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천사
“크레리는 우리의 스펙터클한 삶에 관한 역사가-철학자이다. _『아트포럼』
“부단히 매혹적이다… 이 책의 함의는 매우 광범위하고 독서의 즐거움이 너무도 크기에, 덧붙일 조언이라고는 가능한 모든 사람이 최대한 주의를 기울여 이 책을 읽으라는 것뿐이다.” _에두아르도 프라도 코엘료(문화비평가)
마네, 쇠라, 세잔의 작품에 형상화된 시각성의 문제를 경유해
근대의 문턱에서 이뤄진 지각 방식의 중대한 변화를 포착하고
스펙터클과 주의 관리 기술이 중첩된 현시대까지 아우르는 학술적 모험
예술비평가이자 인문학자로서 19세기 근대성과 시각의 문제를 탐구하는 일련의 연구서로 학문적 명성을 얻은 조너선 크레리의 대표작 『지각의 정지: 주의․스펙터클․근대문화』가 번역, 출간되었다. 이 책에서 크레리는 19세기 후반의 사회적․철학적․과학적 담론들과 당대의 시청각적 기술들, 그리고 예술적․문화적 실천들이 뒤얽히는 가운데, 주의라는 논쟁적 개념이 어떻게 부상하고 변형되고 재구성되었는지를 추적해나간다. 19세기 말에 주의의 문제는 생산적이고 관리 가능한 주체성을 제도적으로 새롭게 구성하는 데 있어 핵심적 사안이 되었다. 이 책에서는 세심하고 고정적인 고전적 관찰자가 점차 주의력이 불안정한 주체로 대체되는 과정과 주의력에 초래된 위기를 고찰하고, 변화하는 자본주의적 편성들이 주의집중과 주의분산을 새로운 한계와 문턱으로 밀어 넣으면서, 어떻게 지각을 관리하고 규제하고자 했는지 살펴본다. 특히 이 책은 1879년부터 1900년까지 대략 10년 간격으로 발표된 마네, 쇠라, 세잔의 작품을 중심으로 서술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구속에서 풀려난 시각, 근대적 각성의 경험, 그리고 지각의 종합으로 요약되는 주의의 계보학을 치밀하게 그려 보인다. 이 책은 2001년 라이어널 트릴링 북어워드를 수상하기도 했다.
■ 19세기, 산업자본주의와 기술적 진보, 그리고 ‘보는 방식’의 전면적 개조
이 책에서 전면적인 논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19세기는 ‘시각’이 기존의 고전적 질서에서 벗어났으나, 아직 20세기에 부상한 기계적 시각 체제 속에 완전히 자리 잡기 전인 과도기이자 가능성으로 넘쳐나는 시간대였다. 저자는 전작인 『관찰자의 기술』에서 19세기 초반에 생리학적 광학이 등장함으로써 시각 모델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고찰한 바 있는데, 후속작인 이 책에서는 그로 인한 귀결들을 본격적으로 검토한다. 전작과 다른 점은 시각 대신 ‘지각’이라는 확장된 개념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주체에 대해 설명하는 일은 시각이라는 단일한 감각뿐 아니라 청각과 촉각, 그리고 여러 감각이 혼합된 양상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우선 제1장에서는 19세기 들어 주의력이 어떻게 새로운 종류의 문제가 되었는지, 왜 주의의 문제가 지각에 대한 철학적, 심리학적, 미학적 연구와 불가분의 관계가 되었는지와 같은 쟁점들을 규명한다. 1870년대에 ‘주관적 시각’ 모델(즉 외부 자극이 아닌 개인의 감각에 기반한 지각 경험)이 등장하면서 시각의 불확실성과 한계를 포착하려는 이론적 시도가 급격히 증가했는데, 저자는 이러한 다양한 입장들을 다음의 세 가지 범주로 나누어 살펴본다. 주의를 의식적인 의지의 표현으로 여기는 입장, 프로이트처럼 생물학적 본능들과 무의식적 욕동들의 기능으로 보는 입장, 그리고 다양한 유인의 기술을 비롯해 지식과 통제를 통해 생산되고 관리 가능하다고 믿는 입장이 그것이다.
