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루미의 잠

문학과지성 시인선 586

최두석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23년 6월 30일 | ISBN 9788932041650

사양 변형판 128x205 · 144쪽 | 가격 12,000원

책소개

“발길 다다르는 곳마다 시를 피워낸 한 사람”

야생의 자연을 노래하고 생태를 관찰하며
40년 시심으로 쌓아올린 단순함의 미학

군더더기 없는 단순한 마음으로,
시를 채록하는 사람 최두석의 여덟번째 시집

1980년 월간 시 전문지 『심상』에 「김통정」 등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한 이후, 끊임없이 자신을 반성하고 성찰하는 태도로 우리 역사와 자연에 관해 이야기해온 최두석 시인의 신작 시집 『두루미의 잠』이 문학과지성 시인선 586권으로 출간되었다. 첫 시집 『대꽃』(문학과지성사, 1984)에서 “노래는 심장에, 이야기는 뇌수에 박힌다”라고 말한 바 있는 시인은 1980년대의 참담한 현실 앞에서 분노와 슬픔을 드러내는 대신 차분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시적 상상력을 궁구해왔다. 표제시 「대꽃 8」에서 4·19혁명기념일을 말할 때 역시 역사를 비약하지 않고 자신만의 시선으로 군중을 대숲으로 치환하는 등 최두석의 상상력은 시대를 울부짖기보단 언제나 역사의 현장 가까이에 머물던 숨결에 가까웠다. 문단 데뷔 이후 분단 현실에 대해 한 사람의 일생과 역사로 맞서며 비판적 시각을 고수해왔던 그는, 초기 작품에서 김통정, 전태일, 서호빈, 권인숙과 같은 이름을 직접 호명함으로써 시를 객관적으로 대상화하는 작업을 해왔다. 하지만 꽃 이름을 되뇌듯 각각의 이름을 한 겹씩 불러모으던 시인은 이제는 꼭꼭 숨은 사람을 찾듯이 꽃과 새 그리고 흐르는 강에게 말을 건넨다. 이야기의 객관성을 유지하며 줄글로 씌어졌던 시는 선명한 행과 연의 구분을 이루고, 민중에게 향하던 시선이 만물로 옮겨간 지도 어언 40년이다. 이렇듯 자연에게로 가 박동하는 그의 시심詩心은 언제나 우리가 발을 디디고 서 있는 땅 위에 지어졌으며, 순리에 따르는 삶에 대해 찬탄하는 시인의 태도는 우리를 겸허하게 만든다. 자신이 목도한 자연의 순수한 세계를 군더더기 없이 담아낸 최두석의 시선은 이번 시집에 묶인 66편의 간명한 언어를 통해 독자에게로 가 또다시 꽃을 피울 것이다.

시인은 자연 앞에서 인기척을 죽이며 자연이 스스로 나타나길, 자연의 숨결이 자신의 삶과 시에 저절로 와 닿기를 기다린다. 이 기다림은 자연의 항상성 앞에 욕망과 회한으로 출렁이는 마음을 내려놓는 의식의 수련을 수반한다. 인간의 삶에서 멀어진 야생의 자연을 부러 만나러 가는 시인의 행위는 이미 최두석 시의 일부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을 도회적 삶이 요구하는 인위의 가치들로부터 거리를 둔 어떤 순정의 마음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이 충만한 연결이야말로 우리가 최두석 시에서 만나게 되는 진정 아름다운 자연의 모습인지도 모르겠다.
―박혜경, 해설 「시인과 자연이 함께 쓰는 시」에서


