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실패하고,
나는 전진하기에,
이것은 나의 몫이므로.”
세상의 고통을 받아쓰는 시인의 숙명
익숙한 지옥에 울려 퍼지는 광기의 노래
김구용시문학상·현대시작품상·딩아돌하우수작품상 수상 시인 김안의 네번째 시집
2004년 『현대시』를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해 올해로 시력 20년을 맞이한 시인 김안의 네번째 시집 『Mazeppa』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597번으로 출간되었다. 문단의 유행이나 세간의 기조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만의 속도로 정직하게 써 내려온 50편의 시를 3부로 나누어 묶었다. 마지막 부에 수록된 「숭고」는 “꾸밈없는 언어로 현실을 직시하며 세계와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 성찰을 보여”준다는 평과 함께 딩아돌하우수작품상을 받은 바 있다. 2000년대 초 치열하고 관능적인 언어 실험을 선보이며 문단에 데뷔한 젊은 시인. 세계와 불화하는 자아로서 자폐적인 절망을 쏟아내던 소년은 어느덧 중년의 사내가 되어 “피와 먼지가 엉긴 거울들로 가득한 방”(「아오리스트」)에 서서 스스로를 마주한다.
이번 시집의 표제작이자 서시의 자리에 놓인 「Mazeppa」는 우크라이나의 독립 영웅, 이반 스테파노비치 마제파Ivan Stepanovich Mazepa의 삶 위에 시인의 얼굴을 겹쳐놓는다. 귀족 가문의 견습 기사였던 마제파는 백작 부인과 금지된 사랑을 나눈 죄로 광야에 버려졌으나, 오직 광기만으로 살아남아 두고두고 회자되는 전설적인 영웅으로 거듭난다. 그러나 이 시에서 새로 씌어진 마제파의 서사는 위인의 일대기라기보단 나약한 한 사내의 이야기에 가깝다. 이 시집의 해설을 쓴 문학평론가 류수연은 그것을 “항상 실패하지만, 그럼에도 전진해야 하는 숙명을 지닌 자, 바로 시인 자신의 얼굴”로 읽어낸다. 가장 깊은 바닥까지 파고든 자만이 볼 수 있는 풍경, 시인 김안이 도달한 지옥이 이곳에 펼쳐진다.
“나는 나의 귀로 듣는다, 모든 마음이 내 것인 양”
듣는 몸으로 대신 말하는 사람
나는 듣는다,
토끼가 겨울나무를 파먹는 소리,
얼어버린 눈동자가 물결처럼 갈라지는 소리.
나는 듣는다, 술로
연명하다 굶어 죽은 시인의 창밖으로 계절처럼
전진하던 기차 소리,
그 소리에 밤하늘의 불꽃이 흔들리고,
낭만과 폭력을 구분하지 못하던 시절과,
죽은 이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벌레의 날갯소리,
듣는다,
음독이 묵독이 되는 소리,
기억을 잃은 이들이 거울 앞에 서는 소리,
―「Mazeppa」 부분
앞선 표제작에서 “나는 듣는다”로 시작하는 반복적인 선언은, 말의 관절을 비틀며 유례없고 파격적인 언어를 구사해온 시인의 발자취를 떠올릴 때 다소 놀라운 변화다. 그는 “내 질문들은 자꾸만 어리석어지고, 어리석어지니 입을 틀어막”(「뒤풀이」)기로 결정한 듯이 “입을 다물고 입속으로 들어가 다시 입을 다문 채”(「젖은 책」) 가만히 들을 뿐이다. “언어의 팔을 휘두르는 게 한때 제 직업이었”던 시인은 이제 “나는 나의 귀로 듣는다, 모든 마음이 내 것인 양”(「Mazeppa」) 듣는다.
그 말들의 행방이 궁금하던 차에 시시각각 변하는 신체들이 눈에 띈다. 이 시에 등장하는 화자의 몸은 불현듯 늘어나고(“여보, 나는 당신을 생각하며 조금 더 길어진다오”, 「백수광부」), 움푹 패거나 부풀어 오르며(“움푹 팬 얼굴에 손을 넣었더니 아무것도 없었다”, 「코케인」), 짐승의 신체 부위가 몸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머리에 솟은 부드러운 뿔을 기르며”, 「아오리스트」). 시인이 들은 말들이 그의 몸에 흡수되고 뼈와 영혼에 각인된다. 그리하여 신체의 일부가 된다. 그가 시집에 부려놓은 말들은 외부의 말에 대한 내부의 현상학인 셈이다.
이렇듯 타인의 말을 먹고 태어난 김안의 화자들은 시와 생활 사이에 몸을 반쯤 걸쳐둔 채로 삶을 조망한다. 「여닫이문」에는 번잡한 술자리를 벗어나 밖으로 나가던 중 문 사이에 낀 화자가 등장한다. “문은 정확히 내 몸을 길게 반으로 갈라놓고선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이러한 처지는 “서로 밀어주지 못할 바엔 조금씩 나누면서 살아야”겠다는 체념 혹은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소리경」에서 그의 몸 절반은 생의 “한때들”을 쏟아낸다. 때로는 흐리고, 때로는 비바람이 부는 “한때들이 만드는, 한 떼의 폭음”을 듣는다. “되뇌는 건 내가 아닌 광기의 몫”이기에 시인은 그것이 “텅 빈 소리뿐”이라 할지언정 다시 들을 수밖에 없다.
