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사람, 인간, 그거잖아. 왜 사랑해?”
도깨비방망이처럼 펜을 휘두르며
통통 튀는 이야기를 쏟아내는 작가,
설재인 첫 연작소설집!
모퉁이마다 튀어나오는 사랑스러운 무법자들
그 종잡을 수 없는 마주침이 다감한 마중처럼 느껴지는 곳으로
넓은 보폭으로 다양한 장르를 아우르며 독자와 만나고 있는 작가 설재인의 첫 연작소설집 『월영시장』이 출간되었다. 2019년 출간한 소설집 『내가 만든 여자들』을 비롯하여 소설집 두 권, 장편소설 열한 권, 산문집 한 권을 펴내는 등 엄청난 빠르기로 움직이는 작가의 펜은 풍성한 이야기를 뚝딱 내놓는 도깨비방망이를 닮았다. 창작의 가장 큰 원동력으로 ‘재미’를 꼽으며 매일매일 글을 쓰는 꾸준함을 지닌 작가이기에 가능한 속도일 것이다. 이토록 놀라운 힘과 재주를 가진 작가 설재인의 이번 연작소설집은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오래 지켜나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테마에서 시작되었다.
평생 무언가에 꽂혀 눈깔을 가운데로 몰며 살아왔다. 그 대상은 자주 바뀌었다. 오래 지속된 것도 빠르게 사그라진 것도 있으나 공통점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 누구도 예상치 못한 대상에 쉽게 매료되고 충동적으로 빠져들어서는 맹목적으로 사랑했다. 돈도 버리고 직장도 버리고 길도 없는 곳을 향해 핸들을 휙휙 꺾어대서, 나를 잘 아는 이들은 내가 무언가에 빠져든 것을 감지하면 제일 먼저 말한다. 쟤 또 큰일 났네, 이번엔 또 뭘 포기하려나. (놀라지는 않는다.) 그 정도로 사랑을 한다. 하여 유정한 사람이다.
―산문 「시장이랑 아기를 낳을 수 있다면」에서
고등학교 수학 교사의 삶에서 아마추어 복싱 선수이자 소설가의 삶으로 건너온 작가의 특이한 이력은 무척 파격적인 듯 보인다. 그러나 설재인에게 이러한 궤적은 ‘좋아하는 마음’으로 매끄럽게 이어져 있는, 놀라울 것 없이 일관된 흐름이다. 그러므로 어떤 대상을 열렬히 아끼고 사랑하는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설재인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며, 이렇게 탄생한 인물들은 서울 가장 서쪽에 자리한, 작은 공항과 인접하여 비행기가 정수리 바로 위를 날아다니는 ‘월영시장’에서 나날이 서로 부딪으며 살아간다. 이들은 “당연할 것이라 굳게 믿었던” “원리를 멋대로 던져 산산조각 내는, 무법자”(「딸램들」)처럼 튀어나와 시장 골목은 물론 상대의 마음속까지 헤집는다. 예측도 대비도 할 수 없는 이러한 마주침이 어쩐지 진진한 세계로의 흔연한 마중처럼 느껴지는 까닭은 이 무법자들이 친밀하고 애정 어린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예고 없이 나타나 한데 섞여 드는 모난 마음들
지지고 볶이며 둥그레지는 시장통 풍경
시장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가게와 좌판 들에서는 온갖 것이 오간다. 이때 오가는 것은 돈과 상품만이 아니다. 밥을 먹고 장을 보고 구경을 하고 산책을 하는 길의 갈피마다 사람이 끼어들어 있기에 마음 또한 함께 오고 가기 마련이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값을 치르고 재화를 구매하는 일은 상호 합의하에 이루어지는 교환이지만 마음의 경우 그렇게 굴러가지 않는다는 것. 어떤 이의 마음은 타인의 마음 주위를 이리저리 쏘다니다가 별안간 그 속으로 불쑥 들어가고는 한다.
「모질의 역사」에서 ‘정한’의 마음을 비집고 들어온 것은 애니메이션 〈무크와 무이〉 시리즈다. 갈라땋은 머리와 주근깨 그리고 초록색 튜닉이 특징인 쓸쓸한 침엽수림의 요정 ‘무이’를 사랑하게 된 정한은 마침내 제 안으로 그를 불러들여 코스어 ‘쥰’이 된다. 쥰은 “태어나자마자 불의의 재난으로 헤어진 쌍둥이”인 무크를, 그리고 무크를 품고 있는 ‘심파이’를 만나기 위해 오랜 은둔을 깨고 집 밖을 나선다.
