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반反공간, 위치를 가지는 유토피아들.
아이들은 그것을 완벽하게 알고 있다.
그것은 당연히 정원의 깊숙한 곳이다.
그것은 당연히 다락방이고,
다락방 한가운데 세워진 인디언 텐트이며,
아니면 목요일 오후, 부모의 커다란 침대이다.”
사유 실험 속에서 탄생한
푸코의 논쟁적이고도 다성적인 에세이
공간에 대한 푸코의 독특한 사유를 담은 『헤테로토피아』(2014년 초판) 개정판이 ‘채석장 시리즈’로 새단장하여 출간된다. 권력과 공간에 대한 푸코의 고유한 시각을 드러내는 글들을 묶은 선집 『권력과 공간』과 동시 소개된다.
완벽한 세계, 혹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사회에 반反하는 가치를 갖는 세계, 그러나 실제로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우리는 유토피아utopie라고 부른다. 그것은 인간의 상상 속에서만 존재한다. 그런데 유토피아적인 기능을 수행하면서도 실제 지도 위에서 위치를 찾을 수 있는 장소들이 있다면 그것들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그것들을 어떻게 불러야 할까?
헤테로토피아hétérotopie! 미셸 푸코는 이것을 현실에 존재하는 장소이면서도 그 밖의 다른 온갖 장소들에 대해 “이의제기”를 하고 그것들을 전도시키는 장소, 말하자면 실제로 위치를 갖지만 모든 장소들의 바깥에 있는, 일종의 “현실화된 유토피아”라고 이야기한다. 다락방, 인디언 텐트, 목요일 오후 엄마 아빠의 침대, 거울, 도서관, 묘지, 사창가, 휴양촌…… 푸코는 언뜻 유사성을 찾기 어려운 이 장소들을 ‘헤테로토피아’라는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줄줄이 소환한다.
『헤테로토피아Les Hétérotopies』는 푸코가 유토피아와 대비되는 공간으로 독자적인 개념화를 시도했다가 일찌감치 포기해버린 미완의 개념인 ‘헤테로토피아’와 관련된 논의를 담은 푸코의 에세이들을 모아 번역한 것이다. 헤테로토피아에 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하는 두 편의 강연 원고인 「헤테로토피아」(1966)와 「다른 공간에서」(1967), 유토피아와의 관계 속에서 몸이라는 ‘장소’를 현상학적으로 서술한 「유토피아적인 몸」(1966), 공간과 건축에 대한 푸코의 시각이 통치성과 자유라는 문제와의 관련 속에서 잘 드러난 폴 래비나우와의 인터뷰(1982), 「헤테로토피아」에 대한 다니엘 드페르의 해제 등 흥미로운 글들이 실려 있다
모든 장소에 맞서는, 절대적으로 다른 공간
푸코가 ‘헤테로토피아’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사용한 것은 1966년 4월에 출간한 『말과 사물』에서였다. 푸코는 이 책의 서문에서 보르헤스의 에세이 「존 윌킨스의 분석적 언어」에 나오는 “어떤 중국 백과사전”의 기이한 동물 분류법(“a) 황제에게 속한 것 b) 향기로운 것 c) 길들여진 것 [……] m) 방금 단지를 깬 것 n) 멀리 파리처럼 보이는 것”)과 마주쳤을 때 느낀 당혹감을 토로하며, 이 부조리한 ‘텍스트 공간’을 헤테로토피아라고 이름 붙인다. 푸코는 헤테로토피아에 대해 “사물들이 몹시 상이한 자리에 ‘머물러’ 있고 ‘놓여’ 있고 ‘배치되어’ 있어서, 사물들을 위한 수용 공간을 찾아내거나 이런저런 자리들 아래에서 공통의 장소를 규명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언어를 은밀히 전복하고, 말과 사물을 함께 붙어 있게 하는 통사법을 무너뜨린다고 이야기한다. 그것은 우리의 사유가 자리한 불가능성, 사유의 한계, 우리의 담론 아래에서 사유할 수 없음을 증언한다.
그리고 같은 해 12월 7일, 푸코는 한 라디오 채널이 ‘유토피아와 문학’이라는 주제로 마련한 특강 시리즈에 출현해 『말과 사물』에서는 가볍게만 언급했던 헤테로토피아 개념을 다시 끄집어내 본격적으로 논의하는데(방송 당시 강연 제목은 ‘실제의 유토피아, 혹은 “장소와 다른 장소”’였으나, CD와 단행본으로 출간되면서 「헤테로토피아」로 제목이 바뀐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푸코는 이 용어의 의미 축을 ‘텍스트 공간’으로부터 ‘사회 공간’으로 옮겨놓는다.
