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사회 하이픈 (2023년 여름)

문학과사회 편집동인

출판사 문학과지성사 | 발행일 2023년 5월 31일 | ISBN 1227285X

사양 변형판 152x225 · 148쪽 | 가격 15,000원

책소개

여름호를 펴내며

주저앉음

아홉 개의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는, 문학과 예술의 현재(現在) 사회사.

아무 노래나 불러야 한다. 아무렇게나 춤춰야 한다. 아무렇지 않아 보여야 한다.

어떤 글이라도 일단 써야 한다. 아무렇게나 써제껴야 한다. 아무렇지 않게 읽혀야 한다.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 어떻게든 자랑해야 한다. 뭐라도 되는 듯 보여야 한다.

감히 예측하건대, 이 문장들은 거의 읽히지 않을 것이다. (순식간에 ‘스캔’될 것이다.) 용케 읽히더라도 , 즉각 ‘패싱’당할 것이다. (‘패싱’하고 있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을 것이다.) 아무렇지 않게, 아무에게도 아무렇지 않아 보이게. 왜냐하면 저 아홉 개의 문장은, 결국, 얄팍한 패러디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뻔히 보이는 수법에 속아 넘어가는 독자는 이제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깊이를 감춘 표면이 존재한 (다고 믿어지던) 시절이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깊이’라고 불리는 어떤 사태/상황/사건이 세계의 표면 아래 존립하며, 그것이 다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인식과 그에 대한 암묵적 동의가 널리 성립했던 때가 있었다. 그때에는,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듯 보여도 속으로는 너무나 심각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고 , 그 심각성에 대한 인지와 대응이 가장 절박한 과제라고 주장하는 여러 목소리가 앞다퉈 출현했다. 비록 서로 각축하긴 했지만, 그래도 그것들은 어떤 세계감Weltgefuhl 혹은 세계 인식을 굳건히 공유하고 있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의 거친 싸움은 바로 그 하나의 바탕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으리라.
현재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 바탕은 지나치게 획일적이고 거기서 발생한 행위와 그에 따른 작용 들은 터무니없을 정도로 중심 지향적이었다. 그러나 과거의 관점을 되살려 본다면, 그때의 싸움은 바닥 모를 추락처럼 처절했고 그로 인한 상처와 여파 들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부조리했다. 도처에 있었으므로 적을 찾는 일은 너무 쉬웠지만, 시간처럼 쉼 없이 부활하는 그를 무찌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리고 , 그러므로 , 쓰러지는 것은 언제나 자기 자신이었다. 이것은 쓰라림을 유발하는 경험이었고 , 다시 이 경험은, 거의 어김없이, 깊이에 대한 갈망과 어둠에 대한 인식으로 전환되었다.

허기처럼 찾아오는 갈망과 불안을 동반하는 인식 사이에서 길 잃은 ‘그때 그 사람들’은 한결같이 문학과 예술을 일종의 불가피로 여겼다. 모두가 완벽하게 행복한 사회에서는 아무도 문학을 읽지 않을 것이고 , 누구도 예술을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여전히 유효한 가정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들에게 문학과 예술은 불확실한 깊이를 보증하는 절실한 약속이기도 했다. 문학이 존재하고 예술이 지속하는 한, 이 세계는 피상성의 구속으로부터 자유로웠다. 그들에게 피상성은 무의미와 동의어였고 , 무의미는 지옥으로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러므로 문학과 예술의 약속은, 말하자면, 단 하나의 탈출구였다. 분명 그들은 그 약속이 영원하리라고 믿을 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그들의 삶의 의미를 지켜줄 만큼 충분히 오래 유지될 것이라고는 기대했다. 그때가 언제였는지 정확히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원(遠)과거가 아니라 근과거라는 사실만큼은 또렷하다.
그러나 바야흐로 드러나고 있는 ‘진실’은 깊이에 대한 믿음 자체가 얄팍한 환상이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것을 계몽이라 부를 수 없다. 아니, 그것은 심지어 깨달음이라는 단어에도 상응하지 않는다. 무릇 계몽과 각성은 깊이를 향한 동경에서 시작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나의 계몽은 수만 개의 ‘딥페이크 deepfake’에 의해 즉시 차단되고 , 한 번의 각성은 수천 개의 댓글과 더불어 금세 사그라든다. 하지만 비단 계몽과 각성만 상실된 것이 아니다. 그것들과 함께 무의미에 대한 공포도 사라졌다. 다시 말해, 피상성이 드디어 무의미와 결별한 것이다. 이제는 어떤 것도 무의미하지 않다. 단 한 가지, 궁극적인 의미를 찾으려는 노력을 제외하고. 요컨대, 적극적으로 의미를 추구하는 행위가 오히려 완루한 무의미를 양산하는 퇴행이 되는 역설이 발생한 것이다. (자인하건대, 이것을 역설로 인식하는 관점은 그 자체로 시대착오적이다.)
하지만 깊이는 멸시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깊이는 그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아니, 그것은 원래 존재하지 않았다. 이제 그 사실이 확연해졌을 뿐이다. 따라서 이제는 누구도 피상성을 예찬하지 않는다. 구태여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만 그것을 충실히 살아내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과거의 잔재를 처리해야 한다. 집요하게 €?남아 있는 기억, 깊이를 향한 열망의 기록 들을 말끔히 삭제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과연 가능한 일인가 ? 그렇지 않다. 도저한 의미를 향한 길이 완전히 끊긴 상황에서도 부정의 정신은 얼마든지 작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과거의 거울에 현재의 상태를 비춰 보는 일은 어디서나 끊임없이 지속되는 사업이며, 또한 과거에 대한 상상으로 미래의 청사진을 수정하는 작업은 동서고금 모든 사회의 공통분모와도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기반이 지금 황망할 정도로 빠르게 붕괴하고 있다. 부정의 정신마저 고갈 혹은 멸종 위기에 처해 있는 것이다. (재차 자인하건대, 이것을 위기로 인식하는 감각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반동적이다.)

