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텅 비어 흘러가네 처음처럼”
점점 넓어지는 부재의 공간을 바라보며 부르는 끝없는 사랑 노래
성기완 여섯번째 시집 출간
1994년 『세계의 문학』 가을호를 통해 시단에 등장해 욕망의 파편들을 실험적이면서 감각적인 방식으로 펼쳐온 성기완 시인의 여섯번째 시집 『빛과 이름』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시적 무정부주의자”(김현문학패 선정의 말)라는 평처럼 시인은 그간 한국 현대시의 기준을 허물고 그 자장을 끝없이 넓히며 자유분방한 시 세계를 구축해왔다. 불온한 욕망, 의미 없음, 사랑에 관한 언어의 실험, 시와 음악의 결합 등이 그의 30년 가까운 시력을 대변한다.
이번 시집 전반에 담긴 정서는 올해로 작고한 지 10년이 된 그의 선친 故 성찬경 시인을 비롯한 모든 이별한 존재들을 바라보며 느끼는 통탄과 그리움이다. 첫 시의 마지막 행 “누런 오후 하늘에 달무리 지”(「눈—20130226화 아버지 돌아가시던 날 오후」)는 풍경은 아버지를 떠나보내던 날 “무릎을 말아 쥔 채/기다리”던 “어둠을”(‘시인의 말’) 짐작게 한다. 상실감에 굴복한 채 한곳에 고여 웅크리고 있을 법한 이 애절한 슬픔은 이어지는 시편들에서 다시 음악처럼 ‘들리는 것’으로 자세를 바꿔 더 깊은 울림으로 오감을 뒤흔든다. 슬프면 슬픈 대로 “끝없이 노래하”(「게으른 기타리스트의 발라드—Où sont les neiges d’antan?」)게 하는 동력은 다름 아닌 ‘사랑’이다. “때로 이름과 함께 절절히” 사랑했던 사람들을 하나둘 꺼내며 “스테이지에 홀로 서서 부르는 사랑 노래”(황유원).
놓고 가신 님 뒤안길에/전구가 녹아 흘러 빛이 출렁여/아리랑 아리랑 우는 바람 소리/귀청을 찢고 목청으로 파고들어/곡소리가 절로 나와 부질없이 빌며/문지방 너머 맨발로 뛰쳐나오며/되뇌니이다/사랑해요/사랑했어요/사랑만을 했어요
―「놓고 가신 님」 부분
영원 너머 빛이 된 이들과의 추억을 써 내려간 출석부
『빛과 이름』은 총 51편의 작품을 5부로 나누어 구성했다. 곳곳에는 시인이 잃어버린 인물들이 편재해 있다. 그는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기억 속에서만 존재하는 “내 인생을 다 주었”(「지지난 꿈에 나왔던 지난 꿈의 사람」)을 만큼 사랑했던 이름들의 “출석을 부른다”(「영원—웅천석재에서」). 처음으로 호명되는 것은 ‘아버지’다. 아버지가 부재한 10년 동안 그를 그리워하며 쓴 시편들에는 아들이 올 걸 어찌 알고 현관문을 열면 늘 앞에 서 계셨지만 이제 문밖에서 “초인종 눌러도 당신은 없”으니 “속속들이 사무치게 그”(「마중」)리운 마음이 오롯이 담겨 있다. “빤히 보이진 않아도 깃들어 계신 당신”이기에 어떤 형태로든 “어디에나 있게 되는 것”(「물결―오스틴 텍사스 사우스 바이 사우스웨스트 리버 보트 셔플」)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지만 “넘실거리며 물이 떠나”고 “너도 떠나”(「untied 물이 나가네—파도의 록 스테디」)는 광경은 결코 면역되지 않는 먹먹한 슬픔의 세계로 인도한다.