자본주의의 문화적 논리는 주체가 다양한 자극에 대응하여 끊임없이 주의의 초점을 전환할 수 있는 능력을 요구했다. 이는 크레리가 일찍이 텔레비전을 통해 감지했던 감시와 스펙터클의 중첩 모델로 연결된다. “감시와 스펙터클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이러한 중첩의 양상들을 새로 고안해내고 퍼뜨리고 확장하는 과정과 단단히 맞물려 있는 것은 바로 자본주의다.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에게 내면화된 스펙터클적 감시의 형식이 바로 집중과 분산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하는 주의(력)의 관리”(p. 617)라는 것이다. 역자에 따르면, 오늘날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해 ‘줌’ ‘구글미트’ 같은 온라인 화상회의가 보편화된 현상은 크레리가 말한 스펙터클적 감시의 기술이 ‘사용자 친화적’으로 탈바꿈된 사례이며, 그 사용자들은 감시의 주체이자 스스로의 얼굴을 다수에게 내보이는 스펙터클적 대상이 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종종 의식의 분열이라 지칭되곤 했던 종합 능력의 실패나 오작동은 19세기 말에는 정신병 및 다른 정신병리학과 결부되어 다루어졌다. 이는 사실상 주체가 시각장과 맺는 관계가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음을 나 타내는 증거였다. 저자는 최면술과 정신분열, 몽상 등을 통해 주의의 근본적 양가성을 보여주기도 하고, 카메라 옵스쿠라와 입체경, 파노라마 같은 각종 스펙터클적 장치들과 재현 모델이 담당한 역할을 조명하는 등 심도 있게 자신의 지적 성찰을 펼쳐나간다. 그 밖에도 리하르트 바그너, 윌리엄 제임스, 뒤르켐, 후설, 아도르노, 베르그송 등 수많은 이론들을 호명하고 있으며, 광범위한 대상들과 주제들을 오가며 600여 쪽에 걸쳐 상세한 논의를 수행한다.
■ 마네, 쇠라, 세잔의 그림이 알려주는 것들,
지각의 역사적 출현을 위한 조건들의 고고학적 탐사
이어지는 세 개의 장에서는 마네의 <온실에서>(1879), 쇠라의 <서커스 선전 공연>(1887~88), 세잔의 <소나무와 바위>(1900)를 주축으로 삼아, 주관적․생리학적 시각 모델이 낳은 귀결과 반향을 조사하는 한편, 그 과정에서 펼쳐진 창조적 지평을 고려하고자 한다. 저자는 이 회화 작품들을 몇몇 익숙한 예술사적 해석틀로부터 분리해내고자 했으며, 그에 따라 우리는 ‘순수 시각’을 강조하는 전통적 해석에서 벗어나 분산적 힘과 집중적 힘이 교차하는 역동적인 주의의 장으로서 회화적 표면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벤야민은 “근대성이란 역사상 처음으로 개인들이 공적 영역에서 다른 이의 시선에 응대하지 않는 법을 체계적으로 습관화”하게 된 것이라고 언명한 바 있는데, 저자에 따르면 이를 가장 잘 증언해주는 것이 마네의 그림이다. <온실에서>에서 자신을 내보이는 중이면서 무심하게 자신을 통제하는 여자의 얼굴은 규범적 지각이 유예된 상태를 암시한다. 또한 같은 그림 속 남자의 두 눈은 비대칭적이고 분열적인 관계에 놓여 있는데, 오른쪽 눈은 대각선 아래에 위치한 여자의 얼굴 쪽을 보는 듯하고 왼쪽 눈은 여자의 우산 또는 손을 응시하는 것으로 보인다. 시선의 방향만이 아니라 그 효력마저 혼란스럽고 모호하게 처리되어 있다. 이는 이 그림이 두 개의 이질적인 시지각적 축이 있는, 통일성이 깨진 시각장 내에 있음을 시사하며, 총체적으로 지각되는 응집력 있는 세계가 사라져버렸음을 극적으로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
