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그리고 사랑만이 기적이다”
소리 없이 남기고 간 뜨거운 눈물
아롱진 자국을 어루만지는 시인의 손길
특유의 예민함과 애정 어린 시선으로 시대의 풍경을 그려내는 시인 곽효환의 다섯번째 시집 『소리 없이 울다 간 사람』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4부로 나뉘어 총 68편의 시로 구성된 이번 시집은 전작 『너는』 이후 5년 만에 펴내는 것으로, 시련과 상처를 견디며 눈물짓는 이들을 너른 품으로 끌어안아 보듬는다.
시대의 곡절과 흐름을 이야기할 때 흔히 역사적 사건과 인물을 주로 나열하곤 하지만, 사실 우리의 터전을 이루어온 대다수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이들은 주어진 삶과 사랑하는 타인을 지키기 위해 고통의 순간순간을 소리 없는 눈물로 버텨낸다. 이때 소리 내지 않음은 자칫 힘없고 유약한 수용처럼 보이지만, 역경의 무게와 어둠을 기꺼이 감내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차라리 단단하고 뜨겁다. 이 무명의 눈물들이야말로 진정 우리 사회를 추동해온 동력이며, 『소리 없이 울다 간 사람』은 근현대사의 뒤꼍에 남아 있는 눈물 자국을 가만히 쓸어보고 기억하고 되짚어보려는 문학적 시도다.
‘소리 없이 울다 간’ 존재들을 조명하는 시인에게 “차단된 삶의 여로이고, 단절된 역사의 현장이며, 잊혀가는 오래된 정감의 고향이자, 채울 수 없는 결핍과 그리움의 진원지”(『슬픔의 뼈대』 해설)인 북방은 특히나 유의미한 공간이다. 이에 『지도에 없는 집』(2010)에서부터 꾸준하게 이어져온, 시원과 궁극을 찾으려는 그의 북방 여정은 이번 시집에서도 계속된다. 연해주, 북만 등을 폭넓게 아우르는 곽효환의 시편들은 거대한 북방의 원형을 차근히 완성해나가며, 그동안 시인이 계획하고 꾸려온 “고되고 길었던 여정”의 끝 또한 “마침내 저 너머에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묵묵한 울음과 식지 않는 슬픔이 존재하는 한 그는 “오래지 않아 주섬주섬/다시 여장을 꾸릴 것”(‘시인의 말’)이다. 사람과 사랑만이 몸을 기댈 수 있는 기적이기에.
멀리는 만주와 시베리아를 넘는 북방 공간이나 베트남 등 남방 공간까지, 가까이는 그의 오랜 근무처 인근이었던 광화문이나 청계천까지 오감을 열어놓은 시인의 발걸음은 넓고 깊게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걷다가 때때로 ‘시대의 정거장’이나 ‘시대의 강가’에 머물며 서성거리고 귀 기울인다. 그렇게 귀 기울이다 보면 그 찻길과 물길의 내력에 관련되었던 사람들의 안부가 궁금해지는 것은 차라리 자연스럽다. 그래서 시인은 안부를 물어야겠다고 말한다. 소극적 수용 단계를 넘어서 적극적 회통과 그것을 위한 다가서기의 의지적 발화다. 그러다 보면 사연 많은 말들을 채록하게 되고 이런저런 소문들을 접하게 되는데, 그것들을 가로지르면 사람살이의 다채로운 풍경첩을 마련하게 된다. 그렇게 마련한 ‘사람-풍경’을 독자에게 전해주어야겠다는 것, 이것이 바로 시인 곽효환의 시적 의지이고, 그 결실이 바로 이 시집이다.
―우찬제, 해설 「사람-풍경의 고현학」에서
북방의 시공간을 가로지르며
또렷하게 불러보는 이름들
그 어느 길목에 지친 다리를 부리고 숨 고르다
금강산 기슭에서 발원하여
휴전선 품은 화천 어디에서 마침내
북한강이 된다는 금강천 줄기 찾아
두고 온 그의 옛사람들 안부 물어야겠다
무청 도려낸 무들 촘촘히 박혀 있는 겨울 들판과
시래기 주렁주렁 매단 지붕 낮은 집 처마 밑으로
무수히 들고 난 바람이 실어 온 말들과
들풀처럼 무성한 소문 또한 전해주어야겠다
수많은 내와 천과 강의 지류들
흐르고 합수하고 다시 흘러
마침내 큰 강이 되는 물머리에서
실어 온 이야기들에 귀 기울여야겠다
―「양구에서」 부분
시의 언어로 북녘을 횡단하는 곽효환의 여로는 ‘북방의 시인’이라는 그의 별칭을 환기한다. 시인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꼬리를 물고 있”(「시베리아 횡단열차 4」)는 열차에 올라 북방의 산과 들과 강에 깃든 이야기들을 떠올리고, 백석, 윤동주, 이용악 등 북방 지역에 고향을 둔 시인들, 연해주 포시예트 구역에 지신허 마을을 개척한 최운보(「지신허地新墟 마을에서 최운보崔運寶를 만나다」), 1910년대 원동 시베리아에서 활동했던 여성 혁명가 김 알렉산드라 페트로브나(「김알렉산드라 소전小傳」), 19세기 말 한국과 중국을 여행했던 이사벨라 버드 비숍(「장강에서 버드 비숍을 만나다」) 등을 비롯한 여러 인물을 불러낸다.