“온갖 장소들 가운데 절대적으로 다른” 공간, “자기 이외의 모든 장소들에 맞서” 그것들을 중화시키고 혹은 정화시키기 위해 마련된 “일종의 반공간contre-espace”인 헤테로토피아는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첫째, 모든 사회, 모든 문화에는 헤테로토피아가 존재한다. 둘째, 그 존재방식이나 작동방식은 동일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변화한다(묘지). 셋째, 헤테로토피아는 한 장소에 복수의 공간을 겹쳐놓을 수 있다(극장, 페르시아 정원). 넷째, 헤테로토피아는 전통적인 시간과의 단절, 일종의 헤테로크로니아hétérochronie를 동반한다(박물관, 휴양지). 다섯째, 헤테로토피아는 그것을 주변 세계에 대해 고립시키는 열림과 닫힘의 체계를 갖는다(미국식 모텔). 즉 그것은 열려 있는 동시에 닫혀 있다. 여섯째, 헤테로토피아는 나머지 공간에 대해 이의제기의 기능을 수행한다. 즉 단단하게 실존하는 것으로 여겨지던 공간을 신기루처럼 보이게 한다거나(사창가), 확고하게 질서 잡힌 것으로 여겨져온 제국의 공간을 뒤죽박죽인 것으로 보이게 하는 식으로(주도면밀하게 계획된 식민지), 현실 공간을 ‘다르게 보이도록’ 한다.
1967년 3월 14일, 푸코는 파리 건축가들의 연구모임에 초대를 받아 라디오 방송 강연 원고를 대폭 수정・보완하여 「다른 공간들」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한 번 ‘헤테로토피아’를 논한다. 그러나 이를 마지막으로 헤테로토피아라는 용어는 푸코의 저작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다른 공간들」이 푸코가 타계한 1984년에 정식으로 출판되기까지 이 두 편의 글은 거의 논의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글을 접할 방법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그런데 「다른 공간들」이 출간되자, 헤테로토피아에 대한 아이디어는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푸코의 가장 논쟁적인 개념 중 하나로 떠오른다.
푸코의 ‘유산된 사유’가 배태한 역설적인 생산성
사유할 수 있는 것의 바깥을 사유하다!
푸코가 다른 저작들에서 보여준 논리적 엄격성이나 꼼꼼한 사료 분석을 생각할 때, 헤테로토피아 개념은 모호하고 논리적 비약이 심하며 헤테로토피아의 사례로 제시된 공간들이 일관성도 별 쓸모도 없다는 비판들이 적지 않았다. 푸코의 오랜 연인이자 「헤테로토피아」에 대한 해제를 쓴 다니엘 드페르 역시 푸코의 이 글들을 (푸코가 스스로의 지적 행보에서 일종의 일탈을 하여 벌인) ‘문학적 게임’에 속하는 글, (푸코 전체 저작에서) ‘부차적인 텍스트’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를 별 중요성 없는 것으로 치부해버릴 수 있을까? 푸코의 헤테로토피아 개념은 그것이 ‘재발견’된 시점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문학, 예술, 건축, 도시공학, 사회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논쟁적인 해석을 낳으면서 발전을 거듭해나가고 있다. 이 원고들에 담긴 아이디어는, 그 모호하고 허술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아니 어쩌면 바로 그 덕분에 새로운 사유와 연구를 자극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에 착안한 수많은 연구논문, 학술서, 예술작품이 거둔 흥미로운 성과들은 이 ‘유산된 사유’가 배태하고 있던 역설적인 생산성을 증명한다.
이 책을 옮긴 사회학자 이상길 교수는 청계천과 4대강이 상징하는 콘크리트 자연 공간의 낯선 파노라마, 또 한편으로는 ‘점거하라’는 구호가 울려 퍼지는 광장, 두리반과 희망버스, 일상적인 수다와 격렬한 정치토론과 욕설이 뒤섞이는 SNS 공간을 헤테로토피아라는 관점에서 응시해볼 것을 제안한다. 다니엘 드페르는 헤테로토피아의 탁월한 예술적 구현물의 예로 에이즈로 세상을 떠난 연인 푸코의 빈 자리를 떠올리게 만드는,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의 작품 「무제」를 든다. 그리고 “푸코는 자신이 독자들보다는 이용자들을 희망한다고 여러 번 선언하지 않았던가?”라고 말하며 여전히 이 개념에 여러 해석의 가능성이 열려 있음을 강조한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각종 사회 공간의 배치 양상과 경계, 그것을 낳은 상상과 그것이 간직한 합리성과 가능성을 가로지르는 공간, 한마디로 공간-존재의 한계를 위반하는 반공간. 헤테로토피아는 인간의 욕망과 충동을 상상 속에서 채워주던 유토피아가 현실의 중력에 의해 끌어당겨졌을 때 드러나는 그 균열과 틈새를 직시하게 해준다. 이를 통해 우리는 ‘바깥’ 공간을 다시 바라보게 되며, 여기서 새로운 상상, 현실의 지평이 열린다.
