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

허수경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23년 10월 3일 | ISBN 9788932042169

사양 변형판 128x205 · 316쪽 | 가격 17,000원

분야 , 시 선집

책소개

“나는 빛으로 들어가는 입구에서 언제나 서 있기만 했던 시였지”
가장 낮은 언어로 가장 먼 곳에 가닿는 언어
시인의 자취를 따라 걷는 가만한 발자국

젊은 시인들이 고른 83편의 시 전문
함께 읽는 기쁨을 더하는 56인의 ‘추천의 말’ 수록

시인은 지금 우리와 같은 세계에 있지 않지만 그의 시들이 남아 그의 존재를 말해주고 있다. 나는 반짝이는 그의 조각―시―들을 품고 이 세계를 살아가고 싶다. _윤지양(시인)

시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애인아, 하고 부를 때면 세상의 온갖 약한 존재가 한꺼번에 뒤돌아볼 것만 같다. 그 쓸쓸하지만 고고한 음성은 언제까지나 허수경의 것이다. _임유영(시인)

올 10월 3일, 허수경 시인 5주기에 맞춰 시선집 『빛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를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한다. 56명의 젊은 시인이 직접 고른 83편의 시 전문과 그에 대한 ‘추천의 말’을 함께 엮었다. 허수경은 1987년 시단에 등장해 그 이듬해 첫 시집을 출간했다. 시인이란 늘 한 발짝 멀리 가는 사람일까. 스물셋이란 어린 나이답지 않게 무르익은 언어 감각으로 문단과 독자의 사랑을 두루 받아온 시인은 2018년 위암으로 투병하던 중 쉰넷의 나이에 다소 이른 생을 마감했다. 우리 곁에는 그가 꼬박 31년의 시력 동안 쓰고 펴낸 여섯 권의 시집이 남았다. 그중 스물여섯 해는 머나먼 이국 독일에서 고향의 언어를 되새기며 쓴 시간이었다.
이번 시선집에는 시인의 대표작은 물론, 관능적인 여성성과 이방인으로서 고독, 소박한 일상을 다루는 시까지 고루 실렸다. 무엇보다, 2000년대 이후 데뷔해 활발한 작품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56명의 시인이 출간에 함께했다는 점이 그 의의를 더한다. 그의 동료이자 친구, 후배 들이 오늘의 언어로 호명한 시들은 우리가 여전히 허수경을 읽는 이유를 알려주는 이정표가 될 것이다. 그의 시들을 읽다 보면 어쩐지 쓸쓸해지고, 그러나 쓸쓸한 사람만이 닿을 수 있는 먼 곳이 있다고 믿게 된다. 언젠가 어디에선가 만날 당신을 그리며 이 시선집을 건넨다.