“이것이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다”
광야로 나아가는 아늑한 광기
시와 삶, 삶과 시 사이의 위태로운 균형 감각은 술에 취해 휘청휘청 걷는 사람을 연상시킨다. “사람이었듯 시인인” 화자는 “서로의 술잔을 채”(「코케인」)우며 흥청망청 취한다. 마치 맨정신으론 살기 어렵다는 듯이 “취해 나뒹굴며 황망하게 흘러”(「입춘」)다니며 부끄러움을 잊으려 한다. 이러한 술자리는 그에게 일상의 이면에 감춰져 있던 지옥을 자각게 한다. “돼지 속살이 타오르는 리듬에/부딪는 술잔”(「시인의 말」)을 마주하거나 “기름진 테이블에 둥글게 모여 앉아”(「뒤풀이」) “고기나 뒤집다가 마흔이 넘”(「말과 고기」)어버린 사내는 당면한 현실의 문제를 잊기 위해 술을 들이켜지만, 오히려 그곳에서 지옥의 민낯을 더 선명하게 목격할 뿐이다.
철없던 소년은 성장하며 세계의 진의를 의심하게 된다. 지난 시절의 야욕은 사그라들고 사랑했던 사람은 남이 된 것만 같다. 시인은 그럼에도 쓰는 수밖에 없고, 쓰는 것밖에 할 수 없는 스스로를 낯설어 한다. “이 또한 사랑이고 삶이라고 해봤자/변명과 술수로 한없이/부끄러운 연옥일 뿐이라서”(「시인의 말」) 한없이 회의하고 괴로워한다. 그로 인한 부끄러움과 죄책감, 분노와 환멸은 은은한 광기로 변모한다. 그는 “생활, 생활 속에서 그저 용서받는 광기만을/아늑한 광기만을 구하고 있었”(「소리경」)다며 반성하지만, 그것은 동시에 여전히 남아 있는 광기의 흔적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번 시집 『Mazeppa』는 바로 그 광기를 되찾아가는 여정을 담고 있다.
그의 곁에는 딸이 자라고 있다. 시인은 딸과 함께 산책길을 걷는다. 길 위의 수많은 죽음 앞에 사로잡힌 그와 달리, 어린 딸은 있는 그대로 그것을 받아들인다. 절망의 광기에 사로잡혔던 시인은 그런 딸의 손을 잡고 다시 지옥의 문을 열어젖힐 용기를 얻는다(“울던 딸아이를 달래 그네에 태우고 힘껏 밀다 보면 집집마다 뿌옇게 등 켜지고”, 「이 문장을 끝내지 못한 곳에서」). 아빠와 나란히 앉아 아는 “이름들”과 “이름 모를 것들을”(「간절곶」) 적는 어린 딸의 모습에서 한때 시인의 것이었던 얼굴이 겹쳐 보인다. 언제나 어린아이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인, 길들지 않는 귀로 타인을 듣고자 하는 시인 김안. 그의 시는 오래오래 광야를 누빌 것이다.
바라보는 일은 끝나지 않을 것이다. 놀이터에서 뛰어노는 아이들,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온 사람들, 아이의 무릎에 난 흉터, 잠든 아내에게 붙어 있는 생활의 악몽, 겁먹은 채 부유하는 흰 종잇조각들, 그 입구에서 동동거리는 내 뒷모습. 빗소리 거세지고 잠이 오지 않아서 유일한 바깥인 양 책을 펼치면, 난 이미 비의 어두운 눈. 이것은 끝나지 않을 것이지만, 마음 전부로 눈먼 비유 하나 얻고 돌아와 반듯하게 누우면,
마음을 다 쏟은 어리석은 귀신이 내 옆에 물처럼 하얗게 누울 것이다.
―「마음 전부」 부분
■ 책 속으로
시인들 몇과 만나 술을 마셨다. 우리는
제각각의 이유로
제각기 억울하고,
억울한들 취하고 비틀거릴 수밖에 없고, 몸속에
서로 다른 짐승들이 살고,
나무가 죽어 계절이 오가고, 눈떠보니
사람이었듯 시인인 거라서,
서로의 굽은 몸에서 이를 잡아주는 원숭이처럼 묵묵히
서로의 술잔을 채워준다.
우리가 가던 단골집들은 다 망했다고, 그런데
우리는 아직 망하지 않았다고, 망할 것 자체가 없다고,
이 가게도 망할 리가 없지, 이미 망했으니까,
서로의 말꼬리를 물고 농을 던지다 보니 실은
서로가 서로를 미워하는 사이라는 것을 기억해내곤 말없이
하나둘 사라졌다.
