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사회 146호 (2024년 여름)

문학과사회 편집동인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24년 5월 31일 | ISBN 1227285X

사양 신국판 152x225mm · 400쪽 | 가격 15,000원

책소개

■ 서문:

여름호를 펴내며

장르의 안팎에서

타인이 뜻밖에 그리고 역설적으로― 유의 논리la logique du genre에 대항해―
더할 나위 없이 나와 상관있는 사람으로― 발견되는 것처럼.
― 에마뉘엘 레비나스 에마뉘엘 레비나스, 『우리 사이: 타자 사유에 대한 에세이』, 김성호 옮김, 그린비, 2019, p. 280. 강조는 원저자. 이 구절을 처음 읽은 책은 주디스 버틀러의 『지상에서 함께 산다는 것』(양효실 옮김, 시대의창, 2016, pp. 111~12)이지만 인용은 레비나스 책의 국역본을 따랐다.

지금 우리는 ‘장르’라는 말을 어떻게 생각하고 사용하고 있을까? 최근 ‘○○○은 하나의 장르’와 같은 식의 말을 종종 듣게 된다. 어떤 창작자나 집단의 ‘오리지널리티’를 강조하는 표현인데, 그러기 위해 장르라는 말이 쓰이는 것이 흥미롭다. 또 요즘엔 ‘나와는 코드가안 맞아’ 같은 식의 말도 흔하게 들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이나 집단, 콘텐츠에 감응할 수 없고 오히려 어긋나거나 부딪힌다고 느낄 때 쓰는 말이다. 그 말에서 ‘코드’는 대상의 어떤 내적 특징보다는 대상과 자신의 ‘관계성’에 대한 것이다. 즉 코드가 맞으면 접속할 수 있고, 코드가 맞지 않으면 접속할 수 없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리고 두 가지 말 모두, 많은 사람이 어떤 개성이나 감성, 관점이나 세계관 등을 자연스럽게 장르나 코드로 느끼거나 파악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듯하다.
물론 이러한 용법은 단어의 사전적·역사적·학술적인 용례와는 퍽 다르다. 흔히 장르는 각각의 문화·예술 영역 분과를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어왔고, ‘순수예술’ ‘순수문학’ ‘고급문화’와 대비되는 ‘하위문화’의 영역들을 (막연하게) 지칭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했다. 문학사에서 본격소설이나 순수소설은 경향소설, 세태소설, 감상소설, 장르소설 등과의 부정적 대비 속에서 규정되어왔다. 때로는 비판적인 어조로, 때로는 자조적인 어조로 ‘문단 문학 역시 하나의 장르일 뿐’이라는 이야기도 되풀이되어왔다. 이런 인식은 보편적인 것으로 여겨져온 이른바 순수문학을 상대화하여, 순수문학이 어떤 (역사적·제도적·비평적으로 구성된) 장르인지 검토할 수 있게 했다.
그런데 장르들을 위계적으로, 영토적으로 구분하고 규정하는—그 위계를 보전하기 위해서건 전복하기 위해서건—사고방식은 동시대의 감상 경험과 얼마간 동떨어진 것처럼 보인다.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다양한 매체와 장르 들을 일상적으로 넘나들면서 다양한 콘텐츠를 향유하고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으며, 또 장르의 구성에 영향을 끼친다. 가령 한 감상자는 어떤 영 화·소 설·웹 툰·시리즈 물 을 비슷한 시기에 여러 매체와 장치를 통해 즐기는 동시에, 어떤 전시·공연·영화·소설·웹툰 등(혹은 그 감상자·소비자가 공유하는 문화와 언어)에 대해서는 전혀 접속할 수 없다고 느낄 수 있다. 이때 장벽은 고전적 장르나 매체의 경계보다는 더 유동적이고 수행적인 코드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장르를 (소설·조각·연극·영화 같은) 예술 영역이나 (판타지·로맨스·SF 같은) 역사적으로 형성된 허구의 경향뿐 아니라 담론적/비담론적 요소들을 특정 방식으로 엮는 잠정적 규약·관습·제도를 지칭하는 말로 이해해볼 수 있을까? 이렇게 생각해보면 하나의 장르로 보이는 것은 하나의 장르가 아니고, 또 분리된 여러 장르로 보이는 것이 하나의 코드를 공유하기도 한다.
오늘날의 감상자는 다양한 플랫폼과 미디어, 영역 들을 넘나들면서 전통적인 문화·예술 영역의 경계를 가로지르는 취향을 형성한다. 반대로 취향들, 영역들이 세분되고 진화해나가면서 ‘외부자’들은 이해하기 힘든 코드나 문법이 고도화되기도 한다. 취향이나 장르적 문법의 차이는 (계층이나 지역, 학력 같은) 사회적 차이나 (‘남성향’ ‘여성향’ 같은 말처럼) 성별화된 욕망과도 연동되어 있을 것이다. 또 사회적 차이들이 특수한 장르를 낳기도 하지만, 반대로 장르가 사회적 경계를 강화하기도 할 것이다.
장르 간의 장벽은 한편으로 잘 모르는 장르에 대한 오해와 단순화를 낳기도 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장르의 문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 장르를 이해하거나 즐길 수 없다는 식으로) 배타적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소수자가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내거나 기성의 장르적 문법을 전유하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에 ‘장르적 코드화’는 전략적 효용을 갖는 동시에 어떤 존재를 특정한 방식으로 재현·호명하는 문법이 될 수 있다.