■ 책 속에서
이 반공간, 위치를 가지는 유토피아들utopies localisées. 아이들은 그것을 완벽하게 알고 있다. 그것은 당연히 정원의 깊숙한 곳이다. 그것은 당연히 다락방이고, 더 그럴듯하게는 다락방 한가운데 세워진 인디언 텐트이며, 아니면―목요일 오후―부모의 커다란 침대이다. 바로 이 커다란 침대에서 아이들은 대양을 발견한다. 거기서는 침대보 사이로 헤엄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커다란 침대는 하늘이기도 하다. 스프링 위에서 튀어오를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숲이다. 거기 숨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밤이다. 거기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유령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침내 쾌락이다. 부모가 돌아오면 혼날 것이기 때문이다. (「헤테로토피아」, 13쪽)
내 몸, 그것은 나에게 강요된, 어찌할 수 없는 장소다. 결국 나는 우리가 이 장소에 맞서고, 이 장소를 잊게 만들기 위해 그 모든 유토피아들을 탄생시켰다고 생각한다. 유토피아의 매력, 아름다움, 경이로움은 어디에서 비롯하는가? 유토피아, 그것은 모든 장소 바깥에 있는 장소이다. 한데 그것은 내가 몸 없는 몸을 갖게 될 장소인 것이다. 아름답고, 맑고, 투명하고, 빛나고, 민첩하고, 엄청난 힘을 지니고, 무한히 지속되고, 섬세하고, 눈에 띄지 않고, 보호되고, 언제나 아름답게 되는 몸. 원초적인 유토피아, 인간의 마음 속 가장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유토피아, 그것은 바로 형체 없는 몸의 유토피아일 것이다. (「유토피아적인 몸」, 30쪽)
사랑을 나눈다는 것은 스스로를 되찾은 자신의 몸을 느끼는 것이다. 그것은 마침내 몸이 모든 유토피아의 바깥에서 자기 밀도를 온전히 가지고서 타자의 손 안에 존재하는 것이다. 당신을 가로지르는 타자의 손길 아래서, 보이지 않던 당신 몸의 온갖 부분들이 존재하기 시작한다. 타자의 입술에 대응해서 당신의 입술은 감각적인 것이 되고, 반쯤 감겨진 그의 눈 앞에서 당신의 얼굴은 확실성을 얻게 된다. 이제야 당신의 닫힌 눈꺼풀을 보려는 시선이 있는 것이다. 사랑 역시 거울처럼, 그리고 죽음처럼 당신 몸의 유토피아를 누그러뜨린다. (「유토피아적인 몸」, 40쪽)
아마도 모든 문화와 문명에는 사회 제도 그 자체 안에 디자인되어 있는, 현실적인 장소, 실질적인 장소이면서 일종의 반反배치이자 실제로 현실화된 유토피아인 장소들이 있다. 그 안에서 실제 배치들, 우리 문화 내부에 있는 온갖 다른 실제 배치들은 재현되는 동시에 이의제기당하고 또 전도된다. 그것은 실제로 위치를 한정할 수 있지만 모든 장소의 바깥에 있는 장소들이다. 이 장소는 그것이 말하고 또 반영하는 온갖 배치들과는 절대적으로 다르기에, 나는 그것을 유토피아에 맞서 헤테로토피아라고 부르고자 한다. (「다른 공간들」, 51쪽)
그런데 오늘날 이 위기의 헤테로토피아들이 사라지면서 그 자리를 일탈의 헤테로토피아라고 부를 법한 것들이 대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곳에는 사회적인 규범의 요구나 평균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는 개인들이 들어간다. 요양소, 정신병원, 그리고 물론 감옥이 그러한 장소에 속한다. 아마 여기에 양로원을 덧붙여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양로원은 위기의 헤테로토피아와 일탈의 헤테로토피아의 경계에 있다. 필경 그것은 위기이지만, 여가활동이 규칙이 되고 무위가 일탈이 된 우리 사회에서 노화는 일종의 일탈이라고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공간들」, 54쪽)
한데 17세기에, 그리고 17세기 말까지도 여전히 박물관과 도서관은 개개인의 선택이 표현되는 곳이었다. 반면 모든 것을 축적한다는 발상, 일종의 보편적인 아카이브를 구축한다는 발상, 한 장소 안에 모든 시간, 모든 시대, 모든 형식, 모든 취향을 가두어놓으려는 의지, 시간 그 바깥에 있으면서 부식되지 않는, 모든 시간을 담아둘 장소를 구성하려는 발상, 이처럼 고정된 어떤 장소에 시간을 영원하고 무한하게 집적하려는 기획, 이 모든 것은 우리의 근대성에 속하는 것이다. 박물관과 도서관은 19세기 서양 문화에 고유한 헤테로토피아이다. (「다른 공간들」, 58쪽)
■ 차례
일러두기
헤테로토피아
유토피아적인 몸
다른 공간들
공간, 지식, 권력—폴 래비나우와의 인터뷰
해제: 「헤테로토피아」—베니스, 베를린,
로스앤젤레스 사이 어떤 개념의 행로_다니엘 드페르
옮긴이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