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심장 훈련

이서아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24년 5월 10일 | ISBN 9788932042756

사양 변형판 124x188 · 420쪽 | 가격 18,000원

책소개

“나는 이 거리에 홀로 남아 있고 끔찍이 고독해요.
하지만 나는 매일매일 훌륭하게 살아남아요”

퀘스트가 난무하는 어른들의 세계를 평정하러 온
명랑 소녀들의 고군분투기

어쨌거나 지구는 늘 지옥이었다. 나무는 절단당하고, 사람들은 초콜릿으로 폭식하며, 온 도시에 은빛 건물과 쨍한 스크린이 가득하다. 터널은 산의 몸통을 뚫고, 하늘에서는 설탕 비가 내리며, 스크린은 내 눈에 불빛 총알을 쏜다.
―제21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이서아의 첫번째 소설집 『어린 심장 훈련』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2021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에 「악단」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한 그는 당시 “한동안 한국문학에서 자취를 감췄던, ‘질주하는 아이’ ‘무서운 아이’의 귀환”이라는 평을 받으며 문단에 “새로운 아이의 출현”(강동호)을 예고했다. 이후 꾸준히 활동하며 “동화와 누아르의 독특한 결합”(조효원)을 멈추지 않은 그가 등단작을 포함한 일곱 편의 소녀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이 소설집은 성숙한 어른이 되기를 능동적으로 거부하는 여자아이로부터 출발한다. 주변 어른들은 그 아이에게 ‘비정상’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고 얌전히 규칙에 따를 것을 명령한다. 하지만 마치 어린 짐승 같은 소녀들은 어른의 세계에 편승하는 법이 없다. 오히려 “말처럼 거침없이 내달리면서도 총알처럼 정확하고 빠르게 표적에 꽂히며 독자에게 쾌감을 안겨준다”(김보경, 「런, 리셋, 리플레이」).
일곱 편의 소설에 등장하는 각각 다른 연령과 배경을 가진 ‘나’는 작품이 거듭될수록 성장한다. 이 과정에서 총‧원숭이‧새 등이 연결 고리처럼 배치되어 마치 한 편의 성장소설처럼 읽히는 것이 이 책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다. 작가는 현실에 놓인 퀘스트를 게임하듯 흥미롭게 수행해 나가면서 필요에 따라 다른 차원의 세계를 넘나들며 심장 강화 훈련을 멈추지 않는다. 이 용감하고 천진한 여자아이들의 ‘지옥에서 살아남기 위한 무한 질주극’으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지금 당장 검은 말 한 마리를 상상하시라. 그것도 맹렬히 달리는 놈으로”
통제 불가 일곱 아이의 심장 훈련법

『어린 심장 훈련』 속 여자아이들은 자기를 즐겁게 하거나 불행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본능적으로 파악한다. [……] 위계질서와 명령, 괴롭힘, 폭력에 굴하지 않으며, 자기를 구속하는 세계로부터 탈주하며, 자기 혹은 사랑하는 대상을 괴롭힌 이들을 응징하는데─비록 응징에 실패하더라도─거리낌이 없다.
─해설「런, 리셋, 리플레이」에서

