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이자 산문가 민병일이 쓴,
모든 세대를 위한 메르헨
“삶이 아름다운 건 꿈을 꿀 수 있기 때문이야”
시인이자 산문가인 민병일이 ‘모든 세대를 위해’ 쓴 동화 『바오밥나무와 달팽이』가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독일 함부르크 국립조형예술대학에서 시각예술학을 공부한 사진작가이자 편집인, 북 디자이너이기도 한 저자는 그의 전작 『바오밥나무와 방랑자』에서 시적 영감으로 가득한 이야기와 반짝이는 사유의 문장들을 통해 현대인이 잃어버린 꿈과 설렘, 기적과 순간, 열정의 가치를 동화적으로 구현해낸 바 있다. 이번에 출간한 『바오밥나무와 달팽이』는 전작과 마찬가지로 서양 미학에 기초한 향기로운 사유의 향연을 펼쳐 보이며, 예지와 몽상 그리고 초현실적 꿈이 가득한 메르헨의 세계로 독자들을 초대한다.
전작에 이어 『바오밥나무와 달팽이』에서도 그 크기가 높이 20미터, 둘레 40미터에 이르며 하늘을 떠받치듯 우뚝 솟아 5천 년을 사는 신비한 나무인 인격화된 ‘바오밥나무’가 등장한다. 그와 더불어 “별이 빛나는 우주를 보고 꿈을 꾸며 먼 곳을 동경”하는 숲속의 몽상가 ‘달팽이’가 바오밥나무와 함께 꿈을 찾아 광막한 우주 여행길에 오른다. “꿈은 ?(물음표)예요!”라고 말하는 몽상가 달팽이는 먹고사는 현실의 문제가 그 무엇보다 중요한 달팽이 세계에서 여느 달팽이들과는 달리 꿈을 꾼다는 이유로 쫓겨나듯 떠나왔다. 스스로 빛을 내며 반짝이는 파란별을 찾아가기 위해. 파란별을 만나면 삶을 반짝이게 하는 빛을 어떻게 내는지, 꿈이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물어보기 위해.
이 책은 바오밥나무와 달팽이가 파란별을 찾아 떠난 여행길에서 여러 방랑자와 만나 나누는 대화를 바탕으로, 동화 형식의 철학 우화가 흥미진진하게 펼쳐진다. 그들은 ‘대초원별을 찾아가는 코끼리’ ‘황금방망이 꼬리털여우’ ‘꽃의 소행성의 꽃들’ ‘회색 눈사람 행성 울티마 툴레에서 만난 씨앗’ ‘그림 없는 그림을 전시한 화가’ ‘붉은 소파를 등에 메고 다니는 사진사’ ‘바람 구두 신은 난쟁이’ ‘카일라스로 간 소리 수집가’ 등으로 각양각색이다. 전작에서 바오밥나무와 방랑자들이 저마다 여행의 이유도, 목적도 다르지만 진정한 ‘말 건네기’를 통해 삶에 대한 깨달음을 주고받으며 서로의 존재를 찾아 나가듯, 이 책에 등장하는 바오밥나무와 달팽이 역시 방랑자들과의 우연한 만남을 통해 삶의 신비와 고독, 절망과 외로움을 이야기하고 잊힌 것들과 잃어버린 것들을 새삼 일깨우며 서로의 마음에 그리움을 묻은 채 헤어진다. 한데 무리 지어 빛나는 것 같지만 홀로, 오직 자신만의 빛으로 반짝이는 별들처럼, “낯선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별이 또 다른 별을 만나는 일”임을 깨닫는다.