시각의 카메라 옵스쿠라 모델이 무너지고 생리학적 광학이 부상하면서, 지각은 외부 이미지를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일이 아니며 관찰자의 기질과 능력이 지각의 구성에 관여한다는 점이 점차 분명해졌다. 1880년대 후반 쇠라의 작업은 그러한 인식론적 위기가 낳은 중요한 문화적 산물 가운데 하나다. 쇠라의 <서커스 선전 공연>은 멀리서 보면 칙칙하고 흐릿한 무채색으로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보면 분홍색, 청색, 주홍색 등 다양한 색채의 점들이 어우러져 다른 느낌을 준다. 이처럼 관람자의 신체적 움직임을 통해 그림을 다른 방식으로 경험할 수 있는데 쇠라는 이와 같은 작업을 통해 감각 데이터의 불균질성 및 동시성에 주의를 기울이는 관찰자의 한계와 가능성을 검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저자는 내시 현상에 대한 헬름홀츠의 광학적 연구나 에른스트 마흐의 감각 개념 등을 끌어들여 쇠라의 작품을 독해해나간다. 쇠라의 후기 작업들은 개개의 관찰자들이 각자의 고립 상태는 유지한 채로 군중 혹은 관객이라는 유사 연대로 모일 가능성을 드러낸다. 그 밖에도 무대적 공간의 붕괴가 경제적 교환의 새로운 조직화와 원초적 무매개성이라는 퇴행적 환상 모두와 어떻게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지를 밝히고자 한다.
1900년경부터 세잔의 작업에서는 종합의 재발명이 시도되었는데, 이를 통해 어떠한 문제들이 제기됐는지 검토해본다. 마네와 쇠라가 부분적으로 의지했던 결속, 항상성, 고착의 전략들은 세잔에게는 더 이상 먹히지 않는 것이었다. <소나무와 바위>에는 두 종류의 이질적인 주의력 형태가 동시에 작용하고 있는데 이 그림 내부의 분열은 지각 경험의 변덕스러움과 불균질성을 작품 속으로 끌어들이려 한 세잔의 독특한 시도를 보여준다. 세잔의 후기 작업을 통해 저자는 철학, 과학적 심리학, 초기 영화, 예술 이론, 신경학 등 다양한 영역에서 나타나는 주의 깊은 관찰자의 불확실한 지위를 탐구한다. 특히 당시 부상하고 있던 기술적 배치들을 비롯해 새롭게 개념화되고 조직화된 운동, 기억, 시간성이 가한 충격의 한복판에서 어떻게 주의 깊은 현존 개념이 재창안되었는지 같은 사안을 고찰한다.
“마네, 쇠라, 세잔의 작업에서 지속적 주의력은 복잡하게 얽힌 사회적․심적 승화 기제와 결코 완전하게 분리되어 있지 않았다. 이들에게서 몰입된 지각이란 충족되지 않은 갈망으로 손상된 시야를 고스란히 드러내는 시각을 부인하고 회피하는 수단이었다. 그러나 그처럼 지각이 정지suspension되어 있을 때 그것은 현재의 명백한 필연성과 자기충족성이 해체될 수 있는 조건들을 낳았고, 또한 규정할 수 없는 미래를 기대하게 하고 희미하게 빛나는 유기된 기억의 대상들을 복원할 수 있도록 했다”(p. 581).