「바라보는 마음」에서는 ‘명규’의 가게 르앙구제를 주축으로 여러 층위의 맞닥뜨림이 교차한다. 강아지였던 전생의 기억을 가진 채 태어난 아기 고양이 ‘꼬봉’은 전 주인 명규와 다시 함께하기 위해 르앙구제 환풍구에 올라가 삐악삐악 울고, 명규의 헤어진 연인 ‘솔’은 휴일을 맞아 닫아걸어둔 가게 셔터를 꽝꽝 두드린다. 그리고 솔 앞에는 연이 끊겼던 동생 ‘원형’이, 구제 원피스에 코딱지처럼 묻어 있던 혼 ‘시즈코’ 앞에는 30년 전 첫사랑의 혼이 붙어 있는 카디건이 우연히 등장한다. 상처를 주고받았던 이들은 제대로 헤어짐으로써, 서로를 잊지 못한 이들은 재회함으로써 다시금 가까워진다.
「돌 닮은 당신」에서 월영합기도 관장 ‘강산’이 새로 들인 외국인 사범에게는 강산의 것과 같은 최씨 성과 ‘영’이라는 이름이 붙는다. 처자식을 고향에 두고 타지에 온 만큼 “최영 장군님의 의지를 받들어,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며 묵묵히 오래오래 일하라는 뜻에서다. 국적은 다르지만 같은 성씨를 공유하고, 번역기로 불완전하게나마 기러기 아빠로서의 경험과 감정을 나누며 서로를 이해하는 영과 강산의 모습은 점차 가족이라는 단어를 연상시킨다.
사람의 마음은 거래의 원리를 따르지 않는다. 당사자가 원하지 않아도 시작될 수 있고, 무언가를 주었더라도 아무것도 받지 못할 수 있으며, 기대와 다르게 흘러갈지언정 쉽게 무를 수 없다. 누군가의 마음이 또 다른 누군가의 마음에 들어가는 일은 결국 일종의 침범과도 같다. 그러나 침범되지 않으면 만날 수 없고 만나지 않으면 행복에 가닿기 어려우므로, 소설 속 인물들은 언제나 자신들도 모르게 마음의 틈을 살짝 열어놓는다. 그 틈으로 엿보이는 것은 치열하게 불화하고 화해하며 조금씩 모서리가 깎여 나가 둥그스름해진 마음들이 자아낸, “얼렁뚱땅 해피엔드”(「바라보는 마음」)다.
누군가의 손을 맞잡아본 아이는
손 내밀 줄 아는 어른이 된다
작은 아이들은 아무래도 인근 다른 곳보다 월영시장 안에서 안전했다. 물건을 좌판에 놓고 목욕탕 의자에 앉은 상인들, 허리가 고부라진 노인들, 시장이 가장 큰 놀이터인 강아지들. 그 모두보다 아이들의 눈이 더 높은 곳에 있기 때문에. 시장 밖에서 사람들은 아래를 잘 보지 못했고 그래서 허리춤까지밖에 오지 않는 애들을 밀치고 걷어차며 지나가기 일쑤였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그러지 않았다.
―「에필로그」에서
충분하고 온전한 돌봄 아래 자라나는 아이가 과연 몇이나 될까. 모두에게는 저마다 어린 시절 채워지지 못한 결핍과 해소하지 못한 응어리가 있는 법이고, 월영시장의 아이들 역시 그렇다. 그리고 낮고 완만한 이 시장 안에서 아이들은, 또 비슷한 눈높이의 존재들은 서로를 발견하고 손을 잡는다.
「달리기뿐」에서 ‘하민’에게 손을 내민 이는 독특한 옷차림으로 리어카를 끄는 ‘스타할매’다. 점점 무너져가는 엄마와 단둘이 살면서 또래의 따돌림을 견뎌야 했던 하민에게 스타할매는 군것질거리를 사 주고 합기도장에 다니게 하고 바세린 통을 건넨다. 스스로 찻길에 누워 차바퀴가 제 몸을 깔고 가도록 하지 않았더라면 언젠가 “할매의 손을 잡아줄 수 있는, 할매와 딱 붙어 걸을 수 있는 누군가”로 클 수 있었을지 문득 궁금해졌을 때, 하민의 혼은 마침내 손 내밀 줄 아는 어른으로 빠르게 성장하지만 이내 육신은 그치고 만다.
월영시장에는 죽지 않고 살아남은 아이들도 있다. 「딸램들」의 ‘동지’는 “태어나서부터 포차에서 취객들을 마주하며 성장”한 자신과 같은 아이들을 보살피겠다는 일념으로 유아교육과에 진학하며 “애들이 나중에 커서 막, 내 인생 구해줘서 고맙다고 줄줄이 찾아오는 그런 어른”이 되리라 다짐한다. 그러나 막냇삼촌이 놓고 간 사촌 동생 ‘동윤’은 생각과 달리 잘 챙겨주려 “애를 쓰면 쓸수록” 동지의 심기를 거스르며 냉담하게 군다. 이에 동지는 “자신 또한 준 애정에 대한 보답을 원하는 사람, 마음 다치는 일은 싫은 보통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손은 뇌가 말하는 바와 다르게 행동”하며 끈질기게 동윤을 쫓아다닌다.
