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들고 구석진 곳이 아니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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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 S. 엘리엇의 말이다. “미숙한 시인들은 모방한다. 원숙한 시인들은 훔친다.” (91쪽)
〔……〕 나는 내가 읽은 것을 모조리 훔쳤지. 진짜 도둑이란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사방팔방을 경계하고, 온몸을 잔뜩 긴장한 채, 노심초사하는 눈빛으로, 한밤중에 전혀 모르는 집에 혼자 들어가는 자일세.〔……〕나는 혼자 어둡고 고요한 집에 들어갔지. 지금 혼자 죽어가듯이, 책을 읽느라 평생 혼자였던 것 같네. (33쪽)
독서는 소리 없는 절도이다. (41쪽)
책이 열린다.독서는 삶을 향한 통로를, 삶이 지나는 통로를, 출생과 더불어 생겨나는 느닷없는 빛을 더 넓게 확장한다.독서는 자연을 발견하고, 탐색하고, 희끄무레한 대기에서 경험이 솟아오르게 한다. 마치 우리가 태어나듯이. (13쪽)
나는 책을 좋아한다. 책의 세계가 좋다. 어느 책에서나 형성되어 떠오르며 퍼지는 구름 속에 있는 게 좋다. 계속 책을 읽는 게 좋다. 책의 가벼운 무게와 부피가 손바닥에 느껴지면 흥분된다. 책의 침묵 속에서, 시선 아래 펼쳐지는 긴 문장 속에서 늙어가는 게 좋다. 책이란 세상에서 동떨어졌으나 세상에 면한, 그럼에도 전혀 개입할 수 없는 놀라운 기슭이다. 오직 책을 읽는 사람에게만 들리는 고독한 노래이다. _9쪽
독자가 몸을 웅크리고 앉은 벽의 모퉁이와 독자의 시선 아래 펼쳐진 두 지면으로 이루어진 모퉁이는 하나의 세계를 구성한다.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는 ‘다른 세계’를 소리 없이 얻게 되는 틈새이다.영혼이 이 틈새로 파고든다. _13~14쪽
독서는 책이 펼쳐지는 순간, 그리고 책에서 찾거나 얻으려는 의미가 이러한 끊임없는 탐색과 다르지 않은 영혼에 불을 지피는 즉시 이 세계를 떠난다.독자란 두 지면으로 이루어진 자신의 ‘하늘을 나는 작은 양탄자’에 올라타서 바다를 지나고, 아주 먼 거리를 주파하고, 수천 년을 건너뛰는 마술사다. _21쪽
모든 책에는 드러나는 ‘무언의 의미’가 있다. [……] 습득된 언어를 앞지른다고 주장하는 이 ‘무언의 의미(sensus mutu)’에 대해 더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다. [……]내게 바다에 대해 말하지 말라, 뛰어들라.내게 산에 대해 말하지 말라, 올라가라.내게 이 책에 대해 말하지 말라, 읽어라, 고개를 심연으로 더 멀리 내밀어 영혼이 사라지게 하라. _24쪽
얘야, 아들아, 내 삶에는 한동안 두문불출했던 시기, 번민을 가라앉히려고 하루에 열 권 분량의 책이 필요했던 시기가 있었다. 나는 근처 도서관에 가곤 했지. 사는 게 그야말로 고역이었거든. 절망을 잊게 해줄 책들이 없었다면 난 살아남지 못했을 거야. 그런데 이런 고통을 견디며 살아남은 기쁨이 있다면 그건 훨씬 더 심오하고 거의 매혹적인 다른 기쁨이란다. 즉 이 모든 고통을 멀리서, 가령 어둠 속에서, 먼 곳에서, 여름에 피어오르는 연무煙霧 속에서 관조할 수 있다는 거야. . _31~32쪽
그러므로 책들은 고요해진 언어의 대양에서 일어나는 파도 같은 것이다. 책들은 포말처럼 솟구친다. 책들은 살아 있는 구어를 묵묵히 독서하는 사람의 몸 안의, 내부의, 가장 깊은 곳의 세계에 죽어서 유령이 된 상태로 묻어서 은닉한다. _74쪽
문법학자 퀸틸리아누스라면 라틴어 동사 ‘adsimulari(비슷하게 만들기)’보다 의당 ‘suum facere(제 것으로 취하기)’라는 표현을 선호할 것이다.‘동일자를 복사하기’나 ‘다른 것이 되기’가 아니라, 저 자신이 아닌 무엇을 ‘제 것으로 만들기’의 문제이다.이런 의미에서 자기soi 안에 ‘자기soi’는 없고, 몸에 맞게 ‘제 것으로 만들기’가 있을 뿐이다.독서는 합병한다. _97쪽
나는 감히 이렇게 말한다. 글의 발명이 불의 발견보다 더 중요한 것이라고. 그야말로 인간의 혁명이라고. 구어의 표기법은 어느 것이나 인간 집단의 심장이라 할 집단의 언어를 객관화시켰다는 점에서 ‘의인화’ 혁명이었다. [……] 프로메테우스는 하늘에서 불을 훔쳐 인간에게 주었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공중에서 언어를 훔쳐 글 속에 묻었다. [……] 문인(fur)도 죽은 문인들—세계의 상류를 이루는 모든 망자들—에게서 그들의 탐구가 묻힌 글을 훔쳤다. _106~107쪽
■ 차례
제1장 지상 낙원으로의 여행
제2장 간제에게 보낸 제아미의 편지
제3장 fur(도둑)
제4장 바그다드의 기사
제5장 알프alf 혹은 알레프aleph의 A
제6장 재의 수요일
제7장 가에타에 내걸린 키케로의 머리
제8장 Benveniste의 B
제9장 문학이라는 말에는 기원이 없다
제10장 중국의 새들
제11장 어린애란 무엇인가?
제12장 Litterarum amor(문자 애호)
제13장 에페수스의 헤라클레이토스
제14장 정신분석
제15장 마호메트에게 나타난 가브리엘 천사
제16장 녹색
제17장 자서전
제18장 타피스리
제19장 잠의 문을 새벽이라 한다
제20장 그림자는 시간 속에서 자라는 꽃이기 때문이다
제21장 테네브레의 딱딱이
제22장 알페이오스 설화
제23장 대나무 테라스들
제24장 침대란 무엇인가?
제25장 이 책이 조판된 가라몽 서체에 관하여
제26장 알려지지 않은 악기, 알려지지 않은 책
제27장 가장 감미로운 놀이
제28장 문인들의 희귀함, 등귀騰貴와 실종
제29장 Vertumnum Janumque liber…(베르툼누스와 야누스 성향의 책……)
제30장 낭만적인 것들
제31장 옛날의 냄새
제32장 페트라르카가 키케로에게 편지를 쓴다
제33장 시간 도둑
제34장 암고양이 무에자
제35장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표절에 대하여
제36장 독자讀者인 왕
제37장 Y자에 대하여
제38장 사랑의 신비로운 본성
옮긴이의 말 · 도둑과 도둑질에 관한, 혹은 거듭re-태어나기naissance에 관한 서사
작가 연보
작품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