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탐정사의 밤

곽재식 추리 연작소설집

곽재식 지음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23년 6월 15일 | ISBN 9788932041315

사양 변형판 128x188 · 408쪽 | 가격 16,000원

책소개

“둘 중에 누가 진짜일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누구라고 생각할까. 어느 부분이 가장 믿기지 않을까.
나는 누구를 믿고 있나.”

장르의 경계를 넘나드는 이 시대의 이야기꾼,
곽재식의 첫 추리 연작소설집!

1949년 서울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숨 가쁜 탐정 수사 일지

2006년 MBC 베스트극장에서 「토끼의 아리아」가 영상화된 후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쳐온 공학박사이자 SF소설가 곽재식의 첫 추리 연작소설집 『사설탐정사의 밤』이 문학과지성사에서 출간되었다. 작가는 그간 『한국 괴물 백과』(워크룸프레스, 2018), 『지구는 괜찮아, 우리가 문제지』(어크로스, 2022) 등 과학‧인문‧교양‧에세이‧소설‧청소년소설‧역사동화 장르를 가리지 않는 넓은 창작 스펙트럼을 보여주며 ‘곽재식 속도(반년간 단편 네 편을 집필한다는 뜻)’라는 신조어까지 탄생시킨 다작으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집필뿐만 아니라 라디오와 TV 교양 프로그램 등에 출연하며 과학과 역사 지식으로 무장한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와 특유의 입담을 뽐내고 있다.
1949년, 대한민국 제1공화국 서울을 배경으로 한 여덟 편의 탐정소설 연작인 『사설탐정사의 밤』은 2015년~2022년까지 격월간 미스터리 잡지 『미스테리아』에 게재했던 추리소설을 한데 모아 엮은 것이다. 오디언에서 올해 초 출시된 화제의 오디오북 <1949 사설탐정사> 수록작을 포함했다.

명멸하는 밤거리를 불안에 잠식된 채 유령처럼 부유하는 인물들이 있다. 자조 섞인 유머 감각으로 무장한 사설탐정이 그들의 뒤를 쫓고, 나는 탐정의 뒤를 쫓으며 그들과 얽힌 여덟 개의 사건을 본다. [……] 승부를 걸었던 마음은 온데간데없고, 지금은 사설탐정사의 조수로라도 취직해서 어서 더 사건을 맡으라고, 이야기를 더 내놓으라고 재촉하고 싶은 기분이다._박대민(영화 「그림자 살인」 「봉이 김선달」 「특송」 감독)


황량한 서울 거리를 휩쓴 의문의 사건들
야행에 나선 탐정의 대추격전

저편에 남선 탐정 사무소 건물이 보였다. 건물 안팎을 들락거리는 분주한 사람들이 있었다. 일을 하고 들어오는 힘찬 발걸음, 일을 마치고 나가는 보람찬 발걸음. 요즘에는 백범 김구가 직접 찾아와 남선 탐정 사무소에 일을 맡긴다는 소문까지 있어서, 혹시나 백범을 구경해볼까 하는 영감님이나 아이 들까지 괜히 건물 옆에 늘어서 있었다.
―「유령들이 잔치를 벌이다」에서

손님이 없어 파리만 날리는 사무소에서 무명 탐정은 자신의 처지와는 대조적으로 북적거리는, 길 건너편 ‘남선 탐정 사무소’를 하릴없이 바라보며 시간을 죽인다. 북한이 전기를 끊어버려 불을 밝힐 수 없는 그의 영세한 공간에도, 궁지에 몰린 의뢰인이 홀연히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모종의 거래가 성사된 후, 탐문에 착수한 무명 탐정에게 비로소 활력이 돈다. 광복 후 정부가 수립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시기, 변화의 물결이 거리를 휩쓴 당시의 풍속이 작가 특유의 시원하고 군더더기 없는 묘사에 힘입어 오늘인 듯 생생하게 눈앞에 펼쳐진다. 속도감 넘치는 등장인물 간의 대화, 미궁에 빠진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 재빠르게 움직이는 탐정의 부지런함이 더해져 스릴과 재미를 모두 잡았다. 쫓고 쫓기는 추격과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수차례의 위기 끝에 사건은 종결된다. 무엇보다 격변기 시대상을 고스란히 반영한 각각의 에피소드에서 오랜 시간 작품을 통해 견지해온 작가의 휴머니즘적인 시각이 더욱 뚜렷하게 빛난다.