“몽상가란 헛된 생각에 잠겨 자기 혼자만의 세상을 사는 사람이 아니라, 꿈을 통해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고 디오니소스적인 긍정을 찾게 하는 방랑자입니다. 은하계 별들은 서로 다른 속도와 각자 다른 방향으로 우주를 여행하며 빛을 냅니다. 사람들도 저마다의 속도와 방향에서 빛을 내며 누군가에게 신호를 보냅니다.” 「프롤로그」에서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별이다”
저자 민병일에 따르면, “속도와 경쟁하는 부산한 삶을 살아갈 때 우리의 영혼은 눈꺼풀에 자물쇠를 채우고 심연으로 꼭꼭 숨고 마는데, 이럴 땐 메르헨이 묘약이다.” 메르헨은 “지금, 여기의 조금 낯선 이야기이면서 초현실 세계이고, 초현실이면서 현실을 보다 깊이 각성할 수 있는 삶의 은유”이기 때문이다. 이 책 『바오밥나무와 달팽이』 역시 “우리 생을 낯설게 보여주어 어떻게 존재할 수 있는가를 스스로에게 묻는 따뜻한 존재론, 생을 낯설게 바라보기로서의 메르헨”이다. 메르헨 속 방랑자가 끊임없이 무언가를 향해 걸어가고 타자를 향해 건너가듯, 이 책의 등장인물들 또한 “수수께끼이고 끝없는 질문의 연쇄, 해답으로 향하는 문들이 즐비한 아케이드”(「해설」)인 삶의 여행길에서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 하염없이 헤맨다.
그 지난한 여행길에서 나무는 항상 우리 곁에 존재하는 가장 친숙한 생명체로, “살아 있는 것들에게 은신처와 꿀을 제공하는 삶의 거처”이자 “어려운 일이 생기면 찾아가 속마음을 털어놓는 정신적 지주”다. 이 책에 등장하는 바오밥나무 역시 파란별을 찾아 광활한 은하를 여행하는 몽상가 달팽이와 함께하며, 먼 길 떠나온 방랑자들에게 말을 건네고 속닥속닥 꺼내놓는 그들의 이야기에 가만히 귀 기울이는 방랑자들의 가장 친한 친구다. 「대초원별을 찾아가는 파란 코끼리」에서는 방랑자의 고독에 잠겨 있는 달팽이에게 나무 또한 꽃을 피우기 위해 “시간을 견디고, 고독에 침잠하며, 상처에서 새순을 밀어 올리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다독이는가 하면, 「장례식에 가는 달팽이들의 노래」에서는 “삶이 아름다운 건 죽음처럼 불멸을 말하지 않고 꿈을 꿀 수 있기 때문”이라고 일깨워주기도 한다.
‘나는 왜 파란별을 찾아 꽃 피는 바다별까지 멀고 먼 여행을 한 것일까?’ 때로는 고독에 침잠하고 때로는 존재론적 회의에 휩싸이기도 하며, 광막한 우주의 여행길에서 만난 방랑자들에게 삶의 깨달음을 얻기도 하는 몽상가 달팽이는 우리의 또 다른 자아에 다름 아니다. 길고 긴 여행 끝에 마침내 파란별이 떨어졌다는 꽃 피는 바다별에 다다랐지만, “별빛은 사라져간 별의 흔적”일 뿐 달팽이가 본 파란별은 아주 오래전에 사라지고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허탈해하거나 슬퍼할 필요는 없을지니, 그동안 “지나온 모든 길은 달팽이 안에 수많은 생각의 길을 만들어주었”으며 “그 작은 길들은 결국 미지의 길로 이어지며 생의 보이지 않는 길을 보이게 만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독자들은 저자 민병일의 무애한 상상력을 따라가며 “방랑자가 아름다운 건, 방랑이 미지의 생을 빛나게 할 파란별의 의미를 알게 했기 때문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파란별은 꽃 피는 바다별뿐 아니라 세상 어디에도 있고, 우리 안에도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별들이 우주의 가스와 먼지 속에서 만들어져 스스로 고귀한 빛을 내듯, 좌절과 상처, 고독과 외로움, 사랑의 상실, 아픔이라는 세속의 가스와 먼지를 겪어내면서도 마음속 깊이 파란별이라는 꿈을 간직하고 사는 우리 모두가 지상에 존재하는 별이라는 것을.