“울음과 슬픔과 상처와 시름과 참혹 사이에서”
변방의 말들을 펼쳐놓는 말줄임표의 언어

시인이 “자신에게 주어진 언어와 무관히” “저마다의 모어를 구사”(김뉘연)하는 이라면, 허수경이 남긴 시들은 ‘말줄임표의 언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할 말이 없거나 할 말을 생략하기 위한 말줄임표가 아닌, 변방의 무수한 말들을 펼쳐놓기 위한 말줄임표”이다. 허수경은 마치 이 세계의 고아, 방랑자, 이방인처럼 “이곳과 저곳과 그곳을 동시에 떠다니”(박지일)며 작지만 선명한 여섯 개의 점을 남겼다.
첫 시집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1988)에는 진주에서 나고 자란 허수경의 향토성이 짙게 배어 있다. 세상이 “뻘밭 구덩이임을 진즉 알”게 되더라도, “진날 마른날 나이를 곱절씩 먹어도” 시인은 여전히 “벌거숭이 고향산”을 동무 삼은 “계집애”(「남강시편 1」)이다. 어린아이를 닮은 그 천진함은 시적 여정 내내 비관적인 세계의 끝에서 나지막한 희망을 노래하는 원천이 된다. 그리하여 시인은 “폭력과 고통의 소리를 잊지 않으려 애”(조용우)쓰되 “그럼에도 빛나고 싶어” 한다. 그 “비천함과 아름다움”(백은선)을 동시에 껴안고자 한다.
독자들의 뇌리에 허수경 이름 석 자를 돋을새김한 『혼자 가는 먼 집』(1992)은 쓸쓸한 목소리로 세상 모든 가여운 존재를 보듬는다. “몸 얻지 못한 마음의 입술이/어느 풀잎자리를 더듬”(「공터의 사랑」)고 “마음끼리 살 섞는 방법”(「마치 꿈꾸는 것처럼」)을 고민하다가 “마음의 어깨 마음의 다리 마음의 팔이 몸을 안는”(「사랑의 불선」) 그 시들은 마음 따라 몸 갈 도리밖에 없는 시인의 먼 미래를 예감한다.
독일에서 고고학을 공부하던 시인이 세번째 시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2001)로 돌아온 건 근 10년 만이었다. 두번째 시집 출간 후 한국 시단에 안착한 허수경은 홀연 모든 것을 버리고 이국으로 떠난다. 상실과 고독의 감각 속에서 씌어졌을 시편들은 “사라지는 마음, 썩어가는 몸, 이제는 없는 사람, 남아버린 글자”(신이인) 사이에서 영혼의 흔적을 찾아 헤맨다. “그리움을 죽일 수 없다면 차라리 마음껏 그리워하기로”(문보영) 한다.


“너는 누구인가, 내가 사랑하던 너는 누구인가”
‘당신’의 행방을 묻는 그리움의 목소리

네번째 시집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2005)은 발굴 현장에서 전쟁과 살육의 역사를 목도하고 그것이 끝없이 반복되는 시간을 거치며 지은 시집이다. “일 미터를 지나왔는데 내가 파낸 세월은 한 오백 년”(「시간언덕」)인 고고학의 세계에서, 지층에 새겨진 한 인간의 생애는 고작 몇 센티미터에 불과하다. 밥벌이의 현장에서 그 지난한 사실을 체득하면서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시인은 필사적으로 이 세계의 흔적을 기록한다. “사라지는 건 괜찮지 않다고. 기억되지 않는 건 하나도 괜찮지 않다고”(김승일) 손을 내민다.
“가본 적 없는 어떤 세계”와 “닿을 수 없는 먼 존재”(안미린)를 그리워하는 이유는 그 모두가 곧 나인 까닭이다. 표제작 「빛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의 ‘나’는 뒤엉킨 시간 속의 무수한 ‘나들’을 소환한다. 이 시에서 평행의 우주에 살고 있는 ‘나’는 “다른 부모” “다른 이름”을 가진 다른 육체이다. 평행의 우주에서 “흰빛의 남자들은 검은빛의 여자들에게 먹히”지만 “내가 살던 다른 곳에서는 거꾸로”이다. 그러므로, 화자가 평행의 우주에 사는 또 다른 나를 만나려 할 때마다, “다른 평행에 살던 당신”을 만나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나’와 전혀 다른 ‘또 다른 나’는 ‘당신’의 이름으로 나타난다.
이 시를 포함하여 허수경의 시 전반에 반복해 등장하는 ‘당신’은 ‘나’였다가 ‘사랑’이었다가 기어코 ‘세상’이 된다. 무수한 ‘나들’로 이뤄진 시적 공간이 ‘나’라는 주체를 허물고 ‘당신’에게로, 더 나아가 온 세상으로 나아간다. 이를 주지할 때, 타자의 고통은 ‘나’의 고통 위로 쓰러지는 일”과 다름없다. 하여, 시인은 “언제나 과거의 말단에 서”서 아프고 아픈 이들의 슬픔에 기꺼이 “휘말”(유계영)린다. 죽은 이의 무덤을 파헤치는 고고학자의 운명처럼 이미 소멸된 시간들을 발굴한다.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2011)은 이 땅 위의 슬픔을 속으로 삼켜온 시인이 지어 올린 거대한 유적지다. “인류!/사랑해/울지 마! 하고”(「삶이 죽음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그때처럼」) 외치는 용기 앞에선 언제고 속수무책이 된다. 단순하고 거대한 그 사랑 앞에서 우리는 “영원에 가까운 시간 동안 되물어온 것 같은 질문”(김지민), 즉 “당신이라는 수수께끼”(「수수께끼」)를 떠올린다. 끝내 완전히 알 수 없을 ‘당신’의 존재 앞에서 ‘나’의 행방을 묻는다.


