지만, 앞의 풍경들이 바뀐다고 뒤의 풍경도 바뀐다는 희망은 품지 않게 되었다.
―「무화과나무 여름 바구니 이름」 부분

갑자기 멈춰 세우지 마

뛰다가 갑자기 멈추면 넘어지기 쉬워

아침에 일어나면 뭐든 씹어 삼키려고 한다
침대는 내 혼잣말을 어떻게 다 듣고 있는지
아마 영원에 중독된 것 같기도 해

[……]

잠시 눈을 감으면 지난밤 혼잣말이 혀끝에 감돈다
막막한 질문들이 체스 판 위의 말처럼 소년을 옮긴다

소년은 체스 판 위에서 퀸이 된다
퀸은 종과 횡과 사선으로 움직일 수 있다
―「종과 횡과 사선으로」 부분

지금 가게 주인의 말이 이해 가지 않는다. 아이스아메리카노를 팔지 않을 수 있지만 아이스아메리카노라는 게 없다고 말하는 것은…… 이상하다. 당장 밖에 나가 조금만 걸어가도 나는 다른 가게를 찾을 수 있을 것이고, 그곳에 아이스아메리카노가 없을 리 없다. 나는 주인의 눈을 쳐다봤다.

사람들에게는 저마다의 무표정이 있다. 누군가는 약간 찡그린 미간이 무표정이고 누군가는 희미한 미소가 무표정인데, 가게 주인은 무표정이 무표정이다. 온갖 표정이 내려앉는 곳.

커피에 대한 철학이 깊은 건가. 하지만 철학과 아이스아메리카노가 무슨 상관일까. 추운 날씨 때문일까? 철학도 상관이 없는데 날씨는 또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주인을 쳐다보다가 벽에 붙은 메뉴판을 읽어본다. 정말 아이스아메리카노라는 메뉴가 없다. 아메리카노라는 메뉴도 없다. 이게 그저 장난이 아님을 알았다. 나는 중요한 선이 하나 빠진 설계도를 보듯, 혹은 유출된 기밀문서를 보듯이 메뉴판을 샅샅이 쳐다본다.

[……]

사랑은 금세 삶 쪽으로 쓰러진다. 바닥이 더러운 이유다. 비유가 너절한 이유다. 참,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다시 모르게 된다. 그러니 다시 모르게 된다. 누군가 나의 단점을 묻는다면 없다고 말해야 한다.
―「시티 커피」 부분

마음대로 아름답고 싶은데
슬픔을 뺏겨서 기분이 이상합니다.

나는 고개를 숙입니다. 뒤통수에도 이목구비가 생기는 기분. 다시 고개를 듭니다. 이제 나에게는 어떤 초능력이 생겼습니다. 내 입술은 세트장을 무너지게 할 수 있고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습니다.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고 손을 가지런히 모으며 나의 새로운 초능력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다시 슬픔슬픔슬픔슬픔슬픔슬픔슬픔슬픔슬픔슬픔슬픔

슬픔을 입안에서 굴려.

서로의 그림자를 밟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워지면 우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그림자가 땅을 끊어버리고 물건들을 조각내는 그때에.
내 입술이 무슨 말을.
―「입 모양을 읽었거든」 부분

고자질하는 것처럼 글을 써
내가 잘만 쓰면 미래가 내 편을 들어줄지도 모르잖아?

미래를 한참 기다리다가 미래가 오늘 안에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너 기다리다가 을지로에서 양말이 다 젖었다

나는 이수 씨와 함께 눈을 밟고, 밟다가 이상하게 신이 나서 뛰다가
같이 밥을 먹었어 이제 슬슬 잘 준비를 해

한참 쓰다가 미래마저 미워지면 눈물이 나려 한다

눈물이 볼에 닿지 않게 상체를 숙이고 운다
그렇게 울면 눈만 살짝 붓고 마는데 멀리 있는 미래가 보면 우는 줄도 잘 모를 것이다
―「일기」 부분


■ 시인의 말

다섯 살 때 목표는 손 한번 떼지 않고 하트를 그리는 것이었다.

눈이 좋지만 크고 넓은 안경을 하나 샀다.

힘들면 잠시 엎드려 있어야 하는데
그럴 땐 안경을 빼서 옆에 두어야 한다.

종이가 있다며 가지러 간 언니가 닫힌 문을 다시 열고 들어올 때까지.

2024년 5월
이다희

목차

■ 차례

시인의 말

1부
입춘(立春) | 충청도 |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 무화과나무 여름 바구니 이름 | 겨울병 | 종과 횡과 사선으로 | 우리 사이 꽃 | 나날들 | 선악을 초월한 다리 위에서

2부
렌드로 카이프테 | 청소부 천사 | 현대시 | 하이쿠 | 모든 것과 그 밖의 다른 것 | 방 안의 집 | 오일 페인팅 | 홍시와 홍시 | 미인이 하는 게임 | 미인은 자기 얼굴이 싫을 거야

3부
우회전하면 영화제 | 시티 커피 | 121분 | 입 모양을 읽었거든 | 일기 | 시선을 내려놓고 | 샌드위치 시스템 | 머리카락은 머리 위의 왕관 | 낯선 거품과 맥주잔 | 우유 전구 | 열대어

4부
유령의 집 | 적산가옥(敵産家屋) | 지팡이 | 소파 오페라 | 사라진 대표님 | 모르는 엉덩이 | 손을 들어서 | 오렌지 절벽 | 설탕물 | 놀이터 | 주공아파트 | 하루보다 긴 일기

해설
어른의 성장통·김영임

작가 소개

이다희 지음

시인 이다희는 1990년 대전에서 태어나 201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시 창작 스터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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