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호를 펴내며
대화적 비평을 모색하며
죽기 마련이라는 데에 넋을 잃고
생각에 잠겨서 사는 건 좋지 않으리. 다만 좋은 것은
하나의 대화Gespräh이니, 이야기하기를
마음속 생각에 대해서, 많이 듣기를
사랑의 날들과,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횔덜린, 「회상」 마르틴 하이데거, 『회상』(신상희·이강희 옮김, 나남출판, 2011)에서 재인용.
최근 들어 비평의 위기를 지적하는 목소리가 다시금 심심치 않게 들려오고 있다. 물론 문학 비평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냉소적 비판과 허무주의적 종언론이 어제오늘의 일은 아닐 것이 다. 그러나 근래 다시 대두되고 있는 위기론은 비평이 그간 의욕적으로 실천해나간 변화와 혁신의 과정 및 결과를 대상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 가볍게 흘려들을 이야기가 아닌 지도 모른다.
동시대 한국문학에 관심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 2010년대 중반이라는 전환기를 통과 하며 비평이 다양한 혁신과 쇄신을 모색해왔다는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신경숙 표절 사건, 문단 내 성폭력 해시태그 운동, 페미니즘 리부트 등의 중요한 국면들을 거치며 비평은 그간의 제도권 문학평론에 누적된 한계를 돌아보고 , 그에 대한 반성과 극복을 도모하며 새 로운 담론적 지평을 열기 위해 노력해왔다. 비판적이고 도전적인 의제들을 적극적으로 발굴 하는 가운데 문학과 현실 사이의 실천적 접면을 확장하려 시도하는가 하면, 문학 출판 제도 의 권력과 위계를 무너뜨리기 위한 다양한 실제 기획을 낳기도 했던 것이다. 이러한 비평의 적극적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비평의 기능과 역할에 대한 회의와 우려가 거듭 제기되고 있는 현재의 배경은 무엇일까.
관련하여 다양한 현실 진단과 향후 전망이 제출될 수 있을 것이다. 돌이켜보건대 한쪽에서는 ‘비평 무용론’으로 대변되는 비판적 현실 인식이 운위되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비평의 혁신과 형질 변화에 내포되어 있는 긍정적 의미를 강조하는 반론이 제기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때 관건은 여러 엇갈린 의견을 서둘러 정리해 하나의 합의점을 도출하는 대신, 현존하는 의견들의 다양성이 지속적으로 공존할 수 있는 어떤 숙의의 공간을 마련하 는 것, 그리하여 비평에 대한 깊은 고민들이 더 많은 대화와 토론의 시간 속에서 공유될 수 있는 계기를 준비하는 것이다. 각종 종언론과 무용론의 형식으로 유포되고 있는 비평에 대 한 뿌리 깊은 냉소와 비관주의에 견인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동시대 문학적 현실을 함께하고 있는 동료들이 서로의 존재와 생각을 확인하는 시간과, 그리하여 지금 우리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정직하게 응시하고 문학에 대한 비평적 사랑과 헌신을 대면하는 공통 의 장소가 요청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시선과 관점, 그리고 이념의 차이로 인해 때로는 격한 논쟁이 수반될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일시적인 오해, 갈등, 불화의 순간 을 경험해야 한다 하더라도 비평적 대화의 가능성에 대한 신뢰와 용기를 견지할 수 있다면, 우리는 더 많은 대화의 자리를 통해 비평이 오늘날 당면한 여러 난제를 함께 사유해나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이번 호 『문학과사회 하이픈』에서는 2020년대 이후의 비 평적 흐름을 대상으로 새로운 대화의 장을 마련해보고자 했다. 이를 통해 2020년 전후에 출 현했던 다양한 비평적 의제와 논쟁 들 가운데 오늘날 좀더 유의미하게 확장시킬 수 있는 쟁 점들이 무엇이 있을지 점검했다.