이 감정은 ‘할머니’(「헛기침—할머니의 절대적 모럴을 기리는 향가」), 잠정 해체한 밴드 ‘3호선버터플라이’(「다시 가보니 흔적도 없네—응암동 오 남매 왈츠」), 고양이 ‘나비’(「우리집고양이녹색눈다이아몬드—떠나간 나비의 모듈러 신시사이저」)와 강아지 ‘슈’(「복숭아 소네트—슈 환상곡」) 그리고 ‘가을이’(「마이크로증폭우주밤산책—슈와 가을이에게」), ‘할아버지’ ‘괴테’ ‘재홍 아저씨’와 ‘홍성 고모’ 그리고 故 방준석 음악 감독 등으로 확장된다. “여긴 어딘가요 다들 어디 계신가요”(「죽음은 흰 천을 반으로 접는 일입니다—순간의 현상학」)라는 외침과 함께. 망망대해만큼 커다란 슬픔이 남긴 시구들은 “전구가 녹아 흘러 빛이 출렁여/아리랑 아리랑 우는 바람 소리”(「놓고 가신 님」)가 된다.
그럼에도 그는 비탄에 잠기지 않고 ‘영원’을 공감각화하고자 한다.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빈자리로 가득 찬 출석부를 부르다 “빛이 나”는 “영원”(「날개」)이 자리에 있는 것을 바라본다. 마지막 작별 인사를 나누는 화장터에서도 “시선을 돌려도 무늬의 중심에 [……] 빛”이 있고, 빛은 영원한 이별이 아닌 항상 곁에 있다는 전언처럼 “빛을 타고 빛의 속도로”(「아뉴스 데이—화장터에서」) 위로가 필요한 모든 이의 머리 위로 쏟아진다.
리듬 위에서 일렁이던 슬픔이 허문 음악과 시의 경계
지판 가생이에 하얀 자개 스트라이프가 박혀 있는 스타일 윗줄 네 개를 검지로 한꺼번에 짚으며 한 손가락만 높은음을 따로 짚는 그런 코드 운지 코러스가 배경에 깔린다 좋은 노래다 싶은데 이걸 근데 누구랑 부르지
―「몽유세한도」 부분
잘 알려진 것처럼 시인 성기완은 록 밴드 3호선버터플라이의 리더였으며 SSAP 프로젝트로 활동하며 뮤지션이자 라디오 DJ, 문화평론가로도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특히 올해는 그가 뮤지션으로 활동한 지 30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이를 기념해 ‘쿰바와 영실들’이란 이름으로 싱글 앨범 『네오 소울 곡집 vol. 1』이 시집 출간과 때를 같이해 발표된다. 이 앨범에 수록된 「몽유세한도」는 이번 시집에 실린 동명의 작품을 낭송해 청각적으로 재해석한 것이며, 타이틀곡인 「Fever Song」은 시집 수록작 「빛—49재」에 등장하는 故 방준석 음악 감독을 추억한 곡이다. 시와 음악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시각적 텍스트를 완독한 후의 여운을 청각을 통해 이어갈 수 있으니 시집을 읽고 그의 음악을 듣는다면 더욱 특별한 독서가 될 것이다.
해설을 쓴 황유원 시인이 “이름을 실컷 부른 김에 노래도 한번 불러보자. 아니, 노래를 부르듯 이름을 불러보자”고 한 것처럼 “기타에 피가”(「영원—웅천석재에서」) 튀도록 노래하던 그는 이제 “기타가 된 나무가” 된다. 넘치는 에너지와 끝없는 실험 정신으로 사랑을 노래하던 소년은 다시 “마음의 마당이 부풀어 올라/무한한 들판이”(「게으른 기타리스트의 발라드—Où sont les neiges d’antan?」) 된다. 남은 슬픔이 닳아 없어질 때까지 더 곧고 넓은 사랑을 “노래하고 또 노래”한다(「소희 찬가」).