『어린 심장 훈련』에 나타나는 비극적 세계관은 대개 ‘보호자’라 불리는 가까운 인물들이 아이를 억압하거나 떠나가면서 시작된다. 어린 주인공은 같은 시선에서 이야기할 수 있는 또래 혹은 다른 어른과 함께 상상인지 현실인지 구분되지 않는 무대 위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저마다의 총을 움켜쥔다.
「검은 말」속 ‘나’는 부모와 함께 고모부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미국에 사는 ‘고모’의 저택에 방문한다. 비행기 안에서 죽을 듯한 공포감을 느낀 ‘나’는 부모를 곤란하게 만들 정도로 한바탕 소동을 벌인다. 고모의 집에 도착 후 저택 밖으로 펼쳐진 광활한 대지와 저택 안에 놓인 ‘검은 총’에 매료된다. ‘나’는 상상력이 풍부한 어린 소녀를 편견 없이 바라봐주는 고모와 긴밀한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고모가 그린 도면과 선택지가 나열된 퀴즈 형식의 질문지는 의뭉스럽게 보이지만 이후 ‘나’가 스스로를 돌아보고 글을 쓰게 하는 방아쇠가 된다.
「서울 장미 배달」은 상처 가득한 심장을 가진 이들이 조금씩 자신의 무대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과거 ‘어머니’가 힘들게 구한 입장권으로 서커스를 관람했던 ‘나’는 원숭이 ‘망고’와 눈이 마주쳐 비명을 지르듯 우는 바람에 어머니와 함께 서커스장에서 쫓겨난다. 그리고 이러한 자신이 평범하지 않은 아이이며 부모에게 짐이 된다고 생각한다. 심리 상담소를 다니던 ‘나’는 어느 날 그곳을 탈출해 발레 학원 수강생들을 구경하다가 “내가 너라고 불러도 화를 내지 않은 유일한” 사람, ‘리혜’를 만난다. 부잣집 딸로 우아하게 발레를 하는, 자신과 많이 다른 모습의 리혜와 가까워지고 그녀의 죽은 오빠 사진을 본 뒤에 ‘나’는 그들에게 친숙함을 느낀다.
「초록 땅의 수혜자들」의 아이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폐공장에 모여 살며 서로를 지키기 위해 의기투합한다. ‘나’보다 한참 언니인 ‘진희’는 공장의 사수였던 ‘선영’의 시체가 든 관을 훔치는가 하면 ‘나’를 성추행한 ‘공장장’ 그리고 아이들을 협박하는 ‘예술가’를 응징할 만큼 용감하다. 정체 모를 총성 소리가 난무하는 마을 속 폐공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와 선영은 마치 게임처럼 복수 대상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트럭을 돌진시킨다.
「빨간 캐리어」는 탈주를 거듭해도 끝나지 않는 고통을 새로운 차원의 형식을 빌려 그려냈다. ‘나’는 카지노의 골프장에서 일하는 캐디다. 엄격한 규율 속에 인격 모독이 만연해 있는 골프장은 죽더라도 새로운 몸에 영혼을 갈아 끼우고 아침이 되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일하게 하는 곳이다. ‘707호 캐디’와 카지노에 놀러 간 날, 그곳에서 ‘나’는 거대한 모니터 속에 갇힌 AI가 또 다른 ‘나’라는 것을 발견한다. ‘나’를 괴롭힌 고객들을 공으로 만들어 호수에 빠뜨리던 놀이가 상상이 아니었음을 깨달은 ‘나’는 골프채를 쥐고 그곳에서 탈출할 결심을 한다.
‘어린 심장’을 가진 소녀들이 성장통을 겪는 과정은 험난하다. 저마다 무기를 들고 달려가지만 지옥에서 탈출하기는 쉽지 않고 더 크게 울부짖을 뿐이다. 그러다 자신을 구원해줄 신과 통화하고 싶어 수화기를 들기도 한다(「초록 땅의 수혜자들」). 이 어린 심장의 주인인 ‘어린아이’는 악당에게 당해도 복수하면 되고 노력하면 지옥에서 탈출할 수 있다는, 무모한 믿음과 무한한 상상력을 가지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단단해진 마음으로 자신을 지키며 자유로워지는 어린 심장의 아이들.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며 울더라도 총구를 겨눌 줄 아는 이서아식 세계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이들에게 매료되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이게 내가 사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살 때에만 나는 진실로 살아 있었다”
내일의 ‘예쁜 인생’을 위한 오늘의 퀘스트 달성하기