살아 움직이는 입체적 캐릭터의 향연
온정 어린 시선을 간직한 곽재식표 누아르

광복 직후 미군정시대(1945~1948)를 거치며 한국 사회를 잠식한 급격한 인플레이션, 남북 분단과 정세의 혼란 속에서 서민들의 살림은 을씨년스럽기 그지없었다. 일본인 소유의 공장이 가동을 멈추고 노동자는 대량 해고되었으며 생필품은 부족해지고 적산敵産 불하에 한몫 챙기려는 친일파가 곳곳에서 기승을 부렸다. 『사설탐정사의 밤』은 경제적 궁핍과 환란이 극에 달한 그즈음의 생활상과 변화하는 세태에 적응하기 위해 발버둥 치는 민간인들의 모습 그리고 그 틈을 타고 벌어지는 암투와 소극을 그린다.
여수순천십일구사건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자 숙청을 피하려 살인범으로 신분을 위장한 인물들(「범인이 탐정을 수사하다」), 겨레와 동포를 위하는 대의에 눈이 멀어 사사건건 사고를 치는 왕년의 독립운동가들과 그들과의 의리를 지키려 거짓으로 사건을 의뢰한 여성 정치가(「천사가 모터사이클을 타고 내려오다」), 백범 김구를 저격할 목적으로 탐정 사무소를 사용하기 위해 무명 탐정을 외부로 유인하는 무리(「유령들이 잔치를 벌이다」),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하던 형사였다가 광복 후 자신을 유명 경찰학자로 홍보하며 요설을 곁들여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사기꾼(「탐정이 살인하는 법을 배우다」), 기자 생활을 관두고 인쇄소를 차려 재산을 불린 사업가(「마귀들의 울음소리로 음악회를 열다」) 등은 역사적 격변기에 저마다의 방식으로 생계를 보전하며 탈출구를 모색한 민중의 삶을 대변한다. 곽재식은 평범한 인간 내면에 담긴 욕망과 이익을 둘러싸고 교차하는 군상의 상상력을 촘촘히 다룬다. 동시에, 거대한 운명의 파도에 휩쓸린 작은 존재를 향한 연민을 놓지 않고 이해를 목전에 둔 끈질긴 접촉을 시도하며 인간적인 결말에 도달한다.


아스라이 빛나는 영광 뒤편의 허무
격변기 시대상을 반영한 미스터리 드라마

적산 불하 제도 이야기였다. 해방이 되고 일본 사람들이 빠져나가면서, 주인이 없어진 일본 사람의 공장이나 건물이 곳곳에 널려 있었다. 정부에서는 심사를 거쳐서 그런 공장을 운영하기에 가장 적합한 한국 사람을 찾아 넘겨주었다. 미군이 들어왔을 때부터 시작된 일이지만, 며칠 후 국회에서 새로 법이 통과되고 나면 더 많은 공장이 새 주인을 찾게 될 거라고 했다.
“새 법이 통과되면 대동산업에게 유달리 유리해지는 일이 있는가?”
“유리하고 불리하고 할 게 있습니까? 국회의원들이야 해방 전까지 서당 훈장이나 하던 영감님들이고, 해방되고 나서는 동네 애들 몰고 다니며 영어로 ‘웰컴, 웰컴’ 할 줄밖에 모르던 양반들인데요, 뭘. 법 만들고 폐지하고 하는 것도 이제 갓 돌 지난 정부에서 투닥투닥 애들 소꿉장난하듯이 하는 일이죠, 뭘.”
“대동산업이 일본군 술 공장을 넘겨받기에 적합해 보일 만한 자격은 있나?”
“적합한지 안 적합한지 공무원들이 알 게 뭡니까? 일본 애들 밑에서 머릿수 세는 일만 하던 사람들이 나사못 하나 만드는 일이나 알겠습니까? 그냥 친한 사람한테 넘기는 거죠, 뭘.”
―「쓰레기를 비싼 값에 사다」에서