“열매들이 올 거다 네가 잊힌 빛을 몰고 먼 처음처럼 올 거다”
둥근 별에서 만날 우리의 시간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2016)는 다음 역으로 떠난 허수경이 남긴 마지막 시집이다. 시인은 “나비처럼 날아가다가 사라져도 좋을 만큼/살고 싶다”(「농담 한 송이」)라고 노래한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그저 “살고 싶다”라고 말한다. 죽음을 앞둔 투병 생활, “불안하고,/초조하고,/황홀하고,/외로운,/이 나비 같은 시간들”(『그대는 할 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서문)을 견디다 훌훌 떠난 시인. 그 산뜻한 버둥질에 다만 삶 속에 머무는 이의 아름다움이 있다.
한 시인의 생애를 톺아본 뒤 새삼 이 책의 첫 수록작으로 돌아가면,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의 안부를 묻습니다”(「한식」)라는 문장에서 삶과 죽음을 경계를 넘나드는 이의 익숙한 표정을 마주하게 된다. 출간 순으로 놓인 여섯 권의 시집은 세월을 거듭하며 원숙해지는 작품 세계를 조감케 하는 대신, 직선의 시간을 거부한 채 “뒤로 가는 실험”을 자행한다. 이 실험이 “앞으로 가는 실험과 비교해서 뒤지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뒤로 가나 앞으로 가나 우리들 모두는 둥근 공처럼 생긴 별에 산다”(『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뒤표지 글)는 사실을 그가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인이 말하는 둥근 별을 인류의 고향이라 말할 수 있을까. 시인은 오랜 시간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은 채 고향에 대한 원체험을 써나갔다. 초기 시의 고향이 ‘진주’의 지역적 특성을 부각했다면, 후기 시의 고향은 ‘나’의 뿌리를 낯설게 바라보고, 그로써 또 다른 나를 발견하는 공간으로 그려진다. 오래된 미래와 갱신된 과거가 공명하는 시의 현장에서 “우리의 팔은 서로에게 닿으”며 “둥글어”지고, 포옹의 순간에 “우리의 검고도 둥근 시간”(「오렌지」)이 찾아온다. 슬프고 아픈 이들은 둥근 별의 시간 속에서 “현재 진행형으로 ‘우리’가 된다”(이소호).
그의 오래된 얼굴을 담은 첫 시집 출간 당시, 허수경의 미발표 원고를 처음 읽은 소설가 송기원은 이렇게 말한다. “맙소사, 빈약한 체구와는 달리 그녀의 시는 이미 무르익을 대로 무르익어서 이제 막 땅에 떨어지기 직전의 과일들이 자아내는 어떤 조바심의 분위기가, 그리고 그런 조바심이 자아내는 안타깝고도 애절한 분위기가 전편에 질펀한 것이 아니랴.” 시인 허수경은 다른 평행의 우주에 있지만, 그 열매가 품은 씨앗은 널리 퍼지고 자라 무수히 많은 또 다른 열매를 맺을 것이다. 이제 그 열매들의 시간이 올 것이다.


■ 책 속으로

감꽃이 질 무렵 봄비는 적막처럼 내렸다

감꽃 천지
군화 발자욱이 그 위를 덮친다

집집마다 아픈 아이들
가위 눌린 잠 속으로 감꽃은
폭풍처럼 휩쓸고 다닌다

어린 살 속에 시린 날을 세우고
발진처럼 불거져 내리는 감꽃

대문 두드리는 소리
비명 소리
미친 듯 떨어지는 감꽃 꼭지
그 위에 적막처럼 봄비가 내린다

날이 밝으면
왜 이리 조용하지 이상하다
아버지는 쓴 입속으로 물을 넘긴다

먼 둔덕 애장터
오지 사금파리가 아리게 반짝이고
어른들은 화전을 부친다
오미자 물을 우려낸다

이상하다, 왜 이리 조용하지.
―「이상하다 왜 이리 조용하지」 전문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썩었는가 사랑아