이런 생각들과 함께 이번 『문학과사회 하이픈』 여름호에서는 일반적인 용례보다 넓은 의미에서 장르를 다시 생각해보고자 했다. 이러한 요청에 여섯 필자가 귀한 글로 응답해주었다. 먼저 나원영의 「우리가 포스트-록을이해하기를 멈출 때」는 ‘포스트-록’이라는 모호하고 분열적인 장르에 대한 고찰이다. 나원영은 대중음악 평론가로서 과거 자신이 한국의 포스트-록에 관해 썼던 글의 미흡함이나 착오를 짚어보면서, “지난 수년간 죽도록 괴로워한 장르의 문제”를 이야기한다. 다른 대중음악 장르도 마찬가지이지만, 포스트- 록은 어떤 명확한 실체나 성격으로 규정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그것을 어떤 내적 요소로 규정하려 한다면, “실은 특정시공의 우연한 조건에서만 가능했던 사운드”를 장르의 보편적 특징인 것처럼 착각하게 될 수 있다. 따라서 나원영은 음악의 장르를 내적인 본질이나 음향적 속성이 아니라 특정한 “청취·창작 양태”를 통해 사고하고자 한다. 이 양태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기술적·사회적·담론적 정황에 따라 다르게 형성된다. 따라서 영국이나 미국의 포스트- 록과 한국에서의 포스트- 록은 다를 수밖에 없다. 이 차이는 한국에서 형성되는 장르의 상대적 고유성을 주장할 수 있게 하는 동시에, 여전히 ‘원본성’을 의식하는 “문화적 주변부”라는 분열적 정체성 또한 돌아보게 한다. 이처럼 이 글은 특수한 장르에 대한 고찰이지만 2000년대 이후 한국이라는 시대적·지리적·문화적 조건에 대한 고찰로 확장된다. 나원영의 독특한 아카이브적 글쓰기는 자신의 글을“장르를 즐거이 거닐 만한 통로로 넓히고 싶”다는 마음에서 나온 것일 테다.
안희제의 「사랑은 망한다— 장르의 잔여, 붙잡을 수 없는 욕망」은 케이팝 팬덤 문화에서 자주불거지는 ‘논란’이 그 문화를 하나의 장르로 구성하는 동인이라는 흥미로운 주장을 제시한다. ‘소비’로 해소될 수 없는 팬들의 정념은 논란이라는 장치를 거쳐 소비의 동력으로 회수된다. 그 과정에서 연예인과 팬은 상처받고 다칠 수 있지만, 케이팝이라는 산업 혹은 문화적 장르 자체는 계속해서 보전되고 융성할 수 있다. 논란도 추리소설이나 음모론 같은 ‘서사적 틀’을 갖추고 있으니 그 자체로 하나의 장르(케이팝 장르의 ‘ 2 차 창작’ 장르)이자 케이팝을 장르화하는 결정적 동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역으로 생각해보면 ‘사랑’은 그러한 장르적 소비 양태속에서 충분히 수용되거나 재현될 수 없는 ‘잔여’가 된다. 그 사랑은 케이팝 장르를 가능하게 하지만, 동시에 장르의 외부로 계속해서 격리된다. 따라서 ‘매혹’은 필연적으로 ‘좌절’을 겪게 되고, 이 사랑이 사랑이 맞기는 하냐는 의심도 계속해서 불거진다. 안희제는 그러한 잔여가 “비평과 토론이 창발”하는“생성의 장소”가 될 수 있다고 말하며 “뚜렷이 언어화할 수 없는 모순들”을 들여다보자고 제안한다.
이은지의 「장르적인 것으로부터 사회적인 것을 구해내기— 장르물의 체제 종속성과 자율성에 대하여」는 여러 층위의 장르물이 구성되는 경제적·역사적 조건을 비판적으로 짚으면서도, 그러한 조건 속에서 얼마간 ‘자율적인 미적 체험’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독자와의 상호작용이 일찍이 강조됐던 추리소설에서는 소위 ‘본격소설’에서보다 ‘상호 주체성’이 먼저 실험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작품이 구성되는 과정에 개입하는 그 적극성은 오늘날 웹소설 독자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는 면모다. 그렇게 다수의 독자가 웹소설에 “대중적이고 친숙한 코드를 최대한 활용”하도록 촉구한다면, 웹소설은 “욕망의 ‘사회적’ 성격”을 구현하는 창작물로서 탁월하게 이중적인 측면을 지닐 수 있다. 