창문 밖에도 절벽 위에도
온몸으로 피우는 시에 대한 순정

강은 흘러야 강이고
꽃은 피어야 꽃이라고 말하는 듯
동강할미꽃 피네

수만 년 동안
강과 산이
밤낮으로 만나 빚은 절경
절벽을 수놓는 꽃

댐을 막아
절경을 수장시키려던 시절
때맞추어 세상에 나타나
아름다움의 가치를 증언한 꽃

강은 한없이 젊고
그리움은 늙지 않는다고 말하는 듯
동강할미꽃 피네.
―「동강할미꽃」 전문

시인이 자신의 여덟번째 시집 『두루미의 잠』 원고를 다 엮었을 때, 강원도 정선과 영월에는 예년과 다름없이 동강할미꽃이 피었다. 동강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에서 온몸으로 피어나는 꽃은 우리나라에서만 자생하는 식물로 하늘을 향해 꽃망울을 터뜨리는 게 특징이다. 초봄, 그것도 열흘 남짓 꽃 피우는 동강할미꽃을 보기 위해 매년 전국에서 사람들이 모여드는데 매번 화제가 되는 것은 꽃의 아름다움이 아닌, 꽃을 훼손하는 이들이다. 바위틈에서 자라는 꽃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꼭 필요한 묵은 잎들이 죄다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그뿐만 아니라 꽃의 영롱한 자태를 혼자만 보기 위해 아예 뿌리째 파낸 일도 있었다. 꽃의 아름다움을 보기 위해 절벽에 오른 자가 그 마음을 꺾고 짓밟는 것을 두고 시인은 “사람에게 함부로 대하는 이가/꽃도 함부로 꺾는다”(「꽃꺼끼재를 지나며」)며 꽃의 안위를 걱정했다. 한겨울 새벽 버스 안에서 누군가의 한숨으로 피어난 성에를 처음으로 꽃이라 명명한 시인은 이번 시집에서 역시 꽃의 이름을 꼼꼼하게 곱씹는다. 꽃이 필 때면 “부러 새삼스럽게/더 즐거운 일 찾지 않”고 “더 긴한 일 만들지 않”(「따사로운 봄날」)는다는 시인은 “떨군 꽃잎이/쓰레기가 되어 발길에 밝히는 게 싫”은 나머지 산 속에 사는 화자가 되어 “사람들의 번거로운 눈길에서 벗어나”(「산목련이 백목련에게」) 그윽하고 깊이 걷기만을 원한다. 시적 상상력과 비유를 삼간 채 자연의 생태만을 포착하는 시인의 시선에는 인간의 마음이 아닌 꽃의 마음을 들여다보려는 순정만이 남아 고개를 숙인 채 절벽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꽃의 흔적을 선연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자신이 살아보지 못한
시간을 헤아리다 자연의 일부가 되는 시인

영월 동강가 제장마을에 옻나무를 심어 가꾸던 이가 있었다. 그는 옻나무에 칼집을 내 상처에 고이는 진액을 채취하였다. 그는 칠장이였고 소중하게 모은 옻액을 걸러 옹배기에 담아두었다. 그런데 장난치며 뛰놀던 누렁이가 옹배기를 엎질러 칠액을 뒤집어썼다. 불같이 화가난 칠장이는 부지깽이로 개를 두들겨 팼다. 졸지에 검둥이가 된 누렁이는 산으로 도망쳤다. 개의 행방이 궁금한 칠장이는 개 발자국을 따라 산에 올랐고 바위 위에 검둥개가 앉아 있었다. 칠장이가 개의 곁에 다가가 주위를 둘러보니 동강의 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동강이 백운산 자락을 휘감아 흐르며 굽이굽이 세워놓은 뼝대가 하늘 아래 절경이었다. 절경을 보며 개는 슬픔을 다스렸고 칠장이는 화를 다스렸다. 이후 칠장이는 개와 함께 이곳에 자주 올랐고 해가 바뀌자 검둥이는 다시 누렁이가 되었다. 칠장이와 누렁이가 나란히 앉아 있곤 했던 자리는 훗날 칠족령이라 부르게 되었고 산 너머 문화마을로 가는 길도 그들이 처음 찾게 되었다.
―「칠족령」 전문

