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이야말로 문학이 허용하는 유일한 해학이다”
한국문학 연구자 장클로드 드크레센조를 따라 걷는 한국 소설의 숲
내가 프로방스 숲속을 걷는 동안 동행하던 책들이 떠올랐다. 이 팬데믹을 견디고 한정할, 적을 만들기도 무력화시키기도 하는 방법은 한국문학 속에서 오웰George Orwell과 궤를 달리하는 디스토피아의 징조를 끌어내는 것이다. 내 발걸음이 이끄는 대로 글들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고 신체 활동이 두뇌 활동으로 변모하며 내가 하고 있는 육체적 산책이 한국문학 속 산책으로 이어졌다.
―「책머리에」에서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태어난 한국문학 연구자 장클로드 드크레센조의 새 연구서 『프로방스 숲에서 만난 한국문학』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프랑스 엑스마르세유 대학교에서 한국학과를 창설하고 주임교수를 역임한 그는 아시아학연구소IRASIA의 일원이자 한국문학 공동번역가로도 활동 중이다. 또한 한국문학 전문 웹진 <글마당>을 운영하며 프랑스에 드크레센조 출판사를 설립해 한국 현대 작품을 프랑스에 널리 알리고 있다.
전작 『다나이데스의 물통―이승우의 작품 세계』에서 한 작가의 장편소설 6권을 유럽 문학·철학과 연결 지으며 분석했다면 이번 신작은 끊임없이 형태를 변형해 세계인의 목숨을 위협하는 바이러스처럼 한국 소설에서 무수히 등장하는 적(敵)의 형상을 다양한 형태로 표현한 아홉 명의 작가(김애란, 박민규, 편혜영, 장강명, 이승우, 은희경, 한유주, 이인성, 황석영)의 작품들을 들여다본다.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인류의 적에서 출발해 한국 소설에서 나타난 적으로 확장되는 장클로드 드크레센조의 분석은 현 시국을 은유적으로 내포하고 있는 작품들의 ‘예견적인 시각’을 통해 우리의 현재를 짚어보고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모색하게 한다. 한국 작가들과의 특별한 추억이 담긴 저자의 에피소드들에서는 한국 작품에 대한 그의 무한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 서양 철학을 접목해 한국 소설을 분석한 이 연구서는 우리 문학의 현재를 가늠케 하고 작품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할 것이다.
한국문학 속 적의 형상과 팬데믹 이후의 세상
한국문학은 적과 함께 살거나, 적을 바라보거나 무시하거나, 적에 저항하거나 도전하거나, 적을 몰아내거나, 적에 협력하는 데 익숙해졌다. 거의 90년간 지속적인 적의 존재로 인해 한국에서의 적은 개인적, 집단적, 더 나아가 국민 정체성의 일부를 구성했다. 이 적은 반대 세력들(그리고 타협 세력들)을 결속시키면서 보전하려는 힘을 동원했다. 이는 사람들이 (대체로) 어제의 적에게 반항하고 어제의 적을 제거하려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적을 무효화하는 것은 반대 세력의 의지를 객관화하는 것이다.
―「한국문학 속 적의 형상」
『프로방스 숲에서 만난 한국문학』이라는 제목이 암시하듯 코로나19로 봉쇄령이 내려진 프랑스에서 저자가 매일같이 숲을 산책하며 떠올렸던 작품들이 이 책의 근간이다. <1부 나와 나의 적>에서는 한국의 1970∼1980년대 출생 작가들이 경험한 민주주의운동과 그들의 작품에 나타난 적의 형상을 탐구한다. 파란만장한 역사의 흐름 속에 생겨난 적이 “고독, 기술 중독, 소통의 어려움, 시민 정신의 결여, 의존성, 가상 세계, 의식과 정체성의 위기와 같은 익숙한 형태의 적들”로 변화했음을 김애란의 「나는 편의점에 간다」(『달려라, 아비』, 창비, 2005),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예담, 2009), 편혜영의 『재와 빨강』(창비, 2010)을 통해 확인하고, 한국 청춘의 키워드이자 강화된 적이라 할 수 있는 욕망과 절망 그리고 자살을 그린 장강명의 『표백』(한겨레출판, 2011)의 탄생 배경을 분석한다. 코로나 시대에 마스크가 일반화되면서 얼굴은 감추고 ‘시선’만 주고받는 현실에 대한 은유인 듯, 타인의 시선과 그 사이의 균열에서 적을 찾는 한유주의 「막」(『얼음의 책』, 문학과지성사, 2009)에서는 오늘날의 초상을 발견하기도 한다.
<2부 막간극>에는 한국 소설가들과의 만남과 한국 작품에 얽힌 저자의 짤막한 에피소드들을 담았다. 이인성 작가와 식사를 하며 그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점집을 현실과 헷갈린 일, 한국에 오면 꼭 들르는 인사동의 한 포장마차에서 옆 테이블의 재미난 이야기를 엿들은 일, 이승우 작가와 조에 부스케의 집에 함께 방문한 일 등은 마치 프로방스 숲에서 저자와 함께 산보하며 이야기 나누는 듯한 느낌을 선사한다.