나아가 시인은 북방의 시공간을 채우고 있는 “그리운 무명의 사람들”(「만선열차」)의 이름을 하나씩 호명한다. 이주를 강요당해 라즈돌노예역에서 열차를 타야 했던 고려인들, 강 위에서 평생을 꾸렸던 뱃사람들, 땅을 일구고 다리를 지으며 성실하게 일했던 필부필부…… 막연하게만 느껴지던 북방의 과거는 어느새 생동하는 현실로, 어른어른하게만 나타나던 인상들은 또렷하고 구체적인 얼굴들로 다가온다.
슬픔으로 구멍 난 시대의 자리
함께 울며 메우는 우리의 공백
시절과 장소를 막론하고 눈물은 어디에나 고여 있으므로, ‘소리 없이 울다 간 사람’의 외연은 근대의 북방을 넘어 지금 여기로도 확장된다. 시인은 동시대의 길을 찬찬히 걸어나가며 그 위에 선 사람들과 눈을 맞추고 곳곳의 공백을 살핀다. 조용히 눈물을 훔치던 사람들의 자리였을 “끝없이 이어지는 구멍/점점 늘어나는 구멍/점점 더 커지는 구멍”(「위로할 수 없는 슬픔」) 앞에서 시인은 그들의 슬픔이 얼마나 커다랗고 깊었을지에 대해 말하는 대신 함께 울음을 터뜨린다. 눈물이 타고 흘렀을 그들 얼굴의 굴곡, 붉어졌을 눈가, 다물린 채 떨렸을 입술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렇게 복원된 슬픔을 마주하며 “지쳐 쓰러져 흙더미에 파묻힌 당신과 나를/다시 일으켜 세울”(「입석立石」) 희망과 사랑을 기약도 없이 기다린다. 애써 숨죽여 울다가 떠나간 모두는 결국 손을 내밀어 등을 도닥여주어야 할 또 다른 우리다.
한없이 흐르는 슬픔, 나는 그 깊이와 끝을 가늠할 수 없다 다가가 어떻게 손을 내밀어야 할지도 모른다 그냥 곁에 앉아 그와 함께 울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끝없이 흐르는 혹은 위로할 수 없는 슬픔의 등을 쓸어주며 작은 온기를 흘려보내고 두 팔을 벌려 너덜너덜해졌을 그의 마음을 보듬어주어야 할 것 같다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부분
■ 시집 속으로
기구한 삶을 이어나가기 위해
가족을 위해 더러는
독립과 민족과 자유를 위해
강을 건너고 산을 넘어
다시 더 멀고 더 깊은 대륙 저편으로
갔다가 돌아온 혹은 끝내 돌아오지 못한
그을린 붉은 얼굴들
나는 저 너머의 시간을 건너
오늘밤 섬섬히 빛나고 또 스러지는
몇천, 몇만 혹은 몇십만 년 전 떠났을
별들을 헤아린다 그리고
모든 것을 꽁꽁 얼려놓는 혹한과
질척질척한 혹서만이 한 몸처럼 존재하는
이 드넓은 붉은 벌판을
천형처럼 건너갔던 검은 그림자들이
어느 먼 시간을 건너
하나둘 별이 되어 돌아오는 검붉은 파노라마를 본다
차창을 사이에 두고 나도 그들도
하고 싶은 말도 묻고 싶은 말도
먹먹한 슬픔과 울음으로 삼키는 잠들지 못하는 밤
열차는 먼 곳으로 끝없이 흘러가고
광막한 시베리아 벌판에 붉은빛이 든다
긴긴밤을 지나
멀리서부터 아침이 온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3」 부분
시월이면 함박눈 펑펑 쏟아져 쌓이고
혹한의 밤 깊으면
번뜩이는 이쪽과 저쪽 총구 아래
또렷이 물 흐르는 소리만 들리는
폭탄을 품은 젊은 사상이 유령처럼 나타날 것 같은
국경의 강안에서 나는
차마 눈감지 못하는 사내를 본다
목숨을 건 삶들이 건너가고 건너왔을
지금도 계속되는 시름 많은 시대의 강가에서
터지는 울음을 애써 삼키는 북관의 사내를 보며
나도 운다
―「국경에서 용악을 만나다」 부분
타박타박 지친 걸음으로
미륵전에 들었다
언젠가는 올 것이나 당대에는 결코 오지 않을
미륵을 기다리고 기다리며
한 시대를 건너고 한 생을 건넜을
뭇사람들의 그림자
키 큰 미륵불을 모신 삼층 법당에 어른거린다
그 검은 그림자들 사이에서