자연 앞에서 한낱 인간의 욕망은 반드시 사라지고야 말 인위의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시인이 채록한 영월 동강가의 설화를 담은 4부의 시 「칠족령」은 언뜻 보기에는 불같이 화를 내는 칠장이와 주인한테 맞고 검둥개가 되어버린 누렁이의 이야기인 것처럼 보이지만 이 시의 주인공은 “훗날 칠족령이라 불리”는 자연이다. 이렇듯 최두석의 시는 “자연을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호명해 새로운 능동성을 부여”(문학평론가 박혜경)한다. 자연이 보여주는 절경 앞에서 욕망이 뒤섞인 칠장이의 분노는 천천히 사그라들고 그 옆에 있는 누렁이의 슬픔 역시 고요해진다. 자연과의 긴밀한 연결 속에서 개개인의 욕망은 자연의 일부로 자기 안의 헛된 욕심을 내려놓았을 때 우리는 비로소 충만함을 느끼게 된다. 여전히 훼손되지 않은 야생의 자연을 노래하기 위해 시인은 숨을 죽이고 발꿈치를 들고 다시 걷는다. 한반도 곳곳을 누비며 시를 써온 시인의 시간은 “주로 야생으로 살아가는 생명들을 만나는 데 쓰이”(「시인의 말」)면서 독자들을 인위의 시간에서 벗어나 오롯이 스스로 그러한 자연自然으로 초대한다.
수록된 작품 전반에 걸쳐 시인이 잃지 않고 고수하는 것은 고요히 생명이 움트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겸손한 태도라 할 수 있다. 가장 쉬운 단어와 명확한 문장만으로 오롯이 감탄하는 것. 자연의 생동력 앞에서는 그 어떤 사족도 필요하지 않는다는 고집. 최두석의 시는 40년 동안 그렇게 묵묵히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을 이야기했다. 자유와 혁명을 지나 자연으로 가 닿은 시인의 시는 우리가 다시 걸어야만 하는 오솔길처럼 길을 헤맬 필요 없이 고요하기만 하다. 우리의 서정시가 오래도록 지켜온 겸손한 마음과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순정을 이 시집에서 오롯이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 책 속으로

가까이할 수도 어루만질 수도 없는
새를 본다는 것은
새와의 거리를 확인하는 것

새를 쫓아다니는 게 아니라
새의 습성과 영역을 알아
길목에서 미리 기다리는 것

멀리 날아간 새를 아쉬워하고
가까이 다가온 새의 노래에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

새가 경계하지 않고
마음껏 춤추고 짝짓기 하게
인기척을 죽이는 것

새를 본다는 것은
종마다 서로 다른 부리를 확인하는 것
그 부리로 무얼 먹나 궁금해하는 것

먹어야 사는 생명이
팔 대신 날개 달고서
얼마나 더 자유로울 수 있나 살펴보는 것.
―「새를 본다」 전문

삵 같은 천적 피하기 위해
얕은 물에 발을 잠그고 자는 두루미는
추위가 몰려오면
한 발은 들어 깃 속에 묻는다

외다리에 온몸 맡긴 채
솜뭉치처럼 웅크린 두루미의 잠

자면서도 두루미는
수시로 발을 바꿔 디뎌야 한다
그래야 얼어붙지 않는다
그걸 잊고 발목에 얼음이 얼어
꼼짝 못하고 죽은 새끼 두루미도 있다

한탄강이 쩡쩡 얼어붙는 겨울밤
여울목에 자리 잡은
두루미 가족의 잠자리 떠올리면
자꾸 눈이 시리고 발목도 시려온다.
―「두루미의 잠」 전문

나는 엄천강 수달이어요
지리산 뱀사골 백무동 칠선 계곡에서
흘러내린 물이 모이는 엄천강

맑은 물에서만 사는
꺽지 갈겨니 동사리 등을 먹고 살지요
어떤 체조선수보다 부드럽게
어떤 수영선수보다 힘차게
몸을 놀려 물살을 가르지요

그런데 요즘 들어 갑자기
굴착기가 굉음 울리며 강바닥을 파헤치네요
제발 여울과 모래톱과 바윗돌을 그냥 그대로 두세요
제발 나의 가족과 친척들의
집과 밥상과 놀이터를 뒤엎지 마세요

자연이 수백만 년 조화롭게 한 일
함부로 망가뜨리는 망나니짓 그만두세요.
―「엄천강 수달」 전문

너는 잎도 없이 꽃망울 터트리지
수백 수천의 꽃눈 붓끝처럼 세우고
추운 겨울을 견디면서
벼르고 벼르다가
온몸으로 봄볕을 느끼며 한꺼번에
수백 수천의 꽃망울 터트리지
사람들은 너의 환한 꽃그늘 아래 서서
마음껏 봄날을 즐기곤 하지