<3부 이후의 세상>에서는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해온 적이라는 형태에 맞서기 위해 앞으로 취해야 할 자세를 이승우, 황석영의 작품들을 통해 제언한다. 「향수(鄕愁)를 읽다—이승우의 장편소설에 대하여」는 저자가 프랑스어로 공동 번역해 출간한 이승우의 장편소설 『캉탕』(현대문학, 2019)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과 면밀한 분석을 담고 있으며, 과거(또는 적)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재탄생’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한국의 느린 도시들」에서는 작품 속 적과 현실 속 코로나 바이러스를 피하는 방법으로 ‘느림’을 꼽는다. “‘더 높이, 더 빨리, 더 풍요롭게’라고 포효”하는 현 세태가 오히려 부정적인 ‘적’을 만드는 데 영향을 주기 때문에 문명에 가속화에 저항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다를 마주하고 바위 위에 앉아 밀려오는 잔물결에 발을 담그고 두 손에는” 쥐는 일이 어쩌면 그 실천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프로방스 숲에서 만난 한국문학』은 프랑스인의 시선으로 한국 작품들을 꼼꼼하게 읽어나간 연구서이다. 한국 문학 읽기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것뿐만 아니라 오늘날 무수히 많은 적과 싸우며 살아가는 모두에게 더 나은 내일로 나아가는 새로운 길의 좌표를 건넬 것이다.
■ 책 속으로
적은 우리의 경각심을 유지하게 한다. 적은 끊임없이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불확실성 때문에 상상할 수 없는 존재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 말하자면 적은 한 민족의 면역 체계를 강화하고 그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도움이 되므로 사회에 필요한 존재인 것이다. 적이 개인을 은신처로 생각한다면 더욱더 그렇다. 적은 내부의 적, 자기 자신의 또 다른 면이 되어 흔히 눈에 보이지 않고, 힘을 모으는데 유용하고, 뇌리에 떠나지 않을 정도로 매혹적이어서 들리면 거슬리지만 사라지면 더더욱 짜증 나는 소음 같다.
―「한국문학 속 적의 형상」
하루 일과를 마치고 밤이 되었을 때, 책과 빼곡히 기록한 수첩을 보고 있으면, 내일은 아무런 근심이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원래 우리가 두었던 상태 그대로의 작품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은 늘 같은 장소에 있는 집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만큼이나 강하다. 긴 여행에서 돌아온 오디세우스처럼, 우리는 집에 머무르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고작 하루만에 집을 떠나게 될 것이다. 되찾은 책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책이 아니고, 어쩌면 책에 실리지 않은 그다음 이야기를 들려줄지도 모른다.
―「나는 작품 속에 산다」
우리는 종종 세상의 동요로부터 벗어나 방 안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책과 수첩, 틀어박혀 있기에 충분한 양의 잉크에 둘러싸여 지내기를 꿈꾼다. 삶을 방 하나 크기로 축소시키면 포근한 세상이 돌연 생겨나고, 세상에 대한 야만적인 투쟁도 내쳐진다. 그렇게 평화로워진 사회적 관계는 침묵을 받아들이고, 어두운 방에서 우리는 평화를 꿈꾼다.
―「조에 부스케의 방」
향수는 장소가 아닌 시간상의 회귀 욕망을 토대로 형성된다. 오디세우스는 칼립소가 제공한 영원성 덕분에 이타카섬에 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회귀라는 인간의 시간—과거의 시간, 나이가 없는 시간, 본래의 순수 상태의 시간—을 선택했다. 향수는 어린 시절을 보낸 장소로의 회귀를 통하여 경험되지 않는다. 우리는 그 장소가 더 이상 과거에 살았던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안다. 향수는 이전의 한 세계에 연결된 유년기 시절로의 회귀이다.
―「향수(鄕愁)를 읽다―이승우의 장편소설에 대하여」
우리는 남쪽에서 바다를 마주하고 바위 위에 앉아 밀려오는 잔물결에 발을 담그고 두 손에는 책을 쥐고서 속도를 자아의 망각으로 만든 것들이 설계한 시간의 가속화에 저항하려 한다. 소설은 느림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단 한 줄 문장만으로 20년 더 나이든 얼굴이 등장하도록 단숨에 시간을 생략해버리기도 한다. 만약 지금 이 순간의 파란곡절을 다음 세기로 미뤄버릴 수도 있다면, 바로 이것이야말로 문학이 허용하는 유일한 해학이다.
―「한국의 느린 도시들」
■ 차례
책머리에 7
1부 나와 나의 적
한국문학 속 적의 형상
예견적 시각—김애란, 박민규, 편혜영의 소설에 대하여
『표백』, 절망의 잔재—장강명의 장편소설에 대하여
외부의 윤리—이승우의 단편소설에 대하여
전복되는 관계, 「아내의 상자」—은희경의 단편소설에 대하여
시선 그리고 「막」—한유주의 단편소설에 대하여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에 맞서다—이인성의 장편소설에 대하여
2부 막간극
나는 작품 속에 산다
새벽 세 시 포장마차에서
조에 부스케의 방
나의 우아한 시체
마주 잡은 손
3부 이후의 세상
향수(鄕愁)를 읽다—이승우의 장편소설에 대하여
작품 속 관대함—황석영의 소설에 대하여
한국의 느린 도시들
옮긴이의 말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