누군가에게 손 내미는 이들이 꺼내 보이는 사랑의 모양은 마냥 예쁘지만은 않다. 사랑은 상대의 뾰족하고 두툴두툴한 구석까지 끌어안아야 하는 일이므로, 오히려 조금 헌 듯한 모양에 가깝다. 그러나 너절해질지언정 결코 닳지는 않는 검질김 또한 사랑의 특성이기에, 이들은 내민 손을 결코 거두지 않는다. 손과 손이 마주 잡힐 때까지, 서로서로 지탱해줄 수 있을 때까지, “꺼지란 말”이 “안아달란 말의 유의어”(「에필로그」)가 될 때까지.
■ 책 속으로
사랑과 돌봄의 효능을 지나치게 과대평가했던가. 동지는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사랑과 돌봄이 절대적인 열쇠이며 고귀하고 강력한 해답이어야만 어린 동지가 겪은 심리적 불우가 설명되었으니까. ‘좋은 돌봄을 겪은 아이는 괴롭지 않다’라는 명제가 참이어야만 그 대우인 ‘괴로운 아이는 좋은 돌봄을 경험하지 못했다’도 참이 될 터였다. 어린 동지는 너무나 괴로웠고 매일 밤 잠에 들며 내일 깨어나지 않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했기에, 괴로움의 원인을 반드시 어딘가에서 찾아내야 했다.
―「딸램들」
비행기가 날았다. 와, 비행기 이렇게 낮게 나는 거 처음 봐! 민망해진 사람들이 괜히 하늘을 가리켰다. 정한도 시선을 들었다. 비행기는 빠르게 날아 정한이 한때 잘 알던 곳 쪽으로 사라졌다.
지긋지긋해, 하고 엄마가 말하던 곳.
“밥 먹으러 가요.”
정한이 말했다.
“시장에 먹을 데 많거든요.”
밥 먹으러 가잔 말을 한 이유는 단 하나. 아주 어렸던 때, 모든 게 서서히 침식되기 직전, 부모의 절망을 이해하지 못한 채 낯선 시장에서 맛있게 먹었던 이사 날의 음식들, 그 기억 때문이었다.
―「모질의 역사」
그때 나는 그냥 울지 않았다.
사랑해, 명규 씨.
주문을 외듯 말하면서 울었다.
내가 너무 사랑해서 옥황상제님이 다시 보내주었나 봐.
명규 씨는 당연히 알아듣지 못했겠으나 또 너무나 당연히, 명규 씨라면 응당 그랬을 그대로, 나를 거두었다. 하루에 열 번 분유를 먹였고 혹 죽진 않았나 150번 들여다보았다. 손을 벌벌 떨며 병원비를 지불하였으며 아주 견고하게 얼굴을 어깨에 딱 고정하고는 내 파란 눈을 마주하며 싱긋 웃었다.
―「바라보는 마음」
져주는 게 이기는 겁니다. 염 사장이 그렇게 말했었지. 그게 비단 학부모와의 관계에만 해당되는 이야긴 아닐 것이었다. 염 사장은 확실히 통찰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자식과의 관계에서도 아마 마찬가지일 것이었다. 상대가 패악을 부리는 이유는 시시비비를 따지기 위함이 아니다. 그저 명확히 인지해달라는 것이다, 나를, 내 존재를…… 내가 중요한 개체임을 인정하고 확인해달라는 것이다.
―「돌 닮은 당신」
보고 싶지 않아요. 내가 몰랐던 사정을 알게 되는 것도 싫고 혹시라도 내게 못 해준 것들을 되새기며 운다면 그것은 더욱 싫습니다. 애당초 정신을 차리고 살았으면 됐잖아! 하고 소리를 지르고 싶은 거죠. 맘대로 싸질러놓고 그런 식으로 산 당신 잘못이야!라고요. 그런데 그건 내가 어려야 가능한 일이잖아요. 어른이 되었는데도 헤아려주지 못하고 그렇게 화를 내면, 그건 내가, 내가 아주 모진 인간인 것이잖아요.
―「달리기뿐」
■ 차례
프롤로그
딸램들
모질의 역사
바라보는 마음
돌 닮은 당신
달리기뿐
에필로그
산문 | 시장이랑 아기를 낳을 수 있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