오귀스트 뒤팽, 셜록 홈스, 드루리 레인, 푸아로 등 세계문학사적으로 널리 알려진 명탐정의 신경질적인 날카로움과 대비되는 이 사설탐정사의 정직하면서도 관대한 정신은 일견 브라운 신부를 닮아 있지만 그보다는 훨씬 소시민적이다. 여느 평범한 삶에서 발견되는 번민의 당사자로서, 두 다리를 쉴 틈 없이 움직여 몸소 생활 전선을 파고들고 많은 순간 주변 인물과의 연대를 거부하지 않는다. 타인의 표정과 몸짓을 순식간에 파악하는 관찰력과 어지러운 인간의 심상을 직관하는 탐정의 통찰력은 묵직한 울림을 전한다. 총 여덟 편이 수록된 이번 추리 연작소설집은 1949년 대한민국의 시대상을 세밀하게 그려 역사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긴박감 넘치면서도 위트가 풍부한 서사 구조로 독자를 단번에 사로잡는다.
작가 자신의 숙원이었고 ‘작가의 말’에서 언급했듯, “1940년대, 1950년대에 나온 옛날 흑백영화 중에 범죄를 다룬 이야기들을 보면 그 시기에 유행했던 탐정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것들이 여럿 있다. 특히 하드보일드 탐정이라고 하는, 도시의 뒷골목을 쓸쓸히 헤매다가 가끔 범죄자들과 껄렁한 싸움에 엮이기도 하는데, 그런 싸움에서도 두려움보다는 피곤함을 먼저 느끼는 탐정들이 나오는 이야기” 그 자체인 『사설탐정사의 밤』은 다정한 유머로 세상살이의 고독을 보듬으며 소재의 기발함과 강한 흡인력으로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곽재식표 소설의 진수로 다가올 것이다.


본문에서

“완전범죄를 저지르려면 먼저 열심히 공부하고 연습하여 훌륭한 의사가 되어야 하겠군요.”
“운명에 따라서는 누구나 한 번쯤 그런 기회를 가지게 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의 원수가 우연히 물에 빠졌다고 생각해봅시다. 전속력으로 달려가 원수의 손을 붙잡고 힘차게 끌어낸다면 여러분은 원수를 살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일부러 조금만 천천히 달려간다면? 혹은 원수의 손을 붙잡을 때 일부러 조금 느슨하게 붙잡아서 놓친다면? 여러분 때문에 원수는 물에 빠져 목숨을 잃겠지만, 그게 누구에게나 이상하게 보일 정도로 심하지만 않다면 여러분 때문이라고는 아무도 지적할 수 없습니다.” 「탐정이 살인하는 법을 배우다」

“저는 대동산업에서 유독성 물질이 섞인 소주가 나왔다고 했을 때, 그 술을 모두 버려야 하니까 대동산업이 큰 손해를 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막상 조사해보니 그렇지 않았습니다. 실수로 마시면 죽는 술이 된 그 소주를 비싼 값에 사려는 사람은 서울에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그걸 마시고 죽으면 보험 사기를 칠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던 겁니다. 오히려 대동산업은 마시면 죽는 쓰레기 술을 더 비싸게 팔 수 있었습니다. 해방되면서 일본 사람들이 갑자기 다 나가는 바람에 보험회사에서 업무를 잘 아는 이들이 없어졌고, 그래서 보험 사기를 치기 쉽다는 소문이 돈 것 같습니다. 사람값은 너무 싸고 현금은 너무 부족한 도시 아니겠습니까.”
그녀는 아니라고, 내 말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왜 보험 사기를, 그런 걸 걔가 왜 했겠어요? 갑자기 그렇게 돈이 필요한 일이 뭐가 있다고.”
나는 들고 있던 보고서의 다른 장을 넘겼다.
“제가 마지막까지 이해할 수 없었던 것도 그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적산 불하 제도를 살펴보다가, 답을 알게 되었습니다.” 「쓰레기를 비싼 값에 사다」