오기로 했고 올 것이고 오고야 말
그러나 아직 오지 않은
어쩌면 끝내 오지 않을
너를 기다리는
산사에 봄눈 분분히 흩날린다
기다린다는 것은 비워두는 것이고
비워둔다는 것은 기다린다는 것일진대
담박하게 너른 마당을 홀로 지켜온
늙은 산사나무가 기다리는 이는 누구일까
눈 수북이 쌓인 가지마다
맑은 눈물 똑똑 흘리면서
―「미륵을 기다리며」 전문
세상이 멈춘 듯 우두커니 서 있는
왜가리 한 마리 앞에 서서
당신과 함께 걷던 날들을 생각합니다흐르는 것들은 모두 아무 일 없다는 듯이
가슴 속 깊이 고인 슬픔의 물꼬를 열어
조금씩 떠나보내는 실개천 같은 것인가 봅니다올해 가을은 일찍 왔고 늦게까지 머물다 갔습니다
―「청계천」 부분
수백 년을 살아온 나무는
제 몸의 가지가 어디로 뻗을지 알지 못한다
수천 년을 흐르는 강 또한
물길이 어디로 나고 어디로 흘러갈지 모른다
가지가 어디로 뻗든
물길이 어디로 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가지마다 초록이 오르고 꽃이 만개하고
물길 닿는 곳마다 생명이 움트는
나무와 강이 품고 빚어내는
먼 풍경이 아름다운 것이다나도 내가 어떻게 뻗어 어디로 가게 될지 모른다
하여 그것들이 빚어낼 훗날의 풍경 또한
서둘러 예단하지 않으련다
―「먼 풍경」 전문
■ 작가의 말
고되고 길었던 여정의 끝이
마침내 저 너머에 보이는 듯하다.
그러나 나는 안다.
이 여정의 끝에
새로운 시작이 기다리고 있음을.
아마도 역려에 들어
잠시 몸을 누이겠지만
오래지 않아 주섬주섬
다시 여장을 꾸릴 것임을.
그래왔듯이 그 길에서도 나는
계속해서 묻고 사유하고 걸을 것이다.
2023년 가을 삼성동에서
곽효환
■ 차례
시인의 말
1부 숲의 나무들이, 그 정령들이 흘러간다
시베리아 횡단열차 3
지신허地新墟 마을에서 최운보崔運寶를 만나다
라즈돌노예역에서
아무르강의 붉은 꽃
김알렉산드라 소전小傳
시베리아 횡단열차 4
불편한 진실
만선 열차
붉은 그림자
장춘에서 백석을 찾다
해란강은 알 것이다
중국조선족애국시인 윤동주
여기서부터 만주다
국경에서 용악을 만나다
2부 그날 그 시간 그곳엔 나와 신만이 있었어요
장강에서 버드 비숍을 만나다
잔교棧橋
작은 배에서 사는 사람들
강의 견부들 1
강의 견부들 2
호아虎牙 협곡
밧줄 다리
장강 너머
사람들 사이를 흐르는 강
시의 도시
넘버 스리
그라시아스 페페
8분 46초
정글 마을에 핀 꽃
아무것도 갖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을 얻은 사람
영원한 심장
호흡뿌리
우체국과 성당
3부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미륵을 기다리며
노둔한 사람들
바람을 견디는 힘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
제주 동백
소리 없이 울다 간 사람
늦은 졸업식
날마다 사람이 죽는다
아무도 쓰지 않은 부고
위로할 수 없는 슬픔
죽음을 건너 죽음으로
그해 가을, 달 없는 며칠 동안
트로이카
기쁘다 구주 오셨네
나무가 죽어간다
다시 흐르는 강
안택고사安宅告祀
4부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울 이는 어디에 계신가요
입석立石
돌탑을 걷는 산새
눈사람
청계천
마음의 궁기
시들지 않는 꽃
호랑가시나무숲에 대한 소고
나는 서툴다
보고 싶은 사람
달을 낳다
나비의 왈츠
수묵담채水墨淡彩
정미소처럼 늙다
옛 우체국 앞 자전거
내 마음의 오지
양구에서
시간의 사막을 건너는 사람, 윤후명
행과 불행
먼 풍경
해설
사람–풍경의 고현학・우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