『어린 심장 훈련』에는 작가가 던져놓은 퀘스트들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이야기를 글로 옮겨 적을 때 지루해서는 안 되고(「검은 말」), 학교에 불을 지르되 산과 동물들을 해쳐서는 안 되며(「악단」), 친구를 앗아간 물속에 잠기되 반드시 안전하게 복귀해야 한다(「푸른 생을 위한 경이로운 규칙들」). 이 임무들은 소설 속 어른들이 아이에게 요구하는 것과는 다르다. 현실 세계의 차별과 규율, 부조리와 부당함으로부터 자신을 비롯한 사랑하는 모든 것을 지키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 주인공은 나름의 소신을 가지고 명랑하게 주어진 미션을 하나씩 수행해 나간다.
「사하라의 DMZ」의 배경은 선 작품의 인물들이 힘들게 싸워 당도한 곳이 사막 한가운데임을 암시하듯 펼쳐진다. ‘나’는 친구 ‘바스마’와 함께 가이드의 차를 타고 둘만의 여행을 즐길 수 있는 ‘프라이빗 투어’를 떠난다. 그 여행길의 사막 한복판에서 ‘아말’이라는 의문의 여성을 만난다. 그녀는 자신의 동생이 죽어가고 있다며 차에 태워달라고 부탁한다. 한국인인 ‘나’를 조롱하던 가이드는 차에 탄 아말에게도 무례하게 굴고, 참지 못한 아말이 가이드를 향해 총구를 겨눈다. 이 위험한 상황에서 ‘나’는 깨달음을 얻은 듯 말한다. “누군가 반드시 총을 쥐어야 한다면, 그건 내가 되어야 했다.”
이 소설집의 마지막 작품인「푸른 생을 위한 경이로운 규칙들」속 ‘J’는 ‘나’에게 더는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게 해준 “어른 같지 않은” 어른이다. 그는 수영장에 함께 다니고 동고동락할 만큼 ‘나’와 가까운 사이었지만 ‘나’와 사이가 멀어진 이후 큰 홍수로 세상을 떠난다. 생전 그는 내게 이런 메시지를 보냈다. “글 열심히 써./따뜻하고 좋은 글을 써야 한다./예쁜 인생 살아라.” 이후 ‘나’는 스쿠버다이빙을 배우며 수면 아래에서 죽음과 삶을 생각한다. 이 지옥 같은 세계를 벗어나기 위해 숱한 임무를 수행해왔지만 여전히 제자리라고 느끼던 ‘나’는 상상 속에서 J와 함께 퀘스트를 하나 더 만들어낸다. “너는 아직 어리니까 행복하게 살 수 있어./달리는 열차도 막아 세울 기세로/이 지옥 같은 삶을 벗어나야 한다.” 그러고 나서 생전의 그가 망망대해 속에 숨겨둔 소중한 것을 꼭 품에 안은 채, 죽지 않고 물 밖으로 나가리라 다짐한다.
이 소설집에는 나름의 목표를 설정하고 하나씩 수행해 나가는, 목표를 달성했다면 그다음 목표를 설정하고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소녀들이 있다. 그리고 지난한 과정을 일종의 게임처럼 경쾌하게 뛰어넘는 재기발랄함과 목표를 향해 내달리는 파괴적인 에너지로 이루어진 이서아식 세계가 있다. 드디어 어른이 되었으나 여전히 어린 심장들을 위해 『어린 심장 훈련』 퀘스트가 우리 앞에 찾아왔다. 이제 나다운 나, “예쁜 인생”을 찾기 위한 미션을 수행할 시간이다.


■ 책 속으로

“저기 보이니?”
그녀가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에 울창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나무 주변으로 새들이 빙빙 날아다녔다. 검은빛을 띠는 머리통과 날개 쪽을 제외하고는 온몸이 샛노란 새들이었다. 나는 정체 모를 두려움에 질식할 것 같았다.
“새를 쏘지 마세요.”
나는 참담한 심정으로 그녀에게 외쳤다. 그녀가 총을 매만지며 말했다. “그럴까?” 그녀는 여유롭게 웃고 있었다. 내 표정은 굉장했을 것이다. “제발요.” 그러나 그녀는 나를 보지도 않고 부드럽게 총을 들어 올렸다. 아름다운 포즈를 취하며 어떤 새를, 너무나도 불쌍한 어떤 새를 겨냥했다. 순진한 새들은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고 짹짹거렸다.
―「검은 말」

나는 욱신거리는 온몸을 일으켜 세우며 그네를 바라보았다. 빈 그네가 아이 없이 혼자 철컹철컹 움직이고 있었다. 그곳부터 내가 있는 곳까지 온몸으로 쓸어 만든 자국이 보였다. 내 체구만큼 자그마한 붓질이었다.
뭐,
어찌 됐든 이건 내 무대였다.
―「서울 장미 배달」

달리는 동안, 아이들의 노래와 가을의 노래가 귓가에 맴돌았다. [……]
그 끔찍한 협동 노래는 어떤 복잡한 저주나 주문 같았다. 나는 말도 안 되는 악보 속에 갇혀 있었다.
이제 나는 이야기 바깥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기록했던 모든 것들, 내가 보고 느끼고 노래했던 그 모든 것들이 내 것이 아니게 될 것이다.
그러자 어떤 목소리가 비명처럼 내 머릿속에 날아들었다.
안 돼. 그럴 순 없어.
이대로 사라질 순 없어.
―「불타는 아이」