홍성희의 「두께만큼 깊은」은 비평의 권력과 위계와 관련하여 평단에서 이루어졌던 그 간의 논의를 차례대로 짚어나가면서, 수많은 혁신과 쇄신의 약속 위에서 마련된 제도적 대 안이 오히려 문학장의 은밀한 평면화를 낳은 것은 아닌지 질문하고 있다. 이를 통해 문학과 비평의 미래에 대한 무수한 기획의 배면에서 작동하는 욕망을 정직하게 탐문하지 않을 때, 일종의 자기모순과 기만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계한다. 비평이 윤리적·정치적 안전지대로부터 나아가 “안전하지 않은 위치이자 공간으로서 자신의 한계를 밀고 나가”야 한다는 주문은 우 리 비평장이 처한 현실을 반성적으로 되돌아보게 만든다.
성현아의 「비평(非平)한 비평(批評)—비평의 경량화에 대한 비판과 옹호」는 최근 비평 이 보여주는 에세이화, 리뷰화 현상을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시각들에 대한 일종의 반론에 해당하는 글이다. 그는 최근 비평의 경량화 현상이 나타나게 된 배경과 원인을 분석하는 가 운데, ‘취존의 문화’ 속에서 자신만의 문학적 기준을 마련하기 위한 비평가들의 고독한 각개 전투를 목도하고 , 시대적 변화에 응답하기 위한 비평의 능동적 실천성을 강조한다.
최다영의 「‘독자 –비평(가) 공동체’를 위한 제안」은 ‘독자’에 대한 새로운 논의가 진행되 는 과정에서 발생한 비평적 논쟁을 다시 검토하며, 독자와 비평가 사이의 적극적 상호 소통 을 활성화시킬 아이디어에 주목한다. “’독자 –비평가’의 시대를 예비하기 위한 실천”으로 요 약될 수 있는 그의 제안은 “비평장을 구성하는 필연적인 조건들의 회로를 재배치하는 일”이 야말로 비평가 공동체의 공생 조건을 도모하고 새로운 독자 –비평가의 유입을 가능하게 하 기 위한 일이라는 새로운 방향성을 담고 있다.
최진석의 「비평 이후의 비평—2020년대 문학적 의제의 흐름과 지형」는 코로나19 팬데 믹을 통과하며 부상하게 된 전 지구적 차원의 의제가 비평에 끼친 영향을 이론적으로 검토 한다. 최근 평단에서도 화두가 되고 있는 포스트휴머니즘과 신유물론을 비롯해, 인공지능 기술의 대두로 인해 문학과 비평의 토대에 해당하는 전통적인 ‘인간’ 개념이 흔들리고 있음 을 지적한다. 그의 글은 비평이 향후 적극적으로 사유해야 할 새로운 이론적 과제를 제시 하는 중이다.
노태훈의 「사라진 한국문학봇과 챗–비평의 시대」는 챗GPT의 등장으로 인해 문학 비 평이 당면하게 된 곤혹과 딜레마를 조명하고 있다. 과연 AI의 시대에도 평론가는 기존의 전 통적인 기능과 역할에 있어 비교 우위를 주장할 수 있을까. 이러한 고민 끝에 그는 평론가의 주관성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교류의 중요성을 확인하고 , 디지털 시대 비평이 실험할 수 있 는 새로운 대화의 형식들을 제안한다.
이은지의 「비평의 오물—물밑을 휘저으며」는 ‘정치적 올바름’과 관련하여 필자가 경험 했던 논쟁의 시간을 복기하며, ‘호명을 통해 작동하는 문단 시스템’과 그 안에서 간과되고 있는 ‘평론가의 감정’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평론가에 대한 고질적인 소모와 착취의 메커 니즘을 지적하며, 이러한 구조와 시스템으로 넘어선 “숙의의 비평을 희망”하는 그의 제언이 시사하는 바는 결코 작지 않다.