사랑은 나를 버리고 그대에게로 간다
사랑은 그대를 버리고 세월로 간다

잊혀진 상처의 늙은 자리는 환하다
환하고 아프다

환하고 아픈 자리로 가리라
앓는 꿈이 다시 세월을 얻을 때

공터에 뜬 무지개가
세월 속에 다시 아플 때

몸 얻지 못한 마음의 입술이
어느 풀잎자리를 더듬으며
말 얻지 못한 꿈을 더듬으리라
―「공터의 사랑」 전문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내가 아니라서 끝내 버릴 수 없는, 무를 수도 없는 참혹……, 그러나 킥킥 당신
―「혼자 가는 먼 집」 전문

아이야 사탕을 든 아이야 먼 옛날, 추억의 고무신 공장이 문을 닫던 날, 추운 골목길에서 사탕을 입에 넣고 울던 아이야 나는 너의 미래야 미래의 사랑이야 미움이야 아이야

나는 알아, 그 사탕은 너의 마지막 사탕이었다는 걸, 그다음 네가 먹었던 이 세상의 모든 사탕은 불법이었어 그래, 사탕 안에 들어 있던 건 진흙으로 만든 집이었지, 그 집은

방랑가수를 위한 공연장이었고 하지만 너의 미래인 나에게는 삶의 터전이었어 여의도 근처에서 밥을 벌 때 벌건 태양은 은행과 증권거래소에만 빛을 주었지, 빛이 들어오지 않는 마지막 그 골목에서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면서 남몰래 흐르는 노래를 부를 때,

그 여름에 사탕을 문 아이를 싣고 떠났다 돌아오지 않은 정치가가 너의 미래였어 정치가가 남긴 신발 한짝이 우리의 미래였어

나는 돌아오지 않았으면 하는 순간마다 새로운 얼굴이 내 앞에 나타나는 것을 느끼지, 울지 마 울지 마,라고 누가 말할 때마다 새로 돋은 잎들이 울잖아 떨면서 지잖아 아이야,

나는 너의 미래였어, 어둔 골목길 불 밝힌 상점 앞에서 극렬한 도둑질을 하고 싶은 고양이 같은 나는 너의 과거였어
―「사탕을 든 아이야」 전문

서는 것과 앉는 것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까
삶과 죽음의 사이는 어떻습니까
어느 해 포도나무는 숨을 멈추었습니다

사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살았습니다
우리는 건강보험도 없이 늙었습니다
너덜너덜 목 없는 빨래처럼 말라갔습니다

알아볼 수 있어 너무나 사무치던 몇몇 얼굴이 우리의 시간이었습니까
내가 당신을 죽였다면 나는 살아 있습니까
어느 날 창공을 올려다보면서 터뜨릴 울분이 아직도 있습니까

그림자를 뒤에 두고 상처뿐인 발이 혼자 가고 있는 걸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어봅니다
포도나무의 시간은 포도나무가 생기기 전에도 있었습니까
그 시간을 우리는 포도나무가 생기기 전의 시간이라고 부릅니까

지금 타들어가는 포도나무의 시간은 무엇으로 불립니까
정거장에서 이별을 하던 두 별 사이에도 죽음과 삶만이 있습니까
지금 타오르는 저 불길은 무덤입니까 술 없는 음복입니까