■ 책 속으로
사랑해요
이 말을 못 한 것은
그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도 그렇기에
이 말을 하는 순간
당연함 속에 잠자던 그 맘을
부러 흔들어 깨워
고연히 곱씹는 의혹의 눈동자가 불을 켜
자꾸 그 불을 끄기 위해 혀를 놀려
내뱉었다가 자칫
쓸데없이 지껄이는 말이 되어 끝내
사랑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려
―「놓고 가신 님」 부분
점점 더 만남이 안타까운 것은
이것이 마지막일 수도 있다는
어쩌면 확실한 예감의 재촉에
그토록 들뜨신 거였겠죠
그래서 그렇게 반가워하셨나요
―「마중」 부분
그 수많은 하얀 절정이
시간의 배를 장엄하게 호위합니다
이 작은 초록 물결에도
당신이 계십니다
딱히 이승의 언어로는
없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있는 것도 아닌 상태라고만
말해두지요 빤히 보이진 않아도
깃들어 계신 당신
―「물결—오스틴 텍사스 사우스 바이 사우스웨스트 리버 보트 셔플」 부분
이젠 모자를 벗는 작별의 시간
당신 가슴에 얼굴을 묻고
함께 바다에 빠져버릴 테야
비명을 지르며 당신과 사라질래
―「지중해」 부분
우리에게는
밤도 있고 낮도 있고
미러볼은 돌고
음악은 흐른다
다시 말해 시간이[……]
good good good better better bitter best best beast
솔라솔솔시솔 빛의 꺼짐 더듬거리며 순서를 놓치는
서른여섯의 순살치킨 손익 붐붐붐
―「단분산 콜로이드 입자를 함유한 이름의 브라운운동에 관하여―무지개 산란과 틴들운동 즉흥곡」 부분
우리 성기완 선수 홈스트레치 돌아 있는 힘을 다해 머리를 앞세워 멋진 헤드 퍼스트 슬라이딩을 합니다 천이 바닥에 깔려 있어서 폭신하겠지 예상하며 안심하고 몸을 내던집니다 아 과연 그렇네요 골을 넣고 잔디에서 슬라이딩 세레모니를 하는 축구 선수처럼 한참을 미끄러져 드디어 도착입니다 이 큰 천을 반으로 접는 데 성공합니다 다시 공간 전체에 대한 시야가 부감으로 확보될 때쯤 흰 천의 바깥으로 푸우 하고 나오네요 여긴 어딘가요 다들 어디 계신가요
―「죽음은 흰 천을 반으로 접는 일입니다―순간의 현상학」 부분
■ 시인의 말
여는 시
공용 세탁소에서
무릎을 말아 쥔 채
기다리네
빨래가 다 되기를
입을 벌리고 하얀 크림빵을 먹는
어둠을
시를
2023년 가을
성기완
■ 차례
시인의 말
1.
눈—20130226화 아버지 돌아가시던 날 오후
놓고 가신 님
마중
영원—웅천석재에서
헛기침—할머니의 절대적 모럴을 기리는 향가
물결—오스틴 텍사스 사우스 바이 사우스웨스트 리버 보트 셔플
다시 가보니 흔적도 없네—응암동 오 남매 왈츠
블랙에서의 변주
담배 또는 펜이 손에 들려 있었고—입관식 예지몽
몽유세한도
2.
곶감 그믐 그 밤
모퉁이 카페 소네트
돌고래 두 마리
마음 06:53 AM
낯선 도시에서 시를 썼다 1—나주별곡
지는 꽃을 하염없이 보던 너는
지지난 꿈에 나왔던 지난 꿈의 사람
소나기
심심하게 자란 아이
untied 물이 나가네—파도의 록 스테디
3.
봄
날개
우리집고양이녹색눈다이아몬드—떠나간 나비의 모듈러 신시사이저
소희 찬가
외계인—3호선버터플라이 블루스
몸 산책
아뉴스 데이—화장터에서
여행
이 자리
그맘때
4.
모시적삼을 입은 분—양자얽힘 랩소디
마이크로증폭우주밤산책—슈와 가을이에게
저쪽 세 폭 병풍
해—성산대교 북단 타령
지중해
붐붐 중력장
단분산 콜로이드 입자를 함유한 이름의 브라운운동에 관하여—무지개 산란과 틴들운동 즉흥곡
내재성의 평면과 거울 우주
엄마 우주
브로콜리 우주
5.
음악—어디에도 없는 세계로부터
게으른 기타리스트의 발라드—Où sont les neiges d’antan?
청둥오리와 농부—대부도 멤피스 스웜프 블루스
틱 159 —이태원 레퀴엠
낯선 도시에서 시를 썼다 2—톨게이트 콘크리트 뮤직
복숭아 소네트—슈 환상곡
죽음은 흰 천을 반으로 접는 일입니다—순간의 현상학
겨울비—잔골 아리랑
빛—49재
넘는 시
해설
빛의 만가挽歌・황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