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아주 멀어진 시원으로 회귀하는
비밀의 통로를 하나쯤 갖고 있다”
광활한 사막과 호흡하며 문학의 심연을 탐구한 소설가의 고백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이효석문학상 수상 소설가 최윤
인생의 주제를 망라한 신작 산문집 출간!
“가장 뛰어난 증언의 문학”(김병익)이라는 수사와 함께 등장해 동인문학상, 이상문학상, 이효석문학상 대상을 수상하며 오랜 시간 한국문학을 대표하는 살아 있는 현대 고전으로, 빼어난 작품들로 독자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온 소설가 최윤의 신작 산문집 『사막아, 사슴아』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1978년 『문학사상』에 비평 「소설의 의미구조분석」을 발표하며 문학평론가로 데뷔하고, 1988년 『문학과사회』에 중편소설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영화 「꽃잎」(1996)의 원작 소설]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작가가 첫 산문집 『수줍은 아웃사이더의 고백』(문학동네, 1994) 이후 30년 만에 묶어낸 귀한 두번째 산문집이다. 치열한 생활의 현장에서 소설가로, 교육자로, 신앙인으로, 신실한 독자로 문학적 삶을 체현하며 차근차근 세월을 밟아온 작가의 목소리가 오롯이 담겼다. 그간 신문, 잡지 등 여러 지면에 기고한 칼럼과 수필, 서평, 강연 원고를 묶은 것으로서 다양한 주제로 독자와의 대화를 시도한 작가의 생생한 육성을 느낄 수 있다. 소박한 일상과 여행, 문학적 고민 등 인생의 주제를 망라한 3부 구성으로 37편의 글을 실었다.
모호성 그 자체로서 드러내는 존재의 무한한 의미(정과리), 정신의 모험을 통한 비극적 인간 조건에 대한 고찰(김치수), 비언어의 언어가 낳은 강력한 환대의 연결 고리(박혜경), 개인과 역사의 변증법적인 만남의 풍경(강동호) 등으로 일컬어진 최윤의 작품 세계는 산문에 고스란히 옮아와 우리 시대 문학이 길어 올린 따뜻한 ‘환대’의 메시지로, 인생이라는 망망대해를 헤쳐 갈 소중한 지침이 되어줄 것이다.
인생의 책, 여행, 교육, 신앙……
타자와 동행하는 아름답고 숭고한 여정
그들은 다가오는 고난을 피하지 않는다. 삶이 우리에게 갑자기 던지는 시련을 선물처럼 감사히 여기며 이겨내는, 글로 씌어지지 않은 그들의 이야기가 결국은 다음 세대의 지침이 된다. 어떤 명망 있는 사람들의 기상천외하고 감동적인 사건보다 더 값진, 진짜로 다음 세대에 물려주고 싶은 이야기인 것이다. ―「12월의 열매」에서
이 책의 1부 ‘인생유행人生遊行’에서는 대학 교단에서 오랜 시간 청년들과 함께한 교육자로서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쉴 틈 없는 현실을 살아내면서 ‘소설가’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성숙의 탐험”(「12월의 열매」)을 나누기 위해 세상에 손을 내밀었던 부단한 시도들, 문학을 하고, 가르치고, 문학으로 살아가는 와중에 겪은 크고 작은 에피소드가 생생하게 담겼다. 2부 ‘사막아, 사슴아’에서는 작가가 여행자로서 ‘사막’이라는 특수한 공간에 집중한 이유를 더듬어볼 수 있다. “한 본질이 또 다른 본질을 무화시키는 이율배반”(「돌아가야 할 때」)의 풍경이 펼쳐진 사막을 통한 깨달음이 순수한 내면의 속삭임과 어우러져 치유로 나아간 과정은 깊은 울림을 전한다. 본문 사이사이에 실린 작가가 직접 촬영한 사진은 묘미를 더한다. 3부 ‘빛이 머무는 동안에’에서는 자연과 종교, 타자와의 ‘관계’를 다루는 한편 문학이 일구어낸 전 인류를 향한 드넓은 공동체 정신과 그를 발판 삼아 시대의 불안을 딛고 평화를 향해 나아갈 것을 염원하는 작가의 또렷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나의 소박한 경험으로는 사막 깊숙이 들어갔을 때 영원과 고요가 결합되는 기이한 순간에 근접하는 것 같다. 삶의 흔적이 희박한 그곳에서 자연은 가장 본질적인 몇 요소로 요약된다. 사막에서 나는 기이하게도 그만큼 단순화된 존재의 원형을 되찾는 것 같은 착각을 한다. 그것이 나로 하여금 마치 명절 때 고향을 방문하듯이 나의 근원을 찾아 사막으로 떠나게 한다. ―「속도와 잡음」에서
산문집 전반에서 존 밴빌, 조르주 페렉, C. S. 루이스, 응구기 와 티옹오, 김현승, 엔도 슈사쿠, 알베르 카뮈,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등 작가가 사랑한 문학작품을 다룬 서평을 읽을 수 있다. 최윤은 작품의 내용을 뛰어넘어 ‘작가란 무엇인가’ ‘문학은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되새기며 문학가로서의 신념과 그에 따른 구체적인 실천을 역설한다.