트럭이 크게 흔들렸다. 수정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내가 그들의 총을 이렇게 쓸 줄은…… 하늘에서 보고 계실 거야…… 얼마나 충격을 받으실까!”
“분명 기뻐하실 거예요!”
공장장 아주머니 아저씨, 시간 나면 신에게 전해주세요. 그 비참하고 불쌍했던 여자애들이 이렇게 망나니 같은 인간으로 컸습니다. 여전히 생은 고되고 지겹지만 웃는 날도 많습니다.
마지막으로 집중!
탕! 탕! 탕!
―「초록 땅의 수혜자들」

사람 목숨을 우습게 여기는 지휘관이 넘쳐 나는 이 세상에 아직 어린 것이 무턱대고 무대 위에 오르는 일이 얼마나 많단 말인가. 지휘관은 무대 뒤편에서 팔짱을 끼고 구경하다가 어린 것이 관중들에게 계란이라도 맞으면 훌쩍 도망가버린다. 어린 것은 계란 비린내를 풍기며 어리둥절한 얼굴로 욕받이가 되거나 황급히 세상을 떠나 신의 아이가 되어버린다. 기억하자. 준비도 안 된 어린 것을 무대에 올리려고 드는 이가 있다면 일단 경계해야 한다. 수영도 하지 못하는 어린 것을 물살 센 날에 바다로 던져버리는 건 사랑이 아니다.
―「푸른 생을 위한 경이로운 규칙들」


■ 작가의 말
가장 최근에 다이빙을 다녀온 바다는 동해다.

언젠가 코론 바다에 다시 가고 싶다.
그 아름다운 바다에.

떠돌아다니는 건 좋다. 기록하는 것도.
안산과 서울과 발렌시아에 거주했을 때
그 도시의 타투이스트들에게 문신을 받아 왔다.
그중 왼쪽 손목의 문신은 흉터 커버업이다.
흉터를 새긴 건 이제 꽤나 오래된 일이고
그동안 내 인생에는 나름대로 많은 일이 있었다.
죄다 무의미하고 별 볼 일 없는 일이었던 것 같다가도
돌아보면 하나하나 다 대단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 섬은 대단했다.
그 바다는 대단했다.
그 밤바람은 대단했다.
그 사랑은 대단……까진 아니고 뭐 나쁘지 않았다.
그 우정이 정말로 대단했지.
여전히 대단하고. 영원히 사랑하고.

나는 나의 동료들을 위해 쓰고 싶다.
혹은 나보다 더 어린 존재들을 위해.
혹은 슬픔 때문에
어린 존재들보다 더 어려진
어떤 지친 이들을 위해.

내가 대단히 다정한 사람이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내 사랑의 총량은 매우 미미하고
나는 황폐한 내면과 매일 싸운다.
속절없이 소심해지거나
사람들에게 벽을 치는 날도 많다.
그럴 때면 내 곁에는 책과 고양이♡밖에 없다.

[……]
내 소설들이 읽히고, 조율되고, 비행하고, 관측되던 몇 달의 시간은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평생 동안 간절히 꿈꿔온 순간이었다.
책이 출간된 후에도 두 선생님의 정비와 트래킹은
고모의 편지가 되어
A의 훈련이 되어
나를 수영장 물에 빠뜨리고
드넓은 밀밭을 정신없이 달리도록 만들 것이다.
지금으로선 측정할 수 없을 만큼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날에도 나는 쓰고 있을 것이다.
어차피 지금까지 늘 그렇게 살아왔다.
이 생이 단지 무의미하다는 사실을 안다면
매일 멍청이처럼 웃을 수도 있겠지.
믿기지 않는 슬픔도 무작위의 불안도 잘 어르고 달래서
자부할 만큼 고요히 단단히 살아갈 수도 있겠지.
이 땅에 내 의지로 태어난 건 아니라고 하더라도
나는 그 어린 것에게 가능한 한 천진한 미래를 주고 싶다.

낙관의 끝이 비관이듯
비관의 끝은 낙관.
(무한 반복!)
이것이 내가 붙들고 사는 생의 진실이다.

2024년 봄
이서아

목차

■ 차례

검은 말
서울 장미 배달
악단
초록 땅의 수혜자들
빨간 캐리어
사하라의 DMZ
푸른 생을 위한 경이로운 규칙들

해설 | 런, 리셋, 리플레이 · 김보경
작가의 말

작가 소개

이서아 지음

1997년에 태어났으며 2021년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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