이 책은 총 3부로 구성되어 22편의 글과 23점의 그림이 수록되어 있다. 독일 함부르크 국립조형예술대학에서 시각예술을 전공한 저자는 동화에 그림을 직접 그려 넣었다. 『바오밥나무와 달팽이』를 읽는 독자들은 아름답고 정갈하게 닦여 있는 글맛뿐만 아니라 삶에 대한 새로운 발견의 기쁨과 감동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 책 속으로
달팽이는 회색 눈사람 모양의 울티마 툴레에 앉아 생각에 잠겼다. 눈을 감고 있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무수한 빛-암흑이 있었다. 숲을 떠나올 때 보았던 언덕의 능선과 나뭇잎을 스치고 가는 바람, 풀잎에 맺힌 새벽이슬, 해거름 녘의 풍경……
늘 보던 것들이 그리워졌다.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가는 게 삶이라는 걸 모르진 않았지만, ‘꿈은 찾을 수 있을까? 파란별은 어디쯤 있는 것일까?……’ 달팽이는 방랑자의 고독에 잠겨 있었다. 광막한 우주 한 모퉁이에서 헤아릴 수 없는 별을 거느린 은하를 보고 있으니 회의와 좌절감이 밀려왔다. 우주의 경이로움 앞에서 느끼는 숭고한 절망감이었다. (「회색 눈사람 행성 울티마 툴레에서 만난 씨앗」. 36~37쪽)
“달팽이야, 고독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 작은 새도 알껍데기를 깨고 나와 새롭게 눈을 뜨고 먼 곳을 향해 날아오르지. 나를 봐! 보이지 않는 세계를 찾아가고 있잖아. 별을 보고 너만의 길을, 네 안의 별을 찾아가도록 해. 자, 밤하늘을 한번 쳐다봐! 별들은 무리 지어 빛나는 것 같지만 홀로, 오직 자신만의 빛으로 반짝이거든.”
달팽이는 순간 가슴이 벅차올랐다. 꿈꾸기를 좋아하고 몽상을 즐긴다는 이유로 숲을 떠났지만, 고독했던 시간이 미지를 찾아가게 했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돌이켜보니 달팽이 세계를 떠나온 일로 아무도 원망할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구루 달팽이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생각의 차이가 존재의 차이를 만들 뿐, 누가 옳고 그르냐의 차원이 아니라는 것을 달팽이는 여행을 통해 알게 되었다. (「대초원별을 찾아가는 파란 코끼리」. 57~58쪽)
밤하늘을 수놓던 은하수가 아주 오래전부터 현재까지 사람들이 버린 사랑이라니!……
달팽이는 장밋빛 할아버지별의 추억을 안고 떠나면서 우주엔 신비한 사연을 간직한 별들이 많다는 것에 새삼 놀랐다. 먼 훗날 밤하늘의 별을 쳐다보면 ‘사랑수집소별’들이 먼저 생각날 것 같았다. 누구에게나 마음을 들춰보면 바위처럼 굳어버린 사랑이 한둘쯤 있다. 누구에게나 마음을 열어보면 샛별처럼 아스라한 사랑이 반짝이고 있다. 달팽이는 그 마음을 쓰다듬으며 별을 보고 있다. (「바람 구두 신은 난쟁이와 장미별」. 69쪽)
달팽이와 바오밥나무는 설렘이란 말이 낯설게 들렸다. 왜냐하면 벌레구멍별에선 펄떡거리는 고등어처럼 싱싱한 설렘이 사람들 마음마다 가득했기 때문이다. 지구를 포함한 많은 별에서는 설렘이 사라진 지 오래라고 했다. 설렘을 잃어버린 별은 사막처럼 황폐해졌으며, 상상력과 아이디어마저 고갈되어 설렘을 서로 차지하려고 다툰다는 것이다. 어느 별에서는 만년설 덮인 산정이나 심해,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의 순례길 바위 밑에 잠든 설렘을 찾기 위해 설렘 탐사대를 보낸다고도 했다. (「대마젤란은하의 벌레구멍별과 설렘 상자」. 77쪽)
