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 한국 시의 가장 첨예한 현재!”
2023 문지문학상 후보작 및 시작 노트 수록
한국 현대 시의 흐름을 전하는 특별 기획, 『시 보다 2023』이 출간되었다. 문학과지성사는 새로운 감각으로 시적 언어의 현재성을 가늠하고 젊은 시인들의 창작 활동을 적극적으로 응원하기 위해, 2021년 문지문학상 시 부문을 신설했다. <시 보다>는 문지문학상[시] 후보작을 묶어 해마다 한 권씩 출간하는 시리즈로, 올해 세번째를 맞이했다.
시인(김언, 김행숙, 이원)과 문학평론가(강동호, 이광호, 홍성희)로 이루어진 심사위원은 2022년 5월부터 2023년 4월까지 발표된 시들을 면밀히 검토해 데뷔 10년 이하 여덟 시인의 작품을 가려 뽑았다. 올해 후보작은 강보원, 김리윤, 김보나, 문보영, 백가경, 안태운, 오은경, 이린아(가나다순)의 작품들이다. 『시 보다 2023』에는 기발표작 5편과 시 세계 바깥의 이야기를 진솔한 언어로 풀어낸다. 또한 선정위원의 ‘추천의 말’을 각 시인들의 작품과 ‘시작 노트’ 뒤에 배치해 시가 낯선 독자들도 접근하기 쉽도록 구성했다. 독자와 시인 사이를 잇기 위한 여러 노력을 모은 이 책은 “한낮의 언어와 한밤의 언어가 충돌하는 격전장”(김언)인 동시에 한국 시를 둘러싼 환대와 우정의 자리이기도 하다. “그들의 시가 더 자세히, 더 세심하게, 더 깊게 읽히기를. 그래서 이 세계가 더 가깝게, 더 멀리, 더 깊게, 더 새롭게 읽히기를”(김행숙) 바라는 마음으로, 시인마다 다르게 빛나는 시적 에너지를 기쁘게 만나보길 바란다.
* 문지문학상의 상세한 심사 경위와 심사평은 『문학과사회』 겨울호와 문학과지성사 웹사이트에 게재될 예정이다.
*검토 지면: 2022년 5월~2023년 4월 내 간행된 종합문예지, 시 전문지, 웹진
<시 보다> 기획의 말
시의 시대가 사라져버린 것 같던 시간 속에서 젊은 시인들과 그들의 낯선 감각을 다시 읽어준 독자들이 출현했다는 것은 기적이 아니다. 모든 헛된 풍문을 뚫고 한국 문학의 심층에서는 본 적 없는 시 쓰기와 시 읽기가 끊임없이 시도되고 있었다. <시 보다>는 시 쓰기의 극점에 있는 젊은 시 언어의 운동에너지만을 주목하고자 한다. 1년에 한 번 이루어지는 이 작은 축제는 선별의 작업이 아니라, 한국 시를 둘러싼 예감을 함께 나누는 문학적 우정의 자리이다. 우리가 체험하는 것은 젊은 시인들의 이름 너머에서 꿈틀거리는 ‘시’라는 사건 자체이다. 시인은 동시대가 소유한 이름이 아니라, 동시대의 감각을 발명하는 존재이다. 시는 도래할 언어의 순간에 먼저 도착해 무심한 표정으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지금 ‘시 보다’라는 행위는 시‘보다’ 더 고요하고 격렬한 세계를 열어준다.
선정위원 강동호 김언 김행숙 이광호 이원 홍성희
* 강보원, 「일어나는 일들과 일어나선 안 되지만 일어나는 일들」 외
그렇군. 모르겠다…… 내가 뭔가를 잘못했는지도.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는 농부가 아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를 만난 것도 플로리다가 아니라 경기도 김포 어디쯤이었던 것 같다. 사실 왜 내가 그를 농부라고 생각했었는지조차 잘 모르겠다. 거기엔 정말이지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파인애플 자르는 법」
2021년 『완벽한 개업 축하 시』를 펴내며 시인으로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강보원은 시대와 지금 현재의 문제점을 농담 같은 언어로 “시적 콩트를 연출”(김행숙)하듯 펼쳐 보인다. “일어난 일들이 그냥 시로 쓰일 수 있는 방법들을 찾으려고 노력”(시작 노트)하는 그의 언어는 사실 “정확한 지적 통찰의 결과”(강동호)로서 읽다 보면 자꾸만 화자와 닮은 ‘나’를 만나게 된다.
* 김리윤, 「전망들」 외
깨끗한 이불 아래서만 우리의 몸을 실감한다. 미약하게 미약하게 움직이며. 손톱 밑으로 파고드는 도시의 구조물들을 느끼며. 일주일에 두 번, 손톱 밑에 낀 세계를 깨끗하게 깎아내며. 조금씩 깊어지는 굴을 만지며. 우리는 먼지투성이 머리통으로 서로를 사랑한다.
