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국이 다가오는 것을 어떻게 보겠는가?
그러한 도래-보기, 그러한 시간-응시의
감각기관은 무엇인가?”
역사의 시각자료 아카이브 속에서 망각되었던 것들을 발굴하는
사유의 방법론을 전개해온 디디-위베르만의 에세이
“파국의 순간에도 희망을 잃지 않는 이들에게 남은 것은
미래의 역사를 위한 증언, 아카이브, 문헌 조사에 호소하는 에너지뿐이다.”
광산 가스를 어떻게 감지할 것인가?
역사의 광산 가스, 파국이 다가오는 것을 어떻게 감지할 것인가?
한때 광산 가스로 인한 폭발 사고는 수많은 이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대표적인 산업적, 사회적 재난 중 하나였다. 우리는 광산 가스가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아차릴 수 있을까? 인간의 감각기관으로는 감지할 수 없는 무색무취의 광산 가스를 감지해내기 위해 옛 광부들은 카나리아와 함께 갱도에 내려가곤 했다. 광부들은 어린 새가 깃털을 부풀리는 것을 보고 위험의 순간이 다가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렇다면 우리는 ‘역사의 광산 가스’, 다시 말해 파국을 어떻게 감지할 수 있을까? 일견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듯 보이는 사회 체제 안에서, 아무런 기미 없이 다가오는 파국을 감지할 수 있는 감각기관은 무엇인가?
프랑스의 미술사학자 조르주 디디-위베르만은 이 책 『가스 냄새를 감지하다』에서 예기치 않은 폭발을 야기하는 광산 가스를 도래할 파국의 징후 이미지에 비유하며, 가시화된 적이 없고 따라서 기억되지 않는 과거의 사건이 어떻게 되돌아와 가독성을 획득하게 되는지 질문한다. 저자는 발터 벤야민의 말을 토대로, 역사가의 임무는 역사를 단순히 참조 대상으로 삼거나 판테온에 고이 모셔두는 것이 아니라, 위급한 현재의 순간 예기치 않게 솟아오르는 과거의 기억을 포착해내는 것, 그럼으로써 보이지 않던 것을 감지하고 읽어낼 수 있게 만드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공식적인 행렬 속에서 이미 완결된 과거의 파국에 대해 수행하는 애도나 추모의 작업과, 앞으로 일어날 파국의 관점에서 현재의 상황을 조망하기 위해 과거를 복기하는 일은 분명 다르다. 이 책은 저자의 개인적인 기억과 이탈리아의 영화감독이자 시인, 소설가인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의 다큐멘터리 영화 <분노>(1963)를 오가면서, 역사가 어떻게 시적 분노와 몽타주를 통해 가독성을 획득하게 되는지 보여준다.
“이 이미지의 스펙터클은 얼마나 억압적인가,
얼마나 살인적 광경인가?”
기존의 시각적 질서, 권력의 표상 체계에 균열을 불러일으키는
파솔리니의 변증법적 몽타주 혹은 ‘시적 분노’
프랑스 북부 생테티엔 출신인 디디-위베르만은 과거의 광산 사고 목록을 훑어보다가 1968년 자신이 유년 시절을 보냈던 고향 마을에서도 커다란 광산 사고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당시 그는 이 사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으며, 따라서 기억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이러한 기억상실이 대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리고 어떠한 경우 상실된 기억이 다시 돌출해 인식 가능성을 얻게 되는지 질문한다. 그러면서 디디-위베르만은 파솔리니의 몽타주 영화 <분노>를 소환한다. 디디-위베르만은 이전에도 여러 차례 파솔리니를 주목한 바 있다. 『반딧불의 잔존』(2009)에서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미미한 빛을 내며 잔존하고 있는 민중의 몸짓을 가시화하는 일을 언급하며 반딧불-민중의 춤을 찬미했던 파솔리니의 시적 응시에서 그 모델을 찾았고, 『민중들의 이미지』(2012)에서는 주변부의 것이라 할 인류학적 기록들을 조직하여 미미하게 잔존하고 있는 몸짓과 얼굴을 시대착오적으로 다시 출현하게 하는 감독, 형상적 섬광을 담아내는 감독으로 그를 소개했다. 이 책에서는 변증법이 작동하는 장소로서의 시영화를 통해 리얼리티에 도달하고자 한 파솔리니의 영화 <분노>를 집중적으로 탐구한다.
