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녀를 슬픔으로 이해할 겁니다.”
부영사는 말한다.
‘고통’이라는 세계를 가로지르는 3악장의 불협화음!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는
상실과 파괴, 외침과 눈물의 서사
프랑스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전위적이고 여성적 글쓰기로 작품과 삶 모두에서 우리를 매료시킨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부영사』가 소설가 최윤의 번역으로 ‘문지 스펙트럼’ 시리즈로 출간되었다. 인물과 사건, 감정과 심리의 흐름을 극도로 섬세하고 함축적인 언어로 표현하며 고유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온 뒤라스의 문학적 행보는 그의 극적인 인생 편력만큼이나 모험적·급진적이다. 문학 이외에도 예술의 경계를 활발히 넘나들며 활동해온 그는 연극, 영화 그 어떤 장르에서건 전통이나 상식, 관습으로부터 자유로웠다.
이 책 『부영사』는 뒤라스가 직접 감독하고 칸 영화제 예술·비평 부문에서 수상한(1975) 영화 「인디아 송」의 원작소설로, 1930년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배경으로 한다. 그리고 가난과 질병, 굶주림과 죽음으로 가득한 당시 인도의 수도 캘커타. 세상의 모든 고통이 한데 모여 있는 듯한 이곳은 사실적 시공간이라기보다 작가 자신이 설정한 하나의 소설적 지역이다. 작품의 주요 인물인 걸인 소녀가 고향을 떠나 거쳐 가는 수많은 마을의 이름은 실재하지만 현실의 지리적 사실성을 뛰어넘는다. 그것은 바로 “고통의 대명사”다.
어슴푸레한 빛 속에 잠긴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걸인과 문둥병자, 그들의 냄새와 신음으로 『부영사』의 무대인 캘커타 대서관저의 아침이 시작된다.
세 세계, 세 인물, 3악장의 불협화음
작품에는 철책 밖의 걸인 소녀, 철책 안의 부영사와 프랑스 대사 부인 안-마리 스트레테르, 이들 세 인물의 이야기가 무질서하게, 때로는 서로 뒤섞여 전개된다. 광활한 평원의 굶주린 길 위를 걷는 소녀는 어린 나이에 애를 배고 집에서 쫓겨났다. 그녀의 가장 큰 기능은 ‘길을 잃기 위해’ 걷는 것이다. 굶주림에 허덕이며 아이를 백인에게 팔고, 기억도 길도 잃은 채 음식 쓰레기가 풍성한 대사관 철책에 도착한다. 그녀는 마침내 걸인과 문둥병자의 무리에서 구분되지 않는, 익명의 ‘그녀’가 된다.
이들 무리와 단절되어 보호 철책 안에 갇힌 백인 사회에는 무수한 소문을 나르며 정보와 서술을 일부 담당하는 익명의 ‘그들’로 구성된 또 다른 무리가 있다. 그들은 문둥병을 두려워하며 원주민과의 어떤 접촉도 시도하지 않는다. 때로는 호기심으로, 철책 앞까지 가는 백인들도 있으나 혼비백산해 도망쳐 되돌아온다. 그들의 관심은 추상적이고 접촉이 없다.
상호 침투가 불가능한 두 세계에 접촉과 소통을 시도하는 인물들이 있다. 라호르의 샬리마르 정원에 무리 지어 있는 문둥병자들에게 총질을 해 캘커타로 불려와 다음 임지를 기다리는 프랑스 부영사 장-마르크 드 아슈. 그는 익명의 백인 무리가 철책 밖의 세계만큼이나 도외시하며 피하는 인물이다. 끝으로 중년 여인 안-마리 스트레테르. 대사관저의 남은 음식물을 철책 밖 걸인들을 위해 내놓으라고 지시하는 대사 부인이자 두 딸의 엄마이며, 무수한 연인과 친구를 둔 신비한 여인이다.