그걸 알아볼 수 없어서 우리 삶은 초라합니까
가을달이 지고 있습니다
―「포도나무를 태우며」 전문


■ 추천의 말

잊고 싶은 상처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늙고 환해지는 것이라고 시인은 말한다. 그렇게 불을 켠 듯 환하고, 그래서 오히려 더 아파지는 자리를 향해 가겠다고. 사랑이 나를 버리고 갔을 때, 세월도 저만치 가고 내게 남은 것은 몸 얻지 못한 마음과 말 얻지 못한 꿈뿐일 때, 나는 어디로 가게 될까? 나도 시인처럼 기꺼이 환하고 아픈 자리로 갈 수 있을까. 공터에 뜬 무지개가 상처를 낫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무지개조차도 다시 아프고야 마는 자리. 아프더라도, 기꺼이 다시 겪는 자리로 갈 수 있을까. 허수경 시인의 시를 읽으며 내내 나에게 묻고 있다.
-안미옥, 「공터의 사랑」 추천의 말

눈 감으면 코 베어 간다면서, 신경 곤두세우던 것에도 지쳤던 것 같다. 서울 와서 꼭 두 해, 이십대 중반의 나는 이 시를 종종 내가 쓴 시처럼 외고 다녔다. 당시 나는 서울에 사는 서울 토박이가 아닌 나를 무참히 발견해나가던 참이었다. 서울이 별건가 싶었지만, 나도 모르게 낯선 이에게서조차 다정을 바라고 모르는 음식을 마주하면 허기를 감추지 못했다. 어쩜 나는 이 시를 외며 코를 베어 가도 좋다는 마음가짐, 허기를 어쩌지 않을 거라는 오기 같은 것을 다졌던가. 그런 합리적 의심이 든다.
-김복희, 「먹고 싶다……」 추천의 말

오래 굶주린 후 강렬한 식욕을 느낄 때, 우리는 그저 한 그릇의 밥으로 생을 유지하는 유기체에 불과하다는 것을 통렬히 깨닫는다. 그에 반해 삶은 왜 이다지도 어렵고 단순하지가 않은가. 왜 비극은 몇몇 이들만 찾아가면서 밥때는 누구에게나 똑같이 찾아오는가. 왜 어떤 이는 국밥을 만들기 위해 육수를 세 가지나 섞는데 어떤 이는 허기를 무시하고 독서에 열중하는가. 밥벌이의 역사는 그 모든 이해되지 않는 것들과 함께 계속되고, 그 한가운데에 이 시가 놓여 있다.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면서도 한 끼 한 끼를 기어코 지속해나가는 사람들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양송이, 「내 마을 저자에는 주단집, 포목집, 바느질집이 있고」 추천의 말

타오르는 불을 향해 호기심과 간절함을 담아 손을 뻗는 황홀. 자신의 존재를 산산조각 내어 흩어버리는 간구의 순간. 그렇게 타올랐던 흰 재가 곰의 배 속에서 다시 눈송이로 휘몰아치는 마지막 장면은 허수경식 사랑의 귀환이자 사라지는 방식의 구원이다. 눈과 불, 외로움과 치명, 매혹과 공포가 만나는 장면을 이토록 신비롭고 내밀하게 그려낸 시가 또 있었던가. 「어느 눈 덮인 마을에 추운 아이 하나가」는 내가 생각하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가장 아름다운 우화다.
-이혜미, 「어느 눈 덮인 마을에 추운 아이 하나가」 추천의 말

좋은 시를 만나면 속눈썹이 먼저 반응을 한다. 속눈썹은 인간의 가장 깊고 여린 고독이라, 여간해서는 잘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인다 한들 알아채기도 쉽지 않다. 그런데 이 시를 읽는 순간 나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느꼈다. 내 마음 안쪽에서도 물새 한 마리가 떨어진 것일까.
사실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육안으로는 그저 늦은 저녁이, 평화롭기까지 한 저녁이 이어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확신한다. 당신 안에서 물새가 떨어지던 그 시각, 당신을 둘러싼 저녁의 색과 질감이 완전히 바뀌었을 것이라고. 좋은 시는 그런 일을 한다. 소리도 냄새도 없이 당신이 발 딛고 선 땅을 속절없는 그리움의 행성으로 바꿔놓는다.
-안희연, 「찬 물새, 오랫동안 잊혀졌던 순간이 하늘에서 툭 떨어지는 것을 본 양」 추천의 말