1962년 파솔리니는 제작자 가스토네 페란티의 제안을 받아들여, 아카이브에 보관되어 있던 9만 미터 분량의 1950~60년대 뉴스릴 자료를 사용해 몽타주 영화를 만든다. 이 프로젝트는 원래 파솔리니의 단일 장편 다큐멘터리로 구상된 것이었으나 1963년 파솔리니가 완성한 급진적 결과물에 당황한 제작자는 계획을 바꿔 영화를 총 2부로 구성하기로 하고, 『신부님 우리 신부님』으로 잘 알려진 우파 작가 조반니노 과레스키에게 후반부의 연출을 맡긴다. 제작자는 훗날 영화가 좌파와 우파 이데올로기 사이의 일종의 영화적 논쟁으로 재구성된다면 더 수익성이 있을 것이라 판단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영화는 대중적으로 철저히 외면당했고 곧 잊혔다.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에야 파솔리니의 영화만 복원되었고, 비판적 힘을 가진 몽타주 영화의 예외적이면서도 탁월한 사례로 재평가된다. 디디-위베르만은 파솔리니의 이 몽타주 영화가 무로부터 세계를 다시 발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시도들보다 훨씬 더 시적이고 정치적이라고 말한다. 당황한 제작자로 하여금 시급히 영화를 ‘중화시킬’ 수단을 찾아나서게 만들었던 파솔리니의 몽타주는 대체 어떤 모습이었을까.
모든 연대기적 시간 너머에 위치하는
시적 몽타주의 비평적 힘
9만 미터의 뉴스릴을 앞에 두고 파솔리니는 이 이미지들이 보기를 거부했던 바 혹은 보여주기를 거부했던 바를 보여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겉으로는 중립적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가증스러운 이데올로기적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이미지들을 어떻게 다시 몽타주할 것인가. “전쟁 직후 그리고 전후 세계에 당도하는 것은 무엇인가? 정상성이다. […] 인간은 정상성 속에서 잠이 든다”라는 강렬한 목소리로 시작되는 영화는, 어떤 위험의 징후도 없이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기만적인 세계가 당도했음을 알린다. 파솔리니는 ‘중동,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혁명’과 ‘새로운 자본주의의 국제질서’, ‘자연재해’와 ‘미인대회’, ‘넝마를 거친 하층민들’과 ‘우아한 옷을 입은 부르주아들’, ‘이름 없는 이들의 침묵’과 ‘힘 있는 자들의 연설’, ‘광산 사고 현장에서 촬영된 비탄의 광경’과 ‘그 무렵 세상을 떠난 할리우드 배우 매릴린 먼로의 얼굴과 신체’, ‘추상회화 작품’과 ‘텔레비전 장면’과 같이 이접하는 요소들을 변증법적으로 충돌시키고 재조립하는데, 몽타주의 작용은 관찰자적인 ‘초연함’과 입장을 취하는 ‘분노’라는 이중적인 시선 사이에서 특유의 시각적 운율을 만들어낸다.
또한 영화는 세 개의 목소리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번째는 이미지를 해설하는 ‘공식적인 목소리’ 즉 권력의 목소리, 두번째는 ‘산문의 목소리’ 즉 정치적인 양심의 목소리, 세번째는 ‘시의 목소리’이다. 파솔리니는 두번째 목소리의 낭독을 반파시스트 화가이자 친구인 레나토 구투소에게 맡겼고, 세번째 목소리는 『핀치콘티가의 정원』으로 널리 알려진 소설가이자 친구인 조르조 바사니에게 맡겼는데, 이 두 목소리는 마치 정치적이고 시적인 두 면모가 음색과 리듬의 대조 속에서 구체화되어야 한다는 듯이 대조를 이룬다. 디디-위베르만은 파솔리니의 이 시각적 시가 이질적인 이미지들을 이질적인 시간 속에서 불러냄으로써 합의된 이미지가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 안에서 돌연히 출몰하는 다른 무엇인가를 보고 읽게 만드는 비평적 힘을 갖는다고 이야기한다. 파솔리니는 이렇듯 아무런 ‘위기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 시대에 ‘광산 가스’와 같이 우리를 위협하는 ‘잠재적 위기’를 감지해낸다.
이 책은 역사가와 예술가들에게 제대로 보이지 않는 파국, 혹은 공식적으로 인지된 파국의 형상 아래 모습을 감추고 있는 또 다른 파국들을 감지해내고 경고를 줄 수 있는 사유 혹은 창작의 방법론을 찾아내야 한다고 말한다. 벤야민과 아비 바르부르크, 크라카우어, 브레히트, 아도르노, 아감벤 등의 논의를 참조하여 변증법적 이미지의 작동방식이라 할 시각적 몽타주와 그 사유 형식을 분석하는 이 에세이를, 디디-위베르만은 그가 주창하는 몽타주적인 형식 속에 분석적이면서도 아름답게 담아냈다.