사람들은 곧 박 사장의 방 안에서 벽을 두드려보았다. 그리고 그곳의 벽 속에 분명히 누가 시체나 사람의 뼈를 넣어두었을 거라고, 틀림없다고 저마다 한마디씩 던졌다. 그 모든 것은 공책에 적힌 이야기의 후반부와 비슷해 보인다는 데에도 다들 생각이 비슷했다.
박 사장은 침대에 비스듬히 앉았다. 그리고 술이 든 잔을 한 손에 들었다. 박 사장은 그 술의 맛을 보았다.
“벽에 시체가 들어 있는 방에서 계속 지낼 수는 없잖아. 또 한동안은 이 집에서 살게 될 텐데 방을 바꿔야 되나? 어제저녁까지 잘 놀고 잘 자다가 이제 와서 무서워서 도망친다는 게 좀 부끄럽기는 하네.” 「손님이 주인을 내쫓다」

“1910년대와 1920년대에, 세계 여러 나라에서는 ‘다다이즘’이라는 예술 풍조가 유행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예술이라면서 꾸미고 짜놓은 것 말고, 남들이 도저히 예술이라고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무의미한 것을 예술이라고 내세우면 놀랍고 신기하고 충격적일 거라고 생각했던 현대적인 예술 풍조였습니다. 다다이즘 시대의 시인들을 시를 쓴다면서, 그냥 자기 주머니에 있는 소지품을 다 꺼낸 뒤에 그게 뭔지 차례로 써두고 그게 시라고 주장했습니다. ‘회중시계. 동전 네 개. 껌 종이. 먼지. 텅 빈 성냥갑.’ 그런 게 시라는 겁니다. 그렇게 시를 발표하고 나면, 그게 현대 산업사회의 나약하면서도 기술에 얽매인 인간 군상을 상징한다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나와서 시의 가치를 평가해주었습니다. 그런 다다이즘을 우리나라에서는……”
“따따이즘이라고 불렀지.”
“그렇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 다다이즘 예술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자기 별명을 아예 따따라고 붙여서 자기 이름을 ‘고따따’라는 식으로 말하기도 했습니다.” 「마귀들의 울음소리로 음악회를 열다」