즉 웹소설은 대중 독자와의 더 즉각적이고 광범위하며 불가피한 상호작용을 통해 이 사회의 ‘지배적 이데올로기’를 전면적으로 보여줄 뿐 아니라, 그 내부에서 거기에 “대항하는 힘이 될 수도 있는 미적 체험”까지 제공할 수 있다. 이은지가 제안하는 바는 말하자면 웹소설에 대한 ‘변증법적’ 독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융희의 「‘장르문학’이라는 독법」 역시, “텍스트에서 수용자로” 방점이 이동한 현대에 창작물의 장르를 규정하는 것은 창작물의 내적 요소(텍스트 속의 코드나 장르적 화소)가 아니라 수용자 혹은 소비자의 소비 방식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이융희는 “특정한 텍스트의 양식”보다는 “‘장르문학’이라는 소비자”의 탄생에 초점을 맞춘다. 특히 흥미로운 것은 한국에서 그 소비자의 탄생이 일본 문화의 (밀)수입 그리고 ‘반일 정책’과 관련 있다는 주장이다. 1980년대에 막 형성되기 시작한 그 소비자 집단의 형상은 “부르주아 계층의 엘리트 얼리어답터 기득권들”이었다. 그들이 부모 세대의 문화와 제도에 반발하면서, 한편으로는 민족주의적인 정책이나 지적 경향에 비추어 비난받으면서도 일본에서 여러 문화를 발 빠르게 ‘수입’해 자신들의 문화를 만들어갔는데, 그것이 한국의 장르문학 소비자의 시초라는 것이다. 그들의 위치와 동기를 고려했을 때 그들의 소비가 “‘환상’으로 귀결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라고 말하면서도 그 ‘환상’의 기능과 동력을 자세히 짚어본다. 이융희는 결론적으로 장르가 텍스트의 문법이나 내적 요소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수용과 소비의 양태에 따라 형성되는 것이기에 고정적으로 정의될 수 없다고 강조한다. 그 변화와 순환, 해체의 과정을 “계보적”으로 짚을 수 있을 뿐이다.
소유정의 「마주침의 장소에 대한 회고—필굿 소설이 그리는 안전한 세계의 위험성」은 ‘필굿 소설(feel-good novel)’이라 불리는 어떤 장르 혹은경향에 대한 성찰에서 출발한다. 자의에서든 타의에서든 최근 그런 이름으로 묶이는 소설들이 “이례적인 판매량을 기록”하고 있지만, 어쩌면 “모든 골치 아픈 요소를 배제한 나머지 판타지에 가까워”진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러한 경향이 나타나는 사회적·시대적 이유를 헤아리면서도, 일련의 소설들이 손쉬운 위로를 통해 엄연히 존재하는 갈등이나 문제를 표백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려하는 것이다. “너무나 안전한 결말”을 보여주는 소설은 독자가 해석하고 생각할 여지를 차단하는 것일 수 있다. 소유정은 이러한 우려로부터 문학의 기능과 의미에 대한 성찰로 나아가고, 설재인의 『월영시장』과 이서수의 『마은의 가게』에서 “개인적인 사안이기도 하나 사회적인 맥락을 결코 배제할 수 없는 문제들”을 읽는다. 이 글의 중요한 주장은 낙관이나 희망이 잘못되었다는 게 아니라 “갈등을 경험하지 않은 낙관은 거짓에 가깝다”는 데 있을 것이다.
전승민의 「가장음험한 가장—코드의 언어 경제로 보는 시와 소설 그리고 비평의 매트릭스」는 대항적·비판적으로 보이는 담론이나 경향 역시 자기중심적인 포섭 혹은 코드화일 수 있다는 문제의식 위에서 한국문학의 ‘퀴어’ 코드를 비판적으로 읽는다. 이 글에서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읽기의 수행’으로간주되는 비평 배후에 도사리는 “쓰기의 음침한 욕망”이다. 비평(가)은 스스로를 내세우기 위해 적당히(자신의 주체성에 위협이 되지 않는 범위에서) 발칙하거나 문제적인 작품들을 가져와 활용하는데, 넓은 의미의 ‘상품성’은 이 범위의 한계를 규정하는 물적 조건이다. 