―「코케인」 부분
그는 지옥이었고 사랑이었고 희생이었으나
그는 무능력이었고 아집이었고 알코올이었으나
나는 그와 비슷한
피부 색깔과 좁은 어깨와 걸음걸이를
가진 탓에
그는 두려움이고 사방 창 없는 벽이고 천장이고
가계의 첫머리였기에
그의 신화가 죽은 화분 위에 버리는 물처럼
마음속으로 흘러든다.
―「피붙이」(p. 26) 부분
이념도 없고 분노도 없는 계절이 왔다. 마음이 질겨서 봄이다. 이제 나는 한 줄로도 만족하게 되었다. 한 줄만큼의 어리석음이면 족하다. 그 정도의 망신이면 족하다. 부끄러워 봄이다.
까마득한 크레인 위에서 겨우내 사람들이 얼어갔고, 젊은 청년들이 자꾸 죽었지만, 친하지도 않은 이들과 어깨 겯지르고 같이 취해 나뒹굴며 황망하게 흘러 다니다 보니
남편이 되었고 아빠가 되었고 사무실에 앉아 버려져가는 반쪽짜리 노동이 되었다.
나는 버려지기가 무서운 것일까. 그래서 착한 척이나 하는 것일까, 하다가그저 밤늦도록 취하기 좋으니 봄이다. 가끔 술에 취해 전화하는, 지금은 꽤 잘산다는 친구를 생각한다. 그 친구의 꿈은 아직 시인일까? 내가 생각한 것은 이따위 것이 아니었다. 나나 그 친구나 포즈만을 꿈꾸었구나.
―「입춘」 부분
그 누구도 자신의 불행을 견디기로 다짐하지 않는다. 그것은 견뎌지는 것이거나(신은 견딜 수 있는 불행만을 허락한다는 의미에서는), 좌절시키는 것이거나, 견디고 있나 싶으면 어느 사이 얼굴 속으로 흘러들어 굵고 깊게 스미는 것이다. 그것은 때로는 물성을 지닌 것으로 느껴진다. 무겁거나, 거대한 검은빛이거나, 차갑거나, 견딜 수 없이 뜨겁거나, 거칠게 떨리거나. 하지만 그 물성은 만져지지 않는다. 만져지지 않으나, 그것은 서로 다른 몸과 몸이 뒤섞이듯 어떤 기형의 자세를 체득하도록 한다.
―「유전」 부분
그날 이후 나는 몸 위로 숱한 선을 그었습니다. 그때마다 몸이 마음을 붙잡으려고 해서, 폭발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전부 그 선입니다. 이 선을 다 헤아려보세요. 헤아리는 마음. 죽어서도 마음이 넘치면 귀신이 됩니다. 그것과 같은 부족이 됩니다. 당신은 읽었습니까. 헤아렸습니까. 그렇지 않더라도 살아 있습니까. 내일의 비는 파토스처럼 쏟아질 겁니다.
―「선으로부터」 부분
■ 시인의 말
언제나 내가 쓰는 가장 좋은 시는
지금 현재 쓰고 있는 시이고, 앞으로 써나갈 시이다.
때문에 한 권의 시집을 묶는 것은
내 모자람을 확인하는 작업이기에 곤혹스럽기 그지없다.
네번째 시집을 엮으면서도 그 곤혹스러움에
방 안을 배회하며 늙었다.
삶의 곤혹스러움은 부지불식간에,
그리고 한꺼번에 찾아온다. 지난 몇 해가 그렇다.
허방에 한쪽 발을 담근 채로, 기억의 근력이 다해가던
가족과 이별해야 했다. 몸과 마음이 한쪽으로 기울어진 채로,
들키지 않기 위해 가까스로 균형을 잡아야 했다.
이 시집에 묶인 시들 또한 그럴 것이다. 겨우, 시 같은 것을
만들고자 했고, 시 같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변명과 다짐. 후회와 기울어진 나무의 행렬.
아직까지 제 아빠의 변변치 않은 직업을 자랑하는 딸과,
나의 가장 오랜, 그리고 최초의 독자인 아내,
나의 뿌리인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마음 전부를.
2024년 2월
김안
■ 차례
시인의 말
1부
Mazeppa | 시인의 말 | 코케인 | 말과 고기 | 신년회 | 여닫이문 | 뒤풀이 | 무의식 | 피붙이 | 피붙이 | 당신의 눈먼 아들이 되어 | 그 누구도 죽지 않았네 | 천장天葬 | 끽다거喫茶去 | 입춘 | 백수광부 | 귀신의 맛
2부
붉은 귀 | 귀신통 | 종언기 | 동백 | 유전 | 아오리스트 | 대학 시절 | 눈 이야기 | 카스토르 | 물과 자전 | Purgatorium | 죽음의 집의 기록 | 우연 | 젖은 책 | 마흔 | 이 문장을 끝내지 못한 곳에서 | 엘레지
3부
우나코르다 | 마중 | 도깨비불 | 기일 | 엠페리파테오 | 소리경 | 불이과不貳過 | 간절곶 | 여름의 빛 | 마차 타고 고래고래 | 숭고 | 회문 | 마음 전부 | 선으로부터 | 니힐리스트 | 대설大雪
해설
연옥煉獄으로의 한 걸음 · 류수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