작가의 말
작가들은 필생의 과업을 저마다 하나씩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너무 거창하게 들리는 것 같다면, 자주 떠올리지만 실행에는 잘 옮기지 않게 되는 집필 계획을 거의 대부분 갖고 있다고 생각해도 좋다. ‘내가 언젠가 이런 소설은 한번 써보겠다, 그런 것 써보면 참 재미있을 것 같은데’ 싶은 구상을 각자 마음속에 품고 있다는 뜻이다. ‘역사상 참 놀라운 사건이었던 그 사건을 소재로 엎치락뒤치락하는 인간 군상을 다룬 이야기를 소설로 써보면 참 재미있을 텐데’라든가, ‘그때 가봤던 그 해변의 아름다운 풍경을 배경으로 기막힌 사랑 이야기를 써보면 멋지겠지’라든가 하는 생각이 흔한 예시다.
일전에 글쓰기 방법론을 다룬 산문집 나는 『삶에 지칠 때 작가가 버티는 법』(북스피어, 2019)이라는 책에서도 그에 대한 이야기를 쓴 적이 있다. 그때도 했던 이야기인데 그런 필생의 과업 같은 구상일수록 의외로 실천에 옮기게 되기란 쉽지 않다. 한번 꼭 써보고 싶은 소설이라고 마음속에서 긴 시간 품고 있었던 이야기인 만큼, 멋지게 잘 쓰고 싶다는 생각이 너무 앞서기 때문일 수도 있다. 훌륭한 글을 긴 분량으로 담아내려면 많은 여유가 필요할 것 같다. 그러나 그만한 여유가 있는 때는 잘 다가오지 않는다. 또 작가라 해도 항상 훌륭한 글, 아주 멋진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기에 욕심에 걸맞은 준비를 하기도 쉽지 않다. 그러다 보면 나중에, 언젠가 시일이 지난 후에, 여유가 충분할 때 쓰자고 미루게 되기 쉽다. 다른 방향에서 생각해보자면 이렇게 설명해볼 수도 있다. 이런 부류의 꼭 한번 써보고 싶은 이야기일수록 잠깐잠깐 상상 속의 훌륭한 소설을 구상하는 것이 너무 달콤하다. 그에 비해 실제로 글을 써나가는 것은 피곤한 작업이다. 공상으로 ‘이런 글 써보면 좋겠지’ 하는 시간의 즐거움과 실제 글 쓰는 어려움의 차이가 너무 크기에, 공상만 하게 되고 실천에 옮기기란 쉽지 않다.
그러다가 나는 그런 거창한 소설을 쓸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영영 생기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멀리 보면 그런 날이 올 가능성이야 있기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과연 그때가 지금보다 훨씬 더 소설을 잘 쓸 수 있는 시기일까? 그 역시 의심스러운 문제다.
필생의 과업, 꼭 써보고 싶은 소설일수록, 너무 꿈만 꾸지 말고 당장 한번 써 보는 편이 오히려 낫지 않을까? 그게 답이 아닌가 싶었다. 고민해볼수록 그게 맞는 것 같았다. 작가 생활을 몇 년 하는 동안 나는 한 가지 지혜를 얻었다. 완벽한 글을 쓰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적어도 내가 완벽한 글을 쓸 수는 없다. 일단 그때그때 최선을 다 해서 쓰고, 좀 마음에 안 들면 다음번에는 더 좋은 글을 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완벽의 경지를 애초에 노리면 안 된다. 그렇게 생각하면, 필생의 과업이라고 해서 꼭 엄청난 결심을 하면서 오래오래 때를 기다리며 그런 글을 쓰게 될 날을 상상만 할 이유가 없다. 일단 지금 한번 열심히 써보고, 나중에 시간 나면 더 좋게 또 써보면 될 일이다.
나에게도 이렇게 오랜 시간 마음에 품고 있었던 ‘언젠가 한번 꼭 써보고 싶은 이야기’가 몇 가지 있었다. 그중 하나는 해적 모험담이었다. 특히 나는 한국의 신라 시대를 배경으로 한 해적 모험담을 쓰면 개성이 있을 거라는 공상을 오랫동안 해왔다. 결국 나는 해적 소설을 몇 편 썼는데, 단편으로, 장편으로, 인터넷 오디오 소설로 세 가지 정도를 완성했다. 모두 반응은 나쁘지 않았고, 몇몇 대목은 내가 보기에도 무척 마음에 들었다.