전승민은 “2010년대의 문단 내 미투운동” 이후, “문학 시장의 독자성이 여성으로 강하게 젠더화”되어 있고 “이 여성 젠더의 섹슈얼리티가 여전히 이성애 중심성을 채택하고 있음을 고려”했을 때 ‘게이’는 어쩌면 가장안전하고 ‘상품성’ 있는 코드였으리라는 과감한 가설을 제시한다. 또 퀴어 코드를 자기중심적으로 전유하는 ‘음침한 욕망’이 이미 2000년대의 시와 비평에서도 나타났음을 짚어낸다. 전승민은 그렇게 퀴어를 코드로 활용하는 경우 그 작업은 전혀 퀴어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 글의 중요한 주장은, 퀴어한 주체가 스스로를 코드화하더라도, 그것은 가시화를 위한 전략일 뿐 “하나의 규범화된 장소로 게토화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는 데 있을 것이다. 따라서 ‘퀴어함’은 (신자유주의적 소비의 코드든 비평적 담론의 코드든) 어떤 방식의 코드로 환원될 수 없고, 그러한 코드화를 초과하는 생성의 힘을 갖는다.
여섯 필자의 글은 ‘장르화’와 ‘코드화’라는 주제 자체를 다방면으로 확장하여 새로운 생각의 길을 여는 동시에 시의적인 안건을 예리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 글들을 통해 어떤 장르나 코드의 구성을 따져보면서 동시에 우리가 장르라고 여기는 것의 ‘잔여’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된다. 모든 장르에는 규약과 형성의 역사가 있고 또한 그 잔여가 있을 것이다. 그러한 잔여를 통해서 우리가 이미 형성된 코드의 교환이 아닌 방식으로, 장르의 경계를 넘어서 대화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싶다. 함께해준 필자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문학은 참으로 모호하고 일관성 없는 장르이고 그것이 문학의 생명력인 듯하다. 우리가 문학에 대해 아주 부분적으로밖에 말하지 못하더라도, 그 모호한 이름으로 우리가 모일 수 있다면, 어떤 특징으로 묶일 수 없는 다채로움을 보여주는 작품들 덕분일 것이다. 이번 호에서는 마종기, 송재학, 신용목, 장승리, 황유원, 임지은, 강혜빈, 김연덕, 장미도, 이실비 시인의 시와 조해진, 함윤이, 정기현 작가의 소설을 만나볼 수 있다. 편혜영 작가의 장편 연재도 이어지고 있다. 또 김나영, 조대한, 최가은, 황사랑, 박민아, 백지은, 송현지, 정홍수 평론가가 지난 계절에 발간된 단행본에 대한 애정 어린 리뷰를 보내주었다.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이 24회를 맞았다. 그 속에 담긴 열정과 질곡을 감히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작품을 마주해 벅차고 떨렸다. 새삼 신인문학상 제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생각해보면 거기에는 형언하기 어려운 역설이 있는 것 같다. 그렇지만 여러 어려움과 제약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며 응답을 요구하는, 빛나는 작품들도 있다. 마치 ‘타인이 뜻밖에 그리고 역설적으로—장르의 논리에 대항해’ 내게 말을 거는 것처럼. 심사위원들은 오랜 토의를 거쳐 시 부문에 구윤재의 「모래밭의 나쁜 아이에게」외 4편을, 소설 부문에 윤단의 「작은 알」을 선정했다. 아쉽게도 평론 부문에서는 당선작을 내지 못했다. 새로운 놀라움과 기대를 품게 하는 두 작가에게 많은 응원과 관심을 부탁드린다. 당선작과 당선 소감, 심사 경위는 본권에서 확인할 수 있다.

