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란 내게……
어쩌면 끝나지 않은 과거가 이어지는 것인지도 모르니까요……”
폭력의 역사를 언어로 기억하고
침묵의 언어를 문학으로 기록하는 작가 한정현의
‘그곳’에서 ‘여기’까지, 끝없이 이어지는 열 편의 이야기
첫 소설집에서 “지식의 소설, 역사의 소설, 사랑의 소설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운다”(이장욱)는 평을 받은 소설가 한정현의 두번째 소설집 『쿄코와 쿄지』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공식적 역사에서 누락되었거나 주류 역사가 삭제시킨 흐릿한 이름들을 발굴하고 그들의 삶을 소설 안에서 만나게 하면서 새로운 역사의 지도를 그려내는 한정현의 소설 세계가 고스란히 이어지는 이번 소설집에는 첫 소설집에 실리지 않았던 등단작을 포함하여 총 10편의 소설이 서로 스치고 얽히면서 끝나지 않는 역사처럼, 이어지고 있다.
올해 여름에 출간한 첫 산문집을 포함해, 데뷔 이후 8년 동안 여섯 권의 책을 출간하며 누구보다 왕성한 활동을 해온 작가이지만, 첫 소설집 이후 3년 만에 묶인 이 두번째 소설집이 유독 반가운 이유는 따로 있다. 8년 전의 등단작이 프롤로그 자리에 놓이며, 한정현 소설의 세계관이 비로소 완성된 듯 보이기 때문이다. 연구자의 시선과 작가의 마음을 함께 가진 한정현 작가의 작품은 역사와 문학의 경계를 오가며 질문을 남긴다. 작가로 활동하며 그가 줄곧 견지해온 생각은 가령 이런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이 이야기가 왜 필요한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에는 어떤 ‘사람들’이 있었는가. 그들에 대해 충분히 이야기가 되었는가. 지금의 우리는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역사의 줄기를 따라 이어지는 한정현 소설을 통해, 우리가 조금 알고 있던 역사적 사실 속에서, 우리가 전혀 몰랐던 타인의 진실을 향한 슬픔과 애도의 방식에 다가갈 수 있다.
한정현의 소설에 나타나는 여성 연구자들은 작가 본인의 페르소나이자 과거를 번역·전달하는 사람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들이 주로 현장 연구와 구술사 연구를 통해 구성하는 지식은 타자의 불완전한 언어를 통과한 것이고, 사실적 진실이 아닌 서사적 진실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역사와 문학의 경계를 오간다. 경계에 놓인 연구자로서 스스로에 대한 정체화도 불안정하다.
[……]
과거의 시공간을 떠났다고 해서 현재의 기억과 기록의 책임이 사라지는 게 아니라면, 미완성인 이야기를 이어나갈 이유가 우리에게 있다. 듣는 이의 기억 속에 자리를 잡았던 타인의 이야기는 그것이 유동적이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외려 듣는 이 자신의 경험과 동화될 수 있고, 이는 또 다른 타인에게 전달 가능한 형태를 갖춘다. 그런 점에서 한정현의 ‘되돌아가는’ 인물들은 벤야민이 말한 이야기꾼에 가깝다. 소설과 뉴스에 자리를 뺏겼던 이야기꾼들은 이제 소설가와 정보 전달자를 겸임한다. 타인과의 만남으로부터 발생하는 이해의 격차는 이제 나를 더 정확하게 설명하고 싶은 마음을 낳는다. 그리하여 완성되는 이 이야기는 또 다른 타자의 질문과 이야기를 기다릴 것이다.
―강도희, 해설 「역사를 상상하고 이야기를 연구하는 사람들」에서
끝없이 이어지고 반복되는 어떤 틈새에서 연결되는 삶
끝내 말해지지 못한, 역사 속 개인의 침묵을 비추는 투명한 응시
이번 소설집의 해설을 맡은 문학평론가 강도희는 전작과는 달리 “『쿄코와 쿄지』에서는 가까운 이들의 익숙하면서도 낯선 모습에 혼란을 느끼고 이해의 필요성을 절감하는 인물들이 유독 돋보인다”고 설파하며 이것이 “현재와 과거의 상호 관계, ‘진실’에 대한 책임이 후세대로 이어지는 문제를 환기”함을 지적한다. 또한 “복원을 넘어서 이해가 목적일 때” 그 방법론에 주목하며 작품 속에 드러나는 ‘침묵’의 다양한 양상을 살펴본다.