수정처럼 투명한 설산, 눈 내리는 소리에서 소리 수집가는 무명無明을 보았다. 허공을 가득 채우며 쏟아지는 눈발 하나하나는 무게가 없지만, 산맥과 계곡, 봉우리마다 쌓여 만년을 침묵하는 눈의 소리……
소리에 집착하여 소리를 유리병에 모을 때와 달리, 카일라스별의 소리는 저장되지 않았다. 그렇다고 소리의 울림을 느낄 수 없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소리에 대한 집착을 끊으니 새로운 소리가 들렸다. 아름다움마저도 집착이었다. 무아無我의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자아가 있다고 집착하는 무지의 상태인 무명을, 번뇌의 근원이 되는 무명을 소리 수집가는 비로소 벗을 수 있었다. (「카일라스별로 간 소리 수집가」. 119~120쪽)
“하지만 친구들! 시인의 말처럼 ‘죽음의 사연들은 무엇이건 아름답지 않고 슬픈 법’이라지만, 그렇다고 삶의 사연들이 무엇이든 아름답고 기쁜 것은 아니야. 아름다움이 항상 진실한 게 아니고 진실한 것이 항상 아름다운 게 아니듯, 삶은 추한 것들 한가운데에서 아름다움을 증명해야 하거든. 나무들은 죽음이 ‘꿈 없는 잠’이란 것을 알기에 천둥 치는 밤이나 꽃 핀 봄날, 폭설 내린 별이 빛나는 밤이나 꿈을 통해 아름다움을 성장시키지, 삶이 아름다운 건 죽음처럼 불멸을 말하지 않고 꿈을 꿀 수 있기 때문이야.” (「장례식에 가는 달팽이들의 노래」. 162쪽)
“나무가 상처 많고 아픈 삶으로부터의 피난처라면, 꽃은 불완전한 생을 아름다운 상상력으로 바라보게 하지. 나무가 존재만으로 삶이 견고해지는 법을 알게 해준다면, 꽃은 우리가 추한 것들 속에 있다는 걸 깨닫게 해. 아무리 힘들어도 세상이 진실하고 선한 건, 나무와 꽃이 척박함 속에서도 끝없이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희망을 만들어가기 때문이지.” (「제비꽃, 난 지금 가보지 못한 길을 만드는 중이야」. 168쪽)
■ 차례
프롤로그 | 나는 별의 산책자, 어디에도 있고 어디에도 없는, 별의 플라뇌르
1부
시간 수선공별과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방랑자
회색 눈사람 행성 울티마 툴레에서 만난 씨앗
생각들이 사는 별
숲속의 몽상가
대초원별을 찾아가는 파란 코끼리
바람 구두 신은 난쟁이와 장미별
2부
대마젤란은하의 벌레구멍별과 설렘 상자
황금방망이 꼬리털여우
그림 없는 그림 전람회
바람 신을 경배하는 새들의 별
꽃의 소행성
카일라스별로 간 소리 수집가
나쁜말별
붉은 소파를 등에 메고 다니는 ‘행복한 초록별’ 프록시마 b의 사진사
3부
어느 외딴 별에서의 대화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별
장례식에 가는 달팽이들의 노래
제비꽃, 난 지금 가보지 못한 길을 만드는 중이야
네안데르탈인과 빙하 추모비
누구에게나 괴물이 있는 법
꽃 피는 바다별의 현자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별이다
해설 | 아름다운 작은 씨앗이 피울 제비꽃 한 송이・김병익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