현 상황에 대한 외면과 근과거에 대한 회상은 필연적으로 뼈아픈 회한을 낳는다. 하지만 이 회한은 시대착오와 반동의 혐의를 기꺼이 무릅쓰게 하고 , 시나브로 부정당한 과거의 어떤 기록을 기어이 끄집어내게 한다.

이제 너는 어쩔 셈이냐―하고 , 너는 그 얼굴에게 질문할 것이다. 너는 얼룩을 닦아낸 후 자리로 돌아갈 것이다. 어느새 객석을 채우기 시작한 사람들이 웅성대고, 불이 꺼지고. 막이 오르고. 무대가 드러나고. 인물이 등장하고. 하지만, 너는 곧 그곳을 찾아간 데 대해 후회할 것이다. 첫 순간부터, 그것은 연극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아직 시작되지 않은 무대를 바라보면서 네가 몸을 떨며 “연극!”이라고 발음할 때 너의 머릿속에 빛처럼 꽂혀오는 바의 그 연극이 아닐 것이다. 그것은 다만 연극인 척하는 연극일 것이다. 꾸미기 위해 꾸며진 무대, 시선을 툭툭 끊어버리는 조명, 오로지 훈련에 의해 그려지는 표정과 동작, 귀를 어둡게 하는 터무니없는 대사들―그런 것들이 연극이 시작되기 직전에 네 등뒤의 한없이 먼 곳까지 펼쳐져 이어지던 무대를 갑자기 그 물리적인 무대 장치 속에 좁혀버리고, 무대와 너 사이의 엄청난 거리를 조장할 것이다. 거기에 배우는 없을 것이다. 너는, 이미 배우가 아닌 무대 위의 그들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왜 객석의 관중들이 그토록 심각한 척 소리죽여 무대를 응시하는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만, 제발 그만!―하고 , 너는 외치고 싶을 것이다. 그렇게 거기 함께 존재해야 할 하등의 이유도 없이, 네 앞에서 연극은 거대한 액자 속에 갇혀 있고, 연극 앞에서 너는 너의 좌석에 갇혀 있을 것이다. 차라리 나가버리자―하고, 너는 불쑥 일어설 것이다. 그러다가 다시 그 자리에 주저앉을 것이다. 이인성, 『낯선 시간 속으로』, 문학과지성사, 1983, pp. 276~77.

이것은 대화 아닌 대화다. 서술자의 언술 속에서만 존재하는 등장인물의 생각과 감정과 행동을 서술자가 미리 짐작해서 바로 그 인물에게 알려주는 (또는 지시하는) 기묘한 일방적 대화다. 40년 전에 활자화된 이 문장들은, 말하자면, 당시에는 미처 존재하지 않았던 피상성에 대한 선제적 저항이라 할 수 있다. 추측하건대, ‘너’라 불리는 그 /그녀가 본 연극은 꽤 훌륭했을 것이다. 적어도 상당히 진지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여기서 표상된 연극은 오늘날의 피상성과는 한참 동떨어진 이른바 ‘본격’ 예술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소설 속 서술자의 ‘너’ 혹은 서술자와 ‘너’는 그마저도 용납할 수 없다. 그래서 ‘너’는 차마 뛰쳐나가지도 못한 채 그대로 주저앉아버리는 것이다.