하지만 나는 떨군 꽃잎이
쓰레기가 되어 발길에 밟히는 게 싫어
산 속에 산다네
햇볕 가릴 만큼 가득 잎을 펼친 다음에
꽃은 한 송이씩 차례로 피운다네
사람들의 번거로운 눈길에서 벗어나
아는 이만 맡게 되는 향내는
한층 그윽하고 깊다네.
―「산목련이 백목련에게」 전문


[뒤표지 시인의 글]

한탄강에서 잠자는 두루미와 재두루미를 본 적이 있다. 두루미 칠십여 마리와 재두루미 이백여 마리가 함께 모여 잠을 자고 있었다. 불침번을 제외하고는 솜뭉치처럼 웅크린 두루미의 잠. 외다리로 서서 다른 다리와 머리는 깃 속에 묻은 두루미의 잠. 그들이 잠자리로 잡은 곳은 혹한이 아니면 얼지 않는 여울이었다. 삵 같은 천적이 몰래 접근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이윽고 날이 밝자 고개를 들고 날개를 털었다. 몇 마리씩 걸음을 옮겨 무리에서 벗어나더니 발을 구르며 달리다가 차례로 날아올랐다. 잠은 떼로 모여 자고 먹이터는 가족끼리 찾는 두루미들이 울음소리로 서로를 확인하며 날아올랐다. 어느새 감쪽같이 두루미와 재두루미가 모두 사라지고 여울물 소리만 들리는데 그제서야 능선 위로 불끈 해가 솟았다.
강변 벼랑 위 나무 뒤에 숨어서 나는 두루미들을 숨죽이며 지켜보았다. 다른 부족의 신성한 제의를 몰래 훔쳐본 토템 시대의 이교도처럼 마구 가슴이 뛰었다.


■ 시인의 말

요즘 나의 시간은 주로 야생으로 살아가는 생명들을
만나는 데 쓰이고 있다. 꽃 피우고 열매 맺는 나무나
풀뿐만 아니라 그걸 먹고 살아가는 새나 곤충의 생생한
모습을 보며 활기를 얻는다. 그들의 숨결과 맥박이 시의
호흡 속으로 나도 몰래 스며들기를 기원한다.

2023년 6월
최두석

목차

■ 차례

1부
따사로운 봄날
동강할미꽃
개개비
휘파람새
물매화
동박새
뻐꾹채
꽃꺼끼재를 지나며
바람꽃
호리꽃등에
노루귀와 빌로오드재니등에
산호랑나비
할머니산수유나무 아래에서
산수유나무
금강초롱
천마산에는 미치광이가 많다
도체비꽃

2부
새를 본다
곤줄박이
두루미의 잠
뜸부기
황새야, 훨훨
먹황새
저어새
각시바위
물수리
백로와 숭어
공릉천 멧비둘기
알락꼬리마도요
파랑새
검독수리
독수리
검은머리물떼새

3부
새는 무릎 꿇지 않는다
후투티
유부도
마름과 흰뺨검둥오리
뿔논병아리
뿔논병아리 가족
장다리물떼새
우포늪 물꿩
때까치
비둘기조롱이
팔당호 큰고니
플라타나스와 멧비둘기
장릉 원앙
기러기 울음소리
임진강 재두루미
참수리
꾀꼬리

4부
연령초
요선암에서
웅녀
칠족령
주목의 환생
살구
쥐 이야기
등칡
마포와 여의나루 사이
꿀도둑
운교역 밤나무
깽깽이풀
설중복
엄천강 수달
충주호
산목련이 백목련에게

해설
시인과 자연이 함께 쓰는 시・박혜경

작가 소개

최두석 지음

시인 최두석은 1955년 전남 담양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어교육과와 동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0년 『심상』에 「김통정」 등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시집 『대꽃』 『임진강』 『성에꽃』 『사람들 사이에 꽃이 필 때』 『꽃에게 길을 묻는다』 『투구꽃』이, 평론집으로 『리얼리즘의 시정신』 『시와 리얼리즘』 등이 있다. 2007년 불교문예작품상, 2010년 오장환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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