한편 ‘좌담’ 코너에서는 평단에서 활발하게 활동하며 최근에 첫 평론집을 출간하거나 출간할 예정에 있는 평론가들과 함께 풍성한 대화를 나누었다. 한국문학의 전환기 또는 격 변기 전후를 경험했던 비평가들의 진솔한 자기 고백이 흥미롭게 읽힐 수 있을 것이다. 좌담 에 참석해준 강경석, 김건형, 김나영, 박혜진 평론가에게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평론가들의 사이의 대화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창작 현장의 풍요로움이 전제되어 야 한다는 사실을 굳이 강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번 호 창작란에서는 김언희, 박상순, 유희경, 주하림, 김유림, 배시은, 오은경, 고민형, 박지일, 변혜지의 시와 백가흠, 윤해서, 전하영의 소설이 풍부한 대화거리를 마련해주었다. 더불어 김주원, 송현지, 이경수, 하혁진, 선우은실, 심완선, 양윤의, 이경재, 이소 , 최선교 , 황호덕이 선보이는 텍스트와의 섬세하고 날카로운 대화의 현장을 돌아보는 즐거움도 크다.
이번 호 ‘지성’란에서는 최근 타계한 브뤼노 라투르의 글 「왜 비판은 힘을 잃었는가 ? 사 실의 문제에서 관심의 문제로」를 소개한다. 문학평론가 이희우의 번역과 해제가 실린 해당 코너를 통해 오늘날 비판 이론이 당면한 현실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을 것이 다. 독자들의 일독을 권한다.
끝으로 그동안 격년으로 시행하던 목포문학상 장편소설 공모를 올해부터 ‘박화성소설 상’으로 새롭게 개편하며 첫 수상자를 배출하게 되었음을 기쁜 마음으로 알린다. 수상작으 로 선정된 김혜빈의 「그라이아이」에 대한 자세한 심사평과 수상 소감은 지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앞으로도 『문학과사회』는 보다 창의적이고도 도전적인 상상력을 통해 우리 문학의 현재와 미래에 관한 풍성한 대화의 자리를 지속적으로 마련할 것임을, 동료 평론가들과 독자들에 게 약속드린다.
편집동인 강동호
■ 차례
| 본권 |
가을호를 펴내며
시
김언희 카페 메이지 외 1편
박상순 배꼽티를 입으신 아발로키테스바라 외 1편
유희경 흑백 외 1편
주하림 Shallow Water Blackout 외 1편
김유림 헌신 외 1편
배시은 체공 외 1편
오은경 보물찾기 외 1편
고민형 달의 주변을 돌다 외 1편
박지일 물보라 외 1편
변혜지 무해한 놀이 외 1편
소설
백가흠 빗소리
윤해서 두 발 움직이면 세 발 따라붙는
전하영 검은 일기
리뷰
김주원 ‘스위트 홈’의 우화들과 ‘비신비’의 모놀로그
—이소호, 『홈 스위트 홈』
—백은선, 『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
송현지 호주머니의 시
—오은, 『없음의 대명사』
—황인찬,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이경수 슬픈 유령들의 세계
—박시하, 『8월의 빛』
—김상혁, 『우리 둘에게 큰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하혁진 나의 가장 먼저 지닌 것
—심지아, 『신발의 눈을 꼭 털어주세요』
—여세실, 『휴일에 하는 용서』
선우은실 삶의 고통을 건너가는 두 가지 방식
—김이설, 『누구도 울지 않는 밤』
—이주란, 『별일은 없고요?』
심완선 지금과 다른 방식으로 이야기할 수 있다는 가능성
—백온유, 『 경우 없는 세계』
—현호정, 『고고의 구멍』
양윤의 사이존재‘들’과 비존재‘들’
—김멜라, 『없는 층의 하이쎈스』
—백수린, 『눈부신 안부』
이경재 끝나지 않는 6·25, 끝날 수 없는 글쓰기
—전상국, 『굿』
이소 잿빛 거미들의 기억법
—권여선, 『각각의 계절』
최선교 시대와 마음
—장류진, 『연수』
—이서수, 『젊은 근희의 행진』
황호덕 정지돈, 책세계와 전승에의 사명
—정지돈, 『인생 연구』
—『땅거미 질 때 샌디에이고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운전하며 소형 디지털 녹음기에 구술한, 막연히 LA/운전 시들이라고 생각하는 작품들의 모음』
지성
브뤼노 라투르 왜 비판은 힘을 잃었는가? 사실의 문제에서 관심의 문제로
이희우 비판을 다시 쓰는 것이 가능할까?
2023년 박화성소설상 발표
김혜빈 그라이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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