―「전망들」
“김리윤의 언어는 나란한 활자들을 만드는 손끝의 움직임”(홍성희)이다. 익숙했던 공간은 그의 정교한 손끝에서 새로운 형태로 재탄생한다. 우리는 한 발 물러나 꿈꾸던 모든 열망이 그 낯선 공간 속에 쏟아지는 것을 바라볼 수 있다. 그의 시 ‘전망’은 말하자면 “동시대의 가장 정밀한 시적 구축물 중의 하나이다”(이광호).
* 김보나, 「세 명의 신을 위한 세 개의 방」 외
델타
내 것이 아닌 별의 이름을 부르며
나는 궁금해했다아름다운 것을 빌지 않고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유리 우주」
김보나의 시는 쉽게 읽히는 듯하지만 그 속에 품은 통찰력과 깊이를 가늠하기 어렵다. 그의 시 세계는 “성녀도 아니고 천사도 아니면서 가끔 신을 생각”(시작 노트)하게 하고, 다정하고 정직한 언어로 스쳐 지나갈지도 모르는 이에게 “사랑의 고백을 예약”(김행숙)한다. 시가 끝나도 그다음을 궁금하게 한다.
* 문보영, 「방한 나무」 외
내가 있는 곳은 서늘하다
그 서늘함으로 나는 살아갈 수 있다
살아간다는 말은 민망하다
살아 있다는 말은 과장이다
―「정글과 함정」
“자유롭고도 능숙한 언어”를 구사한다는 평을 들으며 2016년 중앙신인문학상을 통해 작품 활동을 시작한 문보영. 그의 시들은 마치 언어로 만든 전시 작품장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듯하다. “딴생각에 딴생각을 이어가는 와중에 발생하는 딴생각의 세상”(김언)에서 탄생한 아이디어가 다채롭게 펼쳐지는 장면을 관람하길 권한다.
* 백가경, 「사이파이 비문을 위한 간단한 메모」 외
어머니가 있었죠 어머니는 제 앞에서 길을 안내하셨습니다 대로를 건너서 작은 오솔길로 저를 이끌었어요 조금 걷다 보니 길이 끊겼고 어머니는 밤의 바다로 황금 로봇이 되어 날아가셨죠 바다와 하늘의 경계에서 저만 남았어요
―「Cul-De-Sac―늘 그렇듯 당신이 할 수 있는 가능한 한 최고의 속도로 읽을 것」
백가경의 “세심하게 고안된 체계”(홍성희)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우리를 자신 바깥에서 지켜보는 목격자로 만든다. 나와 나의 관조라는 틈에서 상상력이 자라나고 “익숙한 풍경을 지적인 사유와 미래적 방향성으로 상징·조작”(이원)한다. 이 모든 것이 그에게는 ‘간단한 메모’이자 ‘놀이’이다.
* 안태운, 「기억 몸짓」 외
다 까고 나니 장면은 거기서 전환되었고, 대야의 물속에는 이제 물뱀과 개구리와 소금쟁이가 드나들었고, 구름의 혈연처럼 보이는 아이가 손가락을 담가 흐느적흐느적 움직였다. 이상한 꿈이다. 이상한 꿈이야. 구름은 눈물을 흘리며 어디로든 가보게 되었다.
―「돌과 구름」
스스로를 “연습하는 사람”(시작 노트)이라 말하는 안태운은 부단히 걷고 또 연마한 결과로 “상상력을 빌리는 것이 아니라 ‘되기’를 실행하”(김행숙)는 세계를 구축한다. “더 자유롭고 유연한 시의 상상적 모험”(이광호)이 탄생한다. 이를 바탕으로 내내 따뜻하고 애정어린 시선을 유지하는 그의 시 세계는 무한성을 가늠케 한다.
* 오은경, 「새장」 외
거리에는 기대어 쉴 나무 하나 없다 벚꽃 잎도 전부 사라졌다
[……]
네가 말했다 돌아가고 싶었지만 이미 늦었다 뒤를 돌아보니 새 떼가 날아오고 있었다 너를 관통했다
―「내가 먼저 피하려고 했어」
시집 『한 사람의 불확실』과 『산책 소설』에서부터 정적이고 담담하지만 집요한 시선으로 시 세계를 확장해온 오은경은 “다가갈수록 오히려 멀어지고 희미해져가는 존재들과의 거리감 속에서” “지속적으로 낯설어지고 익명화되는 자기 자신과 마주친다”(강동호). 이 미묘한 긴장감은 우리를 다른 차원에서 한참 머물게 한다.
* 이린아, 「끈」 외
두들기는 소리는 사실보다는 진심에 가깝습니다 미래의 주술가나 과거의 철학자가 아닌 송아지와 염소의 등을 두들기는 데에서 배우는 이유는 살포시 손을 대었다 뗄 수 있는 것들로만 침묵을 놓아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오Griot」
“이린아의 시는 세계를 다시 배우는 자의 언어”이자 “이 세계를 자신의 감각과 사유로 다시 해석하고 이해하려는 자의 언어”(김언)이다. 결코 본 적 없는 명랑과 천진을 장착한 그의 시를 마주하면 “신체의 리듬을 담는 언어의 퍼포먼스”(이광호)를 보듯 몸속에 웅크리고 있던 리듬 세포들이 깨어난다.
