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롭게 출범하는 에크리의 디자인은 한 편의 ‘흑백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앞표지 전면에 배치된 흑백 사진은 영화의 스틸컷을 보는 듯하다. 앞뒤로 이어지는 실선 또한 영사기에서 돌아가는 필름을 연상케 하며 아날로그적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흑백 영화 속 주인공이 자신의 감정을 관객에게 좀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표정과 행동을 크고 분명하게 하는 것처럼, <문지 에크리> 역시 저자의 사유를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오직 ‘쓰는’ 행위를 조명한다. 오랫동안 아껴두었던 연필을 곱게 깎아 꾹꾹 눌러 쓰는 것처럼 <문지 에크리>는 독자들이 문학작품을 통해서만 접해왔던 작가들의 사적이고 내밀한 영역을 만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선사할 것이다.
문학과지성사의 산문 시리즈 <문지 에크리>가 새로운 디자인으로 독자들 앞에 첫선을 보인다. 자신만의 문체로 특유의 스타일을 일궈낸 문학 작가들의 사유를 동시대 독자의 취향에 맞게 구성·기획한 산문 시리즈 <문지 에크리>는 문학평론가 김현과 이광호 시인 김혜순, 김소연, 신해욱 그리고 소설가 백민석까지 문학 독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는 작가들의 작품을 소개해왔다. 에크리란 프랑스어로, 씌어진 것 혹은 (그/그녀가 무엇을) ‘쓰다’라는 뜻이다. 쓰는 행위를 강조한 이 시리즈는 작가 한 명 한 명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최대한 자유로운 방식으로 표현하는 데 그 의미를 두고 있다.
시인, 소설가, 비평가 그리고 여행자
당신의 하루오, 우리의 이장욱
“나는 이곳에 와서 한 편의 시도 한 편의 소설도 쓰지 못했다. 문장들은 내게로 오지 않았다. 아마도 나는 그것을 미리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나에게 여행은 시가 되지 않고 서사가 되지 않았다. 여행이란 언제나 지나가는 자의 것이며, 지나가는 자가 볼 수 있는 것은 지나가는 자가 보고 싶은 것뿐이다.”
―「2007. 7. 6.」에서
시와 소설을 쓰고 있는 사람, 작가는 자기 자신을 이렇게 소개한다. 이장욱에게 글쓰기란 과거의 행위나 미래의 결과가 아닌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독자들에게 이름이 각인된 이후 늘 쓰는 사람으로서 존재해왔던 그가 아무것도 쓰지 못하는 때는 언제일까. 시인도 소설가도 아닌, 하루하루 끼니를 해결하는 일에만 궁리하면 되는 그 순간은 바로 낯선 곳에서 여행자임을 자청하던 때가 아닐까. 그해 겨울, 기숙사 룸메이트 안드레이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 중부 러시아의 추바시로 떠났던 기차 안에서의 풍경은 그로부터 10년 후 2004년의 일기로 남았고, 다시 겨울, 글을 쓰기 위해 떠난 부다페스트에서 본 야경은 2023년의 일기가 되었다. 단지 겨울과 겨울을 건너왔을 뿐인데 순식간에 지나버린 30여 년의 시간이 어리둥절하게 느껴진다는 그는 한 권의 책을 마친다는 것이 “하나의 죽음”을 겪는 일과도 같다며 지난 시간을 소회한다.
이장욱의 글을 흠모했던 이들이라면 현실과 환상을 횡단하다 다다르는 작가만의 서정의 세계를 한 번쯤 경험해봤을 것이다. 혹자는 그의 언어적 확장과 시적 상상력에 매료되었을 것이고 또 다른 이는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이 털어놓는 이야기에 숨을 죽였을 것이다. 단정하고 날렵한 문장과 그 이면의 밀도 있는 이야기로 사랑받는 작가, 이장욱은 자신의 글 속에서 물음표를 달지 않은 채로 끊임없이 우리가 사는 세계에서의 삶과 죽음에 대해 궁구한다. 불현듯 나타나 자신의 이야기를 자분자분 털어놓았던 ‘곽’(「고백의 제왕」, 『고백의 제왕』, 창비, 2010)처럼 이장욱식 ‘고백’은 우리의 일상이 사소한 비밀들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환기한다. 마치 과거의 기억을 천천히 되짚는 듯한 이장욱의 겨울 일기는 과거와 현재라는 시차를 단숨에 뛰어넘어 독자를 19세기식 창문 앞으로 데려다 놓기도 하고, 혹한의 추위에도 얼지 않았던 1990년대 후반의 러시아로 이동시키기도 한다. 종일 개처럼 걸어 다니는 것만이 자신이 멈춰 선 도시에 대한 예의라고 말하는 이장욱은 글쓰기라는 커다란 바퀴를 홀로 굴리면서도 야간열차 안에서 잠이 든 승객들을 깨우지 않을 것이다. 늘 그랬듯이 사뿐히 다가와 비밀을 비밀이 아닌 것처럼 자신이 겪은 19세기를, 1990년대의 러시아를, 2023년의 부다페스트를 보여줄 뿐이다.