주저앉음. 이 불가피한 비의식적/불수의적 행위 속에, 어쩌면, 깊이가 깃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추측이나 전망이 결코 아니며, 하물며 희망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다만 하나의 공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누구나 알듯이 피상성의 우주는 온갖 망상을 허용한다. 그 자유를 만끽하며, 힘없이 주저앉은 채로, 또 하나의 기록을 펼친다.

깊이―로―들어감에 관한 말,
우리가 읽었던 그 말.
그 세월, 그때부터 지금까지의 말들.
우리는 여전히 그러하다.

그대는 아는가, 공간은 끝이 없음을,
그대는 아는가, 그대는 날아갈 필요가 없음을,
그대는 아는가, 그대 눈 속에 적힌 것이,
우리의 깊이를 깊게 한다는 것을.

파울 첼란, 『파울 첼란 전집 1』, 허수경 옮김, 문학동네, 2020, p. 269.

과연 깊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정말로 있다면 그것이 얼마나 깊은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알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 하나만은 분명하다. 깊이로 들어가는 일에 관한 말을 읽은 모든 ‘우리’는, 틀림없이, 여전히, 끝없이, 주저앉아 있을 것이다. 아무 노래도 부르지 못한 채, 아무 글도 쓰지 못한 채, 그 무엇도 되지 못한 채로 . 무대로 들어가지도 , 밖으로 나가지도 못한 채, 그러니까 깊이로 한 걸음도 들어가지 못한 채로 말이다.

*

우리가 읽은 “그 세월, 그때부터 지금까지의 말들” 중에서 가장 남용된, 그래서 가장 많은 ‘깊이’를 잃은 단어는 계급이다. 그리고 올해는 루카치의 주저 『역사와 계급의식』이 출간된 지 그리고 비판 이론의 모태인 프랑크푸르트학파가 탄생한 지 백 주년이 되는 해다. 그래서 『문학과사회』 동인들은 이번 하이픈 기획의 주제를 ‘다시—계급’으로 정했다. 여러 분야의 출중한 필자들이 출동하여 옥고를 보내주셨다.
정치철학자 김만권의 글은 “왜 ‘계급의 귀환’인가”라는 물음에서 출발하여 디지털이 자본과 노동을 왜곡하는 방식에 대한 고찰을 거쳐 능력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에 도달한다. “노동의 위기를 체계적으로 파악하는 데 실패”했다는 냉철한 진단에 기초하여 “함께 책임을 묻고 지우는 정치”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볼 것을 청한다. 평론가 박혜진의 글은 정지돈, 문지혁, 오한기의 소설을 독해하며 “신(新)자급자족류”의 출현을 진단한다. 이 새로운 인간종은 “음모론을 현실화하는 연결과 폐쇄적인 정보들 사이에서 발생하는 불평등”에 대처하기 위한 최후의 몸부림을 현시한다. 사회학자 서동진의 글은 계급과 재현의 관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하면서 우리가 “개인과 사회의 이율배반을 조정할 수 있는 어떤 서사적 전략도 마련하지” 못했음을 통렬히 질타한다. 특히 “계급 관계를 다시 보려는 몸짓 속에 이미 계급 관계의 효과가 각인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공부와 성찰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일깨운다. 페미니스트 노동연구자 이소진은 계급의 문제를 젠더의 문제와 긴밀히 연동시키는 글을 보내주었다. 능력만 있으면 “계급상승을 할 수 있다는 낙관적 믿음”이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착취를 은폐하는 전략으로 이용되고 있다는 주장이 텔레비전 드라마의 사례 분석을 통해 설득력 있게 제시된다. “행복의 약속을 부수고 , 분위기를 깨어야” 한다는 그의 외침이 커다란 메아리를 얻기를 기원한다. 평론가 전청림의 글은 이른바 “중산층 소설”에 대한 고찰을 통해 계급의 문제에 접근한다. “우리가 느끼는 자유로운 감정”이 사실은 “‘자유의 비자유’라는 이데올로기의 역설에 갇힌 주체들의 내면성”을 보여준다는 진술은 오래도록 곱씹어볼 만한 문장이다. 소설가 정보라의 글은 한국 SF문학에 재현된 계급의 문제를 다룬다. 코로나 팬데믹을 계기로 바뀐 사회의 풍경이 최근 간행된 여러 SF소설에 적극적으로 반영되고 있음을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생생히 보여주는 그의 글은 한국 SF문학에 대한 관심을 환기하는 동시에 우리가 익숙하게 받아들이는 현실이 사실은 매우 문제적인 것이라는 점도 알려준다. 영화평론가 조혜영의 글은 영화 「기생충」에 대한 분석을 통해 계급과 결부된 기후변화의 문제를 건드린다. “홍수와 반지하라는 거주 조건으로 인해 기택 가족이 겪은 재난은 불평등의 전 지구적 차원으로 확장된다”는 그의 진단은 “녹색 계급의 출현”을 요청하는 브뤼노 라투르의 목소리에 영화예술이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을 날카롭게 노정한다. 마지막으로 , 국문학 연구자 최진석은 ‘판교문학’이라는 용어의 발명자로서의 소회를 밝히면서 “청년 담론의 계급화와 몰정치화”라는 중차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서사의 역할이 현실을 드러내어 비슷한 처지에 있는 독자의 ‘공감’을 사는 것 정도에 그친다면, 과연 그 작업이 문학이라는 형식을 통해 이루어질 필요가 있는가”라는 그의 질문은 현재 한국 문단에 속한 모든 구성원이 경청해야 할 목소리라고 생각된다.