이 세 인물은 제각기, 그러나 철책을 넘어 타자에게 향한다. 걸인 소녀는 백인 사회의 심장에까지 들려오는 외침(“바탐방”)으로, 부영사는 총질로, 안-마리 스트레테르는 남은 음식물을 철책 밖으로 내어놓는 행위로 혹은 백인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소외시킴으로써. 이 셋을 연결 짓는 표면적 유사성은 거의 없다. 서사적 얼개가 이 셋을 묶는다. 이 무질서에 질서를 부여하고, 상이한 세 인물 사이에 근본적 유사성을 추출해내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이 세 인물은 각기 서로 다른 악장을 이룬다. 걸인 소녀가 자기 상실로 가는 보행이 만들어내는 단조로운 행진곡, 파괴적 행동을 예고할 듯 내지르는 광시곡에 가까운 부영사의 고함, 그리고 안-마리 스트레테르Stretter의 이름에 이미 내포되어 있는 둔주곡strette. 이 음악들은 독서 내내 번갈아 돌림노래처럼 독자들의 귀에 울린다.
고통이라는 우주, 상실과 파괴와 눈물의 이야기
『부영사』는 뒤라스 전공자이자 프랑스 문학 연구자, 소설가 최윤의 번역으로 1985년 국내에 처음 소개되었다. 소설가 최윤이 우리말로 옮긴 단 하나의 문학작품이기도 한 『부영사』는 요즈음에 맞게 번역을 전면 수정, 새로운 옷을 입고 독자들 앞에 선보이게 되었다. 특히 역자는 이 작품을 뒤라스가 쓴 “최고의 작품”이라 꼽으며, 작가의 내면과 외면, 과거와 미래의 작품, 개인성과 역사성 등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넘어갈 수 있는, 다른 쪽에서 들여다보아야 이쪽이 보이는, 그러나 통과해야만 양쪽이 다 보이는 창틀”의 역할을 잘 감당한 작품이라 평하기도 했다.
실제로 뒤라스 글쓰기의 후기적 특성이 도드라지기 시작한 이 작품에서부터 서사는 파편화된다. 작품 속 그 누구에게 배당되어도 상관없는 동일한 문장들이 끊기거나 조각나 반복되는가 하면, 질문은 던져지나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말없음표, 침묵, 짧은 문장, 띄엄띄엄 이어지는 느린 리듬의 행들. 시각적으로도 점차 비어가는 혹은 정화되어가는 뒤라스 언어의 진수를 독자들은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작품의 언어와 구조가 빚어내는 의도적인 모호성과 혼란은 세 주인공의 교집합이 얼핏 없는 것처럼 보이게도 만들지만, 오랫동안 뒤라스의 작품 세계를 관통해온 주제들을 여러 각도에서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롭기 그지없다. 그러나 『부영사』 이전 작품들에 나타나는 뒤라스의 인물들이 존재의 고통을 일깨우는 사건들을 통해 새로운 인식에 눈을 뜨며 존재적 변화를 겪었다면, 이 작품의 세 주인공은 모두 나름의 고통스러운 과거를 지니며 삶의 모든 것을 재로 화化하는 고통이라는 화재 현장에서 빠져나왔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인도차이나라는 작품의 배경이자, 그 배경으로 상징되는 존재적·세계적 고통과 마주한다. 그렇게 작가는 이 작품이 정치적 소설이자 존재적 가치관의 소설로서 읽히기를 요청하는 것이다.
■ 책 속으로
어두워지자 그녀는 발길을 되돌려, 노인이 알려준 방향으로 톤레사프 호수를 따라간다.
그 누구도 이제는 더 이상, 그녀의 고향 근역에서 결코 다시 그녀를 보지 못한다.