모르는 이로 가득한 이국의 호텔에서도, 가까운 이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일상에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혼자이고 고독한 순간은 늘 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휘파람, 휘이익 불 수 있는 명랑한 악기가 있어 토마토 붉게 넘어지는 거리 너머로 뜻밖의 아름다운 노을을 마주하기도 한다. 휘파람, 명랑하고 작은 악기를 사랑한다면 “조금 우울해도 좋아”. 우울을 좋아할 용기, 우울해도 좋다고 말할 용기를 가질 수 있을까. 이 시를 읽으면 정말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고단한 날들 너머의 작은 우울을 기꺼이 껴안아볼 수 있을 것 같다. 이 시는 가만히 함께 휘파람 불어준다. 명랑하고 따스하게.
-주민현, 「이국의 호텔」 추천의 말

목차

■ 차례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한식/ 폐병쟁이 내 사내/ 원폭수첩 2/ 남강시편 1/ 남강시편 3/ 달빛/ 유배일기/ 땡볕/ 별 노래/ 새/ 할리우드/ 이상하다 왜 이리 조용하지

혼자 가는 먼 집
공터의 사랑/ 불우한 악기/ 마치 꿈꾸는 것처럼/ 혼자 가는 먼 집/ 사랑의 불선/ 쉬고 있는 사람/ 먹고 싶다……/ 표정 1/ 한 그루와 자전거/ 저 마을에 익는 눈/ 시/ 유리걸식/ 백수광부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어느 날 눈송이까지 박힌 사진/ 머리에 흰 꽃을 단 여자아이들은/ 구름은 우연히 멈추고/ 그러나 어느 날 날아가는 나무도/ 내 마을 저자에는 주단집, 포목집, 바느질집이 있고/ 베를린에서 전태일을 보았다/ 두렵지 않다, 그러나 말하자면 두렵다/ 바다가/ 동천으로/ 모르고 모르고/ 이 지상에는/ 비행기는 추락하고/ 폭발하니 토끼야!/ 어느 눈 덮인 마을에 추운 아이 하나가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대구 저녁국/ 그때 달은/ 해는 우리를 향하여/ 새벽 발굴/ 연등빛 웃음/ 그해 사라진 여자들이 있다/ 빛 속에서 이룰 수 없는 일은 얼마나 많았던가/ 시간언덕/ 나무 흔들리는 소리/ 마늘파 씨앗/ 물지게/ 여름 내내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
거짓말의 기록/ 수수께끼/ 글로벌 블루스 2009/ 비행장을 떠나면서/ 찬 물새, 오랫동안 잊혀졌던 순간이 하늘에서 툭 떨어지는 것을 본 양/ 열린 전철문으로 들어간 너는 누구인가/ 카라쿨양의 에세이/ 울음으로 가득 찬 그림자였어요, 다리를 절던 까마귀가 풍장되던 검은 거울이었어요(혹은 잠을 위한 속삭임)/ 사막에 그린 얼굴 2008/ 눈동자/ 여기는 그림자 속/ 삶이 죽음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그때처럼/ 추억의 공동묘지 아래/ 문장의 방문/ 사탕을 든 아이야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농담 한 송이/ 그 그림 속에서/ 이 가을의 무늬/ 이국의 호텔/ 포도나무를 태우며/ 병풍/ 딸기/ 포도/ 자두/ 오렌지/ 호두/ 목련/ 죽음의 관광객/ 내 손을 잡아줄래요?/ 우산을 만지작거리며/ 우리 브레멘으로 가는 거야/ 가짓빛 추억, 고아

함께한 시인들
허수경許秀卿

작가 소개

허수경 지음

시인 허수경은 1964년 경남 진주에서 태어나 경상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1987년 『실천문학』에 시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1992년 늦가을 독일로 건너가, 뮌스터대에서 근동고고학을 공부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시집으로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혼자 가는 먼 집』 『내 영혼은 오래되었으나』 『청동의 시간 감자의 시간』 『빌어먹을, 차가운 심장』『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가 있고, 산문집으로 『길모퉁이의 중국식당』 『모래도시를 찾아서』 『너 없이 걸었다』 등이 있다. 2018년 10월 지병으로 별세하여 뮌스터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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