무엇보다, 본권에 실린 시와 소설을 고대한 독자가 많을 것이다. 조용미, 김경후, 김소형, 황인찬, 임솔아, 이설빈, 정재율, 유선혜, 박선민의 시가 찾아왔다. 그리고 은희경, 박민정, 김혜진, 김지연이 독자의 부름에 응했다. 김수이, 소유정, 전승민, 하혁진, 강도희, 민가경, 오은교 평론가의 신간 리뷰도 독자들에게 읽는 기쁨을 전해줄 것이다. 올해는 어두운 폭압의 시대, 이 땅의 인권과 민주화를 위해 싸운 1세대 인권변호사이자 문학과지성사 창립 멤버인 황인철 변호사의 30주기가 되는 해이다. 그가 남긴 의로운 뜻과 아름다운 정신을 기리기 위한 기림비 제막식이 지난 5월 10일에 있었다. 이를 기념하여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역임한 이석태 변호사가 그만의 소회를 담은 추모의 글을 보내주었다. 고인의 오랜 친구이자 문학과지성사 초대 대표를 지낸 문학평론가 김병익이 써서 기림비 한편에 새긴 글도 함께 소개한다. 고인과 필자 모두에게 깊은 감사의 인사를 올린다. 또한 올해는 문학잡지 『어린이』가 창간된 지 백 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아동문학 연구자인 김영순(필명 강이랑)과 김태호가 한국 아동문학의 진정한 효시로 불리는 「바위나리와 아기별」의 미학성 및 역사적 의의와 함께 이 작품의 작가인 마해송의 생애와 작품을 개관하는 소중한 글을 보내주었다.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올해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은 시 부문과 평론 부문에서 당선자를 배출했다. 소설 부문에서는 당선자를 내지 못했지만, 내년에 더욱 좋은 작품들이 많이 응모되길 기대하는 마음으로 아쉬움을 달랜다. 시 부문 당선자 신원경과 양송이, 평론 부문 당선자 현재 세 분께 큰 목소리로 축하의 인사를 전한다. 집필의 고독을 벗 삼아 오래 건승하길 기원한다. 또한 독자 여러분의 따뜻한 관심과 열띤 응원을 청한다. 아울러, 『문학과사회』를 향해서도 날카롭고 그윽한 눈길을 계속 보내주시기를 부탁드린다.

조효원(문학평론가, 서강대 유럽문화과 교수, 『문학과사회』 편집동인)

▶문학과사회 142호 (2023년 여름) 보기

목차

| 하이픈 | 다시 – 계급
김만권 디지털, 능력주의, 그리고 ‘계급의 귀환’
박혜진 신(新)자급자족류
서동진 계급 이후의 계급―계급 재현을 위한 물음
이소진 계급 없는 사회에서 계급을 드러내기―다시, 사적인 것을 정치화해야 할 때
전청림 21세기 신(新)계급 혁명의 도살장―최근 중산층 소설에서 읽는 계급 분화의 징후들
정보라 한국 SF문학 속의 계급
조혜영 수석과 냄새는 계급적 상상력이 될 수 있는가?
―「기생충」(2019)의 계급 재현과 그 실패의 징후
최진석 재현의 계급화와 소시민적 문학 주체의 (재)등장, 그리고 문학의 염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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