■ 책 속으로
전체적으로 사물들은 올바르고 따분하고 그것이 흥미를 끈다. 오늘 도착한 올리브 나무는 서랍에 올려둘 만한 크기의 작은 화분에 심겨 있고 몰랐지만 조화였는데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고 멀리서 보면 잘 구분되지도 않았다.
―강보원, 「진부함이 없이는 견디기가 어렵다」
다시, 당신은 언제나 사방으로 열려 있는 선을 본다.
선은 부드럽게 사랑의 표면을 흘러 다니며 테두리를 헝클어뜨린다.
사랑과 함께 미래의 사랑을 향한다.
―김리윤, 「가변 테두리의 사랑」
겨우 날개가 달린다고
천사가 되지는 못할 테지만
검은 날개를 달고도
악마가 될 수 없다면
사람과 공생하는 연습을 시작하자
―김보나, 「윙 스팬Wing Span」
왼쪽으로 가도 오른쪽으로 가도 뒤로 가도 앞으로 가도 만나게 되어 있다 언젠가 만나게 되어 있으므로 미래가 이불 속으로 숨어 들어가는 건 자신이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희열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곳이 아닌 곳에서 나는 덜 비겁해질 것만 같다
―문보영, 「지나가기」
좌대가 없어도 작품은 문제없이 관람되듯이 인간은 관이 없어도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목수는 아주 쉽게 상상할 수 있었겠지요. 좌대는 작품을 돋보이게 만들 수도 작품의 일부가 될 수도 오히려 더 도드라지는 작품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요.
―백가경, 「사이파이 비문을 위한 간단한 메모」
너는 얌을 쥐고 가네. 꼭 쥔 채 두 얌을 바라보네. 양손에 하나씩 두 얌. 두 얌을 서로 맞대어본다. 두 얌을 양 호주머니에 넣어본다. 다시 꺼내본다. 두 얌. 너는 얌을 쥐고 가네. 두 얌을 네 두 뺨에 오래 문질러보네. 두 얌을 높이 쳐들어본다. 두 얌을 저글링해본다. 너는 잘한다. 잘하네. 던지니 두 얌은 굴러가네. 너는 두 얌을 바라보기만 한다. 풀밭에서 두 얌이 멈출 때까지.
―안태운, 「얌 연습」
너무 멀리 가지는 말아
돌아오기 겁날 수도 있어 (이제부터는 비유를 통해서만 말할 수 있다) 아무렴 다시 시작해보자 이대로 네가 없는 시간보다 더 겁나는 게 있어어째서 나는 숲속에 있으면서 숲을 알아차리지 못했을까?
숲이든 아니든 네가 봤다는 거 너의 눈에 비친 거
네가 만들어낸 환상 (너의 믿음, 정체가 무엇이든)
―오은경, 「갈림길」
긴 머리를 끈처럼 흔들던 아이가 바닥을 잡아당기고 있다면 그건 온몸이 빨개진 사람을 보고 아무도 빨개지지 않는 오후와 같겠죠 빨개진 몸을 감싸는 일이 그들에게는 고된 것보다 슬퍼하지 않는 것에 가깝잖아요?
―이린아, 「끈」
■ 차례
강보원
일어나는 일들과 일어나선 안 되지만 일어나는 일들
모조 해탈 기계
진부함이 없이는 견디기가 어렵다
당연한 것과 당연하지 않은 것
파인애플 자르는 법
시작 노트 | 똑똑이를 생각하며
추천의 말
김리윤
전망들
손에 잡히는
전망들
전망들
가변 테두리의 사랑
시작 노트 | 새 손으로
추천의 말
김보나
세 명의 신을 위한 세 개의 방
유리우주
윙 스팬Wing Span
여름 느낌 단편
딸기의 고장에서 태어난 사람
시작 노트 | 천사의 몫
추천의 말
문보영
방한 나무
적응을 이해하다
천국에서는 누가 깨워주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일어나야 한다
정글과 함정
지나가기
시작 노트 | 세탁기에서 바지 꺼내기
추천의 말
백가경
사이파이 비문을 위한 간단한 메모
Cul-De-Sac―늘 그렇듯 당신이 할 수 있는 가능한 한 최고의 속도로 읽을 것
유타나시아코스터―현재 어트랙션 대기 시간 여기서부터 125분
파멸학 달력―10월 삽화 제작 참고용 메모
에델바이스 작은 뜰 펜션
시작 노트 | 시 찾기 노트
추천의 말
안태운
기억 몸짓
기러기보자기 연습
돌과 구름
얌 연습
모락모락
시작 노트 | 뒤척임
추천의 말
오은경
새장
갈림길
이인용 자전거
내가 먼저 피하려고 했어
끈
시작 노트 | 재회한다는 뜻
추천의 말
이린아
끈
도그 바이트Dog Bite
그리오Griot
필라테스 언니
서니사이드 업Sunny-side up
시작 노트 | 왜 네 몸을 두드리면 내 소리가 날까
추천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