“가치판단을 하는 자가 아니라 응시하는 자”가 역사가라 생각한다는 작가는, 역사가는 아니지만 역사를 사랑하는 작가로서, 최후까지 살아남은 ‘쓰는 자’를 통해, 작품 안에서 “침묵으로의 언어 찾기”를 수행한다. 하여 소설 속 인물들은 폭력의 역사에 희생당한 당사자들의 침묵 앞에 결코 좌절하지 않고, 그 침묵의 언어를 오늘에 다시 기록한다. 스스로의 무지와 고립을 아프게 깨달으면서 말이다.
『쿄코와 쿄지』에 실린 10편의 작품들은 인물들이 자연스럽게 교차하며 공통의 역사를 지나 현재를 산다.
프롤로그인 「아돌프와 알베르트의 언어」에서 소수 언어 연구자인 아버지의 죽음 이후 방황하던 호주인 데이비드 셰이퍼는 사라진 언어를 연구하기 위해 한국으로 왔지만 언어 연구가 아닌 어학원 강사 생활을 하던 중 광주민주화운동에서 동생을 잃은 김옥희를 만나 정착하게 되고, 언어의 장벽으로 대화가 많지 않았던 아내의 죽음 이후 아내가 바로 자신의 언어였음을 깨닫고 ‘신동일’이란 이름으로 한국인이 된다.
「쿄코와 쿄지」에서는 서로의 이름 끝 자를 맞추며 스스로의 공동체를 만들었던 네 명의 친구, 혜자, 미자, 영자, 경자가 광주민주화운동을 겪으면서 예측하지 못한 삶으로 내던져진 이야기가 네 명의 친구 사이에 남겨져 경자가 키우게 된 딸 김영소에게 전해진다.
「리틀 시즌」에서는 엄마 경자의 죽음 이후 홀로 남겨진 영소가 다시 등장하는데, 번식장에서 구조한 자자라는 반려견과 함께 살면서 엄마의 친구 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요양 병원에서 말년을 보내고 있는 미자 이모와 교류하며, 그 당시 이모의 이야기를 기다린다.
「지금부터는 우리의 입장」의 화자인 김강은 자신을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코타르 증후군에 걸린 이모를 돌보고 있는데, 김강의 이모와 영소의 미자 이모는 요양 병원에서 한방을 쓰고 있다. 대학 시절 위장 취업으로 백화점 지하 화장실 청소를 했던 김강의 이모는 당시 건너편 삼풍백화점 1층 명품 매장에서 근무하던 언니에게 동료 이상의 감정을 느끼지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 채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이후 만나지 못했다. 여성 노동자들의 삶을 연구하며 살아온 이모는 스스로 죽었다고 생각하며 전혀 다른 모습으로 말년을 보내다 삼풍백화점의 그 선화 씨에게 유산을 남기고 생을 마감한다.
「나의 아나키스트 여자친구」에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성전환 수술을 한 수호가 등장하는데, 김강의 이모가 유산을 남긴 삼풍백화점 1층에서 일했던 선화 씨의 아들이다. 수호의 전 애인 ‘나’는 그것이 수호와 이별한 이유였지만, 마찬가지로 그것이 수호와 이별할 이유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간다.
그 외에도 대만과 일본의 이중국적을 가진 생물학적 어머니로부터 어느 날 문득 메일을 받게 되는 나나의 특별한 답장이 담긴 「결혼식 멤버」, 쌍둥이 동생을 용산 참사에서 잃은 뒤 동생의 이름이 금기어가 된 가족 안에서 혼란을 느끼는 명선의 이야기 「다만 지구의 아침」, 아버지와 재혼한 베트남 여성 무이와 특별한 유대 속에서 아버지의 삶과 이주노동자들의 삶을 다시금 생각하며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는 화자의 이야기를 담은 「무이네」, 37년여 만에 잃어버린 잠을 찾아 한국에 와서 사라진 극장을 돌아보는 미국인을 안내하며 외국인의 기억 속에 자리한 광주민주화운동의 기억 속으로 함께 들어가보는 몽환적인 이야기 「여름잠」까지, 소설 속 인물들은 누군가의 말 속에서 과거의 한 부분에서 스치고 기억되며 서로 연결된다. 그렇게 마지막 에필로그 「연어와 소설가, 판매원과 노래하는 소녀의 일기」에 이르러 프롤로그의 데이비드 셰이퍼, 신동일을 떠올리며 연구를 핑계 삼아 뉴질랜드로 떠난 뒤 그곳에서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연구를 계속할 마음을 가지게 된다.