“소설을 쓰는 일 자체보다는, 아직 소설이 아닌 무엇을 떠올리는 일을 나는 더 좋아하는 것 같다. 가령 하루오라는 인물에 대해 쓰는 시간이 아니라, 하루오라는 사람이 머릿속에서 문득 눈을 뜨는 순간을. 눈을 뜬 하루오가 미소를 짓거나 걸어 다니는 순간을. 그러다가 문득 사라져버려서 나를 외롭게 만드는, 그런 순간을.”
―「아직 소설이 아닌 무엇」에서
자신이 아는 것을 반만 보여줌으로써 세상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람. 이장욱의 글은 다분히 비밀스러우면서도 숨김이 없고,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면서도 수다스럽지 않고 단순 명료하다. 마치 오랜 친구처럼, 동료처럼 내내 맴을 돌다가 소리 없이 사라진 「절반 이상의 하루오」(『기린이 아닌 모든 것』, 문학과지성사, 2015) 속 하루오처럼 천천히 스며든다. 이번 산문집 『영혼의 물질적인 밤』은 러시아 횡단 열차를 타고 유년의 창경원을 지나 문학의 집에 다다르기까지 발이 닿는 대로 쉼 없이 걷기만 한다. 오로지 ‘쓰다’라는 행위에 집중할 뿐이기에 하나의 주제에 천착하거나 기승전결을 따르지도 않는다. 1장은 러시아의 겨울을 배경으로 2004년과 2007년에 씌어진 것들로 소비에트 몰락 직후를 추억하고 있다. 2장은 2005년과 2015년 사이에 씌어진 메모들로 시와 소설, 철학과 자유에 대한 파편적인 단상을 모았다. 3장에는 ‘동물원’ ‘문학의 집’ ‘금각사’를 주제로 긴 글들이 담겨 있다. 그리고 4장은 다시 지금의 시점으로 돌아와 부다페스트의 풍경을 담고 있다. 여기에는 하얀 눈밭에 맨몸으로 뛰어드는 시인도 있고, 동물의 아가리에서 떨어지는 침방울을 쳐다보는 소설가도 있고, 초콜릿 박물관에서 레닌을 만나는 비평가도 있고, 종일 개처럼 걸어다니다가 중국식당에서 반주를 즐기는 여행가도 있다. 시인, 소설가, 비평가, 여행가 그 모든 이장욱의 절반을 볼 수 있는 책은 축축한 몸으로 건조한 바람을 느끼고 싶은 이를 어디로든 데려다줄 것이다.
■ 책 속으로
그해 겨울, 나는 기숙사 룸메이트 안드레이와 함께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떠나 중부 러시아의 추바시로 긴 여행을 떠났다.
볼가강 연안의 그 소규모 공화국으로 가는 길은 눈과 겨울과 자작나무와 얼지 않는 강과 낮고 단단한 영하의 길들로 잇닿아 있었다. 기차 안에서 보낸 2박 3일, 그리고 엘렉트리치카라고 불리는 낡은 전차 안에서 바라보는 풍경들과 더불어 나는 춥다, 춥다, 춥다고 중얼거렸고 안드레이는 심상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작나무는 자작나무로, 설원은 설원으로 이어져 있었다. 창밖으로 희미하게 흘러가는 볼가강에 인간의 흔적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1-1. 자작나무, 일기
2007. 6. 23
경찰서에 거주지 등록을 해야 한다. 단기 체류자도 예외가 아니다. 자본주의 러시아는 소비에트 시대의 잔여물을 기묘한 방식으로 이용하고 계승한다.
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호텔로 가서 안나를 찾는다. 그녀는 호텔이 아닌 곳에 묵는 나 같은 외국인들에게 돈을 받고 가짜 거주지 등록증을 만들어준다. 안나는 내일 두 시에 다시 오라고 한다. 나는 군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돌아오는 길에 슈퍼마켓에 들러 먹을거리를 샀다. 낯선 향료가 든 샐러드, 말보로 라이트, 둥근 일본 쌀과 한국 컵라면, 스탄다르트 보드카 등속이다. 비닐봉지를 손에 들고 거리를 걸었다. 비가 내렸다. 이런 날에 도시의 뒷골목을 하릴없이 걷고 있으면 몸과 마음을 무언가가 조금씩 누르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페테르부르크의 운하를 흐르는 강물은 평화롭고 정교회 성당들은 오랜 시간만이 줄 수 있는 온화하고 장엄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몸이 조금씩 서늘해지고 심장에서 바람 부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피할 수는 없다. 이것은 감상적인 비유가 아니다. 말 그대로 물리적인, 그런 느낌이다.