뜨겁고 창백한 빛 속에, 아직 배 속의 아이를 가지고, 그녀는 두려움 없이 멀어져간다. 그녀가 밟은 길은, 그건 확실하다, 그녀의 어머니가 결정적으로 그녀를 내버린 그 길이다. 그녀의 두 눈은 울고 있지만, 그러나 그녀는, 그녀는 목이 터져라 어릴 때 부르던 바탐방 노래를 부른다. (31쪽)
요 며칠 사이에 계절풍이 완전히 끝나버린 듯하다. 언제부터 매일 등의 무게 위로 비가 내렸던가?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기에는 얼마나 늦었는가, 놀러 가기에는. 아침 인사를 하고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웃기 위해 북쪽으로 돌아가기에는, 어머니에게 매 맞고 회초리 밑에서 죽기에는. 그녀는 젖가슴 사이에서 동전을 꺼내 달빛에 비추어 본다. 동전을 돌려주지 않으리라, 그녀는 그것을 가슴속에 넣는다, 그러고는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이번에는, 그렇다, 그녀는 앞으로 나아간다. (73쪽)
사람들은 묻는다. 대체 그가 무얼 했을까요? 난 그 일에 대해 조금도 몰라요.
“그는 최악의 일을 저질렀어요.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최악의 일이라면? 죽였나요?”
“그는 한밤중, 문둥병자들과 개들이 숨어 있는 샬리마르 정원에 대고 총을 쏘았어요.”
“그러나 문둥병자들이나 개들이라면, 문둥병자들이나 개들을 죽이는 게 어디 죽이는 것인가요?”
“그리고 또 라호르 관저의 거울 속에서도 탄환이 발견됐대요, 아시겠어요?” (103~104쪽)
사람들은 지루하게 라호르 이전의 부영사가 어떠했는지를 찾는다. 라호르에서 온 이 사람이 지금 어떤 사람인지를.
안-마리 스트레테르와 춤을 추면서, 샤를 로세트는 텅 빈 테니스장 근처에서 그가 본 것을 다른 누군가도 알고 있으리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여름 계절풍의 어슴푸레한 빛 속에, 누군가 다른 사람이 부영사가 지나가는 순간의 텅 빈 테니스장을 바라보았으리라는 생각이. 지금은 침묵하고 있는 그 누구. 아마 그녀가.
사람들은 말한다. 필경 모든 것이 라호르에서 시작되었다고. (129쪽)
사람들은 생각에 잠긴다. 그는 라호르에 죽음만을 불러들였을 뿐이다, 그가 보기에, 다른 어떤 종류의 저주도, 라호르가 죽음 이외의 다른 힘에 의해 창조되거나 파괴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지 못했다. 그리고 때때로 그에게 죽음이 어쩌면 지나쳐 보이고, 비열한 믿음이거나 심지어 착오처럼 보일 때도, 그는 라호르에 불, 바다, 이미 알려진 세계의 논리적이고 물질적인 재난을 기원했다. (158쪽)
그가 여기서 해 뜨는 것을 바라보기는 처음이다. 저 멀리, 푸른 종려나무들. 갠지스 강가에는 문둥병자와 개들이 뒤섞여 이 도시에 첫번째 넓은 성벽을 만들고 있다. 기아로 죽는 사람들은 좀더 멀리, 북쪽의 조밀한 밀집 지대에서 마지막 성벽을 만든다. 빛은 어슴푸레하다. 이 빛은 다른 어느 빛도 닮지 않았다. 끝도 없는 고통 속에서, 단위별로 도시가 깨어난다. (190쪽)
“그녀는 마치…… 긴 직선 끝의 한 점처럼, 실상 별다른 의미 없는 사건들 끝의 한 점처럼 캘커타에 있게 된 것일까? 거기에는…… 잠과 굶주림, 감정의 소멸, 인과관계의 소멸만이 있었던 것일까?”
“내 생각에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마이클 리처드가 말한다. “그건 그 이상이야. 그는 그녀가 사는 것을 바라보는 사람에게만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거야. 그녀 자신은 아무것도 느끼지 않아.”
“캘커타에서 뭐가 남았어?” 조지 크론이 묻는다.
“웃음…… 마치 표백된 것 같은…… 그녀가 말하는 한마디, 바탐방, 그 노래, 나머지는 다 증발해버렸어.” (211쪽)
■ 차례
부영사
옮긴이의 말
작가 연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