아름답고 절제된 문체, 전통 소설의 기법을 벗어나 언어적 실험을 이어나가며 관념적인 주제를 다채로운 알레고리로 다뤄온 최윤의 소설은 시대와 호흡하며 문학의 현재를 꾸준히 갱신해왔다. 작가가 솔직하게 드러낸 사적인 순간들에서 거듭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실존적 고뇌에 함몰되지 않는 부드럽고 따뜻한 시선이 늘 바깥세상을 향해 열려 있다는 것이다. 동시에 그것은 지칠 줄 모르는, 세계를 향한 희망과 믿음으로 이어진다. “당장은 아무 일이 없어도 공감은 결국 무언가를 하게 한다. 공감이 단순한 센티멘털리즘이나 감정의 과잉과 구별되는 점이다.”(「공감의 신비」)
우리 시대 문학이 길어 올린 투명한 가르침
비가역적인 시간 너머 환대의 장으로 나아가기
문학은 그 시대의 인간이 자기 자신에 대해 지니는 자화상을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한편으로는 현실적인 상태를 드러내며 다른 한편으로는 미래지향적인 인간의 격을 탐구하는 것을 소설은 멈춘 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이런 의미에서 늘 소설가의 한 눈은 현실에, 다른 한 눈은 미래에 고정하고 있는 ‘사시의 시학’을 제 작품의 특징으로 얘기해왔습니다. 이 미래는 가치의 영역이기도 합니다.
—「현대를 극복하는 공감과 환대」에서
이번 산문집에서는 작가가 집필해온 소설과 더불어 자전적 이야기를 쓴 「파편자전―익숙한 것과의 첫 만남」(『첫 만남』, 문학과지성사, 2005) 등에서 언급했던 ‘자기 소멸’ ‘자아 포기’의 개념을 한층 더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다. 최윤은 세계의 무너진 질서 속에서도 인류가 화합으로 나아가는 공고한 통로를 마련하는 데 열정적이었다. 그는 2013년 6월 한불수교 127년 만에 프랑스어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한 최초의 『불한성경』을 내놓기까지, 편집위원장으로 편찬 작업을 앞장서서 이끈 바 있다. 작가가 오랜 세월 꾸준히 시도한바 기독교의 공동체적 사랑과 문학이 지닌 사건을 만드는 힘, 즉 “언어의 실행력”의 결합, 그것이 제시하는 미래는 겸손을 통한 “더 나은 인간성의 격”으로 이룩될 것이다. “개인화되고 파편화된 인격성”(「현대를 극복하는 공감과 환대」)이 야기한 혼란의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해체되고 왜곡된 진실을 구하기 위해, 한 사람의 생활인으로서 매 순간 삶의 에피파니epiphany에 몰입한 작가의 일상은 큰 감동을 준다. 인생의 책, 여행, 교육, 신앙…… 작가의 인생을 뿌리내리게 한 여럿의 주제가 빚어낸 이야기는 ‘채움’이 아닌 ‘비움’으로 존재의 시원을 따라가고, 아름다운 음악처럼 마음에 스민다. “세상으로 난 작은 창”에 의지해 사람들과 소통하고 기록을 남긴 은수자 ‘노리치의 줄리안’를 떠올리며, 최윤은 “모든 것이 잘될 것이며, 모든 종류의 것들이 잘될 것”이라는 줄리안의 메시지를 우리 모두에게 전한다.
“문학이, 우리 문학하는 사람이 가장 잘하는 게 무엇일까” 하고. “타자의 삶의 복부에 스며들어가는 것”, “나를 비우고, 때로는 죽이고 생면부지의 타자의 삶에 들어가 ‘그 속의 진실에 홀려서’ 타자 존재의 갈피에 갈피에 접속하는 것”. 사랑의 생리에는 자아가 소멸되는 이러한 홀림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진실에 홀려서 문학에 코가 꿰였던 것 아닌가요. 이러한 문학의 행위, 문학의 생리에서부터 자아 포기는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문학과 함께 달라질 세상에서」
이 책은 아름다운 추체험의 기록이면서 현재진행형의 외침이다. “삶의 무수한 이방인에 대한 성숙한 한 인간의 태도는 이미 우리 곁에 와 있는 무수한 다름의 타인과의 ‘동행’이 아닐까”(「현대를 극복하는 공감과 환대」) 한다는 말에서 읽히듯 세계를 향한 무한한 가능성으로 열린 태도―‘환대’가 최윤 소설의 근간이 되었다. 비가역적인 시간성은 어쩌면 작은 열매를 맺기 위한 역사의 방향을 결정짓는 것이 바로 지금 이 순간임을 가리키고 있는지 모른다. 끈기와 인내심으로 구축된 소설가 최윤의 시간, “예술가는 감상자의 공감 능력을 믿고 작품을 만든다. 누군가는 내 작품을 이해하겠지 하는 믿음 없이 쓰고, 그리고, 작곡할 수는 없다. 이 무작정의 믿음이 예술의 아름다움을 만든다”(「공감의 신비」)는 믿음 아래 그는 멈추지 않고 우리에게 말을 건다.