1-2. 백야, 일기
아직 소설이 아닌 무엇
소설을 쓰는 일 자체보다는, 아직 소설이 아닌 무엇을 떠올리는 일을 나는 더 좋아하는 것 같다. 가령 하루오라는 인물에 대해 쓰는 시간이 아니라, 하루오라는 사람이 머릿속에서 문득 눈을 뜨는 순간을. 눈을 뜬 하루오가 미소를 짓거나 걸어 다니는 순간을. 그러다가 문득 사라져버려서 나를 외롭게 만드는, 그런 순간을.
2-1. 산세리프에서 소설 쓰기
시가 불가능한 밤
더 이상 시를 쓰지 말아야 할 순간을 이렇게 표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시의 주어와 술어가 거의 일치하는 상태. 하나마나한 말을 반복하는 상태. 또는 시의 주어와 술어가 거의 분리되는 상태. 의미의 무한 속으로 사라지는 상태. 엔트로피가 제로에 도달하거나, 반대로 최대치에 도달하는 상태.
다른 말로 하자면,
죽음 또는 해탈의 상태. 동일한 상태.
그러므로 시는 죽음과 해탈에 반대한다.
2-2.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시 쓰기
문학은 게임이론이 작동하지 않는 해변이라고.
아이스크림 가게가 없는 해변이라고.
문학의 해변에는 진짜 파도가 치고 구름이 떠 있고 수평선이 보인다. 사람들이 웃고 울고 물속을 헤엄치고 파도를 타고 조난을 당하고 구조를 기다리기도 한다.
이 해변은 해먹에 누워 한가로이 책을 읽으며 여가나 휴가를 보낼 만한 곳이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폭풍우가 치는 해변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2-4. 삶, 자유, 정치
동물원에 대한 내 유년의 기억은 창경원에서 시작된다. 기억 속에서 창경원의 동물들은 크고 완강하고 격렬했다. 동물들의 벌린 아가리와 무엇이든 찢어발길 수 있는 이빨과 그 이빨에서 떨어지는 길고 굵은 침을 아이는 잊지 못 했다. 이상하게도 아이의 기억 속에는 작고 아담하고 귀여운 동물들은 한 마리도 없었는데, 작고 아담하고 귀여운 동물들에게도 아가리와 이빨과 침이 있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그것들이 동화나 애니메이션 속의 부드럽고 귀여우며 우호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것, 끊임없이 인간을 경계하고 인간에게 적대적이며 인간이 섣불리 이해할 수 없는 먼 존재라는 것을 아이는 직감으로 알았다.
3-1. 동물원
가난한 나라의 집들은 대부분 옥상이 딸린 1층짜리 집이다. 아주 오래된 집들이고 생각 외로 견고하지만, 정말 그곳에 살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작고 가난한 나라의 집들에도 2층이 있지만 대체로 좁고 옹색해 보인다. 지하층은 아직 발달하지 않은 것 같다. 옥상에 올라가 먼 곳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많지만, 사실 그들은 석양에만 정신이 팔려 있을 뿐 집을 관찰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집 같은 것을 관찰하기보다는 차라리 석양의 일부가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3-2. 문학의 집
안전한 삶에 대한 혐오. 안전한 문화주의에 대한 부정. 미시마라는 인간은 그런 정신의 구현이다. 그는 자신을 끊임없이 경계로 몰고 가서 그 경계에 위태롭게 서 있는 자신을 확인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었던 것 같다. 자신에 대한 과잉 결정, 그것이 쇼와시대 일본의 자기부정과 맞물려 미시마를 시대적 아이콘으로 만든 것인지도 모른다.
3-3. 금각사
오늘의 부다페스트는 지금보다 더 감상적이고 우울했던 1994년으로 나를 데려갔다. 30여 년 전의 러시아 여행이 아직 끝나지 않은 느낌. 그때의 나는 혼자 중얼거리며 도시를 떠도는 문학청년이었고 지금의 나는 마감일을 생각하며 작업 일정을 계산하는 중년이 되었다. 나는 시간 여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좋다.
4. 다시 겨울, 일기
말하자면 이 책은 1994년을 추억하는 2004년의 ‘일기’로 시작해서, 2004년을 추억하는 2023년의 ‘일기’로 끝나는 셈입니다. 1994년에서 2023년에 이르는 30여 년의 시간이 그 사이에 끼여 있습니다. 30년이라니, 어쩐지 어색하고 어리둥절한 기분이 드는군요.
작가 후기
■ 차례
1. 그해 겨울, 일기
1-1. 자작나무, 일기
1-2. 백야, 일기
2. 에크리, 또는 메모들
2-1. 산세리프에서 소설 쓰기
2-2.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시 쓰기
2-3. 아름다움, 사유, 침묵
2-4. 삶, 자유, 정치
3. 에크리, 또는 장소들
3-1. 동물원
3-2. 문학의 집
3-3. 금각사
4. 다시 겨울, 일기
작가 후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