■ 책 속에서
광산의 가스 냄새를 감지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광산 가스는 무색무취의 가스다. 그러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냄새를 맡고, 보는 일은 어떻게 가능할까? 달리 말하자면 어떻게 파국이 다가오는 것을 보겠는가? 그러한 도래-보기, 그러한 시간-응시의 감각기관은 무엇인가? 파국은 일반적으로 너무 늦게, 일이 벌어졌을 때에야 보인다, 이것이 파국의 무한한 잔인성이다._8쪽
모든 것이 불탈 때, 그 누구도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파국이 최고조에 이를 때, 파국의 회오리를 겪으며 미래의 죽음을 보는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이들에게 남은 것은 파국을 다룰 미래 역사를 위한 증언, 아카이브, 문헌 조사에 호소하는 에너지뿐이다. “우리는 우리의 민중을, 일상의 소용돌이에 지금 또한 항상 휩쓸려 가는 우리의 모든 민중, 남성, 여성, 청년과 장년을 향한다. 살아 있고, 고통받고, 보고 듣고 있는 이들에게 외치기 위해서. 역사가가 되어라! 〔…〕 문서를 기록하고, 적고, 모아라!_9쪽
“역사가의 일은 ‘어떻게 사태가 일어났는지’ 아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위험의 순간에 솟아오르는 기억을 얻는 것이다. 위험의 순간 역사적인 주체에게 예고 없이 주어지는 과거의 이미지를 붙잡는 〔…〕 일에 관한 것이다.” 실제로 “기억의 장소”의 합의된 행렬 속에서 과거의 파국을 기념하는 일commémorer과 일어날 화재의 관점에서 현재 상황을 조망하기 위해 과거의 파국을 복기하는 일remémorer은 같은 일이 아니다._11쪽
광산 가스는 무색무취이기 때문에, 앞서 말했던 것처럼 예전에는 어린 새를 새장 속에 넣어 광산 갱도로 들고 내려가는 방법이 이용되었다. 어린 새들이 떨거나 깃털을 부풀리는 것으로 사람들은 위험의 순간이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또는 본다고 생각했다. 도래하는 것을 보는 예지력을 동물에게 맡기는 이런 행동에는 분명 미신적인 면모가 있다._27쪽
1950~60년대 이탈리아 “뉴스 영화”의 9만 미터 필름을 앞에 두고 파솔리니가 처음부터 생각했던 바는 다음과 같다. “이 이미지의 스펙터클은 얼마나 억압적인가, 얼마나 ‘살인적’ 광경인가!” 그렇다면 이 이미지가 보기를 거부했던 바 또는 보여주기를 거부했던 바를 보여주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정상성이라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해체하기 위해 이 모든 것을 어떻게 다시 몽타주해야 할까? […] “아무런 [위기의] 기미 없이 지나가는 시대”에 이를 감지해내는 일, 다시 말해 역사를 독살하는 “영원히 잠재적 위기eterna crisi latente”를 파솔리니는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까?_41쪽
로베르토 키에시Roberto Chiesi처럼 <분노>의 영화적 시도를 즉각적으로 “새로운 영화 장르”라는 절대적 지위에 올려놓기보다, 오히려 (지가 베르토프의 경우처럼) 영화적이거나, (워커 에번스의 경우처럼) 사진적이거나, (발터 벤야민의 경우처럼) 철학적이거나, (브레히트의 경우처럼) 시적-시각적인 다큐멘터리 몽타주의 장기지속 선상에서 생각하는 편이 당연하게도 훨씬 유용할 것 같다. 한편으로 (발터 벤야민과 지크프리트 크라카우어의 저작에 담긴 주요한 교훈을 따르는) 테오도어 아도르노의 이론적 가르침은 단연 뛰어난데, 그는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형식으로서의 에세이라는 이론적 교훈을 제안했다._49쪽
1968년 파솔리니는 역사가 존 할리데이Jon Halliday에게 <분노>에 담아 시도한 바를 설명하려고 하면서, “당대 사회의 마르크스주의적 고발”을 “시in versi”로 쓰는 일이 만들어내는 역설 앞에서 망설이지 않았다고 이야기했다. “나는 〔이 영화를 위해〕 의도적으로 시 텍스트를 썼습니다. 그리고 <리코타>에서 오슨 웰스의 목소리를 더빙했던 조르조 바사니와 화가 레나토 구투소에게 이 텍스트의 낭독을 맡겼지요.”_82쪽
■ 차례
가스 냄새를 감지하다
옮긴이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