이렇게 짧지 않은 한 권의 책을 다 읽고 난 뒤엔 거대한 하나의 이야기 속에 들어갔다 나온 듯한 느낌과 더불어 이것이 지면에 세워진 전혀 다른 세계가 아닌, 우리가 딛고 선 이 땅의 이야기라는 실감에 전율할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어딘가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역사 속에 희생된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을 것이라는 예감과 우리의 삶이 그들과 어느 틈새에서 반드시 연결되어 있으리라는 확신 또한 들게 될 것이다. 그렇게 다시, 우리는 한정현이 펼쳐놓은 질문 앞에 서게 된다.
■ 책 속으로
그 침묵은 일종의 강요된 것이었다.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을 말하는 자를 목격했을 때의 침묵, 강요된 복종을 거부하는 자를 바라볼 때의 침묵, 부당한 것에 대한 억울함보다는 공포가 더 선명하게 보일 때의 침묵. 그는 사람들이 의도적으로 침묵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는 일생 동안 그런 침묵을 겪어보진 못했다. 하지만 마주친 적은 있었다. 바로 이 나라에서였고 이 도시에서였다. 이 도시의 사람들은 어떤 순간이 되면 모두 의식적으로 침묵 했다. (「프롤로그―아돌프와 알베르트의 언어」, p. 27)
네, 그렇게 혜자, 미자, 영자 그리고 나 경자까지 모두 자 자 돌림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우정으로 만들어진 가상 아들들의 공동체. 그런데 얼마 뒤 여기서 다시, 우리는 생각해요. 굳이 우리가 또 그놈의 아들 될 이유는 뭐지?
“너네한테 아들을 권하고 싶진 않어. 아들 되기 전에 인간 되는 거 고려해보는 게 어때?”
그렇게 갖고 싶다던 흔한 여자 이름을 갖게 된 영자가 다시 한번 이런 말을 했고,
“그럼 최종적으로 인간 자(者)?”
미선이가 그럼 이거는, 하는 표정으로 물었을 때, 이번엔 내가 다시 말했습니다.
“스스로 자(自),는 어때?”
[……]
그렇게 우리는 아들들의 공동체를 통과하여 최종적으로는 스스로의 공동체로 들어가고자 했습니다. (「쿄코와 쿄지」, pp. 63~64)
이모 진짜의 모습을 죽어서야 드러낸 것인지도 몰랐다. 그렇게 이모의 기억 속에 남은 생전의 사람은 그 언니 한 명이었다. 그런 이모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한편으로는 섭섭하기도 했고 또 어떤 면에서는 애틋하기도 했지만, 그러나 역시 삶은 기억만으로 이뤄지는 건 또 아니다. 비록 이모의 마음에서 이모는 죽었겠지만, 현실에서 이모는 진짜 죽은 것이 아니니까. (「지금부터는 우리의 입장」, p. 167)
오빠, 난 궁금한 게 많아. 멀리 가지 않고 엄마만 해도 그래. 나는 엄마를 좀 이해해보고 싶어. 난 아빠보다 엄마가 더 이해가 안 돼. 아빠는 평생 일도 안 하고, 엄마가 먹여 살렸는데도 손 하나 까딱 안 하잖아. 그런데도 엄마는 아빠가 얼마나 똑똑한 사람인 줄 아느냐는 말만 하고. 그런 엄마한테 아빠는 무식해서 어떡하느냐는 소리나 자꾸 하고. 엄마는 대학 안 나와도 성실하게 잘만 살았는데 할머니 댁 가면 바닥 걸레질까지 다 하고. 대학 나온 남편이랑 사는 게 대단한 거란 말이나 듣고. 난 이런 이유들을 알고 싶어. 그리고 아빠가 자꾸 이태원 녹사평에 있는 미군 성노예 피해자분들에게 양공주라고 하잖아. 다 지들이 먹고살려고 나온 거라고, 그런데 무슨 그게 국가 폭력이냐고 하면서. 그런데 난 그것도 아빠가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 자발적이라는 게 맞는 걸까? 용산이 미군, 일본인 모두에게 빼앗겼던 땅이라면 그 땅에 살던 사람들에게 자발적이라는 게 있는 걸까? 나는 이런 것들이 너무 궁금해. 그러니까, 대체 왜 약한 사람들이 더 저자세로 나가게 되는 건지……”(「다만 지구의 아침」, pp. 288~89)
■ 차례
프롤로그|아돌프와 알베르트의 언어(등단작)
쿄코와 쿄지
리틀 시즌
지금부터는 우리의 입장
나의 아나키스트 여자친구
결혼식 멤버結婚式のメンバー
다만 지구의 아침
무이네
여름잠
에필로그 | 연어와 소설가, 그리고 판매원과 노래하는 소녀의 일기
해설
역사를 상상하고 이야기를 연구하는 사람들·강도희
작가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