■ 스펙터클 사회와 영화에 관하여
특히 이 책은 영화와 관련해서 무척이나 흥미롭게 다가온다. 통상 영화는 사진과 더불어 카메라 옵스쿠라의 장치적 구성을 계승한 매체로 간주된다. 그런데 외부적 세계의 현존을 반드시 필요로 하지 않고, 관찰 대상을 보기 위해 이동할 필요도 없으며, 여러 개의 정지 이미지를 결합해 운동을 구성해내는 주관적 절차에 있어 분명 영화는 크레리가 제시한 입체경 모델에 더 가까운 매체처럼 보인다. 더불어, 1870년대 후반에 바그너가 바이로이트에 선보인 무대 건축의 양식, 즉 무대에서 빛나는 환영들에 관객의 주의를 붙들어두기 위해 ‘인공 어둠’을 활용하는 양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익숙한 관람 환경의 기본값으로 삼은 것이 바로 영화였다. 크레리의 이 책은 영화 장치를 구성하는 여러 자연스러워 보이는 요소들이 실은 주의의 체제 속에서 짜깁기로 구성된 것이며 역사적 특징을 띠기에 얼마든지 의문의 대상일 수 있음을 여실히 깨닫게 한다.
에필로그에서는 프로이트가 로마에 체류하던 시절 가족에게 보낸 편지를 들여다보는데, 이는 변화된 관찰자의 지위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유의미한 사례다. 이처럼 현시대의 특성을 파악하기 위한 이론적 배경을 살펴보고자 한다면, 그리고 영화를 위시한 매체사에 관심이 있다면 이 책이 많은 도움이 되어줄 것이다.
■ 책 속으로
오늘날 여러 기술적 배치들의 주요 특징들 가운데 하나는 저강도의 주의력을 끊임없이 요구한다는 점인데, 이는 우리가 깨어 있는 동안 영위하는 삶의 여러 영역에 걸쳐 다양한 정도로 유지된다. 19세기 말부터 ‘자유’ 시간 혹은 여가 시간을 가차 없이 식민화하는 작업이 개시되었다. 초기에는 그 효과가 상대적으로 산발적이고 부분적이었던 탓에 스펙터클한 것에 대한 주의집중과 자유분방하게 주관적으로 몰입하는 상태 사이에서 오가는 일이 가능했다. 그러나 20세기 말이 된 현재, 전자적 업무와 커뮤니케이션과 소비를 위해 느슨하게 연결된 기계적 네트워크는 그나마 남아 있던 여가와 노동 사이의 구분을 무너뜨렸을 뿐 아니라 서구의 사회적 삶의 무대 대부분에서 그 시간성을 결정하게 되었다. (제1장 근대성과 주의의 문제, 139~40쪽)
카이저파노라마는 시각적 소비가 ‘산업화’되었음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수많은 현장 가운데 하나다. 그것은 신체와 기계의 물리적․시간적 연합이 공장 생산의 리듬에 상응하는, 즉 주의가 무아지경이나 몽상의 상태로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조립 라인의 노동자에게 참신한 것과 방해물을 도입하는 방식에 상응하는 공간이다. 하지만 그것은 또한 1880년대 많은 전前영화적 장치들 및 1890년대 영화적 장치들이 공통적으로 제공하는 경험을 구조화하고 있기도 하다. 지각을 파편화하는 이러한 장치들 고유의 특성은 이접적인 것들을 ‘자연스럽게’ 만드는 기계적으로 생산된 연속체를 통해 제시된다. (제2장 1879: 풀려난 시각, 230~31쪽)
<그랑자트섬의 일요일 오후>와 <서커스>를 비롯한 몇몇 대표작들은 보는 이의 정치적 관점에 따라 달라지는 여러 종류의 사회적 응집 또는 해체의 다이어그램이다. 특히 <그랑자트섬의 일요일 오후>는 뒤르켐적인 의미에서 사회적 연합의 문제적 성격에 대한 모호한 퍼즐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 그려진 사람들의 모임은 조화의 이미지일까? 즉 뒤르켐과 쇠라가 모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단어를 써서 말하자면, “사회적 존재”로 변형된 개인들의 연대라는 평형에 근접한 상태일까? 아니면 그것은 고립되고 범주화된 단위들의 통계적인 분포이자 단순히 부가적일 뿐인 형식적 인접성 원리의 결과로서, 그럴싸한 사회적 화합의 외양 아래 실은 황폐하고 무질서한 관계가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일까? (제3장 1888: 각성의 빛, 297~98쪽)