다른 하나는 바로 1940년대 흑백 누아르 영화 분위기를 담아낸 소설을 써보자는 생각이었다. 1940년대, 1950년대에 나온 옛날 흑백영화 중에 범죄를 다룬 이야기들을 보면 그 시기에 유행했던 탐정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것들이 여럿 있다. 특히 하드보일드 탐정이라고 하는, 도시의 뒷골목을 쓸쓸히 헤매다가 가끔 범죄자들과 껄렁한 싸움에 엮이기도 하는데, 그런 싸움에서도 두려움보다는 피곤함을 먼저 느끼는 탐정들이 나오는 이야기다. 이런 영화에서는 고독하고 과묵한 탐정이 나오기 마련이지만, 그런 사람이 또 이상한 비유법으로 가득한 독백, 내레이션을 읊조리는 장면을 무척 많이 보여준다. 나는 이 점이 또 굉장히 운치 있다고 생각했다. 어두운 도시의 밤거리 풍경이 대조가 강한 흑백 화면으로 잡혀 있고, 묘한 재즈 트럼펫 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탐정 역할을 맡은 주연배우가 내레이션으로 “내가 이 도시를 사랑하는 까닭은 사랑에 빠진 멍청이들이 내는 우는 소리가 밤마다 노래처럼 거리에 울려 퍼지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깔린다.
나는 이런 이야기를 쓰면서 배경을 한국으로 하여 독자에게 가깝게 와 닿을 수 있도록 펼쳐보되, 실제 이런 이야기들이 유행했던 1940년대라는 시대는 그대로 살리면 개성이 강한 이야기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1940년대 후반, 광복 후 대한민국 제1공화국 정부가 생긴 뒤에 혼란스러웠던 여러 가지 도시 풍경을 범죄소설 소재와 결합하면 인상적이면서도 진지한 생각을 같이 잘 담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런 구상을 나는 몇 년 동안이나 마음속에만 품고 있었을까? 몇 년이나 실제로 글 쓰는 것을 미뤄왔을까?
다행히 실행에 옮길 기회가 그리 늦지 않게 찾아왔다. 2015년에 『미스테리아』라는 미스터리 전문 잡지가 창간되면서, 나에게 소설 원고를 청탁해온 것이다. 나는 어떤 추리소설을 쓸까, 생각해보다가 이때다 싶었다. 더는 미루지 않고 1940년대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하는 옛날 흑 백영화 시대의 필름누아르, 하드보일드 탐정 이야기라는 구성을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처음 쓴 추리소설이 『미스테리아』 2호에 실린 「범인이 탐정을 수사하다」라는 단편이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나는 2호 이후로, 소설, 기획 기사, 서평, 옛날 실화 사건에 관한 이야기 등등 지금까지 한 호도 빼놓지 않고 『미스테리아』에 꾸준히 글을 기고하고 있다.
나는 흔히 SF 작가로 소개되는 편이고, 나 역시 SF 단편, 장편을 가장 많이 썼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작 잡지, 문예지 지면에 청탁을 받고 실린 소설 중에서는 이상하게 다른 어떤 장르보다 추리소설을 쓴 것이 가장 많다. 나 자신도 이상할 정도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추리소설을 좋아했고, 지금도 추리를 다룬 영화를 즐겨 보는지라, 돌아보면 뿌듯하기도 하다. 그리고 바로 이 책 『사설탐정사의 밤』이 잡지에 실렸던 내 추리소설 단편을 전부 모아놓은 것이다. 필생의 과업으로 마음속에 품고 있는 커다란 꿈이 있는데, 거기에 한 작가가 어떻게 현실 속에서 조금씩 도전해보았는지, 그 애쓴 기록이 남아 있는 책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유일하게 빠져 있는 추리 단편은 1940년대 대한민국이 배경인 탐정소설이 아니라 현대를 배경으로 쓴, 탐정이 나오지 않는 소설 한 편이다. 이 이야기는 언젠가 또 비슷한 소설끼리 묶어낼 기회가 있을 때 다시 책으로 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2023년 아산에서
곽재식

목차

차례
범인이 탐정을 수사하다
천사가 모터사이클을 타고 내려오다
유령들이 잔치를 벌이다
도망치던 사람이 영화에 나오다
탐정이 살인하는 법을 배우다
쓰레기를 비싼 값에 사다
손님이 주인을 내쫓다
마귀들의 울음소리로 음악회를 열다

작가의 말

작가 소개

곽재식 지음

2006년 MBC에서 단편소설 「토끼의 아리아」가 영상화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당신과 꼭 결혼하고 싶습니다』 『빵 좋아하는 악당들의 행성』, 장편소설 『신라 공주 해적전』, 창작 동화 『고래 233마리』 등이 있다. 숭실사이버대 환경안전공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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