편집동인 이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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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 차례

| 본권 |
여름호를 펴내며


마종기 눈에 대한 소견 외 1편
송재학 아가미는 고백의 한 종류 외 1편
신용목 분실물 보관소 외 1편
장승리 목발 외 1편
황유원 영원히 불타오르고 있었다 외 1편
임지은 세탁기 연구 외 1편
강혜빈 빈 외 1편
김연덕 폭포 열기 외 1편
장미도 광장과 장면 외 1편
이실비 택시 외 1편

소설
조해진 내일의 송이에게
함윤이 나쁜 물
정기현 슬픈 마음 있는 사람
편혜영 꿈을 꾼 후에[장편 연재 2회]

리뷰
김나영 공원과 거실에 남겨진 것
—이장욱, 『음악집』
—장수진, 『순진한 삶』
조대한 절망 그 이후의 자리에서
—김정환, 『황색예수 2』
최가은 움직이는 시
—김이강, 『트램을 타고』
—신수형, 『무빙워크』
황사랑 먼지와 기계의 집
—박참새, 『정신머리』
—한재범, 『웃긴 게 뭔지 아세요』
박민아 영향과 그림자
—전하영, 『사치와 시대착오』
—이선진, 『밤의 반만이라도』
백지은 행복론이거나 인생론이거나
—서수진, 『골드러시』
—문지혁, 『고잉 홈』
송현지 읽는 노동
—구병모, 『단지 소설일 뿐이네』
—명학수, 『말의 속도가 우리의 연애에 미친 영향』
정홍수 선택은 어디에 있는가
—강영숙, 『분지의 두 여자』

제24회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 발표
구윤재 모래밭의 나쁜 아이에게 외 4편
윤단 작은 알

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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