만일 <서커스 선전 공연>에 바그너주의에 대한 비판이 숨어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 그림이 그의 바그너주의자 친구들의 열광적인 허식에 맞서 대중적이고 하층민적인 도시 거리의 오락거리를 묘사한 대항이미지여서가 아니다. […] 오히려 <서커스 선전 공연>은 바그너적 스펙터클 모델을 가차 없이 해체하고 있는 작업으로, 그림 중앙의 인물을 통해 구현된 바그너적 기획에 대한 신랄한 패러디이자 폭로라고 볼 수도 있는데, 그 기획이란 신화와 음악을 사회적 의례로서 결합하고 예술 작품을 형성 과정에 있는 통합된 공동체에 대한 비유로서 설정하는 것이다. 바그너식 공연에서 트롬본은 당시의 대중적 언론이 그것만 콕 끄집어내어 우스꽝스러운 캐리커처로 표현하기에 유용한 시각적 요소였다. (제3장 1888: 각성의 빛, 414쪽)
예술사가인 마이어 샤피로는 세잔의 작업을 “묵직한 주의의 예술”로 특징지었다. 샤피로가 이런 표현을 사용한 것은 그것과 연관된 역설들을 그 자신이 잘 알아 주의 깊게 따져본 결과다. […] 샤피로는 시지각적이지 않은 음악적 경험을 참조해서 “오래도록 집중된 시각”의 개념을 설명하고 있는데, 시간을 벗어나 발생하는 세잔의 지속적 주의력을 지각의 정지로 간주하면서 오래 연장된 한 순간 속에서 배회하는 가운데 역동적으로 관계들이 작용한 결과로 “대상들의 복원”이 이루어진다고 본다. 세잔의 후기 작업에 진정 어떤 “복원”이 있는지 여부는 이 화가와 관련된 가장 중요한 논쟁들에서 핵심 사안이 되어왔다. (제4장 1900: 종합의 재발명, 453~54쪽)
들뢰즈에 따르면 영화는 세계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자율적 세계를 구성하는데, 이러한 세계는 “단절과 불균형으로 이루어져 있고, 어떤 중심도 없으며, 그것이 말을 건네는 관객들 자체도 더 이상 그들 자신의 지각을 좌우하는 중심에 있지 않다. […]” 영화적 눈을 인간적 주의력의 조직과 구별 짓는 것은 바로 그러한 눈의 무차별성, 이것저것 가리지 않는 특성이다. […] 영화는 융합의 꿈이며, 시간과 공간이 빠르게 늘어나는 숱한 여정들, 지속들, 속도들로 풀려나가고 있는 어떤 세계의 기능적 통합을 향한 꿈이다. 여러 평자들이 시사했듯이 영화는 점점 사회적․주관적 경험을 구성해가던 지각적 교란의 진정성에 근거를 부여해주는 것이 되었다. (제4장 1900: 종합의 재발명, 552쪽)
역설적이게도, 시네마토그라프 앞에서 “홀린” 채로 있는 것은 집단성에 파묻히는 일인 동시에 그로부터 분리되어 몰입적 고독에 빠져드는 일이기도 하다. 근대적 주의는 불가피하게 이러한 두 극 사이에서 동요한다. 그것은 내면성과 거리감의 해방적 소멸과 무수한 작업․커뮤니케이션․소비의 집적체로의 마비적 병합 사이에서 불확실하게 옮겨 다니는 자아의 상실이다. (에필로그 1907: 로마에서 홀리다, 594쪽)
■ 차례
감사의 말
서론
제1장 근대성과 주의의 문제
제2장 1879: 풀려난 시각
제3장 1888: 각성의 빛
제4장 1900: 종합의 재발명
에필로그 1907: 로마에서 홀리다
참고문헌
옮긴이 후기
도판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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