■ 책 속으로
서유기에 나오는 화염산이 인근에 있어서 관광지로도 알려진 곳임에도 광야를 가로질러 투루판에 이르게 되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열기를 동반한 바람과 시간이 만들어낸 화염산의 모양도 기묘하기 그지없고, 타림분지와 타클라마칸사막을 따라 돌밭과 모랫길만을 거쳐 마침내 그 끝에서 만나는 투루판의 면모는 신비하기까지 하다. 훅 하고 몇 도 높은 바람만 불어도 온통 타버릴 것같이 달구어진 길 한가운데서 갑작스럽게 이름 모를 나무들이 가로수 그늘을 만들고, 도시 곳곳에 포도나무 덩굴이 아치를 이루는 이 도시가 눈앞에 솟아나는 것이다. 사막 한가운데서! (pp. 70~71)
안타깝지만 내버려둘 수밖에 없는 고난의 시간이 누구에게나 있다. 이겨내야만 더 강인해지는 향수병 같은 간헐적인 병이 있듯이. 그런가 하면 돌밭에서 어렵사리 뿌리를 내리며 농밀해지는 향기가 있다. 라방드 향의 비밀을 알게 된 이후 나는 많은 사막을 여행하게 되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사막에서 가끔 라방드 꽃밭을 환영으로 떠올린다. 둘 사이의 공통점은 돌밭이다. 그곳을 지나야 삶에서는 더 짙은 향기가 난다. 가끔 사막의 돌 틈에서 발견하는 말라버린 잡초 잎에서 더 깊고 짙은 향기가 배어 나오듯이. (p. 74)
그쪽으로 내 차가 천천히 다가가자 강아지는 피하기는커녕, 만감이 교차하는 간절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들이 어릴 때, 키우던 강아지 눈을 들여다보며 혼자 묻고 답하던 것이 생각났다. “엄마, 강아지 눈은 왜 이렇게 착해? 나쁜 일을 하지 않아 그런가 봐.” 그러나 사슴 같은 격이 몸매에서 풍기는 그 강아지는 이내 내게서 시선을 돌리더니 고개를 떨구고는 반대 방향의 숲속으로 사라졌다. 그때서야 나는 그가 외딴 산길에 버려진 유기견일지도 모르겠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p. 100)
매일의 삶은 평화보다는 전쟁에 가까운 것이 사실이기에 어느 정도 평화로운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을 유의해서 관찰하게 된다. 이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모두 자기 자신과 솔직하고 깊은 대화를 하는 것을 익힌 사람들이다. 어려움 앞에서 때로는 투지로, 때로는 겸손으로, 때로는 절제로 자신과의 평화를 유지하고 있어 주변 사람에게도 평화를 선사한다. (p. 131)
어느 날 그녀는 환상 중에 손안에 놓인 작은 열매를 봅니다. 그것이 그녀가 본 세상입니다. 그것은 우주적인 상상력의 광대한 세계에 비하면 손톱만큼 작습니다. 지구는 거대한 우주 안에 있는 사랑스러운 열매입니다. 문학은 그 작은 열매 안의 무한히 작은 한 점입니다. 그리고 그 작은 한 점이 열매를 영글게 하는 데 참여합니다. 여기 모인 작가들 각자의 문학 작업이 지구의 삶을 잘되게 하는 데 기여할 것을, 한 작은 점으로서 기대합니다. (pp. 178~179)
■ 차례
산문집으로 인사합니다
1부 인생유행人生遊行
12월의 열매
가을의 라일락
아름다운 즐거움
이면의 서사
하다, 가르치다, 살다
정직의 체험
소설 쓰십니까
인생의 책
나는 어떻게 쓰는가
공감의 신비
벼랑 아래의 외침
마중물 통장
되찾은 사과 편지
나를 버리고 돌아간 곳에서
2부 사막아, 사슴아
속도와 잡음
사막의 포도, 투루판
돌밭의 향기
지금 생각나는 몇 가지 비유
사계절의 만란한 풍경처럼
사라지는 날
들려오는 속삭임
어떤 눈빛
빈방의 주인은 누구인가
돌아가야 할 때
3부 빛이 머무는 동안에
파란 손의 마음
속닥속닥 식사 모임
어떤 여행
악마를 다루기
시작하는 평화
진정한 해방에 관하여
카빌리의 사람들
빛의 통로
망각의 갈피에서 찾은 것
힘겨운 화해들
현대를 극복하는 공감과 환대
젖은 숲의 빈터까지
문학과 함께 달라질 세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